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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피안(彼岸)’과 ‘포스트-휴먼’의 시대 (지성용) 바이러스와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사실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다 2021-11-05
지성용 edit@catholicpress.kr


오늘날 사람들은 코로나19의 난장을 지켜보며 가까운 과거에 스페인 독감의 참상을 기억하고 소환했다. 과거 스페인 독감이 고조에 달할 때 사람들은 더 먼 과거의 흑사병이 초래한 비극을 떠올렸다.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은 현재와의 냉정한 거리를 두며 현재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이어 미래에 대한 대안과 출구를 모색하는 시작일 수 있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는 ‘바로미터’이고, 미래를 예측하는 ‘미래문명학’이다. 


코로나19, 사스, 메르스, 그리고 20세기 후반 시작된 에이즈라는 팬데믹도 수천만 명 가까운 희생자와 감염자를 낳았지만, 언제 끝날지 지금도 알 수 없다. 질병의 역사가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일까? 코로나바이러스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를 안고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미국 예일대의 스노든(Frank M. Snowden) 교수는 저서 『전염병과 사회』(Epidemics and Society)에서 전염병의 역사적, 사회적 의미와 현상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전염병은 소수 전문가들만 관심을 가지는 하위 주제가 아니라 역사적 변화와 발전이라는 ‘큰 그림’의 주요한 일부라는 것이다. 즉, 감염 질환은 경제 위기와 전쟁, 혁명, 인구 변화와 같은 사회적 발전을 이해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전염병을 공부한다는 것은 해당 사회의 구조와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전염병은 항상 기표들(signifiers)이고, 의료사의 도전은 그 기표들에 묻혀있는 의미를 깨닫게 한다.” 


전염병의 시작과 전개의 과정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종교, 인구학적 요인들을 통합하여 설명하는 과정을 거쳐야 현상에 대한 본질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고 문제에 대한 해답을 보다 근본적으로 찾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스노든은 전염병과 세계화(교류사), 전염병과 사회(사회사), 전염병과 과학(지성사), 전염병과 정치(정치사) 전염병과 종교(종교사), 전염병과 경제 등 다양한 영역들을 연구주제로 선정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나름의 해답을 찾아 나가고 있다. 이를 통해 얻게 된 역사적 감각과 안목에서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비교해 보고, 이런 비교를 통해 현재의 이슈들에 대한 좀 더 깊은 인문학적 성찰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전염병에 대한 대응을 둘러싼 국가들 간의 정치적 긴장이 고조된다는 것도 과거와 현재가 유사하다.


전염병과 사회의 해체


전염병은 그동안 유지되어 오던 사회적인 체계를 해체하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피렌체의 위대한 인문주의자인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는 1451년 『데카메론』에서 흑사병을 피해 살아남은 10명의 100가지 이야기를 묶어냈다. 보카치오는 친척들과 친구들도 환자를 버리고, 환자는 저 홀로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죽어가는 모습을 묘사하며, 전염병이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의 신뢰와 연대를 무너뜨리는 모습을 기술한다. 일상의 모든 관계는 무너져 내리고 사회적 관계는 극도로 위축되었다. 사람들은 섬이 되었다. 사회적 질서들이 무너지고 연대가 해체되는 세계에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이단종교, 외국인 등의 소외된 소수집단들이 가장 먼저, 가장 많이 희생된다. 그들은 처음부터 질병의 원인 제공자로 낙인 된다.


14세기 중엽 유럽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페스트, 즉 흑사병이 유라시아 교역로를 통해 흑해를 거쳐 지중해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상륙한 뒤 전 유럽을 감염시켰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세계적 대유행을 일으킨 전염병은 다름 아닌 “실크로드(상업의 간선로)”를 따라 확산 된다. 


아즈텍 문명과 잉카 제국을 무너뜨린 것도 유럽인들의 기술적·군사적 우위만큼이나 유럽인들이 부지불식간에 퍼뜨린 전염병이라는 치명적인 무기였다. 나폴레옹은 전염병으로 무너진 사람이었다. 프랑스대혁명을 수습한 나폴레옹은 아이티를 진압하기 위해 6만의 병력을 동원했지만 5만이 감염병으로 사망했고, 결국 아이티는 독립했다. 나폴레옹은 북아메리카의 지금의 루이지애나 방대한 영토를 미국에 팔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의 진격에서는 추위와 전염병 발진티푸스로 무너진다. 사람과 물자를 나르는 지역 간 상업도로망을 따라 전염병이 치명적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프랑스대혁명을 수습하고 세계의 ‘위대한 강자’로 등장하던 나폴레옹의 ‘위대한 군대’는 전염병으로 세가 꺾이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20세기 1918년-1920년 미국과 유럽을 통해 번진 스페인 독감은 19세기 후반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 철도와 증기선, 전화와 전신 등으로 촉발된 제2차 산업혁명 곧 정보통신, 교통의 혁명에서 비롯된다. 세계는 이제 비행기와 기차를 통해 좁아지기 시작했고, 바이러스는 교통망을 따라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역시 발생지가 어디냐에 대한 논란은 부차적이다. 발생 이후 순식간에 지구 곳곳으로 번져나갔다. 상업적인 이해와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바이러스는 번져나가기 시작했고, 이러한 바이러스의 전 지구적 확산은 국가 간 국경을 봉쇄하는 통제로 세계적인 인구와 자원의 이동이 멈추고 공항이 멈추어 서는 21세기 4차산업혁명의 시대 ‘초연결사회’에 그리고 ‘세계시민사회’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전염병과 방역에 대한 ‘인간의 대응’



전염병의 역사적 기억 안에서 이탈리아 사람들은 ‘방역’의 중요함과 ‘사회적 거리두기’의 절실함을 깨달았다. ‘방역(quarantine)’의 어원이 된 ‘40(quaranta)’은 그리스도교에서 신학적,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는 숫자였다. 


창세기의 40일 주야로 내리던 비와 대홍수, 40년간 광야를 돌아다닌 이스라엘 백성, 십계명을 받기 전 40일간 시나이산에서 피정하던 모세, 40일간 걸어서 호렙산에 도착한 엘리야, 40일간 광야에서 빵과 권력 그리고, 종교에 대한 유혹을 경험한 예수, 부활 후 40일간 지상에 머물렀던 예수의 이야기는 커다란 재앙이 올 때, 중요한 결단을 해야 하는 시점에 40일간의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quarantine)’, ‘피정(皮世正念, retreat: 후퇴)’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반면 스페인에서는 독감을 신의 징벌로 믿어 신에게 참회해야 한다는 주장이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다. 스페인 사모라(Zamora)의 주교는 보건 당국의 권고를 무시하고 역병의 종식을 위한 대규모 속죄와 참회를 위한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 이후 사모라 시가 스페인에서 최고의 사망률을 기록하여 1918년 10월경에 이미 관을 짤 나무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할 때에는 친척들과 이웃들이 따라가며 슬퍼하는 일이 사라졌고, 관도 모자라 관 하나에 두세 구의 시신을 넣는 일이 빈번했다. 묘지도 모자라 자리 하나에 수십 구의 시신이 포개어져 묻혔다. 잘못된 종교적인 판단이나 신념이 공동선을 역행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도 지난 코로나 유행 시기에 ‘신천지’와 ‘전광훈’ 사태를 경험하며 잘못된 종교와 신념이 사회에 얼마나 커다란 악이 될 수 있는가를 체험하지 않았던가! 


치료제 개발이나 백신 개발도 중요하지만, 인간 정신의 진보 없이는 전염병의 도전을 막아낼 수 없다. 이것은 바이러스와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사실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전염병에 대한 인간의 대응은 정치적일 수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당장에 마스크를 써야 하는가? ‘사회적 거리두기’의 절실함에 대해 말하는 슬라보이 지젝(Slavoj Žižek)과 그에 반대하는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과 그를 추종하는 이들의 격렬한 시위를 바라보며 팬데믹 이후 정치, 경제, 종교, 교육 등 사회 전 영역에 걸친 변화와 구조의 붕괴 등 다가오는 사회에 대한 예측이 난무하고 있다. 아감벤은 말한다. “의료의 이름으로 자유를 폐지한다면, 결국 의료도 폐지될 것이다. 삶의 이름으로 인간적인 것을 폐지한다면, 결국 삶도 폐지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지젝은 “자유의 이름으로 의료를 폐지한다면, 결국 자유도 폐지될 것이다. 인간적인 것의 이름으로 삶을 폐지한다면, 결국 인간적인 것도 폐지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코로나 감염자수의 업데이트를 뉴스를 통해 확인하고 있지만 실상 현실에서는 여전히 암이나 심장마비, 환경오염, 기아와 여타의 질병으로 죽어가는 이들이 많다. 특히 학대로 죽어가는 많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바이러스만 차단되면 이러한 기존 죽음의 방식이 해소되거나 종식될 것이라 생각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지금 커다란 착시가 발생했다. 


코로나 발생 이전 통계청 2018년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한 해에 사망한 사람이 298,820명 이었는데, 암으로 사망한 사람은 전체 26.5%, 79,153명이었다. 심장질환 32,004명, 자살 13,670명, 기타 뇌혈관 질환, 폐렴으로 사망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사람은 여타의 질병으로 죽는다. 많은 사람들이 암으로 죽어가지만, 암의 원인이 되는 환경문제나 노동의 조건, 음식물 등 암의 발원지를 차단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논의는 자본의 포승줄에 묶여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자살은 멈추지 않고 대한민국 사회는 OECD 국가 가운데 자살률이나 자살증가율이 최고이지만 그것의 원인이나 문제에 대한 토론이나 해결책은 그저 국가가 지정한 ‘정신보건복지센터’의 문제일 뿐이다. 


코로나 발생 이후 현재까지 대한민국의 사망자 수는 2,100여 명을 넘었다. ‘질병관리청’에서의 적절한 대응이 주요했다. 코로나19는 이제 우리에게는 인구학적으로 사망원인 하나가 더 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제는 ‘확진자’ 중심의 방역이 아니라 ‘사망자’와 ‘중증환자’ 중심의 방역으로 프레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지젝의 말은 백 번 동의하지만 이로 인해 생겨나는 국가의 통제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개인정보가 이제 빅데이터화 되어 국가뿐만 아니라 자본의 운동에 기여한다는 측면에 대한 문제의식도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는 것을 환기해야 한다. 전염병과 ‘기후위기의 시대’ 그리고 ‘금융자본주의 사회’에 맞선 인간존엄과 지속가능한 포괄적 전망은 부재하다. 그런 의미에서 전염병과 싸우려면 치료제와 백신만큼이나 “인간학적 영성적 진보(anthropological & spiritual advances)”가 중요하고 절실하다. 


전염병으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적인 문제


오래된 연구이지만 중세사연구자 James Rogers는 1884년 『Six Centuries of Work and Wages. The History of English Labour』에서 흑사병이 초래한 인구감소가 노동력 부족으로 이어져 임금의 상승을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인구가 감소한 탓에 수요가 줄어드니 농산물가격까지 하락했다. 결국 지불할 돈은 늘고 수입은 줄게 되자 봉건영주들은 토지를 자유민이나 농노들에게 임대하여 필요한 비용을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영주들은 최대한 손실을 줄이기 위해 농민들을 쥐어짜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농민들의 반란이었다. 결국 페스트가 중세의 경제, 사회체제를 근저로부터 뒤흔들어 궁극적으로는 붕괴로 몰고 갔다는 주장을 했다. 물론 이러한 논리에는 여러 가지 고려되지 않은 문제가 있지만, 몇 가지 의미 있게 성찰할 부분들이 있다.


분주하게 살아가던 일상에서 코로나 팬데믹 덕분에(?) 가족과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재택근무로 더 많은 시간의 자유가 생기는 듯했다. 사람들은 집에서 일하는 사이를 이용해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시간의 여유를 낸 듯했지만 이러한 격리생활이 회사와 집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24시간 일과 휴식을 구별할 수 없는 노동조건으로 몰리게 된 것이 현실이다. 



이제는 가정이 모든 생산과 재생산 노동을 수행한다. 집안의 냉방기를 틀고, 전열기를 틀고, 나의 노트북으로 나의 프린터를 활용하며 노동을 한다. 노동자가 스스로 생산수단을 휴대하고 기업에서 편성되지 않은 예산을 노동자 자신의 비용으로 허비한다. 자동차보험과 운전면허를 가지고 있는 ‘카카오’ 대리기사나 ‘쿠팡’ 배송노동자, ‘배달의 민족’ 라이더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노동자가 되어 버린다. 


더이상 자본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기 위한 비용을 부담하지 않아도 된다. 비용 역시 절감된다. 부지불식간에 자본가들은 생산수단과 연장을 탑재한 노동자들을 통해 고정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 장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배달노동자들의 가혹한 노동과 사망 사건이 빈번해지는 이유는 바로 자본의 치밀하고 교활한 “신자유주의 경제 시대 21세기판 노동착취 진화 버전”인 것이다. 


바이러스 대유행과 함께 다가온 심각한 ‘경제-사회적 불평등’이라는 추악한 질병은 우리들의 삶을 압도하는 것 같다. 특히 최근 들어 긴박하게 들려오는 배달노동자들의 사망소식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산업재해, 음식 배달업체들의 성장과 파열 등이 뉴스마다 반복된다. 


반면 어느 나라든 디지털 산업과 연관된 초거대 자본은 팬데믹 시기에 오히려 전대미문의 엄청난 이윤을 벌어들이고 있다. 이는 보다 근본적으로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약점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금융자본의 일반적인 경향이 작금의 부동산 열풍과 갭투자라는 전대미문의 부동산가격폭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단순한 정부정책 실책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운동의 비인간적 속성 때문이라는 이해와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본은 돈에 인간의 탐욕이 결합된 것이다. 화폐는 그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가치저장의 수단으로 통용되었지만 그러한 화폐가 더 많은 화폐를 벌어들이기 위한 화폐의 거래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면 실물경제에서 발생하지 않은 잉여(剩餘)까지도 현실에서 거래되기 시작한다. 결국, 상상하고 기대하던 가치가 무너져 암담한 실재를 직면하게 되는 날 파국은 시작된다. 


전염병으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적 긴장


고대 로마의 안토니우스 역병으로 차오르는 대중의 분노와 불만은 콜로세움 경기장의 잔인한 살육과 검투 등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잔인한 오락들로 상쇄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향한 박해는 사실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초세기 콜로세움에서 벌어진 그리스도교 순교자들 대부분은 로마시민사회 분노와 불만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동물들과 혈투를 벌이거나 잔인한 동물들의 사냥을 지켜보며 자신들의 공격성을 밖으로 표출하고 순화하는 희생의 제물이 된 것이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창궐한 모든 전염병은 ‘희생양을 만드는 비합리적 논리’를 정당화했다. 유대인들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 역시 시대별로 발생한 전염병들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례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전염병에 대한 대응에 숨어 있는 정치적 논리이다. 


전염병의 시대에도 대중은 다양한 사회적 요구들을 제기하기 마련이고, 정부는 이에 어떤 방식으로라도 대응한다. 정부가 억압 일변도라면 대중은 불만을 품게 되며, 거꾸로 방임한다면 질병에 대한 사회적 통제력을 가질 수 없게 된다. 로마시내에서 60년경 발생한 끊임없는 화재사건의 방화범을 잡지 못하자, 예수의 성경 한 구절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 아느냐!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무자비한 체포와 구속, 탄압과 고문, 죽음을 통해 사회적인 불안과 긴장을 투사하고 해소하였다. 


또한, 전염병으로 인한 인구손실 그리고 노동력 부족은 가까운 지역의 이주민들을 대량으로 유입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러한 이주민들의 유입은 사회적인 갈등을 양산했다. 14세기 흑사병 이후 반란들이 급증했다. 19세기 콜레라 이후에도 사회적 갈등이 증대하고 종종 통제 불가능한 폭력 사태가 연출되었다. 


술집과 클럽이 문을 닫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공개적인 난동과 2020년 8월 전광훈을 위시한 극우 보수 개신교 세력들의 거리집회와 난동, 뉴라이트 진영의 천박한 인식, 곧 ‘다문화주의가 만들어낸 다원주의가 감염병의 원천’이었다며 좀 더 민족주의적인 사회와 국경폐쇄로 교류를 억제하는 정책을 구사해야 한다는 극우 정부들의 대외정책은 감염병 이후의 세계를 이끌어 나갈 효과적인 수단일 수 있는가? 


바이러스 탓에 잔뜩 움츠린 채 각국이 보호 장벽을 높이 치고 있는 가운데 미국과 중국 사이에 ‘신냉전’이 촉발될 정도로 긴장이 팽배하다. 그러나 국가들 사이의 정치적 긴장 외에 국가 내부의 사회적·정치적 긴장에 주목해야 한다. 즉 계급과 세대, 성별, 인종 등에 따라 코로나19에 의해 받는 타격이 다를 뿐만 아니라 수혜도 차별적이어서 사회적 위험도와 그에 따른 정치적 폭발력이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외국인 혐오와 인종주의, 희생양 만들기가 출현하는 모습은 안타깝고 걱정스럽다. 특히 코로나가 중국에서 발원했다는 믿음 속에서 비등해지는 중국인들과 아시아인들에 대한 인종 차별은, 흑사병 시대에 서유럽인들이 이 질병이 북아프리카와 중동 등 이슬람 세계에서 왔다는 믿음 곧 흑사병을 “오리엔트 역병”이나 “레반트 역병”으로 부르는 것과 유사하다. 19세기에도 콜레라가 유럽에 당도했을 때 유럽인들은 이 역병을 “아시아 병”으로 불렀다. 이처럼 역병이 밖에서, 즉 ‘오리엔트’나 ‘아시아’에서 왔다는 생각은, ‘오리엔트’와 ‘아시아’가 역병을 낳을 정도로 더럽고 무지하고 열등한 지역이라는 편견을 전제하고 있다. 


전염병의 창궐을 막기 위해서는 그 이전까지의 삶과 일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렇게나 참혹한 일을 겪어놓고도 병이 물러가고 생존자가 되면 즉각 이전의 일상, ‘노멀’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지젝(Slavoj Žižek)이 경고하듯 시스템을 약간만 수정하여 “예전처럼 매끄러운 일 처리 방식”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역사학과 인문학에서 말하는 집단 기억은 어쩌면 의학에서 집단면역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염병으로 다가오는 인간 심리의 문제 그리고 ‘디지털 피안(彼岸)’


팬데믹 초기의 충격을 지배한 감정은 두려움이었지만 뚜렷한 전망이 제시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두려움이 우울증으로 넘어갔다. 명확한 위협이 있을 때 생겨나는 감정이 두려움이라면, 우울증은 우리의 욕망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신호다. 그리고는 이내 우울은 분노로 터져 오르면서 ‘코로나 레드’로 명명됐다. 사람들은 분노한다. 정치에, 경제에, 문화에, 종교에 분노한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제도와 억압의 굴레에서 자유를 꿈꾼다. 나를 통제하는 모든 것들에 저항한다.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쓰라’는 말에 격분해 시비가 벌어진다. 아이들이 가정에서 폭력으로 사망하는 일이 생기고 어린이집에서 폭력에 노출된다. 


팬데믹은 이제 우리와 공존해야 한다는 상황을 사람들은 서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과연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가?"라는 물음이 시작되었다. 지젝은 인간의 두뇌를 디지털 네트워크에 직접 접속하겠다는 일론 머스크의 망상을 해부하는가 하면 미국과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 벨라루스의 민주화 시위, 흑인의 삶은 소중하다 운동 같은 이질적인 정치적 흐름들과 코로나 바이러스의 세계적 확산의 움직임을 연동해서 이해하려 한다. 우주로 여행하는 백만장자들의 이야기와 ‘메타버스(meta-verse)’로 향해가는 디지털 컨텐츠와 게임산업은 심각하게 바라보아야 할 사안이다. 



팬데믹과 함께 흔히 비대면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비대면 시대는 이제 우리에게 ‘메타버스’라고 하는 매력적인 상업적 공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제 메타버스 안에서 정치, 경제, 물류, 유통, 종교, 문화, 교육, 생산 등의 가상영역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당면한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 혹은 물리적인 한계 안에서 새로운 세상, 유토피아, 천국, 극락을 만들어 낸 저 인류 조상들의 피안과 동일한 ‘디지털 피안(彼岸)’을 구상하고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원론만큼이나 강력한, 종교적 피안을 뛰어넘는 ‘메타 피안(彼岸)’을 형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게임에 중독된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현실과 게임의 가상공간을 혼동하는 일상 안에서의 혼란이다. 디지털 피안의 공간이 만들어져 인간실존은 자신과 분리된 ‘아바타’를 메타버스 안에서 살아 숨 쉬게 만들며 자신이 현실 안에서 이루지 못한 소망과 기대를 충족시킬 대체재를 원하게 될 것이다.


지젝은 말한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궁극적 선택은 이렇다.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분투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팬데믹이 우리가 새로운 '포스트휴먼'의 시대(인간됨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한 우리의 지배적 인식과 관련한 '포스트휴먼')에 들어서고 있다는 신호 중 하나임을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이는 우리의 심리적 삶과 관련된 선택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존재론적' 선택이며, 우리가 현실(로 경험하는 것)과 맺는 모든 관계에 결부된다.(『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163) 


그리고 지젝은 다시 답한다. “탈 인간(포스트-휴머니티)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낡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꿈꾸는 대신 우리는 새로운 일상을 건설하는, 힘들고 고통스런 길로 나서야만 한다. 이 건설 작업은 의학적이거나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속속들이 정치적 문제다. 우리는 사회적 삶 전체를 새로운 형태로 발명해야만 한다.” (같은 책, 166-167.)


Frank M. Snowden. (2019), Epidemics and Society: From the Black Death to the Present,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 7.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공동선> 2021년 9-10월호에도 실린 글입니다.

[필진정보]
지성용 신부 : 인천교구 송림동성당 주임신부, 인하대학교 인문융합치료 전공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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