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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 군부 정권에 암살당한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 시복 먼저 시복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절친’이자 ‘회심의 계기’ 인물 강재선 2022-01-25 19:3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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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절친’이었으며, 엘살바도르 군부 정권에 맞서 가난한 이들을 돕다가 군부 정권에 의해 암살당한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의 시복이 22일(현지시간) 열렸다. 지난해 2월 결정되었던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의 시복식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연기된 바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엘살바도르 군부 정권의 탄압에 맞서 민중들을 지키다 미사 집전 중 군부 정권의 사주로 의심되는 무장 집단에 의해 암살당한 오스카 로메로 추기경을 2018년에 시성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결정된 그란데 신부의 시복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고통 받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 곁에 머무는 모습이 교회가 중심으로 삼아야 할 가치임을 강조했다.

 

그란데 신부는 가난한 가정의 7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고, 아버지가 일거리를 찾아 떠난 탓에 어머니와 조모의 손에 자라게 되었다.

 

가난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늘 기억했던 그란데 신부는 사제가 되어서도 특히 농민들(스페인어: campesinos)의 권리 증진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 예수회 일간지 < America >는 교회가 시대의 징표를 읽어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뜻에 따라 경제, 토지개혁 등의 문제를 다룬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의 일명 ‘메데인 문건’에 관해 “그란데 신부에게 있어 메데인 문건의 비전을 적용하는 일은 농부들이 더 나은 삶의 조건과 노동 조건을 위해 서로 조직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뜻했다”고 평가했다.


그란데 신부는 오스카 로메로 당시 대주교의 절친한 동료이기도 했다. 1977년 3월 12일 마누엘 솔로르자노(Manuel Solórzano)와 넬손 루틸리오 레무스(Nelson Rutilio Lemus)와 함께 차량을 타고 9일 기도를 위해 자신의 고향이기도 했던 엘 파이스날로 향하던 도중 무장 단체에 의해 습격을 당해 그 자리에서 모두 사망했다. 특히 그란데 신부는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알 가운데 12발을 맞아 즉사했다.

 

교황청 홍보매체 < Vatican News >는 이것이 군부 정권의 사주로 이루어진 암살임을 강조하며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행동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란데 신부의 죽음은 그의 친구였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군부 정권의 불의에 맞서 싸우게 된 본격적인 계기로 자주 언급된다.

 

예수회 이안 피플스(Ian Peoples) 신부는 그란데 신부의 시복을 앞두고 “세례자 요한의 죽음 이후 예수의 공생활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것과 유사하게, 로메로의 순교 행렬 역시 그의 친구인 그란데 신부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지적했다.


로메로 대주교는 당시 친구의 죽음을 전해 듣고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란데 신부가 돌보았던 공동체와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밤새도록 농민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다음날 로메로 대주교는 그란데 신부 죽음의 원인이 명백히 밝혀질 때까지 그동안 예의상 참여해왔던 모든 정부 행사를 보이콧 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진상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후로 로메로 대주교는 엘살바도르 군부 정권에 의해 실종되거나 사망한 농민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어 군부 정권에 소리를 높였다.


그란데 신부의 시복식은 로메로 추기경의 또 다른 ‘절친’으로 알려진 그레고리오 로사 차베스 추기경이 산살바도르 주교좌 성당에서 집전한다. 이는 엘살바도르 가톨릭교회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생중계 됐다.


⑴ 시복 : 교회가 공경할 복자로 선포하는 일. 거룩한 삶을 살았거나 순교한 이에게 복자 칭호를 허가하는 교황의 공식 선언. 시복은 로마 교황청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결정된다. (천주교용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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