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검색
대한민국에서 검사로 산다는 것 (지성용) 역사의 한복판, 광야에서 지성용 2022-11-19 12:02:45
  • 폰트 키우기
  • 폰트 줄이기


이 글은 지난 2022년 10월 명동가톨릭회관에서 지성용 신부(인천교구), 홍성남 신부(서울교구), 박주환 신부(대전교구), 김디모테오 목사, 임은정 검사가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주신 두 분 신부와, 김 목사, 임은정 검사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왼쪽부터 지성용 신부, 홍성남 신부, 임은정 검사, 박주환 신부, 김디모테오 목사.


하늘의 천사가 나타나 흔들어 깨우면서 일어나서 먹어라. 하고 말하였다. 엘리야가 깨어보니 머리맡에, 불에 달군 돌에 구워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천사가 다시 와서 그를 흔들어 깨우면서 갈 길이 고될 터이니 일어나서 먹어라. 하고 말하였다. 그는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사십 일을 밤낮으로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 (1열왕 19장)


임은정 검사가 우리에게 처음 던진 이야기는 엘리야가 하느님 천사의 보호와 위로를 받으며 힘을 내어 먹고 마시고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된 예언자 엘리야의 이야기였습니다. 임은정 검사는 국민에게 ‘도가니 사건(광주 인화원 사건)’으로 잘 알려진 국민검사입니다. 임 검사는 도가니 사건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곳곳에 보면 복지시설이라고 할까 이렇게 폐쇄 시설들이 많잖아요. 장애인들이 외딴곳에 폐쇄되어 살아가니 세상 사람들이 관심이 없어요. 좋은 일을 하나 보다 싶어 맡겨놓고 후원하고 지원합니다. 세상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아이들한테 선생님, 학교장 뭐 이런 높은 분들이 아이들을 장기적으로 성폭행하고, 세탁기에 아이 머리 집어넣고 린치를 가하고, 이런 어마무시한 사건들이 수년간 계속되었어요. 그런데 그중 아이 하나가 선생님에게 이러한 사실을 말하고, 여성단체를 통해 상담을 받는 과정에서 비로소 거대한 구조 악에 살짝 균열이 생긴 거예요. 지역에서 이런 말들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 여성단체에서 관심을 가지고 스피커가 되어주면서 세상의 문을 계속 두드렸더니 사건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기 시작한것이죠. 워낙 지역사회에서 그런 가해자들은 힘이 있고, 또 교회 장로님이시고 아마 그랬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러다 보니 사건이 제대로 조사되지 못했는데,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사건이 보도되고 나서 조금씩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이 사건을 들여다보기 시작한거에요. 그래서 일부가 기소되고 나중에 영화가 되고 국민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니, 수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가해자는 징역 10년, 광주 인화원 시설은 결국 폐쇄되었지요. 그때 광주 인화원 출신 청각장애인들이 사회의 관심과 지원으로 지금은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가지고 ‘카페홀더’라고 해서 자립해 생활하고 계시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사회에서 ‘애들의 헛소리야!’, 소수의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런 작은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관심 없는 세상 사람들이 많은데,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주는 한 사람이 있으면, 두 사람이, 세 사람이 돼요. 이렇게 되면 결국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저는 그때 보고 알았어요.”


대한민국 검사



우리는 임 검사에게 물었습니다. “서울중앙지검, 대검찰청 하면 검사들 안에서도 이너써클 아닌가요?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는 길이고, 조금만 잘 보이고 조금만 더 비비면 검찰총장도 할만한 위치인데, 게다가 대한민국 정의로운 검찰 이미지도 가지고 계신 분이신데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나요? 결정적인 터닝포인트가 무언가요?” 그녀는 너무나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덤덤하게 풀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법조인들은 진짜 학교에서 전교 1등 하던 사람들이잖아요. 지고는 못사는 사람들이에요. 저는 고대니까 서울대 법대는 아니지만, 부산지역 여고에서는 전교 1등 했었거든요. 그러니까 지고는 못 산단 말이에요. 이런 마인드로 법조계에 들어오게 되면 나는 1등 하려 하는 마음 가지는거구요. 그것을 좋은 말로 해야되니까, ‘내가 1등 하려고 이러는 거 아니야, 꼴찌 안 하려고 이러는 거야’ 하면서 실적 경쟁에 빠져들죠. 우리 검사들은 지고는 못 살아요. 그러니까 저도 거기에서 그렇게 자유롭지 못했어요. 그래서 제가 ‘출세할 거야, 승진할 거야’는 아니라도 내가 못한다는 소리는 듣기 싫었어요. 실적이 중요해요. 우리는 검찰에서 보면 ‘인지수사, 인지구속 영장 몇 명 했냐! 경찰관 몇 명 넣었냐! 입고했냐!’ 이런 것들로 실적 경쟁을 하니까, 그런 실적 경쟁에서 저도 지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법무부 갈 거야 대검 갈거야’ 이런 마음보다는 솔직히 꼴찌 안 하려고 한다고 사람들한테 말했지만, 1등 하려고 했던 것 같고요. 실적 경쟁에서 그렇게 되면 좋은 평가를 받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전에 중앙지검 갈 때까지만 해도 1지망으로만 발령이 났어요. 부산 1지망 하면 부산 가고, 광주 1지망 하면 광주 갔으니까요.”


임은정 검사는 검찰의 무능과 불의가 판을 칠 때 ‘그래도 검찰은 살아있다. 그래도 임은정 검사 같은 괜찮은 검사들이 조직 안에 있을거야’라는 믿음을 국민에게 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검찰은 이런 임 검사의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며, ‘검찰은 그래도 공정하고 정의로운 조직’이라고 자신들의 썩은 살을 은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임은정 검사는 검찰 이미지를 지키는 방패막이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대한민국의 검사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누구보다 검찰 조직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대화 중에 여러 차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정말 잘 나갔었는데(…) 근데 그렇게 할 때 저는 제가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대한민국 검사’라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물론 나쁜 일도 사람들도 옆에 있었지만요, 어느 조직이나 100% 순결한 조직은 없어요. 나쁜 사람은 섞여 있는 거고 그것이 어느 정도 자정 능력을 발휘하느냐가 건전하고 건강한 조직이냐 아니냐의 차이잖아요. (…)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잖아요. 제가 그때는 조직의 윗사람들 들이받을 생각을 못했어요. 그저 경찰만 괴롭힌 것이죠. 사실 용기가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윗사람을 들이받을 용기 없는 세월로 산 게 12년인 거죠. 그래서 제가 그 책에도 썼지만(…) 제일 부끄러웠던 것은 법무부 법무심의관실에서 근무할 때, 노태우 국립묘지 안장 문제 때문에 엄청나게 싸우고 나서(노태우 전 대통령은 다행인지 그때는 안 돌아가시고) 5.18 내란사건에 관련돼 있던 안현태(전두환 정권에서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내며 전 씨의 천문학적인 비자금 조성에 일조했던 인물), 그분이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제가 담당은 아니었는데 법무심의관실 안에서 난리가 났던 거지요. 법무부에서 (국립묘지 안장에 대한 기준) 해석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니까(…) 그때 제가 계속 고민했던 게 뭐냐 하면, 국립묘지 안장 심의위원회 회의 열렸을 때 원래는 우리 후배가 가야하는 것이지만, 제가 택시 타고 가서 국립묘지 안장 심의위원회 회의장 문을 걸어 잠그고(...) 사표 쓸 생각을 처음 했었어요. 그때 일어났던 법무부 내에서 봤던 치졸한 거짓말과 면피 이런 말들을 보면서() 그것을 계속 후회했던 거죠. 그게 저한테 되게 쌓여 있었어요. 그게 제가 참회록을 쓰게 된 시발인데, 계속 제 마음속에서는 제가 했었어야 하는데(…) 했었어야 하는데() 얼마나 부끄러우며 괴로웠던지() 그래서 박형규 목사님 무죄 구형 때는 이거 안 하면 저는 정말 문을 걸어 잠그려고 했는데 그때는 또 결제는 다행히 나더라구요.”


역사의 한복판, 광야에서


임은정 검사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의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광주인화원 아동 성폭력 사건, 타진요 악성 댓글 사건, 윤길중 과거사 재심 사건, 박형규 목사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등 과거사 재심 사건,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 안태근 전 감찰국장의 서지현 검사 성추행 사건, 한해숙 모해위증 교사 의혹사건 등 역사 안에서 검찰이 저지른 과오를 바로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유우성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는 최종 무죄 확정 되었고 그 증거서류를 위조한 국정원 직원 등은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위조서류를 증거로 제출한 이시원, 이문성 검사는 2014년 8월 정직 1개월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시원은 지난 2022년 5월 윤석렬 정부의 공직기강비서관으로 임용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1961년 박정희의 유신 쿠테타 이후 만들어진 혁명재판소는 윤길중 선생님 등 정치인들이 반국가단체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했다고 보아 1962년 4월 윤길중 선생님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고, 윤길중 선생님은 7년간 복역했습니다. 2012년 12월 28일 임은정 검사는 윤길중 선생님에게 무죄 구형을 했고, 서울중앙지법은 당일 무죄를 선고했으며, 검찰의 항소 포기로 무죄 확정된 일이 있었습니다. 


1972년 10월 박정희의 유신은 헌법개정을 통해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등 영구집권을 시도하며 독재를 강화했습니다. 이때 재야인사 박형규 목사님은 윤보선(제4대 대통령)과 시국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유신헌법 반대 투쟁을 주도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관계자를 만나 격려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1974년 군법회의는 대통령긴급조치위반, 내란선동 등의 혐의로 박형규 목사님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습니다. 억울한 사람 또 하나가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역사가 흐르고 흘러 이후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긴급조치가 위헌으로 지난 판결을 무효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민청학련 관계자들은 모두 무죄판결을 받게 되었습니다. 2012년 9월 6일 임은정 검사는 검찰의 과오를 반성하는 논고를 하며 박형규 목사님에게 무죄를 구형했고, 서울중앙지법은 당일 무죄판결을 선고했으며, 검찰의 항소 포기로 무죄는 확정되었습니다. 이후, 임 검사는 2012년 9월 13일 검찰 내부망 이프로스 공판 실무 자료 사이트에 검찰의 과거사 반성이 언론에 알려진 후 논고문을 게재하였습니다. 저는 임은정 검사가 역사의 심판대에서 읽어 내려갔을 박형규 목사님 무죄 구형의 시간으로 돌아가 조용히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았습니다. 그리고 임 검사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하여 권력의 채찍을 맞아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걸어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몸을 불살라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고 묵묵히 가시밭길을 걸어 새벽을 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의 아침이 밝아, 그 시절 법의 이름으로 그분들의 가슴에 날인했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모진 비바람 속에서 온몸으로 민주주의의 싹을 지켜낸 우리 시대의 거인에게서 그 어두웠던 시대의 상흔을 씻어내며 역사의 한 장을 함께 넘기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위반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와 제4호는 헌법에 위반되어 무효인 법령이므로 무죄이고, 내란선동죄는 관련 사건들에서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관련 증거를 믿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피고인이 정권교체를 넘어 국헌문란의 목적으로 한 폭동을 선동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부고발자, 엘리야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엘리야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저버리는 것을 보고 만군의 하느님을 생각하여 가슴에 불이 붙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우리는 임 검사에게 물었습니다. “내부 고발자라고 하는 낙인은 사실 감당이 상당히 어려운 심리적인 어떤 압박이나 또 정서적인 문제도 있을 것이고, 후배들이나 선배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갈 때 생기는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최근에 발간한 『계속 가보겠습니다』 책의 표지에 ‘내부고발 검사, 10년의 기록과 다짐’ 이렇게 책에다가도 내부 고발자인 것을 적어놓고 스스로 이렇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었을까? 어떤 마음이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임 검사는 이제는 여유롭고 차분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잘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원래 잘 나갔을 때는 동료 검사들이 같이 여기저기서 ‘밥 먹자!’ 하고, 후배 검사들은 ‘선배님 어떻게 하면 법무부 갈 수 있어요?’ 물었어요. 그 친구들은 결국 모두 법무부 갔어요. 제가 법무부 갔다 왔던 검사니까 저한테 법무부 가는 요령을 막 물어보고 그랬어요. 그러던 선배, 동료, 후배 검사들이 저랑 이제 말을 안 섞어요. 제가 불러도 못 들은 척하고 휙 지나가요. 상황이 이제 더이상 장난이 아니게 되니까 제가 숨을 못 쉬겠더라구요. 그래서 그때 제가 하느님한테 기도했어요. 제가 무엇인데(...) 저에게 이런 가시관을 주십니까? 주님 너무 힘듭니다. 너무 힘듭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에서 왠지 모두 저를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니까 우리 아파트, 그때 제가 복도형 아파트였는데 어디서 다 보고 있는 느낌이 있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막 계단을 걸어와서 현관문을 걸어 잠그고 안에 신발 벗을 정신도 없었고요. 그냥 주저앉아서 울었지요. 너무 힘듭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 한참 울다가 방에 기어들어가 자고 그랬어요. 그때 제가 무죄 구형하고 도망가서 영화 같이 봤던 친구 언니가 제 사정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었답니다. 하느님께서 그 언니한테 말씀하셨데요 ‘딸아 사랑한다! 딸아 고맙다!’ 제가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하느님께서 옆에서 계속 말씀하셨는데 제가 너무 고통스러워 비명을 지르며 하느님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까 저에게 말하는 사람을 보내주신 거구나! 하느님의 자녀로 인해 새롭게 변하게 되리라는 말씀이 생각났어요. 그리고 결혼하고 신혼여행으로 성지순례를 했어요. 정말 큰 위로를 받았던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우신 분이시잖아요. 아브라함의 이삭의, 야곱의 그리고, 임은정의 하느님, 모든 사람들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그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달팽이 집


“무죄 구형 전에 남편을 소개팅에서 만났어요. 우리 신랑이 되게 말이 없어요. 제가 남자를 늦게 만났는데, 어느 정도 저 같이 나이도 많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여자들이 오면 정말 나이 많으신 영감님들이 소개팅에 나오시거든요. 그때 ‘소개팅이냐 선이냐?’ ‘나는 누구인가’ 이런 약간 속상한(?) 시간들이 있잖아요. 그쪽도 ‘나는 왜 이 여자를 만나나’ 속상할 수 있겠지만 서로 속상해하는 시간들이 있었지요, 그러다가 만난 우리 신랑은 제 또래였어요. 처음 그의 눈을 보았는데 우리 신랑이 하도 말이 없어서 ‘이 남자인가 아닌가?’라고 생각했었어요. 무죄 구형 사건으로 직장에서 난리가 나기 시작했는데 우리 신랑이 매일매일 깊은 하느님의 말씀을 저에게 보내주면서 응원을 하고 서초동에서는 제가 이제 ‘불가촉천민’이 된 상황이라서 너무 외로운 상황이었어요. 우리 신랑 만난 지 100일째 청혼을 받았었는데 저는 청혼 받기 며칠 전에 꿈을 꿨는데 우리 신랑이랑 되게 행복한 부부로 살고 있고, 너무 행복해하는 꿈을 꿨어요. 그래서 저는 이 정직 기간에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우리 신랑도 신앙에 열심한 사람인데 신랑은 신랑대로 하느님께 기도하며 들은 응답이 ‘제가 앞으로 힘들게 사니까 안아주는 날개가 되어주라’ 그랬데요. 제 신랑은 정말 하느님이 보내준 사람이거든요. 저한테는 수호천사 같은 사람, 달팽이 집 같은 사람이거든요. 그때 공황장애가 짧게 왔다 간 적도 있었어요. 근데 그럴 때마다 우리 신랑이 달팽이 집이 되어주었어요. 달팽이 집에 있으면 산소 공급도 되고 찢어진 피부가 봉합도 되고 그러니까 저는 제 모든 스트레스를 신랑한테 푸는 거죠. 그럼 신랑이 함께 분노해줘요. 내가 ‘나한테 누가 이렇게 했고, 누가 이렇게 했고’ 나한테 이렇게 막말하거나 댓글 같은 걸 달고 한 모든 것을 남편에게 보여줬어요. 사진을 찍어서 보내면 신랑이 함께 분노해 주면서 제 스트레스를 거의 받아주고 본인이 그것을 삭혀주는 거예요. 사람들 모두 저에게 다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고 억울하고, 조선일보 이런 데서 말도 안 되는 기사가 나오면 진짜 억울하잖아요. 숨을 못 쉬고 살다가 돌아오면 신랑이 안아주고 ’괜찮다!‘ 라고 하면서 함께 조선일보 욕해주고 하면서, 새 살이 솔솔, 마데카솔처럼 그러니까 숨을 못 쉬고 있을 때 우리 신랑이 산소 호흡기였어요. 우리 신랑이 괜찮다 하면 하느님이 괜찮다 하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러면 괜찮은 거잖아요. 정말 내 편 한 명이 있으면 견뎌지는 거잖아요. 허허벌판에 있는 듯하지만 한 군데 기댈 데가 있으면 적어도 한 군데에서는 바람이 폭풍을 막아주니까 말이죠. 그러면 견딜 만한 거죠. 그렇게 되면 저는 이제 내부 투쟁만 하면 되고.” 


그래서 임은정 검사는 “계속 가보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조용하고 침묵하는 남편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정의는 세상의 정의로 승화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저희들에게 물었습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우신 분이시고 평화로운 분이신데 어째서 세상은 불의가 판치고 싸움과 다툼이 끊이질 않나요? 왜 하느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시기만 하나요?'


“하느님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다음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1열왕 19장)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아주 약한 사람을 부르시어 당신의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 일으키시고 그들을 통해 당신의 의로움과 평화를 만들어 가시는구나! 아!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정의를 위해, 평화를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구나. 하느님은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모상, 창조물인 우리들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계시는구나. 하느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참으로 우리 모두의 살아계신 하느님이셨군요. 이제야 우리들 당신의 정의를 당신의 사랑을 진정으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찬미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공동선> 2022년 11-12월호에도 실린 글입니다.

[필진정보]
지성용 신부 : 인천교구 송림동성당 주임신부, 인하대학교 인문융합치료 전공 초빙교수
TAG
관련기사

주소를 선택 후 복사하여 사용하세요.

뒤로가기 새로고침 홈으로가기 링크복사 앞으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