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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쓰고 나니 주변이 어둡다, 그러나 희망한다 - 복음의 기쁨, 지금 여기 : 글을 마치며
  • 지성용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8-07-16 11:45:12
  • 수정 2018-07-18 13:5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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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12월부터 매 주 월요일, 지성용 신부의 책 『복음의 기쁨, 지금 여기』를 <가톨릭프레스> 시대의 징표 코너에 연재했습니다. 더 많은 독자들과 나누기 위한 요청에 연재를 허락해 주신 지성용 신부님께 감사드리며 이번 주로 연재를 마감합니다. - 편집자 주 



다 쓰고 나니 주변이 어둡다. 세상이 잿빛이고 무기력하고, 무의미하다. 나만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겨울만큼이나 ‘나’라는 존재가 사무치게 쓸쓸하고 고독하다. 내일이 있는가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도 엄습한다. 교회, 사제, 세상을 말했지만 말하면 말 할수록 공허해지고,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통념이다. 그런데 때로 인간은 인간에게 너무나 치명적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이기 이전에 사회구조적인 악에 의해 자행된다. ‘사회’라는 조직의 유지와 보존을 위해 수많은 개인의 존엄과 인권에 해악을 끼친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것, 공감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커다란 죄, 판단력 부족”이라고 명시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점점 더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공감할 수 없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기도는 고통을 공감하는 무엇이다. 예수의 고통, 마리아의 고통, 인류의 고통을 기억하는 행위이다. ‘십자가의 길’을 기도하면서 예수의 고통을 기억하고 공감한다.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기억하고 공감한다. 그 ‘공감능력’이 바로 기도의 능력이다. 고통에 많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을 더 사랑할 수 있다. 그 고통이 무엇인지 알기에 타인의 고통이 내 것이 되어 버린다. 내 것이 되어 버린 고통은 나에게는 통증 이상의 그 무엇이고, 고통의 제거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서운 것은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것처럼 ‘일상의 악’, ‘악의 평범함’이다. 악은 자신을 교묘하게 위장하고 때로는 스스로에게 속아 그것이 마치 인간의 길인 것 마냥 수사적(rhetoric) 교란을 시도한다. 여기서 종교가 더 위험한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종교 사용자들이 스스로의 속된 본질을 성스럽게 하기 위해 위선적 생각과 행동과 말을 한다는 것이다.


이 글 전체는 평범해 보이고 일상적인 악의 ‘식별’을 위한 지침이다. 이제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 걸 맞는 식별의 영성이 필요하다. 그러한 식별을 위해 신학뿐만이 아니라 사회학, 심리학을 포함한 사회과학적 통찰이 필요하다. 동시에 교회 안에서는 사실(fact)을 말하고, 평론하는 기능을 가진 건강한 언론들이 나타나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는 암흑의 시기다. 교회가 어느 때보다 방탕하고 혼란으로 가득한데, 어디에서도 속 시원한 대답이나 솔직한 정보를 구하기가 어렵다. 그나마 < 가톨릭프레스 >가 있어 정말 다행이다. 이제 제2, 제3의 가톨릭 언론이 등장해야 한다. 교회가 전체를 외면하면서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를 고집할 수 없도록 성숙한 시민사회가 도래했다. 더 이상의 역행은 파멸과 파산을 앞당길 뿐 이라는 사실을 똑바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또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정말 무의미할 수 있다. 이 광대한 우주 가운데 한 점도 안 되는 지구, 그 안의 작은 나라, 그 작은 나라 안의 내가 살고 있는 나의 울타리. 인간은 우주의 일점도 되지 못하는 미미한 존재다. 그런 인간은 죽음을 그 존재의 한계로 한다. 가장 확실한 인간의 미래가 바로 죽음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소멸하고 사라진다. 인간이 구성한 사회는 그 자체로 불의하다. 그래서 절망적이기도 하다.


▲ ⓒ 곽찬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무의미에서 의미를 길어 올리는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불의에서 정의를 끌어내는 것이 인간이고, 절망에서 희망을 가꾸어 가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오늘을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라.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을 추구하라. 그리고 끊임없이 희망하라. 일상 안에서 희망하라. 작은 희망이라도 ‘내일은 오늘과 다르겠지!’ 라는 희망을 간직하라. 그것이 인간일 수 있는 길이다. 그것이 이 숨 막히는 존재의 모순과 불합리, 불의의 한복판을 질러 살아갈 수 있는 길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 33)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용유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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