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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철) 교황대사님, 홍길동을 아시나요?
  • 김유철
  • 등록 2018-12-11 15:33:01
  • 수정 2018-12-11 18:3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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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프레드 수에레브 주대한민국 교황대사


대사님, 평안하신지요?


기쁜 마음으로 안부를 물으며 인사드립니다. 대사님이 이곳 한국에 교황대사로서 소임을 받아 온 때가 장미꽃이 환하던 5월이었는데 벌써 전례시기로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기간이니 세월이 빠릅니다. 아무튼 한국에서 맞은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을 지나고 겨울의 문으로 들어서고 있는 마음이 어떠신지요?


대사님의 부임을 앞두고 동양의 오랜 경전인 <노자>에 나오는 ‘깊은 덕’ (玄德‧현덕)을 비유하여 ‘58개띠 형에게’라는 졸필에서 환영인사의 말씀을 드린 일도 있습니다. 사실 저의 글에서 대주교이며 주한 교황대사이신 분을 평신도이자, 한국인으로서 부르는 호칭에 대해서는 고심을 많이 하게 만들었습니다. 


교계제도가 만든 고위성직자들의 품계인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 등에 대하여 공식석상의 경칭으로 성하(聖下 His/Your Holiness), 폐하(Majesty), 전하(Highness), 각하(Excellency)등으로 부르지만 민간인(?)에게는 ‘너무 먼 호칭’이거나 구중궁궐의 어감이 낯설어서 저로서는 편지글에서 용감(!)하게-사실 저에게는 58개띠 친형이 있기에 살가운 마음으로-‘형’이라 불렀습니다. 오늘은 대주교님의 소임으로서 호칭인 ‘대사님’으로 부르려 합니다.


홍길동을 아시나요?


▲ 홍길동전 (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허균(1569년~1618년)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한국의 대표적인 포털사이트인 DAUM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사회 모순을 비판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이다. 《홍길동전》 외에도 여러 작품을 집필했다. 1606년 원접사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여 명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1610년 진주 부사로 명나라에 가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도가 되었고, 천주교 12단(端)을 가져왔다.’ (참고자료)


DAUM 백과에서는 허균을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도’라고 하였지만 이것은 교회사적으로 고증된 것은 아닐 겁니다. 단지 그가 명나라 연경에 이미 들어와 있던 마태오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한 이른바 신식학문인 천문학, 수학, 세계지도 등과 함께 ‘서학’에 관한 물품과 신학책 등을 맛보았을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분명히 그가 지은 《홍길동전》은 그가 맛본 ‘어떤’ 세상에 대한 꿈을 소설로서 묘사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의 다른 저술들이 한문인 것에 비해 《홍길동전》만을 유독 천시 받던 한글로 쓴 것은 분명 그가 소설의 대상으로 삼은 자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묻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는 역모 죄목을 받아 능지처참형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선각자들의 죽음은 늘 이러한지도 모를 일입니다.


“I have called you friends”


요한복음 15장 1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실 예전에 쓰던 개신교회와의 공동번역 성경에는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해석의 관점이야 신학자들의 몫이라 하더라도 분명 주님께서는 우리를 ‘친구’ 곧 ‘벗’이라 살갑게 불렀습니다. 


지금은 성인품에 오른 교종 요한 바오로2세가 1989년 10월 7일 방한하여 도착인사로서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했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 말은 세계 성현 중 한 명인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가르침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입니다. 


시대의 출중한 학자였던 신영복 선생은 <강의>라는 책에서 이 말씀을 단순히 친구가 찾아와서 기쁘다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 위계만 있는 세상에는 친구라는 ‘朋 붕’의 개념은 없는 것이며, 멀리서 벗이 온다는 것은 수평적 인간관계로서 새로운 인간관계가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 풀이하기도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어느 시대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들의 생각은 모두 ‘인간의 발견’에서 출발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번영에 대한 유혹’은

분명한 경고다.


대사님은 지난 10월 추계 주교회의에서 한 연설을 통해 2014년 8월 교종 프란치스코의 방한때 한국 주교들에게 했던 말을 상기시키며 또한 대사님 자신의 ‘사목적 관심’에 대해 말씀을 주셨습니다. 대사님으로서는 한국 부임이후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 하는 첫 연설이었기에 관심이 깊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사님은 “교황님께서 한국 교회에 하셨던 말씀 가운데, 저는 세 단어만 선택하고자 합니다. 이 단어들은 어떤 면에서 교황님의 메시지를 요약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단어는 기억, 희망, 증언입니다.”라고 전하며 이어서 어찌 보면 한국 주교님들이 가장 힘들어(?) 할 ‘번영에 대한 유혹’을 분명한 경고로서 덧붙였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이 주교회의에서 이루어진 한국 주교님들과의 만남에서 “번영에 대한 유혹”에 맞서 싸우라고 형제애를 담아 조언하셨습니다. “저는 믿음 안에서 제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야 할 형제로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의 교회는 번영하는 교회이고, 선교하는 훌륭한 교회이며, 커다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악마가 가라지를 심지 못하도록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바로 교회의 예언자적 구조에서 가난한 이들을 제거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마십시오.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 잘나가는 교회 …… 그런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번영의 신학’에 이르렀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저 그런 안일한 교회는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2014년 8월 14일).


성직주의 성향에 대한

싸움의 필요성


어찌된 경위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대사님의 이번 주교회의 연설문을 두 가지 버전(?)으로 보고 있습니다. 전해들은 바로는 원본이 전해지고 그것이 번역되어 주교회의 소식에 실린 이후 다시 수정본이 와서 현재 주교회의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연설문이 다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제가 더 이상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진위 여부는 두더라도 현재의 수정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저는 성직주의 성향에 대한 싸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한국 교회도 예외 없이, 일부 성직자들이 성직주의 성향을 지닙니다. 학대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형태의 성직주의에 대해 단호히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본의 내용은 조금 더 길지만 대사님이 전하려는 명확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굵은 부분은 현재본에 빠져있는 부분입니다. 


“저는 성직주의 성향에 대한 싸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한국 교회도 예외 없이, 일부 성직자들이 성직주의 성향을 지닙니다.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대리자께서 하신 권고를 실천합시다. 그분께서는 “성적 학대, 권력 남용, 양심을 저버린 행위가 발생한 모든 공동체에서 매우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인 “교회 권위를 잘못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을 질책하십니다. 성직주의가 바로 교회 권위를 잘못된 방식으로 이해하는 사례입니다. 성직주의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무효화할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주신 세례의 은총을 축소시키고 평가절하하는” 시도입니다. 이어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제 스스로 또는 평신도들이 양산하는 성직주의는 교회의 몸 안에 분열을 초래하고, 오늘날 우리가 규탄하는 수많은 악을 지속시키고 부추기고 조장하는 것입니다. 학대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형태의 성직주의에 대해 단호히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홍길동이 집을 나간 이유


▲ ⓒ 강재선


얼마 전 천주교개혁연대가 주최한 ‘교회사업장의 개혁’에 관한 토론회가 대구에서 열렸습니다. 그 날 저는 발제자 중의 한 명 이었지만 발제자들보다 토론회에 참여한 분들의 발언 내용이 더 가슴에 와 닿고 공감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가 말한 “신부나 수녀를 항상 떠받드는....”이라는 발언을 들으면서 저로서는 참으로서는 암담했습니다. 앞서 말한 허균의 소설에 나오는 홍길동은 자신이 꿈꾸는 이상 세계를 품으며 집을 나서는 이유가 “호형호제가 안 되는 세상”이었습니다. 엄격한-끔직한-신분사회는 몇 세기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여기서도 여전히 진행 중인 것일까요?


주님이신 예수가 말한 ‘벗’, 공자가 말한 ‘벗’,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한 ‘벗’은 모두 ‘떠받듦’이 없는 세상입니다. ‘떠받듦’은 대사님이 주교회의에서 말한 ‘성직주의가 바로 교회 권위를 잘못된 방식으로 이해하는 사례’이며 “모든 형태의 성직주의에 대해 단호히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천주교회가 한국사회에서 아름다운 ‘기억, 희망, 증언’으로 가는 길에 넘어야 할 가장 높은 벽입니다.


겨울이 깊어지면 봄이 오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그것이 하느님이 보기에 좋은 세상(창세 1장)입니다. 머지않아 봄이 오면 아우로서, 아니 벗으로서 대사님을 만나는 날도 오겠지요. 건강하십시오. 고맙습니다. 두손모음




[필진정보]
김유철 (스테파노) : 한국작가회의 시인,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이며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이다. ‘삶·예술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시집 <천개의 바람> <그대였나요>, 포토포엠에세이 <그림자숨소리>, 연구서 <깨물지 못한 혀> <한 권으로 엮은 예수의 말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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