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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음을 통해 신(神)에 이르는 길 - [이기상-신의 숨결] 허무주의 시대 신(神)의 자리 ⑤
  • 이기상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9-10-07 15:27:34
  • 수정 2019-10-07 15: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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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테는 세속화된 현대인들도 수긍할 수 있는 새로운 <신 존재 증명>을 그의 대표적인 저서 『종교철학』에서 시도한다.(1) 벨테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사실에서부터 출발한다. 


인간의 거기에 있음(2) : 우리는 우리의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다


첫째 사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 한 가운데에, 우리 사회의 한 가운데에, 우리 세계의 한 가운데에, 거기에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이 말은 일종의 실재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3) 


이것이 벨테의 신 존재 증명을 위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바탕이다. 물론 그러한 세계 안에서의 우리 현존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즉 우리의 현존재에 대해 플라톤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하이데거 또는 프로이트 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러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은 ― 후설의 제안을 받아들여 ― 괄호 안에 넣도록 하자. 어쨌든 이러한 종류의 모든 해석의 가능성들은 <우리가 우리의 세계 안에 거기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경우이건 이 사실은 존립한 채로 남아 있다.


물론 이 때 우리는 다음의 사실도 확실히 해야 한다. 즉 세계 안에서의 우리의 현존재는 일종의 열린 경험의 장과 같은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행위하며 느끼며 당하며 거기에 존재하고 있음으로 해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있다. 인간적인 세계 내 존재에는 밝음이 속한다. 또는 달리 말해,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와, 우리 세계와 함께 만들 수 있고 만들고 있는 수많은 가능한 경험들에 대해 열려 있음이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말하면서 경험의 근본요소를 밖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세계 안에 거기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명제는 다양한 가능한 해석들을 괄호 안에 묶는다고 해도 경험의 열려 있음은 남아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명제는 비슷하게 들리는 다음과 같은 문장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보름달이 거기에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 안에서의 우리의 거기에 있음을 벨테는 한 마디로 <현존재(거기에-있음)>라 지칭한다. 


무(없음)의 경험 : 우리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것도, 있을 것도 아니다


둘째 사실은, 다음과 같은 문장 속에 표현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것도 아니며 언제나 거기에 있을 것도 아니다.”(4) 이러한 명제 속에서도 일종의 의심의 여지가 없는 앎이 표현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위의 문장 속에 표현되고 있는 실제의 사실을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전의 비-현존재와 미래 비-현존재에 대한 경험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 이전과 미래의 비-현존재’는 각기 현존재에 대한 일종의 부정이다. 부정으로서 그것은 임의의 무가 아니라 오히려 일종의 특정한 무(無)이다. 그것은 그때그때마다 그것이 갖는 특정한 인간적인 현존재와의 연관에 의해서 규정되어 있는 특정한 무이다. 그것은 바로 그 현존재의 아직-거기에-있지-않음과 더-이상-거기에-있지-않음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동시에 특정한 부정으로서 보편적이다. 어느 누구도 그리고 인간적인 것은 어느 것도 이러한 비-현존재를 벗어날 수 없다.(5)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무런 제한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비-현존재는 전체로서의 인간 현존재와 연관되며 거기에는 인간의 세계 안에 들어오거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된다. 벨테는 이러한 부인될 수 없는 두 번째 사실을 한 마디로 ‘무’라고 지칭한다. 


여기서 벨테가 이야기하고 있는 무는 결코 순전한 형식적 무도 아니고 또한 순전한 형식적 부정도 아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우리가 우리의 세계 안에 거기 그렇게 존재하는 인간으로서 ― 우리가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한 ― 만일 무가 어떠한 양식으로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도대체 비-현존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음을 암시했다. 어떠한 방식으로건 무가 주어져 그래서 경험된다면, 이것은 무가 일종의 주어진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바로 그것의 부정성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어떤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며 어떤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언젠가 우리는 거기에 없었다는 것을 경험할 것을 말하고 있다. 좀 더 강하게 말한다면, 우리가 언젠가는 더 이상 거기에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을 경험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무는 형식적인 부정성 속에 녹아들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건드리고 있는 긍정성은, 현존재의 영역에서 통상 긍정적[실증적]이라고 부르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독특한 긍정성이다.(6)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비-현존재는 그 본성상 이중의 의미를 띠고 있다. 그리고 이 이중성은 무의 현상 자체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을 경험하여 우리 모두가 더 이상 거기에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을 보게 되는 사람은, 이러한 경험을 일종의 아무 것도 없는[텅 빈] 무의 경험으로 이해하든가 또는 절대적인 은닉의 경험으로서 이해하든가 한다. 첫 번째의 경우 우리는 여기에는 도대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의 경우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현현하고 있는 무를 보는[경험하는]데, 그 무는 철저하게 나에게서 벗어나 있으며 나에게 은닉되어 있다. 무의 경험의 내용에서부터는, 후설 식으로 말하자면, 무의 노에마(인식내용)에서부터는, 이러한 이중성에 대해 결정을 내릴 수 없다. 바로 이러한 결정내릴 수 없음이 무의 부정성에서의 근본적인 특성의 하나다.(7)



예를 들어 내가 캄캄한 방안에 들어선다고 가정해 보자. 이 때 나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이 경우 나는, 그 방안이 텅 비어 있는지 아니면 비어 있지 않은지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경험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라는 말은 이중성을 띠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중성 때문에, 그래서 그 사태에 대해 자신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8)


따라서 우리는 경험되고 있는 무에서 두 가지 가능성을 구별하고 있으며 우선은 그것들을 의식적으로 열린 채 놔둔다. 즉 순전한 아무 것도 없는 무의 가능성과 은닉 내지는 벗어남의 무의 가능성이 그것이다. 우리는 무의 경험에서부터는 우선 어떠한 가능성인지를 결정내릴 수 없다. 즉 거기에 은닉된 어떤 것, 자신을 숨기고 있는 어떤 것이 놓여 있는지 아니면 도대체 아무 것도 놓여 있지 않은지 말이다. 경험된 또는 경험될 수 있는 비-현존재 또는 무에 대해 ― 물론 앞에서 말한 이중성이라는 유보 아래 ―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발언을 할 수 있다. 


한편에서는 경험될 수 있는 것으로서의 무와, 다른 편에서는 경험하는 자로서의 우리 현존재 사이에 일종의 부정적인 역학[동력]이 전개되고 있다. 


무는 분명 무엇인가를 자체 안에 갖고 있으며 바로 이 무엇인가가 우리로 하여금 바로 이 무에 대해 생각하지 않도록, 적어도 즐겨 생각하지는 않도록, 만들고 있거나 몰아대고 있다. 무에서부터 일종의 억압하는 동력이 나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인간의 행위들이 무에서부터 도피하는 성격을 띤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한 행위들은 직접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무에서부터 나오고 있는 억압하는 동력기제에 대한 반응[반작용]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 닥쳐오면서 우리를 위협하는 낭떠러지 심연으로서의 무의 심연은 부인될 수 없는 사실이며 또한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사실이다.


무(無)는 차원과 같은 어떤 것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차원을 볼 수 있으며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무는 끝이 없다. 이러한 종말의 부정은 무의 차원과 같은 어떤 것이다. 비-현존재 속으로 떨어진 것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바로 이 ‘결코’가 그것이 갖는 끝이 없음에 대한 표현이다. 무는 인간이 계속 더욱 더 깊이 빠지면서도 거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러한 침묵하는 심연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더 이상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따라서 무(無)속으로 사라져버린 사람들에게 천년은 하루나 다름없다.


우리 현존재의 덧없음과 무상함에 견주어 볼 때 무는 비교될 수 없이 큰 것이다. 무는 이렇게 비교될 수 없이 큰 것으로 본래 끔찍한 것이다. 덧없는 그 모든 현존재는 이 끔찍한 것 앞에 정말 보잘 것 없는 무일 뿐이다. 따라서 이 무가 억압하는 힘을 가졌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끔찍한 끝이-없음 또는 무-한성과 다른 차원이 결부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무의 팽팽한 차원이라 명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차원이 비로소 무의 끔찍함을 완성시켜주며 날카롭게 만들어준다. 무는 피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무의 위협에서부터 도망갈 수 없다. 무는 위협하며 다가와서 모든 현존재를 집어삼키며 모든 현존재를 움켜잡고 있는데, 이것을 영원히 그렇게 한다. 현존재의 위대한 형상이 아무리 거대하고 잊혀질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들은 하찮은 것이나 다름없이 무에 의해 삼켜질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힘도 이러한 집어삼킴을 막을 수는 없다. 무는 그 피할 수 없음과 연관지어 볼 때 모든 현존재 및 그 위력에 대해 단적으로 압도적인 유일한 것인데, 무는 이것을 소리 없이 힘들이지 않고 한다. 무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무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압도적인 것이다.(9)


무가 피해갈 수 없는 것으로서 압도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또한 무조건적인 것이라고 칭할 수 있다. 무를 무조건적이라 칭할 수 있는 까닭은, 사람들이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며, 무와 타협을 한다는 것은 하등의 의미가 없다. 무는 ― 묻건 묻지 않건, 생각하건 생각하지 않건 상관없이 ― 와서는 삼켜 먹고 내주지 않는다. 사람들이 대단한 기술과학적 수단을 발휘해서 달에서 돌들을 채취해 오고 언젠가는 다른 별들에서 돌들을 수집해 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 번 지나가 버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무에서부터는 아무 것도 되찾아 올 수 없다. 바로 여기에 그 모든 인간의 능력에 한계가 그어지는 것인데 이 한계는 기술적 차원의 것하고는 전적으로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의 경험을 전적으로 구체적인 의미에서 무조건적인 경험이라 칭할 수 있다.(10)


우리는 무가 지니고 있는 몇 가지 특성을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다. 첫째, 무는 우리가 그것[무]을 주목하지 못하도록 억압한다. 둘째, 무는 끝이 없으며 어느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 없기에 무조건적이다. 셋째, 무는 사물도 주체도 아니다. 넷째, 무는 현존재의 타자이다.


의미요청 : ‘인간들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셋째 사실은 우리의 현존재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우리는 의미요청이라고 부르도록 하자.(11) 우리의 현존재에 속하며 거기에서 경험할 수 있는 무가 무로서 나타나는 데 있어 이중적이라는 점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자.


만일 무가 우리 현존재에 속하지 않아 그것이 현존재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위협하는 비-현존재가 무서워 도망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것 때문에 불안해 하지도 않을 것이다.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며 대단한 관심사이다. 바로 이러한 현존재에 대한 관심을 우리는 세 번째 사실이라고 칭하려 한다. 우리는 단순히 확정될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 우리에게는 바로 이 현존재 자체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우리에게는 그저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 현존재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특히 이러한 현존재가 스스로를 일종의 의미 있는 현존재로서 증명하고 있는 그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현존재를 의미 있게 형성해 내는 것이 중요한 관심사다. 우리는 우리 현존재의 전개과정에서 의미와 같은 것을 요청한다. 이러한 의미요청은 우리의 현존재와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이 무엇에 좋다는 말인가? 좀 더 근본적으로 제기하면 이렇다. 내가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도대체 그것이 무엇에 좋다는 말인가? 더 근본적으로 제기하면 이렇다. 우리 인간들이 함께 거기에 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분명 거기에는 일종의 보편적 인간적인 연대성이 있다. 나는 의미물음을 나만을 위해 제기하지 않는다. 나는 의미물음을 동시에 나의 모든 동료인간들의 이름으로 제기해야 한다. 의미물음에서의 이러한 보편 인간적 연대성이 인간의 윤리적 의식의 근본구성요소에 속한다.


의미요청에서부터 그리고 동시에 그것의 연대적인 보편 인간적 지평에서부터 분명코 인간의 그 모든 기획들이, 그 모든 희망들이, 그 모든 요구들이 발원해 나온다. 바로 이 요청이 모든 인간적, 사회적, 공동체적, 문화적 노력들의 원동력이 된다. 이 모든 노력들은 그것들이 의미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또 의미 있는 것으로 장악됨으로써 그때마다 궤도에 올려지는 것이다.


물론 인간 현존재에 속하는 의미요청에서도 한편으로는 사유되고 기획된 그리고 제대로 주제화된 요청으로서의 의미요청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행되고 살아진 요청으로서의 의미요청을 구별해야 한다. 좀 더 숙고해 볼 때 인간 현존재에 속하는 의미기획이 명확한 주제화에서는 매우 상이한 해석을 용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이한 해석들 중에는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해석의 경우도 속하는데, 그런 해석에 따르면 모든 것이 도대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극단적인 예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즉 우리 현존재는 그 자체로서 의미를 전제하고 있다. 이때 그를 위해 어떤 추가적이고 명확한 행위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현존재는 이러한 전제 없이는 도대체 올바로 서 있을[유지될] 수 없다. 이렇게 몸으로 살고 있는 의미전제가 그것에 대한 해석보다 이르며, 그것은 그것이 사라짐과 더불어 현존재수행의 가능성 자체도 사라져버릴 정도로 포기될 수 없는 것이다.


몸으로 살고 있는 의미요청은 각기 그때마다 현존재를 만족스러운 형태로 앞서 기획해낸다. 그것이 인간적 현존재를 충족된 형태에로 몰고 간다. 의미요청은 구체적으로 도달될 수 있는 충족되는 목표를 먹고산다. 


의미요청과 그것을 밖으로 말하고 있는 의미물음은 그것이 구체적인 동료 인간적인 상황에서부터 자라 나오는 곳에서 비로소 그것의 실제적인 힘을 경험할 수 있다. 다른 인간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에 직면할 때 또는 다른 사람들의 정의와 자유를 위해 구체적으로 투신할 때 의미요청은 전적으로 자명한 것이 되며 그 기본적인 강력함으로 나타난다. 즉 그것은 절대 의미가 없을 수 없으며 없어서는 안 된다. 의미요청은 구체적인 동료 인간적인 영역 안에서 비로소 자신의 고유한 차원을 온전하게 펼쳐 보인다.


활동하는 무(無), 무의 호소


마지막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고찰한 세 가지 사실들을 서로 연관지어 살펴보도록 하자. 그럴 경우 대안적인 귀결이 생겨나올 것이다.


모든 것이 피할 수 없는 무에 의해 위협 당하고 있다면 이 경우 특히 의미요청이 절대적으로 위협 당하고 있으며 물음에 부쳐지고 있다. 의미요청은 언제나 거듭 합당한 방식으로 내재적이고 단기적인 대답들을 발견한다. 그러한 대답들이 찾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전히 다음과 같은 물음들이 남아 있다. 만일 이 모든 것이 전부 사라져 버린다면, 내재적인 의미충족들이 실제로 그리고 진지하게 중요한 것이 될까? 만일 모든 것이 한꺼번에 끊임없이 무가 되어 버린다면, 그런데도 사랑이니 성실이니 하는 것이 여전히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무고한 자들의 고통은 의미가 없지 않는가? 


무가 텅 빈 [무적인] 무로 이해되고 해석될 경우, 모든 의미는 그리고 그로써 모든 인간의 윤리적 행위는 근본에서부터 물음에 부쳐지게 된다. 


이러한 귀결에서부터 우리는 진지하게 벗어나올 수 없다. 물론 인간들이 다행스럽게도 언제나 거기에서부터 도망나오긴 한다. 인간들은 어떤 근절될 수 없는 윤리적인 본능에 의해 그러한 최종적인 귀결로부터는 보호를 받고 있는 듯 싶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최종 귀결을 겁내지 않고 대면하여 파악하는 일이다. 만일 모든 것이 무조건적으로 언제나 무에게 맡겨져 있고 이 무가 그저 없애버리는 [무적인] 무라고 한다면, 이 경우 모든 것은 정말로 아무런 진지한 의미를 갖게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해결은 견지될 수 없으며 수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과 대비해서 우리 인간적, 동료 인간적 현존재의 의미요청이 절대적으로 마주하고 있다. 이 의미요청은 ― 그것이 오직 충분히 구체적으로 주목될 때에만 ― 포기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윤리적인 근본요청이 된다. 이 요청은 윤리적인 근본결단을 요구한다. 우리는 그것을 <모든 것은 의미가 있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과 악의 구별을 포기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랑이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은 확고하게 견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와 정의를 위한 투쟁이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이 견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고통이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이 견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포기될 수 없는 윤리적인 근본요청을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무의미성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여 타당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가 이것을 확고하게 붙잡고 있다면 거기에서부터 하나의 그리고 근본적으로 오직 하나의 귀결이 따라 나온다. 무의 경험이 이중적인 경험이며 그래서 그것의 고유한 부정성 때문에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지적한 사실을 상기하기 바란다.


이제 우리는 다른 근본적인 사실에 부딪쳤는데,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윤리적인 근본요청의 결단이다. 


현존재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가정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적인 삶과 투쟁, 고통의 연대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상정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요청을 올곧게 견지하고 극단적인 귀결들에서부터 도망하지 않는다면, 이 요청은 처음에 결정을 내리지 않은 채 놔둔 무에 대한 물음에 대해 하나의 결단을 내릴 것을 요청한다. 이 경우 의미요청이 굳건히 견지될 수 있기 위해서는, 무가 결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경우 무를 직면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말해져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무가 그것의 무한성과 도망칠 수 없는 힘과 어두운 끔찍함에서 결코 텅 빈 무가 아닐 때에만 확고하게 견지될 수 있다. 따라서 무는 은닉 또는 무한한,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요구해오는 신비에 쌓인 어떤 힘의 은닉하는 현전이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힘이 그 모든 의미를 주고 있으며 그 모든 잠정적으로 무의미한 것들에게 의미를 아낀 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무는 그 모든 사물적인 파악 가능성 저편에서 그 무가 소리 없이 형태 없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비록 강압적인 윤리적인 근거로서 수용되지는 않는다 해도, 무가 무조건적이지만 빠져나간 은닉된 현실성의 징표이며 흔적임을 통찰해야 한다. 이때 그 현실성이란 그 모든 의미를 간직하며 차이를 확고하게 견지하는 ― 비록 사람들이 그 차이를 뒤엎으려고 시도해도 ― 현실성이다. 즉 정의와 불의 사이의, 선과 악 사이의 차이 말이다. 이러한 현실성이 무의 너울 속에 빠져나가 있고 은닉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비밀[신비]이라고 명명될 수 있는 것이다.


분명 이러한 귀결은 경험적이거나 수학적 논거들이 갖는 강압적인 설득력은 없다. 세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무는 ― 비록 그것이 부인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 그것을 보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그리고 의미요청은 쉽게 지나쳐버릴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은 그것의 포기될 수 없음이 은닉되어 버린다. 마지막으로 그 귀결이란 것도 그것이 명확하게 눈앞에 놓여 있어서 어느 누구라도 똑같이 뒤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밑바탕에 놓여 있는 사실요소들뿐만 아니라 그것의 결론적인 연결도 이러한 사실요소들과 그것들의 연관에 관심을 두고 파고들려는 용기와 일관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전부 명확하고 분명하다. 특히 결국에 가서는 귀결을 끄집어내는 윤리적 근본결단은 ― 비록 그것이 쉽게 지나쳐버릴 수 있다 하더라도 ― 명확하고 분명하다.


무는 텅 빈 무가 아니다. 윤리적 근본결단은 우리에게 무가 떠받치고 있으며 존속시키고[보호하고] 있으며 결단하고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윤리적 결단에서부터, ‘믿고 무의 바탕없음과 침묵함 안으로 들어서라’는 호소가 흘러나온다. 무가 떠받치고 있다. 무의 소리 없는 위력은 통상 거대하고 위력적으로 보이는 그 모든 것과 비교할 때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더 크다.


이것은 우리가 세속화된 세계에서도 갈 수 있는 길일 수 있다. 그 결과는 비록 그것이 전승된 신에 대한 그림들과 비교할 때 빈약해 보일지라도 의미가 있다. 아마도 우리 시대는 정말로 무한하고 무조건적으로 우리와 연관되어 있는 그러한 무한하고 무조건적인 비밀과 관련되어서는 빈곤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무의 경험에서 만나는 동·서양의 종교들


우리가 허무주의라는 시대의 근본 경험 속에서 신성의 빛남을 함께 경험할 수 있다면, 즉 우리 시대에서도 어떻게든 ‘종교적 경험’의 가능성이 성립하고 있다면, 이러한 존립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서양의 종교적 경험에만 국한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러한 종교적 경험은 다른 모든 종교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벨테는 ‘아무것도 없음’을 통해 ‘신’에 이르는 ‘길’이 모든 종교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리스도교에서는 ‘부정 신학’이, 유대교에서는 ‘침묵함’이, 이슬람교에서는 ‘이름없는 것’이, 리그베다에서는 ‘캄캄함 속에 캄캄한 것을 숨기는 것’이, 도덕경에서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이, 불교에서는 ‘니르바나’가 그러한 ‘길’을 증명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12)



우선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 니사의 그레고리는 “암흑을 통해 신에 대한 본래적 인식에 도달한 자”로서의 모세를 말한다. 이때 ‘암흑’이나 ‘구름’등은, 그 속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모세에게 암흑은 ‘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위디오니소스는 신이 ‘이름-없음’으로서, 즉 “이름이 없기에 아무것도 아닌 자”로서 만나진다고 한다. 이러한 부정 신학의 대표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우리의 영혼이 받아들여야 할 신은, 좋은 신도, 진리인 신도 아닌 황야 내지 황무지로서 나타나는 신이라고 본다. 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 풍경 속에서 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신은 표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직접적으로 ‘느끼고 경험될 수 있을 뿐’이다.(13)


그리고 벨테는 유대교와 이슬람교도 한 뿌리로부터 난 것이기 때문에 비슷한 방식으로 말해질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벨테는 불교에서 ‘없음의 길’로서 ‘니르바나’를 꼽고 있다. 이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그는 <수소와 소치기>라는 선시(禪詩)를 인용하고 있다. 그 시 속에서 소치기로서의 사람과 신으로서의 수소는 사라지고 만다. 그것의 사라짐은 마치 ‘불꽃 위에 떨어지는 눈’과도 같다. 그리고 거기에 남는 것은 ‘넓고 파란 하늘뿐’이다. 우리는 하늘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니르바나’, 즉 ‘아무것도 없음’을 통해 ‘마지막 자리’에 도달한다. 아무것도 없음에 대한 경험 내지 깨달음은 우리를 신적인 자리, 즉 하늘 자체로 이끌어 준다.(14)


모든 것이 의미-없음의 나락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허무주의 시대에 이렇게 무에 대한 경험에서 동양과 서양의 종교적 경험은 만나고 있다. 없음이 일으키는 바람에 귀를 기울이고 그 없음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놓은 채 신이 떠나버린 ‘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인간은 ‘무의 자리지기’로서 마지막 남은 ‘성스러움’의 영역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이 낳은 우리 시대의 위대한 영성가 다석 유영모의 말을 들으며 우리의 논의를 마치도록 하자.


“하느님이 없다면 어때, 하느님은 없이 계신다. 그래서 하느님은 언제나 시원하다. 하느님은 몸이 아니다. 얼[靈]이다. 얼은 없이 계신다. 절대 큰 것을 우리는 못 본다. 아직 더할 수 없이 온전하고 끝없이 큰 것을 무(無)라고 한다. 나는 없는 것을 믿는다. 인생의 구경(究竟)은 없이 계시는 하느님을 모시자는 것이다.”(15)


▶ 다음 편에서는 ‘동서통합의 영성적 철학자 유영모’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1) 아래의 내용은, Bernhard Welte, Religionsphilosophie, Freiburg Basel Wien 1978, “Zweites Kapitel, Gott als Prinzip der Religion”, 45 이하 (번역본: 종교철학, 오창선 옮김, 분도출판사, 1998, 제2장 <종교의 원리로서의 신>)과 그의 논문 , Gottesbilder heute (오늘날의 신에 대한 그림들), S. Moser/E. Pilick 펴냄 (Königstein, 1979), 1 이하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2) 참조 B. Welte, Religionsphilosophie, 47.

(3) 이에 대해서는 벨테의 다음 저서도 참조. B. 벨테, 유한과 무한의 겨룸터. 인간 현존재의 해석을 위한 숙고들, 오창선 옮김, 가톨릭대 출판부, 1996, 11 이하.

(4) 같은 책 49.

(5) 참조 같은 책 같은 곳.

(6) 참조 같은 책 51.

(7) 참조 같은 책 53.

(8) 참조 같은 곳.

(9) 참조 같은 책 54 이하.

(10) 참조 같은 책 55 이하.

(11참조 같은 책 58 이하.

(12) 참조 B. Welte, Das Licht des Nichts, 61 이하.

(13) 참조 같은 책 58 이하.

(14) 참조 같은 책 62 이하.

(15) 박영호, 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 하권, 문화일보, 1996,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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