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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교회가 할 일, 환대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 이종민
  • 등록 2019-10-24 15:25:54
  • 수정 2019-10-24 15: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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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는 신학 나눔의 새로운 길을 찾아 ‘사건과 신학’이라는 표제로 다양한 형식의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달, 이 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신학 이야기를 나누는 ‘사건과 신학’. 이번 주제는 ‘한국교회 총회’입니다. - 편집자 주


케케묵은 교회의 위기라는 말은 이제 그만하자. 세상에 교회가 더 이상 필요 없다면 문을 닫으면 될 일이다. 그 뒤에는? 그 분이 알아서 하시지 않겠는가! 교회의 총회들이 교회지도자들이 모여 높은 자리에 앉아 그럴듯한 옷을 입고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자구책을 논의하는 자리라면 우리는 그 동안 신물나게도 그 풍경을 보아왔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 땅의 교회에 분명한 사명이 떨어졌다. 그것은 낯선 이주자들을 환대하라는 것이다.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카르노 지역의 한 가톨릭교회에서 쉬고 있는 난민들 (사진출처=AP Photo/Jerome Delay)


2018년 예멘인 500여명이 제주도에 상륙하여 난민신청을 한 사건은 한국사회에 일대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이들의 집단 난민신청은 이주민에 대한 우리사회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17세기 중반 제주도에 네덜란드출신 하멜이 표류하였을 때 우왕좌왕했던 조선사회의 반응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로부터 40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주민에 대한 공포, 특히 그들이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쏟아지는 근거 없는 차별과 혐오발언 등은 여전히 이 사회가 보편적 세계시민의식과는 거리가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국적을 뛰어넘는 자본주의의 발달은 상품 자본 기술뿐만 아니라 노동력까지도 초공간적 이동을 가능케 하였다. 이주노동은 이제 세계 속에서 일상이 되었고 한국사회도 ‘외국인노동자’로 시작한 이주민의 유입이 30년 넘게 진행되어 왔다. 그리고 2천년대 중반 결혼이주여성과 그 가족의 증가는 급속한 정부 주도 다문화정책으로 펼쳐졌다. 그러나 여전히 이주민을 사람 그 자체가 아닌 경제적, 사회적 부족함을 채우는 도구로 여기는 관점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차별과 배제는 지속되고 있다.


최근 급격히 이슈가 되고 있는 난민의 문제 또한 책임 있는 세계 구성원으로서 함께 풀어야할 과제이다. 난민은 식민주의, 전 세계적 경제민주화의 실패, 국경분쟁, 자원분쟁 등의 결과물이며 급속히 커지는 세계적 부의 쏠림현상의 반작용이다. 세계의 가난한 민중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 부를 향유하고 있는 소위 선진국이라면 반드시 이에 책임 있는 응답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이 난민들의 목적지가 되고 있다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치를 반증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환대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환대란 나의 거주지에 갑자기 들어온 이방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된다. 얼굴을 알 수 없는 타자인 이주민의 갑작스런 방문은 그런 의미에서 많은 이들에게 불편함을 가져다주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 낯선 타자, 이주민을 받아들인 역사가 짧고 서툴다. 예멘 난민이 도착했을 때 우리 정부는 이들을 난민법과 출입국법에 의한 적절하고 인도적 지원을 하기 보다는 예멘에 대한 무사증제도를 서둘러 닫고, 이들을 ‘가짜 난민’으로 몰아 추방하라는 일부의 눈치보기에 급급했다.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지속적으로 환대를 베풀 것을 명하고 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은 낯선 나그네들을 환대하고 집으로 초대한다. 낯선 이들에게 자기 공간을 내어 주는 용기 있는 행위를 통해 그는 후손에 대한 새 언약을 약속받는다. 예수를 둘러 싼 이들은 모두 환대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 특히 너무나 유명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예수는 무조건적 환대를 말한다. 특히 당시 보편적이었던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뛰어넘는 예수의 말씀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새로운 인간형을 보여 주는 것이며, 낯선 이, 즉 길가에 쓰러져 있는 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낯선 이의 이웃이 되는 것 ‘너도 가서 그와 같이 하여라(루가10:37)’는 말씀이야 말로 복음의 정수이다.


이제 한국의 교회들은 환대를 결의하고 교회가 무조건적 환대의 공간이 되어 주기를 분명히 해야 한다. 현대의 국가체제 속에서 국가와 시민사회가 이주민과 난민을 무조건적으로 받아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국가는 국경이라는 틀 속에서 자국민을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인권이라는 보편적 윤리와 특정 공동체의 시민권간에 긴장은 분명히 존재한다.


여기에 교회의 존재 이유가 드러난다. 신학적으로 교회는 이 땅과 하느님 나라 사이에 중간 지점에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국가제도와 보편 인권사이에서 완충지대의 역할을 해야 한다. 철학자 벤하비브는 ‘환대의 권리’를 이야기 한다. 즉 “환대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사이, 우리 개인에 내재된 인간성의 권리와 특정 국가의 구성원 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부여된 권리 사이의 공간에 존재한다.” 


이 딜레마의 공간에서 적극적으로 환대를 수행해야 하는 곳은 바로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국가제도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난민, 시민사회가 돌보지 못하는 영역의 이주민을 온전히 받아 안아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물적, 인적 자원을 동원하여 이 사회에 갑자기 들어 온 이주민을 환대하고 그들이 안정되게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 내보내는 완충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 땅의 교회가 혹시 거꾸로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이주민을 전도와 개종의 대상으로 삼거나 교회성장을 위해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번 각 교단의 총회에서는 각 교회가 이주민을 적극적으로 환대하자는 결의안을 세우기를 제안한다. 예를 들어 천주교 의정부교구에서는 2018년부터 1본당 1난민가정 지원을 결의하고 교구 안에 난민지원센터를 수립하였다. 이와 같이 각 교회, 노회 규모에 맞는 이주민과 난민을 환대하는 구체적 지원계획을 세우고 정부가 나서지 못하는 일, 시민사회가 감당 할 수 없는 사명을 책임질 때 교회가 이 사회 속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인정받고 교회 위기에 대한 논란을 줄여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종민(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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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벤 하비브 세일라(이상훈역), 2008, 『타자의 권리:외국인, 거류민 그리고 시민』, 철학과 현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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