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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교우들에게
  • 이기우
  • 등록 2019-11-08 1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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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2주일 : 2마카 7,1-2.9-14; 2테살 2,16-3,5; 루카 20,27-38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의 역할을 크게 부각시키면서, 사도직의 역할과 사명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공생활이 십자가와 부활로 크게 이루어져 있으나,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언자직과 왕직과 사제직의 세 직분으로 이루어졌음을 가르쳐온 교회가 그 직분은 성직자만이 아니라 교회 구성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평신도들이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할 사명이라고 뒤늦게 각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천주교주교단에서도 1968년부터 평신도 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과거 제도교회의 성직주의가 교회관을 지배하던 중세와 근세에는 교계제도를 피라밋처럼 그려놓고 평신도들을 맨 아래에 놓았기 때문에 이러한 역할과 사명이 평신도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교리를 배우고, 성사를 받고, 교무금과 헌금을 내는 정도의 수동적인 역할만 주어졌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성사적이고 공동체적이며 봉사적인 모습으로 획기적으로 교회관을 전환시킨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된 지 반세기가 넘어가고 있는 지금에도 여전히, 우리 한국교회가 속해 있는 라틴 전례의 서구교회는 고대 및 중세의 제국적 정치체제로 구성된 사회집단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교황을 정점으로 한 피라밋형의 구조 안에서, 자기 교구에 관한 한 교황에게 전권을 위임받는 주교들에 의하여 모든 일이 분할 통치되는 일종의 ‘중세식 봉건제 왕국’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구조 안에서는 가르치고 성화하며 통치하는 절대권한이 성직계급에게만 독점적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평신도들은 교회 구성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성직계급에 의해 거의 일방적으로 수동적 역할만이 주어져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평신도의 교회 내 지위를 격상시켰다고 해도, 또 예언자직과 왕직과 사제직의 역할과 사명을 강조했다고 해도, 평신도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도직을 정상적이고 자발적으로 수행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제국적 중앙구조와 봉건적 지방구조로 형성된 교회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와 동일시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찍이 오늘날만큼 강렬하게 자유, 평등 그리고 연대와 평화가 실현되는 정의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이 전 세계적으로 발해진 시기는 없었습니다. 이 열망은 우리 사회 안에서 그 어떠한 물리적 강압으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강력한 기운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보편적 가치들이 인정받게 된 계기는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회 밖에서 일부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자칭 무신론자들에 의해서 일어난 시민혁명이었고, 또한 두 번에 걸쳐 유럽에서 시작된 세계 대전이었습니다. 프랑스대혁명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시민혁명에서 시민들은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왕실과 그 편을 들던 가톨릭교회를 향해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외쳤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부여하신 천부적 권리임을 무신론자로 공격받던 그들이 주장한 것입니다. 


한편 제1,2차 세계 대전은 어마어마한 인명 피해를 초래했습니다. 1차 대전에서는 군인이 9백만 명 이상 죽었으며, 2차 대전에서는 무기의 살상력이 높아지는 바람에 민간인과 군인을 포함한 5천만 명 내지 7천만 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그 후 다시는 전쟁의 참화를 바라지 않는 여론이 높아져서 국제연합이 결성되어 세계 인권 선언이 작성되었으며, 이 안에 기왕의 자유와 평등과 연대의 가치에다가 평화의 가치까지를 합하여 인간의 천부적인 기본 권리로 선언되었습니다.


하지만 1961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23세 교황은 회칙 ‘지상의 평화’를 통해 자유와 평등, 연대와 평화를 향해 엄청난 역사적 진보를 이룩한 인류를 향하여 교회 바깥에서 하느님 신앙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고 합의한 이 가치들의 맹점을 매섭게 비판했습니다. 요한 23세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서 매우 영성적이면서도 자연의 현상을 예로 드는 감수성으로 현대 문명을 비판하는 논리를 세웠습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시면서 질서와 조화의 원리를 인간에게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밤에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면 발견할 수 있는 그 오묘한 질서와 정교한 조화에 경탄을 금할 수 없는데, 낮에 눈을 돌려 인간 세상을 보면 무질서와 부조화 때문에 견딜 수 없도록 실망스럽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질서와 조화, 그리고 인간 세상의 무질서와 부조화가 왜 일어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무질서를 질서로, 부조화를 조화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 요한 23세는 회칙 ‘지상의 평화’에서 차분한 논리로 설파하였습니다. 


그 요지는 이렇습니다. 세상은 자유의 가치를 깨달았지만 저마다 각자의 자유를 부르짖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무질서하다는 것이고, 절대왕정을 혁파하고 민주주의 세상을 이룩했다고 하지만 평등해지기는커녕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불평등은 더 깊어만 간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따라서 서로 연대해야 할 인류가 저마다 조금이라도 더 힘을 가지고 있으면 더 약한 이들에게 억압과 착취를 일삼고 있기 때문에 일치하기는커녕 더 분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연대라는 소중한 가치의 깃발은 들었으되 정작 그 실현에 있어서 나타나는 무질서와 부조화는 평화의 가치에 있어서 더욱 심각하고 위험하다고 요한 23세는 경고했습니다. 사실 무기의 발달로 인해 사상 최대의 인명피해를 야기한 세계 2차 대전을 훨씬 능가하는 핵무기들이 강대국들에 의해 경쟁적으로 개발되는 바람에 이제 또 전쟁이 일어나면 인류가 멸망하게 될 것이고 지구가 사람 살 수 없는 곳으로 황폐하게 변할 것이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23세는 자유와 이에 바탕한 모든 권리는 책임과 의무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책임과 자유, 의무와 권리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평등의 가치는 서로 더 가지려고 해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으므로 이제는 소유가 아니라 존재, 성장이 아니라 분배의 정의에 매진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삶의 질은 재산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는 복음진리를 상기시킨 것입니다. 연대의 가치는 인간성을 좌우하는 핵심 덕목으로서 국가 정부가 시민들의 자발적인 공동선 참여를 독려하고 지원함으로써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평화의 가치는 저마다 주권을 가진 국가들에 의해서는 결코 완전하게 달성될 수 없으므로 국내적으로 실현시킨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서 국제 사회에서도 민주적으로 선출된 공권력이 출현하여 평화의 질서를 책임져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23세는 비록 공의회기 중에 선종했지만, 그의 가르침과 외침은 공의회 문헌 곳곳에 스며들었습니다. 평신도 사도직이라는 명칭부터 시작해서 평신도의 교회 내 지위 회복 역시 그러한 가치와 철학 위에서 출현할 수 있었던 산물입니다.


자유와 평등, 연대와 평화라는 가치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최고선의 질서입니다. 비록 제도교회가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하는 사이에 교회 바깥에서 먼저 알아보고 주장하여 실현되기는 했으나, 요한 23세의 지적대로, 하느님 없이 인간이 온전할 수 없고 신앙 없이 인간 양심과 이성이 온전히 발휘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류 문명을 사랑의 문명으로 바꾸어놓을, 이 네 가지 핵심 가치에 있어서도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교회의 현실은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직자들은 물론 평신도들의 의식부터 세상에 못 미치거나 세상의 문제가 지닌 원인을 모른 척 하고 고대에 기원을 둔 제국적 구조와 중세에 확립된 봉건적 질서를 고수하고 있는 탓입니다.


일찍이 17세기 스페인의 작가 세르반테스는 중세 유럽을 정신적으로 주도하고 있었던 가톨릭교회의 현실을 풍자한 소설 ‘라만차의 기사 비범한 귀족 돈 키호테’를 써서 근세를 열어젖힌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는 당시 중세 유럽인의 눈높이에 맞추어 그러나 종교재판을 일삼던 교회 검열당국의 눈을 속이려고 풍자소설 형식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 내용을 아주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라만테라는 한 시골에 살던 지주가 기사도 소설에 심취한 나머지 망상이 심해져서 중세 유럽을 풍미하던 고매한 기사도의 이상을 몸소 실현해보려고 귀족 신분의 키호테 기사로 자처하고 하인 산초를 데리고 길에 나서서 세상의 악을 무찔러보겠다고 온갖 우스꽝스러운 모험을 하며 여행한 풍자소설입니다. 그는 옆집에 사는 농촌 처녀 둘시네아를 고귀한 신분의 공주로 착각하고 짝사랑하지만 실상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아서 그저 공상으로 그칩니다. 그가 언덕 위에 서 있는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거나 적들이 차지하고 있는 성채로 착각하고 애마 로시난테를 타고 돌진하는 유명한 광경은 미치광이 키호테 기사를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키호테 기사가 귀족 신분 출신이라면서 돈 키호테라고 자칭하는 것이나, 풍차를 거인이나 성채로 착각하는 것, 비천한 농촌 처녀를 고귀한 신분의 공주라고 상상하는 것 등은 당시 중세의 가톨릭교회를 풍자한 듯 합니다.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알지도 못한 채 고단한 농사일을 하며 일생을 살아가는 둘시네아는 당시 평범한 가톨릭신자들 내지 일반 시민들을 풍자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후대의 평론가들이 이 소설을 스페인 황금기의 대표적인 문학일 뿐 아니라 문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이며 세계 최초의 근세 문학 작품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입니다.


평신도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신앙인으로서의 의식이 깨어나야 합니다. 특히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자녀로서 그분을 닮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 하느님을 가장 닮으신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서 그분의 예언자직과 왕직 그리고 사제직을 실천해야 하고 또 할 수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성직자들은 이를 위해 평신도들에게 성사적으로 봉사하라고 서품된 봉사자일 뿐이기 때문에, 고질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성직주의적 폐단도 평신도들이 성사를 배령함에 있어서 기복적 요소를 극복하고 평신도의 의식이 깨어나야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교회 안에서 교구 단위에서나 본당 단위에서 성직자와의 공동논의구조를 민주적으로 마련한다든지, 논의된 바를 결정하고 실천함에 있어서 책임 있게 처신한다든지 하는 구조적 개혁도 가능해 질 것입니다. 


특히 가정과 사회에서 세상의 빛이 되도록 활동하는 소명은 성직자나 수도자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언정 대신해 줄 수 없는 평신도 사도직의 고유한 몫입니다.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의 뿌리요 열매여야 할 평신도 사도직에 관하여, 돈 키호테가 둘시네아의 고귀한 품위를 회복시키고 싶어 하던 그 심정으로 평신도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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