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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고 무시해버린 ‘무’와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 이기상
  • 등록 2019-11-25 10:5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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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죽음>과 인간의 신격화


근대화의 추세는 종교개혁 이후 전개되기 시작한 계몽운동과 그 맥을 같이한다는 것이 거의 공통된 견해이다. 종교적 내지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이 인간의 생활세계를 고루 통제하여 모든 영역을 통합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통일적인 세계관이 종교개혁 이후 무너지기 시작하며 세계가 분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신을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제일원인이자 창조주로서 보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이제 그 자리를 이성적 세계관에 내주어야 했다. 신은 이성에 의해서 세계가 다스려지도록 창조했고 인간에게 이성적 능력을 부여해줌으로써 인간이 세계를 관장할 수 있도록 마련해 놓은 것이다. 신은 역사의 전면에 나설 필요가 없고 이제부터는 인간이 이성으로써 모든 것을 설명하고 다스리고 통제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의 세속화는 시작되었고 신은 점차 인간들의 일상생활에서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계몽운동이 모든 분야에로 확산되어 가면 갈수록 신 내지는 신적인 것이 들어설 자리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신 내지 신적인 것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도 않고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일 뿐 아니라, 윤리도덕의 영역에서도 더 이상 도덕규범의 근거로서 기능하지 않게 되었고, 심미학이 주도권을 잡아가는 예술의 영역에서도 설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개인적 내지는 사적인 믿음의 영역에서만이 영향력을 펼 수 있었던 신이지만, 종교 자체를 사회적 현상의 하나로 설명해 버리려는 계몽의 추세에 밀려 신은 안방에서마저도 쫓겨날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계몽화의 과정을 꿰뚫어 본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함으로써 그 종말을 앞서 예견했던 것이다. 



이렇게 서구 근대화운동의 고속도로를 깔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신 내지는 신적인 것을 우리의 생활세계에서 서서히 몰아내야 했다. 신에 대한 요청을 감안한다 해도 그것을 극도로 제한하여 인간의 개인적인 사적 차원에 국한시켰으며, 그래서 현실을 설명하고 통제하는 데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모든 존재영역을 관장하던 신적인 것이 이제는 종교적 영역이라는 극히 제한된 현실영역을 일부 필요로 하는 심약한 사람들을 위해 용인되고 있는 셈이다. 


이미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지 않았던가.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신이 죽은 이래 이 지상에서 이제는 인간을 규제할 수 있는 어떠한 기준과 척도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야말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 이렇게 서구의 인간중심주의적이며 이성중심주의적인 추세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인간적인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감행한 신적인 것의 퇴치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죽어버린> 신을 어떻게 되살릴 것이냐? <떠나버린> 신을 어떻게 다시 모셔올 것이냐? 어떻게 새로운 신의 도래를 준비할 것이냐? 하이데거는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구원해줄 신의 도래를 준비하기 위해 인간이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성스러움>의 영역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하이데거는 충고한다. 신은 오직 성스러운 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데 세속화 이래 인간의 욕망의 불빛이 모든 곳을 두루 비추고 통제하고 있는 한 우리는 어디에서건 신을 대할 수 없다. 


다석 류영모는 바로 이러한 성스러움의 영역을 닦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친 이 시대 마지막 사상가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석에 의하면 <성스러움>, 즉 <거룩함>은 한마디로 <없이 계심>이다. 인간이 이 <없이 계심>에 접근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에게 더 이상 <성스러움>도, <신적인 것>도, <신성>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우리가 이 <없이 계심>에 대한 시야를 되찾지 못하는 한 우리는 떠나버린 신의 도래를 기대할 수 없다. 이 거룩함은 몸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마음의 눈으로도 볼 수 없다. 오직 얼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인간이 얼나로 솟나야만 그 성스러움을 맞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바로 그 성스러움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다석에 의하면 사람이 거룩한 하느님, <없이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무한한 우주의 허공을 보는 것이고, 둘째는 우주에 깔려 있는 무수한 별무리를 보는 것이고, 셋째는 내 마음 속으로 오는 성령을 만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에 이르는 길 중에 여태껏 간과해온 <무(無)>가 핵심개념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절대의 하나로서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한아>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고, 그렇게 모든 것을 아우르며 지탱시켜 주고 있는 거룩한 힘인 성령, 또는 다른 말로 <한얼>을 만나게 된다. 그 <허공>, <한아>, <한얼>을 <한울님>, <하느님>, <한아님>, <하나님>, <한얼님>, <한웋님>으로 부르든 이름은 중요치 않다. 우리는 어차피 이름 속에 없이 계신 하느님을 잡아넣을 수는 없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이 없다면 어때, 하느님은 없이 계신다. 그래서 하느님은 언제나 시원하다. 하느님은 몸이 아니다. 얼[靈]이다. 얼은 없이 계신다. 절대 큰 것을 우리는 못 본다. 아직 더할 수 없이 온전하고 끝없이 큰 것을 무(無)라고 한다. 나는 없는 것을 믿는다. 인생의 구경(究竟)은 없이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자는 것이다.”


“신이라는 것이 어디 있다면 신이 아닙니다. 언제부터 있었다고 하면 신이 아닙니다. 언제부터 어디서 어떻게 생겨서 무슨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신이 아닙니다. 어디로 들어가야 신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한량없이 그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궁신(窮神)하며 그냥 나아가는 것입니다. 상대세계에서 ‘하나’라면 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절대의 ‘하나’는 신입니다.”


없이 계신 신에게 제대로 접근하려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있음 · 없음에 대한 생각부터 바꾸어야 한다. 있는 것에만 관심을 쏟아 무의 심연으로 내몰려 사유의 대상이 되어보지 못한 <없는 것>, 즉 無 · 空 · 虛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마련해야 한다. 존재중심, 현전중심의 사유 속에서 존재하는 것에만 매달려온 서양의 사유방식에게는 모든 것을 뒤흔드는 획기적인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무의 제거와 존재의 횡포 ― 존재의 유래로서의 무


있는 그대로의 현실 전체를 과연 인간의 이성으로 다 파악하고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가? 인간의 이성에 의해 확인될 수 있는 것만이 <존재>라는 명칭을 받을 수 있는가? 따라서 이성의 빛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들어올 수 없는 것은 모두 <없는 것[無]>이라는 판정을 받아야 하는가? 지속적으로 눈앞에 있는 것으로 이성의 눈에 의해 확인되어야만 존재하는 것이 되는가? 더 나아가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주장되거나 양적으로 계량화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데에야 무슨 반론의 여지라도 남을손가.


▲ 남태평양에 있는 섬나라 투발루는 기후변화로 섬 2개를 잃는 등 최초의 기후 난민국이 됐다. (사진출처=THE SINKING OF TUVALU)


이 얼마나 오만한 인간 중심적이고 이성 중심적인 생각인가? 인류는 바로 이러한 인간 중심적, 이성 중심적, 존재 중심적 사유로 인한 폐해를 20세기에 들어와서 톡톡히 치루고 있다. 지금 지구상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륜 내지 천륜파괴적 만행, 수질오염, 공기오염, 오존층 파괴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개인생명, 사회생명, 자연생명, 지구생명, 우주생명 파괴의 현상들은 그 동안 인류가 관심을 쏟지 않았던 <없는 것[無]>들이 벌이는 <무의 반란>이다. 그러기에 현대의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인 리오타르는 서술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감정을 예민하게 만들어야 하며 그를 위한 새로운 서술들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실성을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가 아니라, 사유될 수는 있지만 서술될 수는 없는 것에 대한 암시를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는 사실이 이제는 분명해져야 한다고 리오타르는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에 대해 다양한 <언어 유희> 사이의 최소한의 화해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전체와 일자(一者)에 대한 동경, 개념과 감성의 화해에 대한 동경, 명료하고 의사소통 가능한 경험에 대한 동경을 실현하기 위해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 긴장완화와 안정에 대한 일반적인 열망 속에서 우리는 테러를 다시 한 번 시작하고, 현실파악이라는 환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의 소리를 너무 또렷하게 듣고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전체에 대항해서 전쟁을 하자. 표현될 수 없는 것의 증인이 되고, 분쟁들을 활성화하고, 그 이름의 명예를 구출하자.”


리오타르는 이렇게 이성에 의한 획일화, 언어에 의한 현실의 박제화에 대항해 차이를 구출하고 표현될 수 없는 것에 존재의 여지를 주자고 외친다. 리오타르는 이성에 의해, 언어에 의해 파악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존재>하고 있는 것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석은 여기에서 한 차원 더 깊이 근원으로 뛰어들어간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배제된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새로이 근원적으로 사유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존재> 또는 <유>라고 여기고 있는 것들이 깊이 사유해볼 때 <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그 유래를 무에 두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잃어버린 <무에 대한 감성>을 되찾아야 할 뿐만 아니라 <무>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과 열린 마음이 무엇보다도 요구되고 있는 시점이다. 다석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20살 전후에 불경과 <노자>를 읽었다. 그러나 무(無)와 공(空)을 즐길 줄은 몰랐다. 요새 와서 비로소 공에 친해졌다. 불교에서는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해야 허공에 갈 수 있다고 한다. 간두에 매달려 있는 한 허공에 갈 수 없다. 우주를 담은 허공이 실존이다. 맨 처음에 무가 있었다는 것은 옳은 것 같다. 무는 엄숙하다. 무는 나도 안다며 지내갈 수 없다. 이 우주 천체는 공에 혹이 난 것이다. 혹이란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그것은 끝내 빔[空]에 돌아간다. 혹에 난 물 것이 생물이다. 나는 빔[空]에 가야 해방된다고 생각한다. 불교나 노자는 한 마디로 빔이라 하면 된다. 서양사람들은 이 빔을 모른다. 유(有)만 가지고 제법 효과를 보지만 원대한 것을 모르니 갑갑하기만 하다. 서양문명은 벽돌담 안에서 한 일이다. 빔[空 · 無]에까지 가야 한다. 빔은 절대자가 아니다. 절대자 하느님의 마음이다. 절대(하느님)의 아들은 빈탕[虛空]을 바라야 한다.”


그리고 유나 무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뒤바뀐 태도를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작은 물체는 있다고 하고 큰 허공은 없다고 한다. 무(無)는 빈 것이요, 유(有)는 찬 것이다. 사람은 찬 것을 좋아하고 빈 것을 싫어한다. 동시에 큰 것을 좋아하고 작은 것을 싫어한다. 이것이 모순 아니겠는가. 큰 것은 좋아하며 빈 것은 싫어하고, 찬 것은 좋아하고 작은 것은 싫어하니 모순이 아니겠는가. 큰 것은 비고, 찬 것은 작은 것인데, 큰 것은 가지며 빈 것은 버리고, 찬 것은 가지며 작은 것은 버리겠다니 말이 안 된다. 작고 작을수록 아름답고 조심스러우며, 크고 클수록 간절하고 원대하다. 가장 작은 것이 나고 가장 큰 것이 하느님이다. 나는 언제나 조심하고 하느님께는 언제나 간절하여야 한다.”


인간의 눈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온갖 사물들과 무와의 연관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단 하나밖에 없는 웬통 하나는 허공(虛空)이다. 색계는 물질계이다. 환상계의 물질은 죄다가 색계이다. 물질이란 말이다. 단일(單一) 허공이라고 이 사람은 확실히 느끼는데 하느님의 맘이 있다면 하느님의 맘이라고 느껴진다. 우주가 내 몸뚱이다. 우리 아버지가 가지신 허공에 아버지의 아들로서 들어가야만 이 몸뚱이는 만족한 것이다. 이것이 그대로 허공이 우리 몸뚱이가 될 수 있다. 단일 허공에 색계가 눈에 티검지와 같이 섞여 있다.”


어리석게도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잃어버린 열쇠를 찾고 있는, 빛에만 익숙해진 인간들에게 태양도 하나의 촛불에 불과함을 주지시킨다.


“등잔불 밑이 어두운 것은 알지만 해 아래가 어둔 것을 잘 모른다. 해 때문에 해 없는 밤에 보이는 별들이 안 보인다. 태양은 방안의 등잔불보다 큰 등잔에 지나지 않는다. 해 아래는 어둡다는 것을, 해조차 어두운 것을 모르는 사람의 지혜는 미(迷)할 수밖에 없다.”


다석은 없다고 무시해버린 무에 대해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을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하고 있다.


맘과 허공


마음이 속에 있다고 좇아 들어 못봤거늘

허공이 밖에 있대서 찾아 나가 만날 손가

제 안팎 모르는 임자 아릿다운 주인인가.


온갖 일에 별별 짓을 다 봐주는 맘이요

모든 것의 가진 꼴을 받아주는 허공인데

아마도 이 두 가지가 하나인 법 싶구먼.


제 맘이건 쉽게 알고 못되게 안 쓸 것이

없이 보고 빈탕이라 망발을랑 마를 것이

님께서 나드시는 길 가까움직 하구먼.


무에 대해, 빈탕한데[虛空]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마련할 때 우리는 그 동안 우리가 못 본 성스러움의 영역을 감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허공과 마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 절대자 하느님이나 허공이나 마음은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의 것이나 밖의 것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을 이 사람은 항상 느낍니다. 꽃을 볼 때는 보통 꽃 테두리 안의 꽃만 바라보지 꽃 테두리 겉인 빈탕(허공)의 얼굴은 보지 않습니다. 꽃을 둘러싼 허공도 보아주어야 합니다. 무색의 허공은 퍽 오래전부터 다정했지만, 요새 와서는 더욱 다정하게 느껴집니다. 허공을 모르고 하는 것은 모두가 거짓입니다. 허공만이 참입니다.”


▶ 다음 편에서는 다석 사상의 철학사적 의미’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지난 편 보기



⑴ <도래하는 신>에 대한 논의는 앞에서 소개한 롬바흐의 책 외에도 다음과 같은 책이 있다. Manfred Frank, Der kommende Gott. Vorlesungen über die Neue Mythologie (도래하는 신. 새로운 신화학에 대한 강의), Frankfurt a.M. 1982.


이 말은 독일 슈피겔 잡지와의 대담 제목이기도 하다. 참조 M. Heidegger, , Antwort. Martin Heidegger im Gespräch (대답. 하이데거와의 대담), Pfullingen 1988, 99-100.


박영호, 『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 하권』, 문화일보 1996, 321.


유영모, 『다석강의』, 다석학회 엮음, 현암사, 2006, 323.


장-프랑소와 리오타르, <질문에 대한 답변: 포스트모던이란 무엇인가>, 지식인의 종언, 이현복 편역, 문예출판사 1993, 43.


박영호, 앞의 책, 67/68.


류영모, 『다석 류영모 명상록. 제1권』, 김흥호 풀이, 성천문화재단 1998, 224.


류영모,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박영호 편, 홍익재, 1993, 154.


류영모, 『다석어록』, 154.


박영호, 앞의 책, 68.


유영모, 『다석강의』, 다석학회 엮음, 현암사, 2006, 4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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