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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시각
  • 이기상
  • 등록 2019-12-09 15:14:10
  • 수정 2019-12-09 15: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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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라보는 눈, ‘존재시각’을 다시 짚어보자 


어느 언어에서건 드러나게 또는 드러나지 않게 가장 많이 사용되는 근본 낱말은 ‘있음’ 또는 ‘존재’일 것이다. 그리고 있음에 대한 이해에 따라 개인의 인생관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고 민족의 세계관이 뒤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 증거를 멀리 가서 찾을 필요도 없다. 바로 우리들 자신이 그 증거다. 백 년 전 한국인의 삶, 자연관이 지금 우리의 인생관, 세계관과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하기만 하면 된다. 인간의 ‘눈’은 단순히 생물학적 기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눈은 보이지 않는 의미로 짜여진 미세한 그물망이다. 예전과 오늘날 의미의 그물망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이것을 하이데거식으로 표현한다면,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에서 예전의 존재이해는 서양의 존재이해에 의해 쫓기고 말았고, 이제는 이것이 안방을 독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들의 눈은 이제 더 이상 선조들의 눈과 같지 않다. 오히려 서양인들의 눈과 더 가깝다. 우리들은 이제 서양인들이 자연을 보듯이 자연을 보고, 그들이 사람을 대하듯이 그렇게 사람을 대하고, 그들이 사물을 다루듯이 그렇게 사물을 다루고 있다. 서양인들의 ‘존재이해’가 우리들의 사고방식, 생활태도, 욕망까지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 강한 문화가 약한 문화를 포섭하는 것은 일면 당연해 보인다. 더욱이 그동안 변방에서 괄시와 천대만 받고 살아온 우리가, 서양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이제 한 번 어깨를 펴고 세계시민으로서 당당히 세계무대에서 그들과 똑같은 의식으로 세계를 보며 세계문제를 같이 풀어간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많은 서양 지성인들이 지적하듯이 현대의 근본문제가 바로 서양인들의 세계 내지 자연을 보는 눈, 다시 말해 존재의 시각에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한 시각이라면 말이다.


우리의 ‘존재시각’이 뒤지고 유치하고 전근대적이라고 포기해 버리기 전에 한 번 그 근본구조라도 탐구해 보고 정리하는 것이 다른 존재시각을 찾아 나선 인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목욕물과 함께 아이를 버리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은 그러한 기여를 위한 한 시도이다.


존재와 무, 있음과 없음에 대한 논의에서 항상 주도권을 잡는 것은 존재이며 있음이다. 무(無)나 없음은 그러한 ‘인식을 주도하는 관심’에 의해 존재에 딸린 속성적인 것으로 부차적인 관심의 대상이 될 뿐이다. 더구나 엄밀함과 정확함을 생명으로 하는 학문적 논의에서 언어로 이해될 수 있고 설명될 수 있는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는 무는 당연히 제외되고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한 번 우리는 이러한 인식을 주도하는 관심에 문제는 없는가라고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애초부터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기 위해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학문적 태도에는 문제가 없는지 말이다. 


우리는 왜 처음부터 존재의 관점을 축소했는가



존재와 무, 있음과 없음을 구별하여 다루는 철학적 논의에서 기준은 무엇인가? 서양인과 동양인의 차별성과 독특함을 연구하는 논의에서 그 준거틀을 서양인에게서 찾아 그 잣대로 연구를 수행한다면 그러한 연구는 일방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동양인에 대한 올바른 접근과 사태 연구를 애초부터 막을 것이다. 존재와 무에 대한 논구에서도 이 유비가 어느 정도는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존재와 무를 다루면서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의 시각을 존재의 관점으로 축소하여 보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서양인들이 생각해온 ‘존재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연 무(無)나 없음까지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개방적이고 포괄적인가? 아니면 있음[존재]마저도 제대로 담지 못할 만큼 폐쇄적이고 협소하지는 않은가? 


존재의 기준은 무엇인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여 가늠하는 준거틀은 무엇인가? 우리의 오감이라는 감각인가? 우리의 사유인가? 지성 또는 이성인가? 이해인가 언어인가? 역사인가 문화인가? 초감각적인 신적 이성인가? 과학적인 합리성인가? 생활세계적인 의사소통적 합리성인가? 우리는 어떤 기준에 의해서 어떤 것은 있다 하고 어떤 것은 없다고 하는가? 이와 같이 우리는 확실하고 자명하게 일상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사용되는 ‘있음’이라는 이 낱말이 가진 의미의 자명성이 전혀 분명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철학적으로 볼 때 존재 또는 있음의 의미는 ‘현전성(그 자리에 있음)’이다. 현전성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음이며 시간의 흐름 속에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머물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차지하고 있음’과 ‘머물고 있음’을 인간의 유한한 시각으로 볼 경우 완전한 존재의 의미가 아닐 것이기에 신적 이성의 관점으로 고찰되어야 한다. 우리의 유한한 이성은 유한한 공간과 시간 안에서 있음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있음의 기준을 잡는 척도로 인간의 유한한 이성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신적인 무한한 이성을 택할 것인가가 여기에서 문제로 대두된다. 


철학의 시작에 ‘이데아’를 존재의 기준으로 삼았을 때 철학자들은 신적인 무한한 이성을 택한 셈이다. 이데아가 인간의 유한한 이성으로 그가 경험하는 유한한 공간과 시간 안에서는 잡을 수 없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 위력을 간접적으로는 확인할 수 있다. 이데아의 ‘있음’과 사물의 ‘있음’은 구별된다. 이데아의 있음을 사물처럼 그렇게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있음’이 일으키는 바람, 영향력, 결과를 통해서 추정할 수는 있다. 이렇게 볼 때 ‘있음’은 ‘작용을 일으킴’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의 ‘현실성’(Wirklichkeit, 작용을 미칠 수 있음)이다. 현실은 구체적인 공간과 구체적인 시간 안에서 ‘있음’이 미치고 있는 작용을 감지할 수 있는 마당을 의미한다. 이러한 ‘있음’의 마당을 감지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인간이다.


잠깐 있다가 사라져버리는 수많은 존재자들은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신의 관점에서 영원을 기준으로 삼아 본다면 그런 것들은 있기는 하지만 본래적인 의미로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특정한 공간과 시간에서 확인될 수 있는 것으로서 없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잠깐 있다가 결국은 없어져 버리는 그런 것을 합당하게 있다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그런 것들을 위해 비존재(me on)라는 용어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인간의 주체성이 강조되는 근대에 오면 신적인 이성이 인간적인 주관적 이성으로 대치된다. 인간이 모순되지 않게 사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그 있음의 기준을 사유 가능한 것으로 잡을 것이냐, 인식 가능한 것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경험 가능한 것으로 할 것이냐에 관한 논의가 근대에서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이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인간 경험의 장은 대단히 확장되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있음’의 기준까지도 우리의 경험의 폭을 넓혀주고 있는 과학에 내맡기기에 이른다. 첨단 과학 장비로써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 있다고 간주된다. 원소, 전자, 미립자, 바이러스, 세균 등은 우리의 오감으로 직접 ‘볼’ 수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현실’을 이루고 있는 것이기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있음’의 근간을 이루는 구조는, 없음과 없음 사이를 잇는 ‘사이에-있음’이다

 

이러한 서양의 존재시각만이 유일한 시각인가, 아니면 다른 존재시각도 가능한가? 이를테면 관점의 중심을 ‘없음’ 또는 ‘무(無)’로 옮긴 그런 시각 말이다. 그러면 ‘있음’의 의미마저도 매우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예전의 존재이해는 서양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에 바탕하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다석을 통해 그러한 ‘없음’ 중심의 존재이해를 살펴보도록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자신의 존재(있음)를 경험하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어떻게 생활화하였는가이다. 그 다음 그것을 어떻게 이론적으로 정리하여 체계화했는가가 학문적인 논의에서 관심을 끄는 사항일 것이다. 서양철학은 처음부터 신적인 것에 모든 것을 맞추어 보려고 노력했다. 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신적인 법칙이 작용하는 현실을 살면서 신적인 이데아를 알아보려고 노력하는 삶이었다. 


우리 한국인은 우리의 있음을 어떻게 무엇으로 경험하였는가? 우리는 우리의 있음을 구체적인 있음으로 경험하였다. 즉 하늘 아래 땅 위, 여기 이 구체적인 공간에서 지금이라는 구체적인 시간을 살면서 남과 더불어 삶의 터전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우리의 있음을 ‘하늘-땅-사이에(天地間)’, ‘빔-사이에(空間)’, ‘때-사이에(時間)’, ‘사람-사이에(人間)’ 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였다. 우리의 있음의 근간을 이루는 구조는 ‘사이에-있음’인 것이다. 사이에 있는 것은 그 사이를 사이로서 이루어주고 있는 그 가능조건에 얽매여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사이에 내던져져 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있음’은 그러한 다양한 사이들을 ‘잇는’ ‘잇음(이음)’[사이-이음]이고, 다양한 사이로서 ‘있음’[사이-임]이고, 다양한 사이를 다른 사이에 있는 것들과 나눔[사이-나눔]이다.



우리의 구체적인 있음을 우리 선인들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절대적 무한 시간과 천지 사방팔방 그 끝을 알 수 없는 절대적 무한 공간(텅빔, 빈탕한데)에서 한 점, 한 끝을 차지하고 있는, 그것도 찰나의 한순간에 잠시 있는 ‘있음’으로 경험하며 받아들여왔다. 나의 공간적 있음이란 무한한 절대공간의 상 아래에서 볼 때, 마치 무한한 우주 공간 안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무한한 텅빔(빈탕한데, 빔-사이) 속에 놓여 있는 한 점으로 있음이다. 나의 시간적 있음이란 영원한 시간의 상 아래에서 볼 때 더-이상-있지-않음(지나간 과거)과 아직-있지-않음(오지 않은 미래)이라는 없음과 없음 사이를 잠시 동안 잇고 있는 찰나적 이음이다. 이렇듯 나의 있음이란 한 점에 지나지 않는 한 긋의 찰나적인 이음으로서의 있음이다. 절대적인 공간의 한 점을 그것도 찰나적인 한 순간에 빤짝이며 있다가 다시 절대 공간의 어둠 속으로, 무한 시간의 없음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별똥이다. 나의 있음이란 그야말로 없음(텅빔)과 없음(텅빔) 사이를 잇는 이음으로서의 있음인 것이다.


이러한 있음의 사건에서 무엇이 기준이 되랴! 절대 공간과 무시무종의 시간을 통째로 온전하게 잡을 길은 없지만, 어떤 것이 ‘참으로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것이 정말 ‘있는 것’일 것이다. 그 무한 공간과 시간 속에 잠시 있다가 스러져 버리는 그 많은 존재[자]라는 것들은 실은 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고 미미한 있음이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있음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잡을 길 없는 절대 공간과 무한 시간을 ‘있음’의 원형으로, 표본으로 보았다. 


이러한 절대 공간과 무한 시간을 이름할 수는 없지만 억지로 이름하여 한늘(절대 공간인 ‘한’과 무한 시간인 ‘늘’), 하늘, 한아(한ㆍ), 하나, 한얼, 하느님, 하나님, 한얼님, 한울님이라 불렀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참으로 있는 것, 온전한 것, 깨지지 않은 것,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 어떤 것도 그것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성스럽고 거룩하다. 우리에게는 무한한 시간을 다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저 침묵의 끝을 알길 없는 어두운 우주 공간과, 무한히 뻗어 가는, 바닥이 없는 검푸른 심연의 푸른 창공이 그리고 지나온 역사와 앞으로 닥쳐올 미래의 사건까지도 자신의 영원한 고요와 적막 속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저 하늘이 성스러웠고 신적인 것이었다. 


어떻게 그러한 무한을 순간적인 있음이라는 쪽박으로 잡아 담으랴! 


“내가 사는 데를 ‘여기’라고 한다. 그제 저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이제’가 내가 사는 것이다. 사는 때가 이제이다. 사는 때가 이제, 사는 곳이 여기이다. 이어 이어 내려와서 여기가 된 것이다. 하느님이 나를 이어주고 나는 하느님과 이어지고 다시 이어 이어 여기 온 것이 나라는 것을 생각한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도 이제 나왔고 운명할 때도 이제 숨을 걷는다고 한다.”


“나는 이 민족의 한 끄트머리 현대에 나타난 하나의 첨단이다. 나의 정신은 내가 깨어나는 순간순간 나의 마음 한복판에 긋을 찍는다. 가온찍기(「·」)이다. 이 한 긋(點)이 나다. 나는 한 끄트머리이며 하나의 점이며 긋수이기도 하다. (…) 한 금을 내려그은 줄 ‘ㅣ’를 ‘이’라고 발음하며 [그것은] 영원한 진리의 생명줄을 말한다. 영원한 생명이 시간 속으로 터져 나온 한 순간이 ‘이’ 긋이다. 영원한 생명이 공간으로 터져 나와 몸을 쓰고 민족의 한끄트머리로 이 세상에 터져 나온 것이 나라고 하는 ‘제’ 긋이다. 또 이 몸속에서 정신이 터져 나와 가장 고귀한 점수를 딸 수 있는 가치가 ‘이 제 긋’이다. (…) 이렇게 시간, 공간, 인간의 ‘긋’이 모여 영원한 생명인 ‘ㅣ’가 나타나 이어 이어 계속 나타나 이 땅위 예에 예어 나가는 나다. 나는 일점광명(一點光明)의 긋이다.”


▶ 다음 편에서는 ‘없음과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지난 편 보기



다석 류영모의 텅빔과 성스러움 : 이 글은 2000년 11월 18일 체코 올로모츠 시의 팔라키 대학교에서 개최된 국제현상학회 ‘현상학의 미래. 100년 동안의 현상학 연구’에서 < Die Leere und das Heilige bei einem koreanischen Denker Dasuk Ryu Young-Mo >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논문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⑵ 류영모,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홍익재, 1993, 62.


같은 책, 30.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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