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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그의 삶이 곧 그의 생명사상이다
  • 이기상
  • 등록 2020-02-17 14:19:28
  • 수정 2020-02-17 14:4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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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거저 내주시며 없이 계심 같이 너희도 가진 것을 나누며 없이 살라!”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갈 새로운 삶의 문법, ‘영성’


▲ (사진출처=다석사상연구회)


혹자는 다석의 생명사상이라는 말을 들으며 도대체 글을 남기지도 않은 사람인데 생명에 대한 이야기 거리가 있기나 한지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몇 쪽 안 되는 글과 그가 반평생 동안 명상하며 적어놓은 『일지』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평생 그를 붙잡았던 화두가 다름 아닌 ‘생명’ 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다석은 쉬임없이 줄기차게 여러 각도에서 생명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생각이 곧 기도라는 그의 말을 떠올릴 때 생명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느 할일 없는 사람의 심심풀이 공상이 아니다. 다석은 마치 자신의 삶 전체를 생명이라는 놀음판에 판돈으로 걸고 죽기살기의 모험을 벌이 듯 치열하게 살다 갔다. 


그의 생명사상은 단순한 생명에 대한 이론이나 학설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그의 모든 삶을 바쳐 증거하고 증명한 한 편의 생명증거이다. 그의 삶이 곧 그의 생명사상이다.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그의 사상이 곧 그의 삶인 그런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다석 생명사상의 독특함은 한마디로 그 영성차원에 있다. 그리고 21세기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과 상생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영성적 차원이다. 왜 그런지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20세기 대표철학자의 한 사람인 마르틴 하이데거는 20세기 서구 문명이 확산시켜 나가고 있는 지구파손, 생태계 파괴와 인간성 말살의 위험을 아주 차갑게 비판한다. 그는 이성중심, 존재자중심, 인간중심의 삶과 사유의 방식이 퍼뜨리고 있는, 지구적 아니 우주적 지배의 논리와 그 폐해를 간파하고 새로운 사유에 의한 새로운 시작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신의 생활세계에서 쫓아낸 <성스러움>의 차원을 되찾아 와야 한다고 말하며 그것을,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라고 표현하였다. 서구의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몰아낸 다양한 형태의 무(無)[없음, 텅빔]에 대한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맺음과 경험만이 인류에게 구원의 희망을 열어줄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이데거 외에도 동서양의 많은 지성인들은 21세기가 새로운 영성, 새로운 종교성, 새로운 정신성의 시대가 될 것이며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⑵ 이제까지는 ‘있는 것’[존재자]과 인간은 이성(理性)으로 관계맺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없는 것’[무, 공, 허]과는 어떻게 관계맺을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영성>으로써다. 이미 서양에서도 오래 전에 신비주의자들은 그러한 영성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한국이 낳은 위대한 영성가인 다석 류영모에 의하면 영성은 우리말로 ‘얼’이다. 우리 자신이 ‘얼’[얼나]이기에 우리는 ‘얼’[한얼, 성령]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다석은 하느님이 거룩한 이유에 대해서도 하느님은 사물과 인간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없이 계심’의 방식으로 있기에 ‘거룩하다’고 이야기한다. 동양과 한국에서는 눈앞의 자명한 있이 있음보다도 오히려 이러한 불명확한 <없이 있음>을 더 중시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하늘[天]로 표현되었고, 그리고 그것이 거룩함으로 공경되었다. 바로 이 거룩함과의 관계맺음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21세기 영성의 시대는 도래하지 않을 것이며 인류에게 희망은 없을 것이다. 21세기 이 땅의 지성인들이 해야 할 과제는 바로 우리들 삶의 문법에 녹아있는 고유한 한국적인 영성을 찾는 일이다.  


다석은 유럽이라는 절대중심에서 벗어나 지구 위의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함께 더불어 살아갈 삶의 원칙을 찾느냐고 일생을 바친 사상가이다. 우리는 지금 온갖 이념과 세계 종교가 뒤섞여 공존해야 하는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갈 새로운 삶의 문법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 와 있다. 다석은 그 해법을 위해 평생 노장사상, 불교사상, 유교사상 그리고 그리스도교 사상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사상을 찾아내려고 애쓴 지구촌 시대의 사상가다. 다석은 이러한 세계철학적인 문제를 풀어갈 해결의 실마리를 바로 한국인의 영성적 심성, 자연친화적 생활방식, 통합적 사유얼개, 우리말의 상생적 문법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다석에 의하면 말을 보이게 하면 글이고, 글을 들리게 하면 말이다. 말은 하느님의 마루뜻[宗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고, 글은 하느님을 그리는 뜻[思慕]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말 속에서 말건네오는 하느님의 소리를 귀기울여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 좋은 문학, 좋은 철학이 나올 수 있다. 지금같이 남에게서 얻어온 것 가지고, 외국어 갖고서는 우리의 사상을 키워나갈 수 없다. 다석은 “글자 한 자에 철학개론 한 권이 들어 있고 말 한마디에 영원한 진리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다석은 우리말 속에 녹아들어가 있는 천지인 합일의 영성적 세계관에 주목한다. 


아래에서 먼저 우리는 젊은 다석의 생명 체험을 실마리로 삼아 그가 어떻게 생명문제에 접근하게 되며 어떤 시각에서 생명을 통찰하게 되는지를 고찰한다. 그 다음 ‘생명(生命)’을 ‘덧 없는 삶[無常生], 비상한 웋일름[非常命]’으로 이해하고 있는 그의 생명사상의 단초를 살펴본다. 그런 뒤 이 둘을 나누어서 좀더 상세하게 다루도록 한다. 삶은 사름이라는 몸생명의 몸살이를 사름과 숨쉼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그 다음 생명이란 하늘로부터 받은 바탈을 태우는 것이라는 얼생명의 의미를 말숨과 우숨[얼숨] 그리고 얼나의 하루살이를 갖고 살펴보도록 한다. 그 다음 이런 고찰을 바탕으로 해서 삶의 실상은 몸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는 제사라는 생명의미를 ‘식사는 장사며 제사’라는 설명 아래 고찰한다. 마지막으로 다석 생명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청년 다석, 우주적 생명줄을 잇기 위해 생명사건을 지펴나가는 땔감이 되어


다석의 일생은 참생명을 찾아 나선 구도의 삶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인지 고민하며 그것에 대해 깊이 사색했다. 이런 깊은 사색 뒤에 나온 생명에 대한 그의 생각의 한 올을 우리는 그가 처음으로 1918년 잡지 『청춘』에 발표한 글인 <오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석은 여기에서 “산다는 것은 때와 곳을 옮기면서 곧 내 생명을 변증하면서 일을 하는 것이니 나와 남과 물건 세 편이 연결하는 가운데 생명이 소통하면서 진리를 나타내며 광명(光明)이 따른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석은 산다는 것이 주어진 공간[빔-사이]과 시간[때-사이]에서 나와 남과 물건을 연결함으로써 생명이 소통하여 진리가 나타나도록 함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때 벌써 그가 생명력으로 개척하여 쓴 그의 글의 세계에 오늘 우리가 우리의 생명력을 가지고 들어가서 그와 사귈 수 있음을 예측하고 있다. 젊은 다석은 생명력을 발휘하여 나와 남과 물건을 연결시키는 일[작업]을 통하여 인간이 하루 동안에도 열 백 세계를 가를 수 있다고 노래한다. 그러면서 그는 삶의 실상을 ‘오늘 여기 나’에서 볼 것을 종용하며 “오늘 오늘 산 오늘!”이라고 외치고 있다. “산 오늘은 살게 써서 산가 싶게 살아야 한다.” 다석은 그의 첫글을 이렇게 끝맺고 있다.


“하루 동안에도 열백 세계가 갈릴 수 있고 하루라는 것은 늘 오늘이라는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안다면 오늘에 자족 아니할 수 없고 자활(自活) 아니할 수 없다. 만반(萬般) 사물로 인연이 닿는 대로 만나는 사람 사람, 열리는 세계 세계에 오직 오늘, 신성한 오늘, 나의 진여(眞如)한 생명력을 지성으로 발휘하여 한갓 나를 대하게 된 그들의 생명력과 투합(投合) 일치하기를 바란다.” 


1923년 『동명』에 기고한 글 <자고 새면>에서 다석은 어느 정도 자신의 생명사상의 큰 밑바탕을 그려 보이고 있다. 매일매일 오늘을 살며 1만 2천 일을 산 날인 1923년 1월 19일 다석은 “인생 1만 2천 밤을 자고 새면 과연 무엇을 하는 것인가? 무엇을 이룬 것인가?”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한다. “오직 생명이니라. 사는 것이니라. 모든 것이 참되게 살기 위하는 것뿐이니라. 정말 과거에 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지금 나의 목숨을 이룬 것이라’ 대답하겠노라. 과거 1만 2천 일 중에 잘한 것이 있었을 것 같으면 지금 나에게 귀한 내용이 되었을 것이요, 잘못한 일이 있다면 그만큼 지금 나의 내용이 빈곤하고 결함이 있었을 것이로다.” 


이렇게 다석은 자신의 오늘의 삶이 우주적 생명사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다. 그는 하나의 원인이 하나의 결과를 단독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천만의 멀고 가까운 인연을 따라서 하나의 결과 또는 천만의 결과를 맺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무슨 공적을 개인 한 사람이 이룬 것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어떤 죄과가 어떤 한 사람만의 행위라고만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천고 만유를 인연한 업과(業果)”며 동시에 “억조 후생의 일인(一因)이 되는 것이니” 어찌 그 의의가 깊지 아니하며 책임이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내 한 몸이 존재하기 위하여 6, 70년 전에 반드시 4대 조부모될 인물이 생활에 분투하였을 것같이 50대 전이나 백 대 전에는 무량수의 사람들이 인(因)을 닦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생명의 신비한 가치를 볼 때 무량수가 곧 하나의 수(數)요, 하나의 수가 곧 무량수인 것을 증험으로 알 수 있다고 다석은 말한다.


혈통만 볼 때에도 우리는 지금 나의 생명이 무량수의 다른 사람들과 인연이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생활에 꼭 필요한 의식주를 고려에 넣을 때 나는 억만 무수의 생물, 무생물과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으며 그 모든 것이 나의 생명을 중심으로 기막히게 하나로 통일되어 맺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이 몸 하나가 훗날 백 대에 억조를 번식케 할 인(因)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인을 끊고 일시에 생의 대명(大命)을 완료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다석은 여기서 이미 인간은 몸으로의 삶을 영위하면서 하늘의 뜻을 이루려는 사명을 깨달아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몸 하나로 “천년의 가치(値)를 일각에 표현할 수도 있고, 일각의 가치를 천년에 늘이는 수도 있다”고 말한다. 


다석은 이렇듯 일찍부터 생명의 신비스러움에 매료되었다. “네 생명을 보라. 현실에 있어서 오히려 신비하고 목전에 가장 영광된 것은 오직 생명뿐이니라.” “하루아침에 깨어서 생명을 본 이는 모든 것이 없어도 오히려 자중자락할 것이요, 모든 세상 것이 오직 이 생명을 거룩하게 이루게 하도록 쓰게 되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줄로 보게 될 것이니라.”


청년 다석은 생명의 신비를 몸과 얼[정신]로 느꼈다. 몸으로서의 나가 지금까지의 모든 생물, 무생물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바로 지금의 나가 우주적 생명사건의 첨단[끝]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나는 이어 이어 나에게까지 이어져온 우주적 생명줄을 계속 잇기 위해 생명사건을 지펴나가는 땔감이 돼야 할 사명을 타고났음을 깨달았다. 나의 생명(生命)에서 오늘을 살게 써서 생의 대명(大命)을 이루라는 하늘의 뜻[천명(天命), 웋일름]을 읽어낼 수 있을 때 내가 하늘로부터 받은 바탈 곧 사명(使命)을 다하는 것임을 체험한다. 이러한 다석의 생명체험은 그의 훗날의 삶을 이끄는 길잡이가 된다. 


▶ 다음 편에서는 ‘몸생명의 몸살이’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지난 편 보기



⑴ M. Heidegger, (하이데거의 슈피겔 대담)>, Antwort. Martin Heidegger im Gespräch (대답. 하이데거와의 대담), Neske: Pfullingen, 1988. 99/100.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나는 구원의 유일한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즉 사유와 시작이 [사유자와 시인이 사유와 시작에서] 신이 나타날 수 있도록 또는 신의 부재가 거두어지도록 예비하는 데 있다.”


⑵ 대표적인 사람으로 아놀드 토인비, 루돌프 오토, 테야르 드 샤르댕, 앙리 베르그송, 칼 라너, 베른하르트 벨테, 하비 콕스, 달라이 라마, 숭산, 법정, 틱낫한, 현각 등을 들 수 있다.


⑶ 글쓴이는 이런 시각에서 다른 곳에서 다석의 사상을 정리했다. 참조 이기상, 『이 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 살림, 2003; 『다석과 함께 여는 우리말 철학』, 지식산업사, 2003.


⑷ 박영호, 『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 下』, 문화일보, 1993, 132.


⑸ 참조 류영모, <오늘>, 『오늘』, 1993, 성천문화재단 출판부, 1993, 8~16.


⑹ 앞의 글, 12.


⑺ 같은 글, 15/6. 이러한 ‘오늘 살이’에 대한 강조에서 우리는 후일 다석의 ‘하루살이’ 삶의 실천을 내다볼 수 있다. 다석은 <오늘>이라는 글을 논어, 불경,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끝맺는다. 그의 생명에 대한 확신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논어). “사람의 생명이 호흡간에 있나니라”(불경, 42장경). “내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오,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성경, 마태복음).


⑻ 류영모, <자고 새면>, 『제소리』, 김흥호 편, 솔, 2001, 395.


⑼ 참조 앞의 글, 396.


⑽ 같은 글, 397.


⑾ 같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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