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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기억인 우리 언어로 철학하기
  • 이기상
  • 등록 2020-04-13 08:35:12
  • 수정 2020-04-20 01: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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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세상을 보는 눈이며 민족의 기억


인간이 ‘철학적 동물(animal philosophicum)’임은 잘 알다시피 인간이 이성적인 사유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일 수 있는 것은 그가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일찍부터 이점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을 ‘언어능력이 있는 생명체(ζωον λογον εχον)’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이 그리스적 인간규정이 로마문화권으로 번역되면서 ‘이성적 동물’로 변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인간은 말하기 때문에 이성적인 동물인 것이다(Homo animal rationale quia orationale).”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언어를 말하는가? 개인의 언어는 그가 그 속에서 성장한 일정한 공통어이다. 이 공통어는 바로 그의 모국어이다. 그 모국어에서 개인은 ‘사물’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의 경험은 그가 ‘알고 있는’ 것의 지도를 받는다. 경험은 개인 자신이 소화하는 인상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국어의 인도를 받는다. 일상생활에서도, 과학[학문]에서도 모국어가 개인의 해석과 사유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결정적으로 간섭하고 있다는 것이 확증된다. 따라서 우리는 모국어가 우리를 대신해서 사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모국어는 모든 사람에게 그 언어공동체의 언어이다. 한글은 한국의 언어공동체에 속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공동 소유재이다. 그 공동체 속에서 인간들은 언어의 소유자들이다. 언어에서는 어떤 인간도 이 소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언제나 한 언어공동체에 속한다. 그러므로 언어는 가장 일반적인 문화재이다. 어떤 인간도 그 자신의 개인적인 힘으로 말미암아 그의 언어재를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언어의 소유는 언어공동체에 대한 소속성으로부터 인간에게서 생겨나며, 인간은 그의 모국어를 습득하면서, 즉 인간은 이 언어공동체 속으로 들어가서 자라난다. 


외솔 선생도 이런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사람이 있는 곳에 말이 있으며, 겨레의 사는 곳에 겨렛말이 산다. 겨렛말은 실로 겨레의 정신이요. 생명이다. 겨렛말의 소리가 울리는 곳에는 겨레의 정신이 약동하며, 겨렛말이 번지는 곳에는 그 겨레의 생명이 번진다. 그리하여, 겨레와 겨렛말과는 흥망을 같이하며, 성쇠를 같이한다.”


모든 민족에게는 그 언어 속에 하나의 세계관이 갈무리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를 언어공동체의 운명, 그 지리적, 역사적 형세, 그 정신적이고 외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그 민족의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상태가 두 민족에게 동일하지 않듯이, 이러한 다른 상태에서 생겨난 두 언어 속에 갈무리되어 있는 세계상 역시 같은 것일 수 없다. 언어보다도 한 민족의 운명과 견고하게 결합된 것은 없으며, 한 민족과 그 언어와의 사이보다 더 밀접한 상호작용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외솔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배달말은 배달겨레의 문화의 연장이요, 창조의 결과이다. 문화와 창조가, 한가지로 자연에 대한 사람의 이상 실현의 정신적 자유를 뜻한다. 그런데, 자유는 정신의 본질이요, 생명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우리말은 우리 겨레의 창조이요, 자유이며, 생명이다.”(81)


언어공동체는 다른 모든 공동체의 전제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기 때문만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의사소통의 토대가 되는 공통의 세계관을 매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많은 공동생활과 공동작용에 대한 전제가 어디엔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언어공동체 안에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한 언어의 효력범위는 한 민족에게 자연적인 영역이 된다. 한 언어에 속하는 모든 이들은 그 어떤 다른 공동체보다도 서로 가까이 있으며, 그들은 운명적으로 서로, 그리고 그들의 언어와 결합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사소통공동체로서의 민족공동체를 외솔 선생은 일찍이 겨레라는 말로써 풀이하였다.


“겨레는 두 가지의 기초를 가졌다. 하나는 자연스런 기초이니, 한가지의 피를 타고 한 땅에 나서 사는 일이요, 또 하나는 문화스런 기초이니, 한가지의 문화를 지니고 있는 일이다. 문화란 것은, 바깥 자연의 땅과 그 밖의 물건에다가, 사람의 슬기로운 이상(理想)대로 힘을 더하여서, 농사를 짓고, 집을 짓고, 쓸 물건을 만들며, 아낙 자연[내부자연(內部自然)]의 마음에다가, 사람의 슬기로운 이상대로 힘을 더하여, 과학‧도덕‧예술‧종교를 만들어냄을 이름이다. 그리하여, 피의 공동은 한 줄기의 목숨을 가짐을 뜻하고, 문화의 공동은 한 형식(形式=꼴재)의 사는 이상(理想)과 사는 길[생활의 도(生活의 道)]을 가짐을 뜻함이니 말과 풍속 습관이 다 이에 딸린다. 다시 말하면, 겨레는 다만 피를 함께 타고 났을 뿐 아니라, 또 그 피로 된 목숨을 살아 나가는 방식을 같이하여 지키어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겨레란 문화적 개념이다. 만약, 저 피의 공동만 있고, 이 문화의 공동이 없다면, 그것은 단순한 인종학에서의 종족(種族)이 될 뿐이요, 겨레는 되지 못한다.”


▲ ⓒ 문미정


우리는 우리의 체험내용을 정돈하는 데에 모국어의 도움을 받으며 우리의 인식을 개념적이고 논리적으로 파악하는 데에도 모국어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우리의 행위 역시 모국어의 안내를 받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대체가 우리는 잘 갈무리되어 있는 세계관을 모국어를 통해 전수받으며 그 속에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국어 사용 집단의 사유의 동일성과 동종성 역시 모국어에 감사해야 함을 보았다. 따라서 주어진 시간과 공간에서 주체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이 땅의 철학자들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모국어인 우리말에 통달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말로 철학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는 것이다. 철학함에서 우리말을 사용하는 언어공동체는 운명적으로 서로 사이에 우리말로 결속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의미로 언어의 중요성을 외솔 선생은 이렇게 힘주어 말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말은 오랫동안의 역사적 생활에서 문화 활동이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결과의 쌓음이다. 따라서 말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개인이나 겨레의 문화의 형태를 나타내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 말의 거울은 다만 수동적으로 사람의 문화 활동의 열매를 거두어 가지고 있음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다시 반사적으로 그 빛살을 쏘아내어서, 사람의 문화 활동을 비추며, 북돋우며, 재촉하는 적극스런 노릇[적극적 기능(積極的 機能)]을 한다. 그러므로, 말의 거울은, 다만 지난적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아, 올적[미래(未來)]의 소망을 점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화의 세기에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외솔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말은 정신의 표현이요, 자유의 산물이다. 말은 자유정신의 애지음[창조(創造)]이다. 말은 다만 애지음으로 말미암아 성립되는 것일 뿐 아니라, 도로 또 사랑을 애지으며, 슬기를 애지으며, 생활을 애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은 자유 정신의 애지음의 결과인 동시에, 또 자유 정신의 나타남[발현(發現)]의 원인이요 수단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말은 애지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애지음[창조(創造)]은 사람 살이의 충실한 번짐[발전(發展)]이라, 이것 아니고는 문화의 밝음이 없으며, 이것 아니고는 생활의 충실이 없다. 말은 결코 단순한 빈 그릇이 아니라, 내용 그것이다. 말은 애지어진 문화의 꽃일 뿐 아니라, 또, 문화의 애지음의 거름[비료(肥料)]이다.”


철학은 우리말로


인간은 이미 형성된 세계 속에 태어나서 그 세계 속에서 통용되는 삶의 문법을 배우며 거기에서 지켜지고 있는 삶의 규칙과 사유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고 사유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모국어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칼 오토 아펠(Karl Otto Apel)은 모국어로 결속되어 있는 언어공동체가 의사소통을 위한 선험적 토대를 이루는 전제조건이라고 보았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오로지 사유, 인식 그리고 행위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우리는 앞에서 논리적인 사유능력 역시 언어를 통해서 습득됨을 보았다. 그리고 이때의 언어란 어떤 보편적인 이성적 언어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자라면서 습득하는 자연어, 즉 모국어이다. 따라서 한 민족의 언어에는 그 민족의 세계관이 갈무리되어 있으며, 민족 구성원은 모국어를 통해 이 세계관 속으로 교육되는 것이다. 삶의 같은 공간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이 사실이 그 언어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사유내용의 동일성과 사유의 동종성을 보장한다. 우리는 모국어를 사용함으로써 같은 사태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들을 나누면서도 서로를 연결해 주고 있는 의사소통의 같은 지반 위에서 열린 마음으로 논쟁할 수 있음을 확인한다. 사유의 깊이가 철학이나 사상의 깊이를 결정한다면 개념적인 차원에서 언어의 깊이와 넓이가 사상을 규정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절대중심의 시대에서 다극화한 다중심의 시대로 가고 있는 탈중심의 시대에 각자가 서로 다른 세계와 문화에서 중심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 그래서 그러한 중심잡기 위에서 가능한 억압받지 않는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의 토대 내지 전제는 ― 오직 그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언어, 곧 모국어이다. 언어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주장을 정리할 수 있다.

①언어는 세계를 보는 눈이다. ②언어는 민족을 묶는 끈이다. ③언어는 사고방식을 형성해주는 틀이다. ④언어는 의식의 밑바탕을 이루는 무의식이다. ⑤언어는 정서의 공감대이다. ⑥ 언어는 자주와 자율의 바탈이다. ⑦언어는 자유와 평등의 조건이다. ⑧언어는 학문[과학]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이다. ⑨언어는 사람 사이의 다리이다. ⑩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철학은 철학함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단순히 이론적 앎만을 뜻하지 않고 실천적 앎[능력, 살아감, 삶]도 함축한다. 철학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문제해결을 위해 공동체적으로 행위하는 주체들이 전개해 나가는 비판적이고 논증적인 상호이해의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철학을 철학함으로서 이해할 때 철학의 주체적 연관, 상황적 연관, 실천적 연관이 부각된다. ‘우리말로 철학하기’는 우리말로 철학해야 하는 우리들이 처해 있는 철학함의 상황 연관과 주체 연관을 강조하기 위해, 이론적 앎과 실천적 능력의 단일성 속에서 공동으로 문제를 발견하고 그 해결을 모색해 나가는 과정으로서의 철학함을 단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화두’이다.


한글 학자 허웅은 우리글 한글의 의의를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적는 데 실패한 우리 ‘한아비’들은 드디어 독자적인 글자를 만드는 데 성공했으니, 이것이 ‘훈민정음’, 즉 한글이다. 한글 창제의 동기는, 외부 세력에 대해서는 자주 독립을 지키려는 민족주의적 정신과, 국내적으로는 모든 국민이 다 글자의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민주주의적 사상이 밑바닥이 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 모두가 처해 있는 시대사적 현실을 의식하여 주체적으로 철학하기 위해서는 우리말로 철학해야 한다는 데 대한 충분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우선 문제제기의 차원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라는 표현 속에 함축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숙고해야 할 점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이 제목은 우리말에 대한 학문적 정리 작업의 요청과 그것을 마주보는 철학 측의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 언어의 독특함과 구조적 특성을, 우리 언어가 변천해온 역사가 현대 언어학적·언어철학적 연구 결과에 힘입어 학문적으로 심도 있게 탐구 정리되어야 한다. 인간을 언어의 능력이 있는 존재로 규정하듯이 우리 문화의 태동에 이미 언어적 사건은 전제되어 있다. 의사소통을 가능케 한 대화적 말함의 사건은 우리 역사를 걸쳐 지속적으로 있어 왔겠지만 이것이 글자로 기록되어 본격적인 의미 문화의 형성을 가능하게 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글의 형태에서 한자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문화는 필연적으로 한자문화권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제라도 우리는 한자문화권에서 벗어나서 주체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말로 철학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언어와 사유의 관계, 언어와 사상의 연관성을 주목해야 한다. 선조들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문제를 인식하여 나름대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였고, 그러한 맥락에서 고민하고 사색하여 얻은 결과를 글로 남겨 놓았다. 이렇듯 철학 원전들은 그 자체로 분리되어 따로 놓여 있지 아니하고, 물음, 의심, 주장 또는 확인을 표현하면서 그 행위의 주체와 그 주체가 처해 있는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인간이 깨닫는 문제의식이란 구체적인 상황과 주관적인 목표설정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철학적 문제도 항상, 일정한 목표설정에 맞추어 본, 어느 누구를 위한 문제이다. 문제 그 자체, 다시 말해 묻는 사람 없는 물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글로써 표현된 철학적 주제나 대상이란 관련된 주체들에서 분리되어 다루어져서는 안 되고 그 당시의 언어적 상황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이때의 언어는 관련된 주체들 간의 상호이해 가능성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문제의 상호이해라는 목적을 위한 행위로서 이해될 수 있다. 언어는 곧 세계를 보는 인간의 시각이다. 철학의 문제들을 담고 있는 철학적 명제들의 언어적 [해석학적] 상황을 간과하고서는 특정한 사상이나 철학을 올바로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 없다. 올바른 한국철학의 정립을 위해서는 주어진 상황에서의 우리말과 사상의 연관성이 학문적으로 깊이 있게 탐구되어야 한다.


셋째로, 언어에 대한 이러한 영향사적 의식을 염두에 두고 현재 우리들의 철학함의 지평을 열어 밝혀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말’로 쓰이고 풀이한 철학사전, 개념사적으로 연구 조사하여 정리하고 우리의 철학함의 시각에서 분류 해석한 철학사전이 필요하다. 그리고 문제사적 관점에서 주체적 문제 발견과 해결의 과정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한국철학사의 정리와 서술이 시급하다. 그리고 우리 고전들을 포함한 모든 철학 원전들의 우리말 번역이 절실히 요청된다. 


넷째로 ‘우리말로 철학하기’는 철학함 자체의 대상[주제] 연관, 주체 연관, 실천 연관의 뗄 수 없는 관련성을 강조한다. 우리의 생활세계에서 절실하게 부딪히는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말로 사색하고 모색한 이론으로서의 철학에 관심을 쏟아서 우리의 시대적 아픔과 분위기 그리고 정신을 파악하고 표현한 철학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철학을 이렇게 이해할 경우 다른 인문학과의 연계는 필수적이다. 역사학, 국어국문학, 사회학 등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우리말로 학문해 나가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그래서 인문학에서의 ‘한국화’가 이루어지고 더 나아가 예술에서 ‘한국화’도 구현되어야 한다.


▶ 다음 편에서는 ‘다석의 우리말로 철학하기’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지난 편 보기


⑴ 이러한 사실이 벌써 철학함에 언어가, 즉 모국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⑵ 참조 H. Lipps, Untersuchungen zur Phänomenologie der Erkenntnis (인식의 현상학을 위한 탐구들), II. Teil, Frankfurt a.M., 1976, 24.


⑶ 참조 레오 바이스게르버, 『모국어와 정신형성』, 허발 옮김, 문예출판사, 1993, 162.

 

⑷ 참조 같은 책, 69. 

 

⑸ 최현배,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 정음사, 1951, 51.


⑹ 참조 레오 바이스게르버, 같은 책, 134. 


⑺ 같은 책, 136.


⑻ 참조 Karl-Otto Apel, Transformation der Philosophie. Band 2: Das Aprioi der Kommunikationsgemeinschaft (철학의 변형. 제2권: 의사소통 공동체의 선험), Frankfurt a.M. 1976.


⑼ 참조 이기상, <고교 철학 ― 무엇을, 왜 가르칠 것인가?>, 『철학교육연구』 제3권 제8호(1987), 19쪽. E. 마르텐스, 『철학교육』, 이기상 옮김, 서광사, 1988, 27쪽 이하, 53쪽 이하.


⑽ 허웅, 『한글과 민족 문화』, 교양 국사 총서 1,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 1974, 3.


⑾ 참조 이기상, <고교 철학 ―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철학교육연구』 제3권 제9호(1987), 15.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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