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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이 땅 우리의 현실에서 출발해야 하는 이유 - [이기상-신의 숨결] 우리말에서 듣는 하늘의 소리 ②
  • 이기상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0-04-20 10:08:01
  • 수정 2020-04-20 01: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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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한국 현대 철학


언어는 민족의 기억이며 세계관의 반영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하느님[존재]의 부름에 대한 인간 측의 응답이다. 따라서 한자말을 중점적으로 사용하여 철학적 사색을 전개하던 시기의 조선의 사상가는 그 한자말에 갈무리되어 있는 세계관에 얽매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아무 문제없이 중화사상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잘 해설하여 남에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였다.


▲ (사진출처=Europeana)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이후 ― 비록 지식인층에서는 언문이며 암글이라 천시하긴 했지만 ― 조선에서의 철학하기는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한자말로 된 동아시아의 고전들을 우리말 토씨를 섞어 읽고 해석하게 됨에 따라 고전해석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알게 모르게 우리의 세계관과 인간관이 그 해석 속에 파고들게 된 것이다. 조선에서의 <사단칠정론>을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퇴계와 이율곡의 (중국과는 다른) 독특한 사상도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일반 서민과 대중의 언어로 한글말이 확산됨에 따라 학문적인 토론에서도 우리말이 더욱 많이 사용되고 그에 따라 사상의 큰 흐름과 내용도 달라지게 된다. 여기에 더하여 서양의 문명이 동아시아에 유입되어 지식인들 사회에 문명의 충돌을 야기시킨다. 정약용, 임성주, 홍대용, 최한기 등의 철학하기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체적인 철학하기를 시도한 예로 볼 수 있다.


최제우와 최해월로 이어지는 동학사상은 그야말로 한자말에서 해방되어 우리말로 철학하며 얻게 되는 귀중한 ‘이 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의 산물이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 갈무리되어 있는 고유한 전통사상인 유불선을 통합하여 서양의 서학에 맞서려는 의도 자체가 사상적 차원에서의 주체적인 문제해결 노력이다. 서학이 어떻게 대중에 파고들어 당시의 세도가와 사대부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는지도 고찰해 보아야 할 중요한 사안이다. 천주교는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서민대중에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민중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말을 찾아 잃었던 혀를 찾게 해주었고 그래서 자신들의 주장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라가 일본에 의해 속국이 되어 이 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려는 노력은 커다란 벽에 부딪치게 된다. 나라를 잃은 환난 속에서 지식인들은 앞서가는 나라의 발달된 문명을 배워 따라가는 길만이 이 민족과 나라가 살길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교육을 통한 체계적이고 제도적인 계몽만이 제대로 서양문명을 배울 수 있는 길임을 통감하고 학교를 세우려고 노력한다.


외국에서 철학공부를 하고 귀국한 안호상과 한치진의 철학관, 국내에서 공부한 박종홍, 신남철의 철학이해 속에서 우리는 그 당시 철학하기의 독특함을 읽어낼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는 박종홍의 철학하기에 주목해 보도록 하자. 


최초의 한국철학자 박종홍과 우리말로 철학하기 시작한 류영모


박종홍은 철학이 이 땅 우리의 현실에서 출발해야 함을 절감한, 이론으로서의 철학이 아닌 ‘철학하기’를 강조한 20세기 한국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그 스스로 고백하듯 그를 철학하게끔 강요한 것은 선택의 여지없이 내던져진 그의 억울한 역사적 현실이었다. 일본 식민지 시대에 일본이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에서 일본이 제공하는 철학교과과정을 배우며 자신의 철학사상을 정립하려 노력한 박종홍의 철학하기에서 우리는 그 당시 우리의 독특한 철학함의 유형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는 박종홍의 철학하기를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시기는 일본 식민지 시대에서의 철학활동으로서 이 당시 그는 일본어와 우리말로 글들을 발표한다. 그가 발표한 글들을 분석하면서 그가 주장하는 내용과 표현수단으로서의 언어가 갖는 상관관계를 조사해볼 수 있다. 이 시기에 그는 한국적 문제의식 속에서 서양철학적인 주제를 일본어 또는 순전한 표현 수단으로서의 한글로 기술하고 있다.


둘째 시기는 해방 직후의 상황으로서 그가 서울대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시기에 해당된다. 이 당시 그는 한국철학 정립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선인들의 사상을 정리하려고 노력한다. 한문으로 된 글들을 한글로 읽어내면서 독특한 우리 철학의 얼개를 찾아내려고 시도한다. 이 시기에 박종홍은 한자를 병용하는 글쓰기를 택하면서 전수된 한국의 고유한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소개하려고 노력한다. 일반 철학도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우리의 고유한 문화적 유산인 유교, 불교, 노장자적인 사상이 하나도 없음을 절감하고 무엇보다도 먼저 큰 흐름과 특징만이라도 잡아내서 소개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한자병용으로 된 우리말을 빌려 우리의 고유한 얼을 잡아내려고 시도한 시기이다. 


셋째 시기는 말년에 나름대로의 독특한 철학을 정립하려고 노력한 시기에 해당된다. 서양철학의 흐름을 나름대로 두 가지 커다란 철학함의 유형으로 나누어 고찰하면서 현재 우리가 놓여 있는 세계철학적인 문제상황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 문제상황에 대처해나갈 수 있는 우리 나름의 철학함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을 창조의 논리라고 이름하며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이론화시키려고 시도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한다. 한국적 철학함의 울타리를 넘어서 보편적인 문화논리를 찾으려고 시도한다. 한자병용의 우리말을 사용하여 새로운 문화논리를 정립하려고 노력한다.


박종홍은 ‘우리 철학’, 즉 한국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립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한국철학자이다. 1934년 박종홍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현대철학의 추세를 말하고 있는 나로서 우리 조선의 현대철학에 관하여 언급할 만한 하등의 자료도 가지지 못함을 섭섭히 그리고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장차 어떠한 형태로서나마 ‘우리의 철학’이 출현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을 나는 확신하련다.” 

 

그리하여 한문으로 전수된 우리의 사상적 유산을 우리말로 정리하여 소개하는 일에 많은 시간과 열정을 할애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이 정리와 소개의 차원에 머물렀을 뿐 정작 나름의 창의적인 한국철학을 정립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 (사진출처=다석사상연구회)


류영모는 정식 교육을 통해 철학을 배운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동서양의 경전들을 읽으면서 혼자 사색하고 사색한 것을 일기장에 적었다. 몇몇 소수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생각한 것을 전해주었다. 그는 박종홍과는 다르게 한 권의 체계적인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 그날그날 사색한 것을 시의 형식으로 기록한 일지와 그가 강의한 것을 속기하여 정리해 놓은 어록이 그가 남긴 전부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서 체계적인 사상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의 말속에서 우리는 그만의 독특한 사상의 큰 얼개와 특징을 찾아낼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그가 인간과 세계 그리고 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정리해낼 수 있다. 


류영모는 최제우처럼 유교, 불교, 도교 그리고 기독교를 아우르는 통합적인 사상을 모색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독특한 언어관을 전개하였으며 그 언어관에 충실하게 사유하였다. 그에 의하면, 언어[말]는 하느님의 마루[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류영모는 우리말로 철학하려 시도한 최초의 한국 사상가인 셈이다. 류영모는 우리말에 담긴 존재의 소리 또는 하느님의 뜻을 읽어내어 그것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고유한 인간관, 생명관, 신관, 가치관을 전개하였다.


먼저 류영모가 우리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따라 가보자. 어떻게 해서 우리말이 우리의 우주관과 신관, 사유의 틀, 생활방식을 담고 있는지를 알아본다. 


▶ 다음 편에서는 ‘다석의 우리말로 철학하기’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지난 편 보기


⑴ 박종홍, 『박종홍 전집 I』, 민음사, 1998, 365.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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