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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맨 앞에도, 가운데에도, 뒤에서도 역할을 하셨습니다”
  • 이병호 주교
  • 등록 2020-04-29 15:21:53
  • 수정 2020-05-06 17:3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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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던 사제 김병상 몬시뇰이 지난 25일 선종하셨습니다. 다음은 김병상 몬시뇰과 가톨릭신학대학 동창인 이병호 주교(전 천주교 전주교구장)가 '사제 김병상님의 영전에' 드리는 추모의 글 전문입니다. 이 추도사는 장례미사가 봉헌된 지난 4월 27일, 인천 답동 주교좌성당에서 낭독되었습니다. - 편집자 주


▲ 27일 인천교구 답동 주교좌 성당에서 봉헌된 고 김병상 몬시뇰 장례미사에서 추도사를 하는 이병호 주교 ⓒ 문미정


사제 김병상님의 영전에 


“이렇게 가시는 군요.” 


이것은 저의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너를 기다리고 있으니, 아들아, 어서 오너라!” (2티모 4,7-8 참조)


당신은 우리 동창생들을 위해서는 큰 형님이셨고, 이 교구를 위해서는 큰 어른이셨습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는 신앙인의 본래 소명대로, 이 인천 지역을 위해서 민주화 운동의 대부이셨다는 사실입니다. 나아가 우리나라 전체를 위해서도 당신은 똑같은 역할을 하셨습니다. 당신은 그 대열, 거기 참여한 모든 분들의 맨 앞에 서기도 하고, 가운데에 서기도 하고, 뒤에서 따라가며 보호자 역할도 하셨습니다. 


이제 돌아보면 그 암울하던 시절에는, 그 일이 어디로 이어질지, 그 끝이 어디일지 전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을 비롯한 수많은 분들은 나라를 좋은 모습으로 바꾸는 일에 뛰어드셨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분들은 목숨을 잃고, 어떤 분들은 팔다리가 부러지고, 어떤 분들은 그 상처 때문에 평생을 신음하다가 가시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폐인처럼 사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유탄에 맞아, 영문도 모른 채 쓰러지셨습니다. 그런 속에서도 어둠이 결코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살아 있었고, 우리가 확인할 수 없었던 그 시간 동안에도 주님의 그 섭리는 계속되고 있었음을 이제는 분명히 깨닫습니다. 


좀 더 멀리 돌아보면, 온 민족이 역사에서 제일 깊은 어둠 속을 헤매던 때는 일제 강점기였습니다. 침략자들은 우리의 자유와 재산뿐 아니라,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소중한 것, 우리의 기억을 말살시켰습니다. 역사를 지워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렸습니다. 오랜 세월 침략자들의 천대와 조롱을 듣다 보니 마침내는 스스로도 자기를 조롱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엽전은 그저...” 기억을 잃어버린 역사는 최근까지 이어졌습니다. “헬 조선!” “이게 나라냐!”


말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사는 모습도 그랬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되지, 자유는 뭐 말라비틀어진 것이며, 민주주의는 또 무슨 아닌 밤중의 홍두깨냐! 그런 것들이 밥 먹여 주더냐!” 그래서 그런 것 없이도 행복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개 돼지가 된 것입니다. 자유, 인권, 민주주의는 사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그러나 침략자들이 우리를 철저히 무너뜨리고 온 민족이 가장 짙은 어둠 속을 헤매고 있던 바로 그 때, 우리가 누구인지를 일깨워주고 기억을 되살려 준 현자가 있었습니다. 동양인으로서 맨 처음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였습니다. 스스로도 외적의 침략으로 나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그는, 1929년 우리에게 귀띔했습니다. “코리아, 일찍이 아시아가 황금시대를 누리던 시절, 너는 그 등불의 하나였다. 언젠가 그 등불이 다시 켜지는 날, 너는 동양의 빛이 되리라.” 


그로부터 90년이 지난 오늘, 그 암울하던 시절은 뒤로 사라지고, 그 코리아는 동양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 지구촌 모든 이들이 우러러보는 나라로 바뀌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때에도 눈을 부릅뜨고 깨어있는 불침번처럼, 눈빛 푸른 분들의 외침에, 바다 건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더해져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더욱 분명히 깨닫고, 본래의 자신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헬 조선!’은 “자랑스런 코리아!”로, “이게 나라냐?”는 “이게 나라다!”로 바뀌었습니다. 기억 상실의 시대는 이제 뒤로 물러갔습니다. “저게 나라다!” “나라를 운영하는 사람들, 그 운전대를 잡은 이들은 모름지기 저래야 하고, 그 주변을 싸고 있는 사람들은 마땅히 저런 모습이어야 한다. 국민도 모두 저래야 한다. 그리고 의료진!” 오늘 코리아를 보며 감동받는 세상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우리의 기억은 온전히 되살아났습니다. 


종이에 기록하고 돌에 새긴 역사는 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전자에 기록되고 민족의 마음에 새겨진 기억은 잠시 잠들 수는 있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깨어납니다. 나라의 창고가 비고 외국에 빚을 몽땅 지었다는 사실을 알면, 금으로 만든 손주의 돌 반지까지 가져다가 빚을 갚고 그 창고를 다시 채우는 마음, 그것이 코리안의 본심이었던 것입니다. 


코리아 -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 코리아가 온 세계 사람들의 눈에, 그리고 그 가슴에 이렇게 찬란한 빛을 내며 다가간 적은 없었습니다. 우리 국민이 조국을 이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한 적도 없었습니다. 코리안임을 이렇게 뿌듯하게 느끼고, 나라를 운전하는 이들을 이렇게 고맙게 바라본 적도 없었습니다. 


▲ 고 김병상 몬시뇰이 떠나는 길을 지키는 사제들과 신자들 ⓒ 문미정


이것이 모두 당신과 같이,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날을 꿈꾸며 온 몸을 던진 많은 분들의 희생, 암흑 속에서도 어둠이 결코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싸운 분들 덕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대통령께서도 국민을 대표해서 당신께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인천, 호남, 영남을 나누고, 동쪽과 서쪽, 남쪽과 북쪽을 가르는 경계선은 물론, 이 나라 저 나라를 나누는 국경선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눈으로 직접 보는 ‘높이’로 올라가셨습니다. 거기에서 보면, 어디에도 국경선은 없을 것입니다. 깜깜하고 끝없이 펼쳐진 우주 공간에서, 보석처럼 찬란한 빛을 내며 정처 없이 떠가는 이 지구별이 얼마나 외롭고 아슬아슬한 항해를 하고 있는지만 또렷이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수없는 경계선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을 당신은 잘 아십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이번의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하느님께서 본래 만들어주셨던 그 모습, 그 마음을 기억하고 되찾아 그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자녀가 부모의 판박이이듯,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만드신 창조자 하느님의 판박이임을 기억하고, 그 모습을 되찾게 해 주시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며 함께 타고 항해 중인 배 - 이 지구를 되살리고, 그 품에 안겨 사는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임을 깨달아, 진정한 하나가 되게 해 주시라고 주님께 간구해 주십시오. 


정치-사회적으로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이렇게 빛나는 상황은 계속되지 않고 곧 사라질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지만, 그들이 알아보자마자 곧 사라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억’의 곳간에도 우리의 참 모습이 틀림없이 저장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이”(마태 13,52) 우리는 필요할 때마다 그것을 불러내고 자기의 본 모습을 되찾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호라!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어떤 이들, 특별히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마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것도 당신은 잘 아십니다. 그런 이들은 그리스도를 모를 뿐 아니라, 코로나19처럼 변태술에 능하고 책략이 놀라워, 그 바이러스가 세포 속까지 깊이 파고 들어와 있는데도, 주변의 여러 사람에게 전파시킨 다음에야 그 증상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무섭고도 슬픈 말씀 밖에 어울리는 표현이 달리는 없을 듯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만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있다.”(마태 7,15) 그래서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기보다,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병든 세상을 치유해야 할 사람들이 죽음의 병에 걸린 형국입니다. 물구나무서기가 따로 없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이 썩으면 제일 추악하게 부패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살아온 종교계 안에 이런 죽음의 바이러스가 들어온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는, 늑대에서 양으로 바뀌고, 그리스도의 철저한 박해자에서 그분의 정신이 뼛속까지, 세포 구석구석에까지 스며들어 가장 위대한 제자와 사도로 변한 바오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인이든 나라든 한때 방향을 잃었던 이들도 이런 기억을 되살려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참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빌어 주십시오.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든다.”(이사 65,17) 우리가 오늘 미사 첫 독서에서 들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진정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는 하느님의 일에 모두가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런 세상을 이루는 일에 우리 하나하나가 자기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이제부터는 ‘위에서’ 계속 함께 해 주십시오. 

 

그 동안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2020.04.27.월, 인천 답동 주교좌 성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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