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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스러움’을 이성적으로 논의할 수 있을까?
  • 이기상
  • 등록 2020-05-11 10: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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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지평과 성스러움


우리는 과연 이성적으로 < 성스러움 >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가? 성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합리적 사유의 단계를 넘어서는 것이고 따라서 철학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 아닌가? 그것은 시의 영역이고 종교의 영역 아니겠는가? 소위 후기 하이데거 사상에 많이 등장하고 있는 성스러움과 신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는 철학이기를 포기한 철학자의 마지막 몸부림 아닌가? 아니면 <철학의 종말>에 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모험으로 보아야 하는가? 기술과 과학의 시대라는 극도의 합리성의 시대에 성스러움에 대한 논의가 여기저기서 관심을 끌고 있는 것 자체가 우리 시대가 처해 있는 독특함을 내보이고 있는 징표 아닌가?


가장 큰 위험은 위험 속에 있으면서도 그 위험을 못 느끼고 있을 때 아닌가? 현대인은 온갖 기술과 과학의 장치로 모든 것을 안전하게 만들었다고 큰소리치고는 있지만 사방팔방에서 안전신화가 여지없이 깨어지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과연 안전한가, 우리는 과연 기술과 과학의 보호 속에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가? 그 많은 견고한 안전장치들이 이제는 오히려 인간을 옥죄고 옭아매는 통제장치와 감시장치들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성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하이데거는 철학의 울타리뿐만이 아니라 존재의 ‘지평’마저도 넘어선 것은 아닌가? 아니면 여전히 그 지평 안에 머물러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우리는 존재와 성스러움의 연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유는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존재를 위해 [그에 맞갖은] 말을 찾는다. 그리하여 이 말에서부터 존재의 진리가 언어에로 오기를 바란다. …… 오래 동안 감싸져 왔던 언어의 부재에서부터 그리고 그 부재 안에서 밝혀진 영역을 조심조심 설명하면서부터 사유의 말함은 시작된다. 시인의 명함 [이름지음]도 같은 유래에서 기인한다. 그렇지만 같은 것도 오직 상이한 것으로만 같기에, 시작과 사유는 낱말에 대한 애지 중지에서는 가장 순수하게 같지만 동시에 그 둘은 그들의 본질에서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사유는 존재를 말하고 시인은 성스러움을 이름한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의심의 여지없이 성스러움을 명명하는 것을 시인의 사명으로 간주하고 있다. 위의 구절에서 우리가 받는 인상은 성스러움에 대한 이야기는 본질적인 점에서 시인과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실지로 하이데거는 횔덜린의 시, 특히 <마치 축제일에...>라는 송가를 설명하는 곳에서 가장 상세하게 성스러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발터 슐츠(Walter Schulz)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하이데거는 거의 전적으로 횔덜린에게 의존하며 그를 시인 중의 시인이라고 명명하는데, 그 까닭은 횔덜린이 바로 성스러움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에서 성스러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 또는 시작의 본질이 무엇이고 시인, 일차적으로는 횔덜린이 명명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시인의 명명과 성스러움, 사유자의 말함과 존재 그리고 신적인 것의 신성과의 연관들을 고찰하기에 앞서 먼저 <성스러움>이라는 낱말이 어떤 일상언어적인 배경과 맥락에서 등장하며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일상용어 사용에서의 ‘성스러움’


‘성스러움’(das Heilige)이라는 독일어는 언어적으로 ‘온전하게 하다, 치료하다(heilen)’와 연관되어 있는데, 그것은 상처받지 않은 것(das Unversehrte)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사람이 화를 당했는데 하나도 다치지 않고(heil) 나왔다고, 다시 말해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상처 없이, 상처받지 않고 거기에서 빠져 나왔다고 말한다. 여기에 또한 동사 ‘치료하다, 완치시키다, 낫게 하다(heilen)’가 속한다. 어떤 사람이 다치거나 상처를 받았을 때 의사가 그 사람을 치료하거나 다시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 즉 상처를 낫게 해준다.


독일어 ‘versehren’은 ‘상하게 하다, 해치다’를 의미한다. 이에 반해 ‘heilen’은 상한 것, 상처난 것을 다시 온전하게 만듦을 의미한다. 따라서 온전한(heil) 상태는 한편으로는 본래의 원상태이며 더 나아가서는 어떤 것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를 뜻한다. heilen은 바로 이러한 온전한 원상태로 회복시켜 주든가 아니면 그것이 놓여 있을 수 있는 최상의 상태에로 이끌어 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일상어의 사용에서 ‘성스러움’(das Heilige)이라는 개념은 인간 현존재가 처해 있는 철저히 위협받고 있고 위태로운 상황을 전제하고 그런 속에서의 독특한 이중의 방식을 지칭하고 있다. 사람들은 위협의 와중 [한가운데]에서도 어떤 사람이 온전하게 [heil, 다치지 않고] 남아 있다거나 또는 세계가 그 모든 눈에 띄는 파괴의 와중에서도 [멸망하지 않고] 온전하게(heil) 남아 있다고 말한다.


▲ Richard Long < South Bank Circle >


이러한 ‘온전함’(heil)에 대한 경험은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거의 유의하지 않았던 독특하고 새로운 존재경험이다. 일상의 언어사용에 반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낱말 아래 이해되고 있는 것을 크게 윤곽 지어 보려고 할 때, 우리는 시작부터 그 독특함에 부딪치게 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온전하다고 칭할 때, 우리는 그로써 그것을 온전치 못한 것과, 즉 부서진 것 또는 어떤 형태로든 이미 상처난 [망가진] 것과 구별 짓는다. 우리는 어떤 것이 온전하다고 말함으로써 그것이 온전하게 남아주었다는 것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셈이다. 우리는 이 점을 아주 각별히 주목해야 할 것으로 그리고 근본에 있어 매우 놀랄만한 것으로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무지막지한 존립에서 전혀 파괴될 수 없는 것 — 예컨대 길에 놓여 있는 거대한 둥근 바윗덩어리 — 을 우리는 온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깨어질 수 있는 그것이 파괴의 와중에서도 다치지 않고 남아 있는 한에 있어서 그렇게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는 파괴될 수 있는 것만을 온전하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사적으로 근원적인 의미에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온전하다고 하는데 특히 그가 싸움에서 아무런 상처 없이 돌아왔을 때 그렇다. 이때 온전하게 남아 있게된 것은 항상 하나의 기적 같은 것으로서, 그것을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비호해주고 있는 힘들에 감사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


성스러움, 치료(완치)보다 더 깊은 차원


지금까지 살펴본 몇 가지 특징들을 정리해 본다면, 성스러움은 우선 깨질 수 있는 것, 상할 수 있는 것, 상처받을 수 있는 것과 관련해서 말해지고 있다. 애초부터 깨질 수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성스러움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둘째, 그렇게 깨질 수 있는 것이 깨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으면서도 깨지지 않고 원래의 상태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과 연관이 있다. 즉 깨질 수 있는 것이 놓일 수 있는 최악의 상태가 고려되고 있다. 


셋째, 그런 위험 속에서도 무사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은 통상적인 이해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합리적인 생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어떤 차원을 지시하고 있다. 


넷째, 바로 이 설명되지 않는 차원이 온전함을 온전하게 만들어주고 유지시켜 주는 그런 ‘신비스러운’ 힘임을 암시하고 있다. 


일상언어의 사용을 좀 더 살펴본다면, 우리는 다시 아문 [완쾌된] 상처를 온전히 나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 생물의 육체적 상태와 관련하여 온전함과 온전히 남아 있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온전해짐(Heilung)의 과정도 있다. 이 온전하게 되어감의 과정을 이 경우 우리는 자연의 원상복귀 시켜주는 완쾌의 힘에 감사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유기적 생명체의 영역에 사용되었을 때에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유기체는 그 모든 부상[상처]에도 불구하고 다시 온전함의 상태로 자신을 되돌리려고 추구하는 어떤 것으로서 나타난다. 이때 의사의 인위적 기술이라는 것이 자연을 어느 정도 내에서는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도 완쾌의 보호하고 원상복귀 시키는 힘을 감추어진 더 깊은 존재의 근거에서의 힘으로서 경험한다.


이 두 번째 부류의 사용에서 눈에 띄는 특징을 정리해 본다면, 여기서는 깨질 수 있는 것, 상처받을 수 있는 것이 실지로 상처받은 경우를 염두에 둔 언어사용들이다. 우선 상처받은 것이 원래대로의 온전한 상태에로 돌아가는 과정 또는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을 ‘완쾌함, 온전해짐, 치료함, 낫게 함’(heilen)이라고 말하고 있다. 


둘째, 여기서도 우리는 그렇게 온전하게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힘을 우리가 알 수 없는 우리 밖의 어떤 힘으로 상정하고 있다. 자연의 유기체 또는 생명체에서 볼 수 있는 회복능력은 신비로운 자연의 힘이다. 


셋째, 인간의 치료행위는 인위적 기술로서 고작해야 자연이 갖고 있는 신비로운 힘에 물꼬를 터서 그 힘을 활용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혼의 구원’(Heil der Seele)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들 수 있다. 이때 ‘구원’은, 인간의 가장 내적인 삶에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위험에서부터의 최종 구제라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서도 어쨌든 영혼의 쉽게 상처받을 수 있음이 전제되고 있으며, 자유의사에 의해 실지로 상처받았음이 상정되고 있다. 원래의 온전하고 깨끗한 상태로 갈 수 있는 것은 영혼의 능력 밖의 일로서 그것을 영혼은 성스러움에 의존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스러움은 좀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로 치료(완치)보다 더 깊은 차원을 갖는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실지로 상처받지 않은 것뿐 아니라 또한 근본적으로 상처받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것이 상하거나 훼손되거나 감소되거나 파괴된다면 그러한 것은 상처받을 수 없는 것 또는 침해(훼손)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성스러움의 본질에는 배치되는 것이다. 


또한 성스러움에는 존경해 마땅한 품위가 내재해 있다. 바로 거기에 상하지 말아야 하는 요구가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요구는 정중하게 지켜져야 하고 그에 상응한 행위에 의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 품위를 얕잡아 보고 그 요구를 거절하는 사람은 성스러움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러한 모독은 인간 현존재로부터 그의 최종적 고귀한 완성을 빼앗으며 그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으며 그 안에서는 모든 가치가 뒤바뀌어 버리는 통속성 속에 빠트린다. 여기서는 온전함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유지시켜 주는 신비로운 힘으로서의, 그렇게 존재하는 절대적 가치로서의 성스러움 그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 차원을 구별했다. 신비로운 힘으로서의 성스러움 그 자체, 성스러움이 보존시키고 유지시키는 상태로서의 온전함, 온전하게 되는 또는 만드는 과정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일상에서의 언어사용 속에 드러나고 있는 성스러움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다음 편에서는 하이데거가 설명하고 있는 성스러움의 차원과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자.


▶ 다음 편에서는 ‘인간, 성스러움, 신,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지난 편 보기



⑴ M. Heidegger, “Nachwort zu Was ist Metaphysik?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보탬말)”, Wegmarken (사유의 이정표)(= Wm), Frankfurt am Main 1967, 106/7.

참조 Walter Schulz, “Über den philosophiegeschichtlichen Ort M. Heideggers (하이데거의 철학사적 위치에 대하여)”, Heidegger. Perspektiven zur Deutung seines Werks (하이데거. 그의 작품 해석을 위한 관점들), hrsg. von O. Pöggeler, Köln/Berlin 1969, 123.

참조 Johannes B. Lotz, Vom sein zum Heiligen. Metaphysisches Denken nach Heidegger (존재에서 성스러움에로. 하이데거 이후의 형이상학적 사유), Frakfurt a.M. 1990, 120ff. Otto F. Bollnow, Neue Geborgenheit (새로운 안온함), Stuttgart/Köln 1955, 148ff.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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