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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와 ‘n번 방’ 사이 음압병동에 갇힌 교회 - [사건과 신학] ‘보이지 않는 세계’와 인간
  • 성석환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0-05-21 14:07:58
  • 수정 2020-05-21 14: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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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는 신학 나눔의 새로운 길을 찾아 ‘사건과 신학’이라는 표제로 다양한 형식의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달, 이 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신학 이야기를 나누는 ‘사건과 신학’. 이번 주제는 ‘성착취 폭력사건, n번방’입니다. - 편집자 주



‘코로나19’에 대처하는 ‘사회적 거리 두기’의 삶은 온통 영상 매체로 채워졌다. 선생님들은 갑작스러운 ‘온라인 강의’ 때문에 진땀을 빼고 있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학생들을 상대하며, ‘아,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오래 전 입으로 비평하며 떠들어 대던 영화 <매트릭스>의 현실이, 또 얼마 전부터 호들갑 떨던 ‘4차 산업혁명’의 실체가 예기치 않게 가시화되는 듯하다.


그런데 이 와중에 터진 소위 ‘n번 방’ 사건은 그 생소한 용어들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한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던 한국사회에 또 다른 충격을 가하며 말기암처럼 퍼져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실체를 폭로했다. ‘인간은 대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 괘를 이루며 더 이상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현실적 질문이 되고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인비저블 맨>은 주인공 세실리아(엘리자베스 모스 역)가, 투명인간의 수트를 입은 세계적 광학자이며 소시오패쓰인 남편 애드리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사투를 그렸다. 영화 내내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공포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또 최근 ‘넷플릭스’에서 선보인 ‘킹덤2’역시 ‘보이지 않는’ 조선시대 역병, 그 현실인 좀비의 공포감을 생생히 표현했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존재/세계’에 대한 본능적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인간


‘바이러스’, ‘투명인간’, ‘n번 방’, ‘코리안 좀비’ 모두 현실세계에서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예측을 불허하는 청춘의 사랑도 ‘보이지 않아’ 온통 불안한 것이리라. ‘보이지 않는 세계’가 예측을 차단하니 인간은 본능적인 공포를 ‘종교’로 실체화한다. 신명을 받고자 산에 오른 그들의 지도자를 기다리다 지쳐 금송아지로 신을 삼아 섬긴 광야의 히브리 백성이 그 실례이다.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쓴다는 생각에 종교개혁자 칼뱅은 중세가 만들어 놓은 온갖 교회장식과 허례들을 없애거나 생략했다. 중세의 교회가 ‘보이지 않는 신’을 대체하여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한 그릇은 규칙과 돈이었다. 이를 거부하고 ‘보이지 않기에’ 열망하고자 한 이들은 수도원이나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자의, 타의로 고립/유배되었다. 어떤 형상으로도 신을 대체하지 말라는 ‘제 2계명’은 인간의 본능적 불안이 있는 한 지킬 수 없는 요청인 듯 하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불안은 근대의 합리화를 통해 극복되는 듯 보였다. 루소는 ‘사회계약’으로 ‘보이지 않는‘ 신의 세계를 인간화했고, 데카르트는 신화가 아니라 ‘방법’으로 현실화했으며, 칸트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 ‘보이는 세계’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이제 종교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불안의 표상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해명된 교회의 선교적 삶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앞에 선 교회의 선교적 삶은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신 ‘맘몬’의 돈과 권력 앞에 그 행로를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간은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는데, 자본으로 대체된 ‘보이지 않는 세계’는 얼마든지 그 불안을 환희와 쾌락과 성공으로 실체화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회 역시 ‘보이지 않는 교제’라는 신학적 고백과는 달리 건물과 공간과 기획으로 철저히 ‘보이는’ 그 무엇이 되고야 말았다. 중세망령의 부활이었다.


이 근대적 ‘재현(representation)’의 욕망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는 합리적 방식이었지만, ‘보이는 세계’가 모든 것을 자신의 이성적 범주 안에 가두어 놓을 때 범주 밖의 존재들에게는 언제나 고통이 수반되었으니 그것은 철저히 타자의 몫이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이 재현의 욕망은 자본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고 그렇게 물화되어가는 세계는 ‘진짜’의 정당성을 더 이상 증명할 수 없는 무한복제의 소비주의에 무릎을 꿇었다.


20세기 근대의 이 모든 기획을 의심하며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료따르의 진단처럼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는 근대의 욕망을 뒤로 하고 설명할 수 없는 상태로 두는 ‘숭엄/숭고’의 가치를 재발견한다. 하여 등장한 ‘보이는 것들‘의 ‘보이지 않는 세계’로의 귀환이 불규칙적이고 때로 혼란스럽게 전개되었고, 이런 경계선의 ‘유연화/무력화’의 혁명은 ‘보이는 신’을 향한 욕망에 질문을 제기하며 다시 본향인 광야로 복귀해야 한다는 각성을 초래하게 된다.


‘n번 방’과 ‘보이지 않는’


무한복제의 상업주의는 세계의 디지털화를 가속화했고, 온라인 신대륙에서 새로운 기득권 세력의 테크노크라시는 탈현실을 넘어 초현실로 영역확장을 추구하고 있다. ‘n번 방’ 사건은 현실과 가상현실의 그 격차에서 발생하는 환차익을 노린 투기세력이 저지른 최악의 일탈이었다. 그들의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은 ‘잡히지 않을 것’ 혹은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아담과 카인의 그 본능적 욕망이었으니, 그곳에서도 인간의 패륜과 죄악은 여전하다.


동조한 자들의 집단적 만용은 ‘보이지 않는 자들‘의 소시오패쓰적 행태로 나타났다. 인간은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 자유를 욕망한다. 투명인간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언젠가 현실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가상현실의 세계가 이미 충분히 그 불가시화의 욕망을 채우고 있다. 돈과 권력으로 촘촘히 짜인 현실세계의 갑갑함에 대한 사회심리적 저항이라 합리화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세계에 문외한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해불능의 사태이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다 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두면 그 환차손의 진폭은 더욱 커져 인간을 상품화하는 자본축적의 욕망은 더욱 고조될 것이고, ‘n번 방’은 그 이름대로 무한히 복제될 것이다. 영화 <뉴로맨서 neuromancer>로 시작해서 <허 Her>에 이르기까지 가상현실이 현실의 인간관계를 어떻게 교란 혹은 중첩시킬 수 있을지 보여주는 상상력은 극에 달해 있으나 ‘보이지 않는’ 세계의 문법으로 전환해야 할 현실기득권의 기민함은 현저히 부족하다.


그러니 “어떻게 그렇게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게 뭐가 어때서!”라며 응수하는 ‘n번 방’ 공범들의 태도가 더 더욱 이해가 되지 않을 터, 근대적 윤리관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는 그들의 존재양식 자체가 문제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때쯤이면 현실세계의 권력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격차가 커져 있을 것이라는 불안이 엄습한다. 이제라도 <인비저블 맨>의 세실리아처럼, <기생충>의 그 아들처럼 우리도 ‘계획’을 세워야 한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잡기 위해 혈투에 나선 이들의 헌신과 희생에 감사하며, ‘보이지 않는 세계’에 독버섯처럼 번진 나쁜 바이러스들을 잡기 위해 먼저 가상현실의 현상학과 해석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져야 하겠다. 시간과 공간 안에 현현하는 실재(reality)의 존재론적 정당성은 ‘다 자인(Da Sein)’에 있다. 동시에 그 윤리적 정당성은 타자에 대한 ‘책임(accountability)’에 있다는 이 존재의 법칙을 그곳에서도 관철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 책임을 테크노크라시의 새 권력에게만 맡겨 놓을 수 없다. 젊은 세대들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욕망에 하염없이 이끌려 또 다시 자본의 논리에 매몰되도록 그냥 둘 수는 없지 않겠나? 그들이 구축해가는 새로운 정체성, 관계성을 근대의 논리로 재단하고 ‘보이도록 만들겠다는’ 시도는 자충수가 될 것이다. 거꾸로 가상현실의 새로운 존재양식이 현실세계의 억압과 배제의 논리를 혁파하는 자원으로 작동하도록 역이용하는 집단지능의 결집이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공포는 다만 ‘보이도록 만드는’ 것으로만 해소될 수 있다는 근대적 신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보이도록 만드는’ 기획이 ‘보이지 않는’ 무한과 영원을 거세한 결과가 오늘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인류의 위기로 속출하리라는 성찰을 고려컨대, 악당들에게 빼앗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주도권을 누가 다시 확보하여 인류의 ‘공동의 선’의 방향으로 전향시킬 수 있을 것인가?


교회와 ‘보이는’


‘보이지 않는 교회’를 고백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보이는 교회’를 떠나 느끼는 혼란과 ‘n번 방’의 충격은 본질상 유사하다. 그 결말이, ‘보이는 교회’로의 복귀가 될 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교회’의 복원이 될지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우리 모두가 ‘n번 방’의 지옥에 치를 떨고 있을 때, 그 어떤 비난에도 아랑곳함 없이 모여 집단감염을 일으킨 교회들을 향한 사람들의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제 ‘보이지 않던’ 신천지가 드러나고 ‘n번 방’의 비밀도 벗겨질 것이나, 권력과 돈과 숫자로 환원되어 가시화되어왔던 개신교회가 오히려 사회로부터 ‘보이지 않게’ 될까 걱정이다. 인간이 가상현실세계에서도 스스로의 품위를 지키며 새로운 탈계급적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지, 또 교회가 ‘움직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로 본연의 그 선교적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지, 이 두 질문이 우리의 미래를 규정할 것이다. 우리는 ‘안 보고도’ 볼 수 있는가?


무교회주의와는 다른 차원에서, 자본주의 원리에 지나치게 경도된 교회의 모습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것은 ‘모이지 않고도’ 공동체의 선교적 삶, 즉 ‘보이지 않는 교회’의 재현이 타인을 배제하거나 차별하지 않아도(아니 않아야) 가능하다는 원형적 복음의 기적을 재확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n번 방’의 ‘보이지 않으려는’ 욕망과 ‘보이게 하려는’ 시나이 광야의 금송아지를 분별하지 못하면 예배당을 떠난 예배자들은 곧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될지도 모른다.


‘보이는’ 교회의 정당성은 존재의 정당성처럼 독자적이지 않다. ‘안 보이는’ 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그의 구속적 사랑을 받아들인 이들이 비로소 ‘보이지 않는 교회’의 지체가 된다. 동시에 교회는 ‘보이는’ 세상과 타자에 대한 신적 사랑을 실천함으로써만 비로소 ‘보이는’ 교회가 된다. ‘n번 방’이 ‘보이지 않으려는’ 욕망으로 ‘보이는’ 이들에게 일방적인 폭력을 행사했다면, 교회는 ‘보이는’ 이들을 섬겨 ‘보이지 않아도’ 교회일 수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교회의 실체는 본회퍼의 말대로 오직 ‘그리스도 예수’이다. 그렇게 시공간에 현존재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면, ‘보이지 않는’ 세계라 해도 타자/이웃과 새로운 관계맺음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19’로 우리의 미래는 온통 불안하지만, ‘n번 방’의 혼란과 무질서는 놀랍게도 다시 ‘보이는’ 교회의 필요성과 절실함을 웅변한다. ‘보이지 않아’ 느끼는 공포는 ‘보이지 않아’ 오히려 확신하는 이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이 있다.”는 주님의 선언은 단지 의심하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는 단세포적 자기확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몸의 상처를 ‘보여’ 주신다. 이제 비로소 제자들은 ‘보이지 않는 교회’가 되었다. 그리고 ‘보이는’ 다른 세상을 열어 가기로 결심한다. ‘코로나19’는 어쩌면 주님이 보여주신 몸의 상처처럼 우리에게 남아 ‘안 보고도’ 믿는, 그래서 비로소 ‘보이지 않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와 ‘n번 방’ 두 바이러스 사이, 어느 음압병동 안에 있다.


성석환(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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