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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들이 보는 교황 비오 12세 문서고
  • 끌로셰
  • 등록 2020-05-25 16:3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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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일 개방했던 교황 비오 12세 문서고가 코로나19(COVID-19)로 인해 5일 만인 3월 6일에 임시 폐관되었다.


따라서, 교황청이 과연 홀로코스트를 비롯해 로마에서 벌어진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침묵’했는가를 추적하는 역사학적 연구도 동시에 중단되었다.


그러나 잠시 개방했던 5일 간 문서고를 방문했던 몇몇 역사학자들의 증언을 통해 비오 12세 당시 교황청의 입장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문서고에 출입한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교황의 개인적 행보를 칭찬하거나 비난하기 위해 특정 문서들을 찾아서 강조하기 보다는 이러한 행보가 나타난 역사적 배경과 사료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오 12세가 직접 말하는 “침묵”


▲ (사진출처=Avvenire.it)


“교황이 유대인 학살을 몰랐다고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교황청 문서에서 유대인 학살에 관한 문건을 찾아볼 수 있는 게 새로운 발견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지난 13일 이탈리아 일간지 < Corriere della Sera >에는 이탈리아 역사학자 겸 국제 가톨릭 공동체 창립자 안드레아 리카르디(Andrea Riccardi)의 특집 기사가 실렸다. 리카르디는 주스위스 교황대사관 문서를 열람했다.


리카르디는 비오 12세의 침묵을 두고 안젤로 론칼리 몬시뇰(Angelo Roncalli, 미래의 교황 요한 23세 - 역자주)이 1941년 10월 10일 비오 12세를 만난 자리에서 “비오 12세가 내게 나치의 행태에 관한 자신의 침묵이 나쁘게 평가받고 있지 않은지 물었다”며 비오 12세가 ‘침묵’(silenzio)을 직접 이야기한 적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리카르디는 “비오 12세 스스로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침묵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고통스럽지만, 의식적인 선택을 지칭했다”며 바티칸 문서고에 남아있는 침묵의 여러 사례들과 그 이유를 설명했다.


리카르디는 1942년 8월 우크라이나 동방 정교회 총대주교 안드레이 솁티츠키(Andrey Sheptytsky)에게서 유대인 학살 소식을 들었고, 1942년 9월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정권 당시 미국 사절이었던 마이론 테일러(Myron Taylor)가 비오 12세에게 유대인과 전쟁포로를 위해 나서달라는 요청을 했었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구체적인 요청이 있었음에도 행동에 나서지 않은 이유에 대해 리카르디는 “한 메모에서 당시 국무성 특무성성(지금의 외교부) 차관보였던 안젤로 델라쿠아(Angelo Dell'Acqua) 추기경은 이러한 소식에 ‘과장’이 있고 이와 같은 조치에 정치적 목적이 있다고 의심했다”며 “결국 교황청이 ‘유대인을 상대로 한 혹독한 대우’에 관한 정보를 받았으나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고 답하는 것으로 결정이 내려졌다”고 설명했다.


리카르디는 이외에도 1942년 성탄 라디오 메시지에서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량학살을 두고 ‘유대인’이나 ‘나치’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피해 “국적이나 인종을 이유로 (사람들을) 점차적으로 말살”시키는 행위라고 말한 것을 두고도 “비오 12세는 교황청이 (나치나 연합군 중) 어느 한 쪽 편을 드는 상황을 피하고자 했다”고 지적했다. 


리카르디는 비오 12세의 이러한 시도가 비오 12세의 선임자인 베네딕토 15세의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니 적들만 생겨났다’는 지적에서 벗어나지 못한 행동이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1942년 5월 폴란드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 공개적인 선언문을 내려는 시도가 교황청 내부에 있었으나 비오 12세는 이것이 연합군에 의해 선전물로 이용될까 우려하여 반려했다. 


리카르디는 “폴란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곧바로 이어진 유대인 대량학살 해결 방식과 유사하게 인도적 행위와 외교 행위였다”며 “오늘날 바티칸 문서고에서 나온 이 세 사진을 보면 유례없는 거대한 비극에 외교 수단이 부적합했는가를 느끼게 된다”고 비판했다.


문서고는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양면적이다


유대교와 가톨릭교회의 관계를 연구하는 프랑스 로마 신학원 연구원 니나 발부스케(Nina Valbousquet)는 주프랑스 교황대사관 문서를 열람했다.


발부스케 역시 리카르디와 마찬가지로 “토론이 오로지 교황이라는 한 인물에 집중해 귀납법처럼 그의 인성, 발언, 행보를 샅샅이 살펴 거기에서부터 더욱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진실을 끌어내려는 경향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분명 로마 가톨릭교회와 같은 위계질서 제도 안에서 교황 권력에 대한 관심은 정당한 것이나, 교회 기구의 복잡성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문제를 축소시킨다”고 지적했다.


발부스케는 비오 12세 임기 때 나치와 유대인에 대한 교회의 “양면성”, “모호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서고의 애매함과 불투명성을 감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1942년 여름 벌어진 유대인 소탕과 수용소 강제수용에 대한 프랑스 가톨릭계의 반응을 중심으로 문서고를 살폈다.


발부스케가 열람한 문서에는 1942년 9월 2일 주프랑스 교황대사관에 제출된 브라운 보고서(rapport de Braun)와 익명의 사제가 쓴 서한이 함께 들어 있었다.


브라운 보고서는 나치의 직접 지배를 받지 않는 비시 프랑스(France de Vichy) 지역이 유대인 강제수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담은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는 프랑스 가톨릭교회와 교황청의 침묵을 꼬집으며 “나는 사제, 수도자, 시민, 공직자들이 교회, 로마가 침묵하는 것에 놀라거나 충격을 받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했다.


반면, 익명의 편지에는 쥘-제로 살리에주(Jules-Géraud Saliège) 추기경에 이어 사목교서를 통해 나치와 프랑스 비시 정부의 유대인 탄압을 고발한 장 들레(Jean Delay) 마르세이유 대주교를 고발하는 편지가 들어있었다. 


“유대인이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잘못도 없는 남녀와 아동을 대거 잡아들이고, 가족을 분리시켜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신성한 도덕률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인간과 가족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닌가?”(장 들레 주교, 사목교서, 1942년 9월 4일)


발부스케는 이 두 문서가 함께 들어있는 것을 보고 “두 문건이 이토록 대비되는데, (교황청에서) 침묵의 개념이 얼마나 가변성이 있었는가를 질문할 수 있게 해주는 예시”라고 말했다. 


 S. Bernay, La propagande antisémite contre les protestations épiscopales de l'été 1942, 2013, p. 245-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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