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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만 신학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 홍인식
  • 등록 2020-05-28 13:59:30
  • 수정 2020-06-04 11: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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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에 연재된  ‘기본소득과 신학’ 가운데 일부 입니다. - 편집자 주



“지난 몇 십 년 동안 우리는 기아, 역병, 전쟁을 통제하는 데 그럭저럭 성공했다는 것이다. 물론 완전히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이 문제들은 이제 자연의 불구해하고 통제 불가능한 폭력이 아니라 관리할 수 있는 문제가 되었다.” 


유발 하라리가 그의 저작 『호모 데우스』의 서문에서 한 말이다. 


하라리는 계속해서 지난 100년 동안 인류는 기술과학의 발달로 생물학적 빈곤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오늘의 문제는 배고파 죽는 것이 아니라 과식으로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라리는 세계에 가난이 아직도 남아있지만 기아로 죽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하는 매우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과연 그런가?


나는 이런 하라리의 언급은 지나친 낙관주의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신자유주의 정책이 가져올 수 있는 전 세계적인 파멸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소홀히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하라리의 기아문제의 접근은 정치경제적 접근을 무시한 것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라리는 기아의 문제는 오늘의 상황에서 인간의 정치, 경제 기술의 발전으로 극복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기에 이제 기아의 문제는 더 이상 인류의 의제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사실인가? 오늘 우리에게 가난의 문제는 더 이상 인류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30여 년 동안 온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심각한 상처를 인류에게 남기고 있다. 젊은 작가가 쓸쓸히 혼자서 죽어간다. 많은 대학생들이 등록금과 또 학자금 대출로 인한 빚의 중압감에 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이것뿐이겠는가? 오늘 우리들이 당면하고 있는 참혹한 사회 현실에 대한 예는 수 없을 것이다. 인류에게 있어서 가난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가난은 여전히 우리의 풍요로운 삶을 위협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참혹한 현실 뒤에는 신자유주의의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 소고에서는 우선적으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대하여 신학적 분석과 비판을 하고자 한다. 특별히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종교적 비판이 되어야 함을 강조할 것이며 이를 위하여 신자유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내재적 신학을 분석할 것이다. 두 번째 신자유주의의에 대한 종교-신학적 비판과 더불어서 이에 대한 신학적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세 번째 대안 모색의 연장선상에서 기본소득이 갖게 되는 신학-성경-목회적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신자유주의와 종교



일반적으로 경제모델을 두 가지 영역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부의 최대산출을 지향하는 경제모델이다. 이 모델은 과학기술과 관리체제의 혁신으로 고용을 줄이고 인건비를 감소하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다. 따라서 이 모델은 구조적인 실업률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다. 더욱이 이 모델은 노동인구의 자유로운 순환은 제한하면서 금융시장의 세계화와 자본과 상품의 자유 순환에만 중점을 두고 있으며 자연적으로 소수의 부의 축적을 목적으로 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경제 모델 하에서 빈부의 격차의 심화현상 다시 말하면 양극화 현상의 발생과 격화는 필연적이다.


두 번째 우리는 빈곤퇴치를 목적으로 하는 경제모델을 상정할 수 있다. 이 모델은 국가적 차원에서나 국제적 차원에서, 일자리 창출과 더 나은 소득의 분배가 경제적, 정치적 결정에 중점적인 기준이 되는 것으로 설정된다. 가난 퇴치와 부의 공정한 분배를 목적으로 하는 경제 모델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향상으로 인한 생산력과 이로 인한 부의 증가가 아니라 인간발전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계층의 상황으로부터 출발하여 한 사회의 경제-정치적 형태를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부와 가난이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는 혼합적인 사회 정황에서 그리고 부의 축적과 부의 분배를 동시에 상정하고 추구해야 하는 모순적인 현실 속에서 기독교회의 복음 선포는 추상적이고 죽음 너머의 세계만을 향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복음 선포는 분명한 의미에서 오늘의 경제, 사회, 문화, 정치 그리고 국제관계의 맥락에서 해석되고 정리되고 선포되어져야 한다. 특히 신자유주의 정책의 지속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상당수가 가난으로 인하여 비참한 삶을 영위해야만 하는 오늘의 삶의 현장을 외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정모는 “진정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복음이 되어야 하며 또한 현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죄의 실체를 드러내고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성령의 행동에 대하여 밝혀주는 선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선포로서 세상의 모든 희생자들에게 예수를 통하여 계시된 생명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종교가 된 신자유주의


위에서 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종교비판이 되어야 한다고 전제하였다. 반드시 막스의 이론을 도입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시장으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는 이미 종교의 영역에 그 자리를 잡고 있는 것에 대하여 의심할 수 없다.


오늘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 시장 혹은 신자유주의 정책은 어느 누구도 비판하거나 그 존재에 대하여 의문을 품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존재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특히 오늘 한국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들어서는 정부가 우파적 혹은 좌파적 성격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어떤 정부도 시장 존재자체를 문제 삼을 수 없다. 시장 존재자체를 문제 삼는 순간 그는 절대적 존재 다시 말하면 신성한 존재(신성, 神性)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단자가 되고 만다. 


이러한 현상은 시장은 이미 우리에게 종교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구체적인 현상이다. 심지어는 사회주의적 좌파 정책을 구사하고자 하는 정부들도 어김없이 시장 존재자체만은 부정하지 않는다. 시장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 없이 오늘의 사회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 자체가 불경스럽게 여겨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은 종교비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종교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비판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시장을 신으로 섬기는 신자유주의의 종교적 성격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작업은 아니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하여 연구하고 또 글들을 발표하였기에 이 부분에 대하여 자세하게 분석하거나 신학적인 증명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에 내재되어 있는 신학을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적으로 살펴보기를 시도할 것이다.


신학만 신학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경제학을 비롯한 모든 다른 학문도 어떠한 철학적 혹은 신학적 가정을 토대로 그들의 이론을 전개하곤 한다. 우리는 그것을 내재적 신학 혹은 내생적 신학(內生的, endogenous theology)이라고 부른다. 


성정모에 의하면 신자유주의는 일반 종교의 전반적인 특징들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낙원에 대한 약속, '원죄'의 개념, 혹은 세상에서 고통과 죄의 근본적 원인에 대한 설명,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길이나 치뤄야 할 대가(필연적 희생)’ 등이 그것이다. 성정모는 신자유주의의 내재적 신학을 통하여 신자유주의의 종교화가 이루어짐을 주장한다.


낙원에 대한 약속


중세시대에는 낙원이나 유토피아는 죽음 이후에 성취되는 종말론적 희망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 낙원에 대한 약속은 시장체제에 의해서 우리의 역사 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자본주의의 결실로서 신자유주의는 그리스도교가 죽음 후에 대하여 약속했던 약속의 이행자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적 전망으로부터 경제세계화의 과정을 변호하는 자들은 오늘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여러 모양의 문제들은 시장체제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체제의 불완전한 실천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따라서 완벽한 신자유주의적 시장체제가 완성되면 모든 인류는 낙원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인류에게 죽음 후가 아닌 오늘의 인간의 역사에서 이루어진 낙원에 대한 약속과 희망을 주고 있다. 이것은 종교적 약속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시장에 대한 한없는 믿음과 신뢰이다.


Milton Friedman은 자본주의비평가들을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한다. “자유 시장을 비난하는 논증의 대부분은 그와 같은 자유에 대한 믿음의 부족 때문이다.” 밀톤의 이 같은 증언에 의하면 이제 시장은 신적인 영역으로 들어섰음이 증명되고 있다. 시장은 이미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그 존재자체에 대하여 논증하거나 토론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마치 신의 존재는 신학의 전제사항이기에 신학의 주목적이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경제학은 시장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시장은 이제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희망과 믿음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신학의 중심적인 관심의 대상이 하나님 또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 형상에 대한 분별이듯이 경제학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시장의 구체적인 실천과 실현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이제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시장에 대한 체험과 시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계시(성서에 나타나는 계시)와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와 전통(교회의 전통)과 더불어 우리의 생활과 교회, 그리고 사회 속에 나타나거나 잠재되어 있는 시장(하나님)의 다양한 형상을 분별하기위한 노력을 계속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죄


낙원에 대한 약속이 사회적, 경제적 문제로 인해서 상처를 입은 현실과 맞부딪힐 때 그 고난과 악의 원인을 해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해결방법(시장체제의 완성)을 제시하는 것 외에도 사회의 문제와 위기의 근원을 설명해야한다.


모든 이념들이나 종교들처럼, 신자유주의 역시 사회문제의 근본적 원인에 대한 진단으로부터 출발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죄악의 근원이 되는 근본적인 악(종교적용어로는 죄)에서 시작한다. 성경말씀 중 이 주제를 다룬 것이 아담과 하와의 신화이며 그리스도교신학에서는 시간적 의미가 아니고 ‘근원’이라는 논리적 의미에서 이를 ‘원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사에서 저질러진 첫 번째 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죄에 대해 말하고 있다.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여받는 자리에서 Hayek은 신자유주의의 신학과 인식론, 인류학의 기초를 언명하는 강연을 하였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연상케 하는 ‘지식 소유의 시도’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하여 그는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려는 의식적인 목적을 가지고 수립되는 경제정책의 시도는 경제위기를 발생케 하는 근원이 되고 있으며 그것은 사회에 많은 해를 끼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 시도는 시장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 이외에도 인간의 지혜가 미치지 못하는 시장의 메커니즘에 대한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는 시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겸손하게 시장에 굴복하고 시장의 매카니즘으로 하여금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게 내버려 둠으로써 우리의 사회적 문제를 무의식적으로 해결하도록 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은 없다.


‘원죄’에 대한 다시 읽기는 시장에 대한 지식소유와 그것을 통하여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도록 하는 시도는 모든 경제-사회적 문제의 근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거의 모든 죄는 ‘선을 행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시장의 법칙을 이행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가장 힘 있는 자들의 생존과 가장 약한 자들의 죽음이라는 체제를 규정짓는 법칙을 따르고 선을 행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선을 찾기보다는 단지 악을 피하는 길을 찾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악은 무엇인가? 악은 선을 행하기를 원하며 그리고 그런 방법으로 시장의 방향을 주도하고 시장에 간섭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한 선은 자유 시장을 방해할 수 있는 원인이 되는 선을 행하길 원하는 유혹에, 나와 모든 다른 사람들이 빠지지 않도록 싸워야하는 것이다.


‘원죄’의 재해석으로 인하여 우리는 사랑의 명령의 전도를 목격하게 된다. 사랑은 더 이상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연대가 아니다. 사랑은 선을 행하는 유혹에 빠지는 것을 피하면서 시장의 본래의 이익(시장경쟁)을 보호하는 것이다.


필연적 희생


인간의 모든 욕구의 만족이 기술 발전으로 인한 부의 무한정 축적으로 가능하다고 믿을 때, 최고의 과학기술발전을 만들어내는 사회체제가 낙원 즉 ‘풍족한 삶’으로 가기 위한 진정한 길이라는 것을 믿게 된다. 다른 대안이 없이 시장체제가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을수록 모든 것은 시장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합법화 될 것이다. 이렇게 시장체제는 우리를 풍족한 삶으로 이끄는 ‘길과 진리’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는 시장논리의 절대적 군림은 사회경비절감과, 무능력한자(가난한자)들과 자본의 축적과정에서 필요 없는 사람들에 대한 배척을 의미함을 알고 있다. 가난한 자들의 고통과 죽음이, ‘구원자적인 발전’의 동전의 다른 한 면처럼 여겨질수록, 그 고통과 죽음은 그 발전을 위한 ‘필연적 희생’이라고 해석되어진다. 가난과 죽음은 여러 다른 사실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어떤 이들은 그 사실을 ‘살인’이라고 말하고 또 다른 이들은 ‘필연적 희생’이라고 해석한다.


죽음과 고통을 ‘필연적 희생’이라고 해석할 때 우리는 그릇된 순환 논법 앞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 희생이 시장체제의 ‘성직자’들이 약속한 결과를 내어놓지 못할 때 그 희생의 정당성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 희생이 헛된 사실처럼 여겨지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그로 인해 ‘성직자’들이 수백만 명의 살인자들로 간주되지 않기 위해서는 시장과 희생의 구원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재천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충분한 희생이 없었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말하며, 이와 같은 방법으로 앞선 희생이 쓸모없는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필연적 희생의 논리에 대한 충성심 이외에, 우리는 ‘오만한 자’(시장 앞에 겸손을 표하지 않고 시장에 간섭하기를 시도 하는 자들을 의미한다)들을 희생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원흉들이라고 비난하는 행위를 보게 된다. 투쟁적인 조합들, 민중운동, 민중교회와 공동체, 좌익당파들은 일반적으로 필연적 희생을 역행해 감으로써 낙원이 임하는 것을 지연시키는 죄인들처럼 취급된다.


그 희생의 논리가 세계 전체가 아니라 주로 서구의 사회적 정신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거의 대다수의 종교에서 우리는 희생의 신학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서구의 그리스도교 전통은 ‘희생 없이는 구원은 없다.’라는 개념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종류의 신학은 고통을 어떻게 극복해야할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의미를 주는 장점이 있음과 동시에 억압체제를 정당화 시키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사회적 정신의 기초에 끼친 희생의 논리의 영향에 대한 출현이 미칠 영향에 대한 인식은 우리사회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왜 자본주의 논리에 저항하지 않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시장체제의 ‘소비의 꿈’을 나누어 가지는 것 이외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낙원을 얻기 위함이나, 속죄함을 받기 위해(무능력, 패배, 가난한 자가 되는 죄) 희생의 요구가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홍인식 (순천중앙교회 담임목사)


▶ 다음편에 이어집니다.


⑴ 신자유주의의 양극화와 해방신학 그리고 기본소득 : 본 소고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해방신학적 접근과 해석의 관점에서 기술되었다. 따라서 본 소고에서 인용되는 문헌들은 스페인어 서적이 다수 임을 밝혀둔다.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김명주 옮김 서울: 김영사, 2017. 15쪽 


같은 책, 16~19쪽


구약의 예언자들에 의한 경제 권력의 우상적 성격에 대한 비판은 Walter Bruegemann의 The Prophetic Imagination, 2nd Edition, Augsburg Fortress, 2001 과 J.L Sicre "con los porbres de la tierra", La Justicia social en los profetas de Israel,(‘땅위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의 사회정의) Cristiandad, Madrid, 1975 를 참고하라. 


이에 대하여서는 Enrique Dussel, Las metaforas teologicas de Marx,(막스의 신학적 은유) Verbo Divino, Estella, Spain, 1993 를 참고하라


성정모, 시장, 욕망, 종교: 해방신학의 눈으로 본 오늘의 세계, 서울: 서해문집, 2017, 21쪽


하비 콕스. 신이 된 시장: 시장은 어떻게 신적인 존재가 되었나. 우강은 옮김, 문예출판사. 2016을 참고하라. 


Hugo Assmann, La idolatria del mercado(시장의 우상숭배), DEI coleccion Economica-Teologica, San Jose, Costa Rica, 1997. 131 쪽 


성정모, 위의 책, 27쪽. 성정모는 이 표현을 우고 아스만에서 빌려온다.


같은 책, 28쪽


본 소고는 성정모의 같은 책 27쪽에서 87쪽 까지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소개한다. 


Hugo Assmann, op.cit., 181쪽


지금까지 살펴본 신자유주의 시장의 모든 신학은 자본주의 시장체제가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성육신이라는 이론을 옹호하는 신학 서적과 그러한 내용의 논문들을 계속하여 발표하는 미국의 Michael Novack과 같은 전문적인 신학자들도 있지만 어느 특정한 신학자의 주장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과 그들의 이론에서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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