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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신을 거부하고 새로운 인간성을 발견하다 - [이기상-신의 숨결] 신(神)없이도 윤리도덕은 가능한가 ②
  • 이기상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0-06-29 10:16:49
  • 수정 2020-06-29 10: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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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 페르츠는 예수를 찾아가 이렇게 경고한다.


“나자렛 사람 예수여, 왜 또 우리를 간섭하려 드는가요? 우리들 애통의 눈물과 노고의 땀으로 일구어 논 대지에서 다시 우리를 내쫓으려 하는가요? 나는 당신을 아오. 당신은 거짓 인자(人子)며, 거대한 독선의 아들, 그러잖아도 그을리고 있는 이 대지에 더 큰 불을 지르러 왔오. (…) 그러나 제발 이대로 돌아가시오. 가서 당신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시오. 이 땅에는 그 분이 받아야 할 아무런 빚도, 주장할 어떤 권리도 없다는 것을. 우리를 지금 이대로 놓아두는 것이 오히려 그분을 높여 주는 사랑이며 축복이라는 것을.”(198)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참 “사람의 아들” 아하스 페르츠의 입장이 어느 곳에서보다 여기에서 분명하고 명확하게 밝혀지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초월신의 거부다. 초월신에 대한 거부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사람은 「신의 죽음」을 선포한 니체다. 여기서 우리는 한번 니체의 초월신의 거부에 얽힌 철학사적 배경과 그것이 갖는 종교철학적인 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초월신의 거부 ― 인간성에로의 해방


니체는 잘 알려져 있듯이 이미 지난 세기의 말에 「신의 죽음」을 선포하였다. 그의 그러한 선포는 초월신에 대한 사고가 밑바탕이 없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초월자에 대해 논하는 형이상학이 무조건적인 것에서부터 조건적인 것을 신뢰할 만하게 이끌어내던 능력을 상실한 이래, 무조건적인 것은, 즉 초월자는 조건적인 것(현실)과는 분리된 비사유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칸트의 존재론적 신존재 증명에 대한 철퇴 이래 초월과의 결속, 「배후 세계」 왕국과의 결속의 종말을 뜻하는 고전 형이상학의 종말이 여러 곳에서 두드러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분리가 그때까지 신에 대한 믿음과 관련해서는 대체로 아무런 귀결을 산출해내지 못했다. 여기에 니체는 과감하게 이 마지막 결론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죽음은 니체에게 있어 헤겔에서와 같이 어떤 변증법적인 통과 단계가 아니며, 「부활」에 앞선 「사변적인 성금요일」이 아니라, 초월신에 대한 믿음이 갖는 무의미함에 대한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확신이다. 니체는 그의 철학저서에서 이러한 초월신의 상실로부터 귀결돼 나오는 모든 결과들을 산출해서 정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런 식으로 허무주의자로서의 니체만을 강조할 때 우리는 흔히 그가 본래 극단적인 유한성의 철학자란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절대자의 형이상학의 종말과 신으로부터의 결별을 잘 궁구해 볼 때 그것은 니체에게 있어서 아주 뛰어난 긍정적 면을 갖고 있다. 그것은 곧 인간이 자신의 본래의 가능성에로 내딛게 되는 해방의 행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교회, 그리스도 그리고 신에 대한 니체의 공격은, 그로 인해 인간의 위대함이 뒤틀리고 있는 거짓된 인간상에 대한 공격으로서만 그 의미를 갖는다. 


초월의 배제로 인해 삶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규정되면서 이전에는 초월신과 절대자에게 돌려졌던 근원적 힘이 역사적 생활세계에 주어지게 된다. 이렇게 되어 종교를 「세속적으로」 새롭게 해석하려는 수많은 기획들에 자유로운 길이 열리게 된다. 그 자신 속세에서 산 인간이었던 예수가 어떻게 자신의 믿음을 세속적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를 묻는 식의 질문이 종교적 내용을 초월적으로 확보하려 했던 그 모든 시도의 자리에 들어서게 된다. 초월적인 종교적 의식이 문제시되자 동시에 세속적인 종교적 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봇물 터지듯이 열리게 된다. 


이러한 초월신에 대한 거부와 축을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성은 이성, 정신, 영혼 등으로 지칭된 인간의 보편적 특성이 아니라 육체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생생한 개인을 염두에 둔 인간성이다. 이 점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인간은 누구인가


근대의 철학적 업적을 「개인의 발견」이라 하지만 근대에서의 「개인」이란 어디까지나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개인으로서 「사유하는 나」로 표현될 수 있는 개인이다. 여기에 윤리적·도덕적 측면을 강조하여 칸트가 인간을 「행위하는 나」로 규정하자 현대적인 의미의 「인격」이라는 개념이 비로소 제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칸트의 인격 개념에 논리적·서술적 주체로서의 「초월론적(선험적) 인격」, 도덕적 주체로서의 「윤리적 인격」, 그리고 경험의 주체이며 대상으로서의 「심리학적 인격」 등이 포함되며 인격이 갖는 본질적인 차원이 다 궁구된 것 같긴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도 「나」는 어디까지나 「지성적으로 행위하는 나」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 


개인으로서의 「나」에 본질적으로 「육체」가 속한다는 것이 아직 고려되지 않았다. 철학에서 육체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 비로소 실존철학에 의해서이다. 20세기는 한마디로 「육체의 발견」이라고 칭해질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육체가 철학의 핵심주제로 부각이 된다.


육체의 발견과 더불어 인간에 대한 정의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종에 해당되는 규정인 「이성적 동물」이라는 것은 애당초 인간 개개인이 갖고 있는 독특함을 「추상」해 버린 생물학적인 차원에서의 정의였다. 즉 생명을 갖고 운동적인 감각기능을 가진 동물이기는 하되 이성적인 능력을 갖춘 고등동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시켜주는 표징이 「이성」이기에 인간은 자신의 동물적 차원을 가능한 한 억제하여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독특한 차원을 견지해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동물과 똑같은 육체를 가진 것을 부끄러워하며 육체를 갖고 있으면서도 육체가 없는 천사처럼 살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인간의 본래적인 차원이 영혼, 정신, 지성, 이성 등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주장이었다.


▲ Gustav Klimt < Death and Life >


이제 인간은 육체를 가진 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인간의 「육체를 가짐」이 벌써 다른 동물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보기 때문이다. 육체를 가진 인간은 다른 동물처럼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 「죽음」을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속한 것으로 보아야지 죽음 뒤의 저세상에서의 육체 없는 영원한 삶을 본질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삶과 죽음 사이의 주어진 시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유한한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숙명」이다.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인간은 자기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며 자신과 주변을 전체적으로 둘러보고 살펴보며 친숙한 자신의 세계로 만들어나간다. 어느 누구도 나의 죽음을 대신해 줄 수 없듯이 어느 누구도 나의 삶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이렇게 이제 인간은 어느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 신을 위해서도 민족이나 국가를 위해서도 아닌 일차적으로 ―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즉 「각자 자기의 존재를 존재해야 하는 그런 존재」로 규정이 된다.


이렇듯 실존적으로 규정된 인간의 고찰에서 비로소 「개인」이 완전하게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이렇게 볼 때 현대는 근대에서 시작된 「개인의 발견」이 그 완성에 이르게 된 근대의 완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인간은 각기 자기만의 고유한 육체를 가진 각자의 고유한 인격성 속에서 주어진 자신의 존재를 과제로 떠맡아 그 존재를 이행해 나가야 하는 「가능존재」가 된다. 실존으로서의 인간은 자신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부모가, 교회가, 사회가, 국가가, 민족이, 신이 내 삶의 목표를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 스스로가 살아야 할 존재방식을 선택 결정해야 하며 그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러한 실존철학적 경향을 우리는 이문열의 주요 작품 전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젊은날의 초상』, 『영웅시대』, 『변경』에서 그러하다. 


우리는 이제 다음에서 이러한 초월신의 거부를 통한 인간의 인간성에로의 해방을 호소하고 있는 『사람의 아들』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는 육체를 가진 인간을 대변하며 말씀보다는 빵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주장의 관점이고, 둘째는 정신적인 행복이 아닌 육체적인 행복을 강조하며 하늘에가 아닌 이 지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립해야 함을 주장하는 시각이고, 셋째는 이에 따른 구원관의 변화이다.


▶ 다음 편에서는 ‘빵이냐 말씀이냐’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지난 편 보기


이문열, 『사람의 아들』, 민음사 1988. 앞으로는 여기서처럼 단순히 쪽수만을 괄호 안에 표기한다. 이문열의 작품에 대한 해설서로는 다음과 같은 책들을 참조했다. 김윤식 외, 『이문열론』 (도서출판 삼인행, 1991). 류철균 편, 『이문열』 (도서출판 살림, 1993). 김욱동, 『이문열.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의 문학』 (민음사, 1994).

성금요일은 그리스도교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날을 기념하여 만든 말이다. 우리가 단순히 감각적인 경험의 차원에서 이 성금요일의 사건을 본다면, 그것은 단순히 한 나자렛사람 예수가 십자가형을 언도받고 죽은 날이다. 그러나 헤겔이 요구하듯이 사변적으로」, 다시 말해 경험을 뛰어넘어 그 경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정신적인 것, 초감각적인 것, 신적인 것을 통찰하게 될 때, 그것은 「부활」이라는 커다란 구세사적인 맥락에서 그 본래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⑶ 참조 K. 부흐텔, 『철학과 종교 : 현대의 종교철학적 논쟁』: 이기상 옮김, (서광사, 1989), 23 이하.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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