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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약자에게만 이토록 가혹한 것일까?
  • 김태형
  • 등록 2020-07-02 11:50:56
  • 수정 2020-07-02 11:5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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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는 신학 나눔의 새로운 길을 찾아 ‘사건과 신학’이라는 표제로 다양한 형식의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달, 이 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신학 이야기를 나누는 ‘사건과 신학’. 이번 주제는 ‘가학적 폭력의 사회’입니다. - 편집자 주



오늘날 한국 사회는 약자들을 학대하는 사건들로 조용할 날이 없다. 아파트 경비원을 폭행한 사건, 연달아 발생하고 있는 아동학대 사건, N번방 등의 디지털 성착취 사건, 동물학대, 노인학대, 장애인학대 등 그 사례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오늘날 한국이 약자를 사랑하고 감싸 안는 사회가 아니라 차별하고 무시하며 나아가 학대하는 사회가 된 데에는 여러 원인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지면 관계상 여기에서는 가장 중요한 몇 가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학대 사회의 객관적 조건


한국이 약자를 학대하는 사회로 전락한 분기점은 90년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80년대에는 아예 왕따라는 말 자체가 없었지만, 2000년대가 되어서는 왕따가 일반화되어 사회 문제가 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한국은 90년대부터 경제적 격차가 크게 벌어짐으로써 대단히 불평등한 사회가 되었다. 80년대에 중소기업 직장인의 소득은 대기업 직장인의 90% 이상이었다. 


예를 들면 대기업 직장인이 월 100만 원을 받을 때 중소기업 직장인은 90만 원 이상을 받았다. 이렇게 소득 격차가 적을 때에는 대기업 직장인과 중소기업 직장인을 동질적인 존재, 즉 똑같은 인간으로 바라보게 된다. 오늘날 중소기업 직장인의 소득은 대기업 직장인의 60% 정도에 불과하다. 소득 격차가 큰 폭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렇게 소득 격차가 벌어지면 대기업 직장인과 중소기업 직장인을 서로 다른 존재, 즉 아예 급이 다른 인간으로 인식하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소득 격차가 미친 듯이 확대되자 사람들을 돈을 기준으로 위계화시켜 바라보는 풍조가 만연되었고 그 결과 한국은 다층적 위계 사회가 되었다. 다층적 위계 사회란, 예를 들어 말하자면, 사람들을 돈을 기준으로 100층의 위계로 구분하고 그에 따라 차별하고 학대하는 사회이다. 대기업 화이트칼라는 중소기업 화이트칼라를 학대하고, 중소기업 화이트칼라는 영세기업 화이트칼라를 학대한다. 화이트칼라들은 블루칼라를 차별하고, 대기업 블루칼라는 중소기업 블루칼라를 학대하며 정규직 블루칼라들은 비정규직을 학대하는 것이 바로 다층적 위계 사회이다. 불평등의 심화, 즉 격차가 확대됨으로써 한국이 다층적 위계 사회가 된 것이 약자 학대 현상의 가장 중요한 객관적 조건이다.


약자를 향한 분풀이


다층적 위계 사회는 모든 사람들을 피학대자인 동시에 학대자로 만든다. 100층짜리 위계 사회의 50층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51층 이상은 자기보다 높은 위계이고 49층 이하는 자기보다 낮은 위계이다. 그는 자기보다 높은 위계의 사람들한테서 차별과 무시를 당하며 살아간다. 소위 갑질을 경험하기도 할 것이다. 위계에 기초하는 차별과 무시는 명백한 학대이다. 대형차를 타는 사람이 소형차를 타는 사람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것은 그를 인간으로서 존중하지 않으며, 자신과 평등한 인간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상대방을 자신과 평등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는 열등하고 비천한 존재로 낙인찍는 것이 학대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차별과 무시 나아가 학대를 당하면 당연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분노와 같은 감정은 반드시 표출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분노를 자기보다 더 높은 위계의 사람들에게 표출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경우 사람들은 흔히 자기보다 낮은 위계의 사람들, 즉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향해 분노를 표출한다. 아동기관에서 아동을 학대하는 사람이 그 기관의 기관장이나 윗사람들도 학대할까? 그들은 오직 힘없는 아이들만 학대한다. 다층적 위계 사회는 모든 사람들을 피학대자로 만들고 피학대자들의 누적된 분노는 탈출구를 찾다가 분풀이 대상인 약자를 만나면 폭발한다.


권위주의적 성향


반복적으로 학대를 당하다 보면 권위주의적 성향이 강해진다. 권위주의적 성향이란, 간단히 말해, 강자에게는 비굴하고 약자에게는 잔인한 성향이다. 권위주의적 성향은 무력감에 기초해 만들어진다. 반복적으로 학대를 당하는 데도 저항하지 못하면 무력감이 심해진다. 목이 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무력감이 심해지면 그 반대급부로 힘을 과도하게 갈망하게 된다. 힘에 대한 과도한 갈망은 강자에 대한 굴종적인 태도만이 아니라 강자를 찬양하고 숭배하게 만든다. 강자를 찬양하고 숭배함으로써 힘이 센 강자를 자신과 동일시하거나 그의 힘을 자신이 공유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수 있어서다. 동시에 힘에 대한 과도한 갈망은 약자를 괴롭히고 학대하려는 충동을 유발한다. 


사람이 가진 힘 중에서 가장 강한 힘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힘이고, 그 다음으로 강한 힘은 사람을 학대할 수 있는 힘이다. 자신이 사람을 학대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이 무력한 존재가 아닌 힘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힘을 과도하게 갈망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력감을 방어하고 보상하기 위해 나아가 자신이 힘이 세다는 느낌을 만끽하기 위해 약자를 학대한다. 권위주의적 성향이 성격적으로 굳어지면 아예 권위주의적 성격이 된다. 권위주의적 성향이나 성격자가 증가하면 약자에 대한 학대가 심각해진다.


약자 학대는 사회병리 현상


오늘날 한국인들이 약자를 괴롭히고 학대하는 가장 큰 원인은 많은 이들이 일상적으로 학대를 당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자신을 학대하는 대상을 향해서 정당하게 분노를 표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아버지한테 학대당하면서 사는 형이 아무 죄 없는 동생을 때리듯이, 한국인들은 자신을 학대하는 사회나 잘난 사람들에게는 저항하지 못하고 애꿎은 약자들을 공격하고 있다. 약자에 대한 폭력이나 학대를 근절하려면 한국인들이 서로 싸우지 말고 연대함으로써 분노의 방향을 진정한 학대자인 잘못된 사회로 돌려야 한다. 불평등을 해소함으로써 사람들을 학대-피학대 관계에 얽어매고 있는 다층적 위계 사회를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개혁해야 한다.


김태형(사회심리학자, 심리연구소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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