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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신을 뒤쫓을 때가 아니라 마중할 때다
  • 이기상
  • 등록 2020-07-13 10:34:52
  • 수정 2020-07-13 17: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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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으로 아하스 페르츠 내지는 그를 등장시킨 민요섭의 신관(神觀)을 정리해 보기로 하자.


말씀의 대변인이며 전파자 교육을 받으며 자라던 아하스 페르츠는 어느 날 빵이 없는 비참한 현실세계에서 고통 중에 버림받은 채 사는 사람들의 실상을 보고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모든 것을 줄 수 있다는 데 대해 회의하게 된다. 결국은 자신이 믿고 있는 야훼 하느님이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 아니라 잔혹한 복수와 분노의 하느님임을 깨닫고 새로운 신을 찾아 길고 긴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는 십년 넘게 이집트, 시리아, 가나안 등지의 중동아시아 지방뿐 아니라 멀리 인도까지 배회하며 신을 찾아다니다가 로마에도 체류한 뒤 고향인 예루살렘에 돌아온다.


새로운 신을 찾아 나선 긴 방황에서 그가 얻은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방인들이 믿는 신에 대한 종합적인 결론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믿었던 야훼신에 대한 최종평가이다. 이문열은 그것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방인의 신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고통과 결핍, 공포와 원망(願望)이 빚어낸 우상들로밖에는 비쳐지지 않았으며, 그들을 향한 찬가 또는 기구는 그런 것들에 시달리는 인간의 절규로만 들렸다. 그 신들로부터 왔다고 믿어지는 은총이나 기적이라는 것도 실은 그 같은 인간의 절규가 공허한 우주의 벽에 부딪혀 되돌아 온 메아리 또는 그 메아리에 대한 인간의 황홀한 착각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100)


즉, 아하스 페르츠는 종교적 현상들을 인간 중심적인 투영으로 어떤 조야한 환상의 결과로 보는 셈이다. 이것은 지난 시대 포이에르바하, 프로이트를 거쳐 우리시대의 신학자 불트만이 대변하고 있는 입장이기도 하다.


“최고의 본질은 인간의 자기본위, 인간의 불안과 소망, 그의 자기보존욕구와 행복욕에 의해 요구될 수 있다. 신에 대한 이야기에 의해 의미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욕구하는 것 이외의 어떤 다른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신이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욕구하고 있다. 인간은 그가 그 자신의 소망과 두려움에 의해 내몰리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자신이 기이한 것 또는 수수께끼에 완전히 내맡겨져 있음을 알기 때문에 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기의 소망에 대한 꿈과 악몽을, 자기의 삶에 완성과 멸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어떤 존재로 실체화시켜 버린다”


이방인의 신에 대한 신앙과 교리체계 저 밑바닥에서 아하스 페르츠가 본 것은 불합리와 악덕과 부패였다. 그는 그들의 신화체계 전반에서 불거지는 상상력과 논리의 저급성, 교의의 바탕을 흔들어 놓는 윤리성의 결여, 잦고 낭비적인 의식과 제례, 승려가 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 승려를 위해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주는 신성의 속화, 민중의 향락심리에 편승한 승려계급의 타락, 터무니없는 미신과 부적들의 남용 같은 것을 보았다(104).


그 다음 그는 자신이 믿어 왔던 야훼신도 여러 다른 이방인의 신들과 접촉하여 혼합 절충되어 만들어진 형태라는 것을 깨닫는다. 


“원래 야훼는 엘 사따이산에 은거하던 목양자의 신에 불과했다. 거기에 모세의 광기가 접한 호렙산의 영이 더해져 야훼는 곧 가나안 쟁취를 위한 무자비한 군신으로 변질되었다. 그 뒤 엘리야와 호세아는 그에게 농경신의 권능을 부여했고, 아모스와 이사야를 통해 민족의 신에서 우주의 절대유일자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바빌론에서 페르샤인들의 사탄과 종말론을 도입함으로써 우리의 야훼는 완성되었다. 결국 야훼가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야훼를 만들었을 뿐이다”(169) 


이러한 야훼를 아하스 페르츠는 경멸하듯이 이렇게 묘사하기도 한다.


“메소포타미아 신들의 사생아. 일찍이 가나안에 버려졌다가 이집트로 흘러 들어가 아톤과 야합한 뒤 다시 돌아와서는 바알과 내연관계를 맺음. 훗날 바벨론에 끌려가 아후라 마즈다의 씨를 받은 적도 있어 앞으로 어떤 혼혈의 자식을 낳을지 예측하기 어려운 논다니”(169)


이렇듯 다양한 각양각색의 신들과 그에 대한 믿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아니면 단지 인간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만든 허구일 뿐인가?


아하스 페르츠는 야훼를 포함해 그 수많은 민족과 지방의 신들이 말, 특히 이름만이 확실할 뿐인 순수한 추상 이외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는다. 마치 저 하늘에서 이글거리고 타는 태양에 대해 수많은 민족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이름이야 인간이 지어내고 만들어낸 것이긴 하지만 저 하늘의 태양은 인간의 산물이 아니다. 그래서 아하스 페르츠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신은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저 태양이 분명한 실체로 불타고 있는 것처럼 그의 섭리도 실존의 숭고한 빛으로 이 무한한 시공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179)


여기서 그는 자신이 여지껏 실체의 신이 아닌 그저 말(이름)뿐인 신을 찾아다녔음을 깨닫고 이렇게 말한다. 


“돌아가자, 헛된 헤맴은 이것으로 넉넉하다. 이제는 자기 속으로 돌아가 침잠할 때이며, 새로운 개안을 기다려 실체로서의 신과 마주할 때이다. 내가 신을 찾아 떠날 때가 아니라 신이 나를 찾아올 때이며 뒤쫓을 때가 아니라 마중할 때이다. 신은 반드시 내 길고 애절한 부름에 ― 지난 반생의 쉬임없는 추구에 응하실 것이다”(180)


▲ Alphonse Mucha < Woman in the Wilderness >


아하스 페르츠는 고향으로 돌아와 실체의 신을 만나기 위해 쿠아란타리아라는 광야에 나가 40일간의 단식과 명상에 들어간다. 드디어 그가 찾던 「위대한 영」을 대면한다.


“사람의 아들이여, 이제 때가 왔다. 그대의 길고 애절한 부름은 드디어 나를 무위와 무명에서 끌어냈다. 이제 그대 지혜의 독수리는 천공을 높이 날고 그 뱀은 대지를 깊이 꿰뚫으리라. 지난 날 너는 수많은 이름으로 나를 불렀으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내 여러 얼굴에 절했으나 나는 받지 않았다. 모두가 이 오늘을 위함이었으며, 메마른 대지가 단비를 빨아들이듯 갈구에 지친 그대의 영혼이 보다 뚜렷이 나를 보고 보다 똑똑하게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189)


그런 다음 아하스 페르츠와 마주 앉은 그 위대한 영은 하루 낮 하루 밤을 함께 하며 기나긴 얘기를 들려준다. 왜곡되고 와전된 창조의 진실로부터 시작해서 우주의 시원과 궁극에 대해, 인간의 숙명 및 그 지향과 당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태초에 한 커다란 존재가 있었으니 우주의 모든 것은 그 속에서 하나였다. 네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니 너희 족속의 신화와 그 신의 이름을 빌어 말하리라. 야훼의 선과 나의 지혜는 저 태초의 존재를 얽고 있던 씨(經)와 날(緯)이었다. 처음 그 존재 유일의 자각자로 출발한 우리는 이윽고 새롭게 창조될 우주의 최고정신으로 스스로를 가다듬어 갔다. 너희에게 이르러서는 오랜 세월의 갈고 닦음이 있은 뒤에야 정의와 자유란 이름으로 부분적으로나마 모습을 드러내게 될 두 정신이었다”(238 이하)


이렇게 해서 서서히 드러나는 민요섭의 최종적인 신의 모습은 이격일체(二格一體) 또는 양성일체의 신인 셈이다. 이 동격이며 일체인 신이 천지창조 이후 불화를 일으켜 지금 인류가 겪는 이와 같은 모순적 상황이 전개됐다는 얘기다. 창조 뒤의 만족한 피로 속에 지혜의 영이 침묵으로 돌아간 뒤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창조의 완성과 함께 당연히 끝났어야 할 말씀이 한 의지의 권화(權化)로 남아 모든 존재를 위압하고 속박하기 시작한 일이었다. 홀로 남은 야훼의 선이 끊임없는 말씀의 홍수를 내려 우리 양성의 조화로 구현된 만물을 그의 법칙만으로 묶고, 본래 엄연하던 존재의 본질을 그의 자의 속에 가둬 두려 한 것이었다”(240)


지혜의 영은 창조 이후 야훼의 선의 독주로 인해 야기된 자기분열의 상태를 부정하여 마감하고 새로운 일치의 시대를 열기 위해 사람의 아들인 아하스 페르츠 앞에 나타났음을 밝힌다.


“선이 홀로만을 주장할 때 독선이 되듯 지혜가 홀로만을 주장하면 악이 될 뿐이다. 독선을 악으로 바꾸어본들 물에 빠진 이를 건져 불구덩이에 내던짐과 무엇이 다르랴. 나의 부정은 더 큰 긍정을 위해 있었으며, 우리 양성의 대립도 궁극으로는 거룩한 조화에 이르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나는 저 태초의 유일자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했으나, 이르고자 하는 것은 변증의 용광로를 거쳐 고양된 우리들의 합일이었다. 만약 너희가 진정으로 믿고 섬겨야 할 신이 있다면 그는 바로 그때의 하나로 된 우리이다”(252 이하)


여기서 이문열이 서술하고 있는, 인간이 진정으로 믿고 섬겨야 할 신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에서 귀결되어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러한 신의 형상이다. 선과 지혜, 정의와 자유가 조화를 이루고 그 조화 속에 이 지상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아닌, 윤리와 도덕 위에 세워져야 하는 평화로운 인간의 나라의 건립을 보장하는 신, 인간의 흠숭과 예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지상의 나라를 전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맡겨 두고 저 하늘에서 자족하며 평안히 안식을 취하고 있는 신의 형상이 그것이다.


“그날의 ‘하나된 우리’는 너희 믿음이나 섬김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위대하고 또 완전하므로. 번거로운 제례와 의식으로 시간과 재물을 낭비하는 너희를 우리는 오히려 민망히 여기리라. 우리의 분별과 간섭이 없어진 뒤에도 너희 사이에서 선은 존중되고 사랑과 자비는 장려받을 것이다. 우리가 기뻐해서가 아니라 그게 너희에게 이롭기 때문이다. 악은 여전히 비난받고 미움과 다툼은 억제 받아야 한다. 그 또한 우리가 싫어해서가 아니라 너희에게 해롭기 때문이다. 너희는 지음 받는 그 순간에 이미 완성되었다. 우리는 몸소 분별해야 하는 번거로움 대신에 너희에게 선을 부어넣었고, 간섭하는 수고 대신에 지혜를 내렸다. 그 선과 지혜를 정의와 자유로 나란히 누리게 되는가 독선과 악으로 스스로의 멍에를 삼는가는 오직 너희 손에 달렸다. 그날에는 부질없이 하늘을 우러러 우리를 찾지 말아라. 우리는 땅 위에 너희를 세웠으니 구원도 용서도 땅 위에서 구하라. 진실로 이르노니, 너희를 억압하고 우리의 거룩함을 보탤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희에게 빼앗아서 우리에게 더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너희를 낮추고서 우리를 높일 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너희 고통 위에 우리 즐거움이 있을 리 없고, 너희 슬픔이 우리 기쁨이 될 리 없다. 너희를 가장 잘 섬긴 자가 곧 우리를 가장 잘 섬긴 자이며, 모든 것은 너희에게서 일어나고 너희에게서 끝나리라”(253 이하)


그리스도교를 떠받치고 있는 두 축인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사랑 중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빠지고 오직 이웃사랑, 인간사랑만이 남는다. 여기의 “하나로 된 신”이 곧 아하스 페르츠의 후계자인 민요섭과 조동팔이 찾아낸 신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벌써 오래 전부터 한 신을 찾아냈소. 그 신은 우리들의 오랜 구도의 결정이자 우리 이성의 최종적 추출물이었소. 선악의 관념이나 가치판단에 관여하지 않는 신,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시인하는 신, 천국이나 지옥으로 땅 위의 삶을 간섭하지 않는 신, 복종과 경배를 원하지 않고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지 않는 신, 우리의 지혜와 이성을 신뢰하며 우리를 온전히 자유케 하는 신”(264)



▶ 다음 편에서는 ‘신(神)없이도 윤리도덕은 가능한가’ 마지막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지난 편 보기


⑴ R. Bultmann, “Das Problem der natürlichen Theologie (자연신학의 문제)”,  Glauben und Verstehen (신앙과 이해),  1. Band, (Tübingen : 1961), 300.  K. 부흐텔, 『철학과 종교』 52에서 다시 따옴.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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