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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중심 ‘환경문제’에서 생명 중심의 ‘생태보존’으로 - [글로벌생명학] 2 : 지구의 안부를 묻자
  • 이기상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0-08-03 10:34:57
  • 수정 2020-08-03 10:4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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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 속에 담긴 시대상


흔히 사람들이 주고받는 인사말 속에는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적 분위기가 담겨 있다. “밤새 안녕하셨어요?”라는 인사가 가장 절실했던 때는 아마도 한국 전쟁 당시였을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친지들이 사라지거나 변을 당하던 그 시절, 밤새 무사했는지를 묻는 것은 생명과 직결된 물음이었다. 또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삶터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쥐며 살아야 했던 시절에는 “식사하셨어요?”라는 인사가 서로의 정을 확인하는 관심의 표현이었다. 산업화 이후 정치와 경제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인사말도 바뀌기 시작했다. “좋은 아침!” 미국과 유럽의 인사를 흉내 낸 이 세련되고 멋스러운 말 속에는 한창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선진국의 꿈이 담겨 있었다. 그러다 IMF가 터져 온 국민이 어려운 시절을 겪은 후에는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와 덕담이 최고의 인기를 끌기도 했다. 


2019년 대한민국은 일본, 독일, 미국,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에 이어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30-50클럽에 들어갔다. 30-50클럽은 1인 국민소득 3만 불 이상, 인구 5천만 명 이상인 국가를 말한다. 세계적인 석학이자 미래학자인 새뮤얼 헌팅턴(Samuel Phillips Huntington)은 < 문화가 중요하다 >라는 책에서 한국의 발전 사례를 아프리카의 가나와 비교하며 극찬한 바 있다. 헌팅턴은 한국과 가나의 국민소득이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76달러로 비슷했지만, 30년 만에 한국이 가나를 15배 차이로 앞선 점을 지적하며 그것이 다 문화의 힘이라고 치켜세운다. 


그렇다. 국민 모두가 합심하여 ‘부자 되세요!’를 외치며 달려온 60년. 우리는 많은 것을 이루었고,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했다. 과연 우리는 진정한 부자의 삶을 살게 된 것일까?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취업, 신뢰, 사회적 유대, 일의 보람 등 국민들의 삶의 질을 측정하는 행복지수는 OECD 국가 중 최하위다. 그뿐인가, 우리나라는 15년째 OECD 회원국 중에서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예외적으로 2017년에는 인구 270만 명 규모의 작은 나라 리투아니아가 1등을 했는데 그때도 우리는 2위를 기록했고 이듬해인 2018년에 다시 1위를 차지했다. 


주관적 건강과 학교생활 만족도, 삶의 만족도, 소속감, 주변 환경 적응, 외로움 등 6가지 영역을 묻는 주관 행복지수에서도 한국의 어린이와 청소년은 OECD 23개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10대에서 30대 사이 한국 청년들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며 최근 통계에 따르면 청소년 3명 가운데 1명이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고 한다. 이것이 2020년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성장의 그늘 속에 파괴된 삶의 터전


1985년 오랜 독일 유학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대학 강단에 섰을 때 이야기다. 당시 전국은 민주화의 열기로 뜨거웠다. 학교 역시 연일 계속되는 시위로 교정에 최루탄 가스가 사라질 날이 없었다. 나는 학생들과 독일 녹색당의 출현 배경과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논의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학생들 중에는 내 이야기가 배부른 선진국의 문제이고, 그들은 개도국이 민주화되고 산업화되어 자신들과 동등한 처지에 오게 될까봐 관심을 환경문제로 돌리는 것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환경에 대한 관점과 태도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동안 우리는 환경과 관련된 많은 사건들을 겪었다. 시화호 사건, 태안반도 기름유출 사건, 천성산 도롱뇽 사건, 고리 원전 건립 반대, 부안 핵 폐기장 건설 반대,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 삼보일배, 4대강 정비사업 반대시위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제 삼천리금수강산이라는 말은 옛말이 됐다. 물도 마음 놓고 마시지 못하고, 자동차 배기가스와 공장에서 뿜어대는 온갖 유독가스, 황사와 미세먼지로 인해 공기도 심각하게 오염된 상태다. 토양 오염과 유전자 조작, 각종 식품첨가물 등으로 인해 야채도 고기도 마음 놓고 먹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듯 환경오염이 심각해지면서 일상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환경문제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체감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짚고 가야 할 사안이 있다. 그것은 환경 문제가 단순히 ‘환경’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환경 보존과 경제성장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가치가 정면충돌하면서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을 강조하는 목소리들은 우리 모두의 행복증진을 위해서라고 큰소리를 치지만 그것은 결국 가진 자들을 위한 성장이며 편이일 따름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성장의 그늘 뒤에 가려진 채 폐기물만 덮어쓰며 살게 된다. 이것은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부유한 나라의 번영을 위해서 가난한 나라의 대부분이 그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깨끗한 물, 맑은 공기, 풍족한 음식은 꿈도 못 꾼다.


인간 중심의 ‘환경문제’에서 생명 중심의 ‘생태보존’으로


환경문제를 단순히 ‘환경’의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는 논의는 1980년대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쟁점은 ‘환경’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공격이었다. 환경 개념이 인간중심적인 시각에서 나왔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환경’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 1960년대 필자는 학교에서 실시하는 ‘가정환경조사’라는 것을 해본 경험이 있다. 그 항목에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자기 집인지, 전세인지, 월세인지부터 시작해서 부모님의 월수입은 얼마인지, 전화, 텔레비전, 자동차가 있는지 등의 질문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렇듯 ‘환경’이라는 말 속에는 인간이 자신의 주변을 삶의 터전으로 바꾸어나가면서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공간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환경문제에 대한 새로운 문제의식은, 지구 전체를 환경으로 삼아 삼라만상과 동식물 모두를 인간을 위한 도구, 원자재, 식료품쯤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시작됐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이 지구의 주인이고 나머지 다른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한 방편이고 수단일 뿐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지구를 모든 생명체들이 함께 살아가야 할 삶의 터전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생태학적 발상이다. 인간이 자신의 주위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자신을 위한 삶의 공간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환경’이라면, ‘생태’는 생명체가 자신의 주변 환경과 관계를 맺으며 둥지를 만들어나가는 삶의 양태를 지칭하는 말이다. 1866년 독일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은 ‘생태학(Ökologie, Ecology)’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 그는 생태학을 ‘유기체와 그 유기체를 둘러싼 외부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과학’이라고 정의했다. 


이처럼 환경학에서 생태학으로 관심을 옮긴다는 것은 인간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생명체의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하자는 발상의 전환이다. 좀 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문제를 보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나가자는 이야기다. 환경문제를 순전히 ‘환경’의 문제로 보는 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없고 계속 땜질식 처방으로 일시적인 사건의 수습만이 실행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생물권을 염려해야 하며, 그것이 결국 인간의 미래를 위한 확실한 보장이라는 생각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 



우주 속 한 점으로 생명의 인사를 건네자


부자들의 성공담에는 흔히 그들의 도전정신과 돈의 흐름을 읽는 안목, 그리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부각된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쥐꼬리만한 봉급을 받으며 묵묵히 피와 땀을 흘리며 고생한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다. 마찬가지로 부유한 선진국의 번영과 사치 뒤에는 가난한 제3세계 농부들과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 독일의 주목받는 생태철학자 비토리오 회슬레(Vittorio Hoesle)는 제1세계 선진국의 풍요는 침묵하는 자연의 착취와 가난한  제3세계 국민들의 피와 땀의 대가라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개발도상국이든 저개발국가든 오로지 잘 사는 선진국이 되기 위해 근대화에 매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근대화의 산물이 바로 환경오염과 생태 파괴다. 근대화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그리고 과학기술을 축으로 하여 자유, 평등, 인권, 사회정의라는 가치관을 전 세계에 퍼뜨리면서 지구를 ‘하나의 세계’로 만들었다. 근대화는 결국 서구화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서구 지향적인 사고방식과 생활태도가 오늘날 생태파괴의 주된 요인이다.


서구적인 생활수준을 보편화시킨다는 것은 지구를 생태학적으로 완전히 파괴시키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구가 열 개는 더 있어야 한다. 지구의 모든 주민들이 제1세계의 주민들처럼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하고, 쓰레기를 배출하고, 대기 중에 유해물질을 퍼뜨린다면, 파멸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회슬레는 이렇게 경고한다.


“서구 산업사회의 발전 추세가 우리를 나락으로 추락시키지 않고서는 결코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은 오늘날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다. 논쟁의 여지가 남는 것은 기껏해야 이러한 파멸이 언제 닥치는가 하는 시점의 문제 정도다.”


회슬레는 생태학적 위기가 지금까지의 ‘경제’ 중심의 구조 틀을 해체시킬 것으로 전망한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구조 틀의 문턱에 서 있다. 이제 ‘경제’라는 구조 틀은 ‘생태’라는 구조 틀로 변화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변화되어야 한다. 회슬레는 21세기의 제일철학은 < 생태학 >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생태학’은 인간이 살아가는 다양한 자연적인 집들 중에서 공간적으로 가장 큰 집인 지구를 조망한다. 


오늘날 지구는 자연적이며 문화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진 분리될 수 없는 통일성을 형성하고 있다. 이 하나뿐인 삶의 터전을 모든 민족들이 평화롭게 더불어 사는 지구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과학과 생태학이 손을 맞잡아야 한다. 회슬레는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가치들을 만들어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고대의 자연개념으로 되돌아 가 거기에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과 자연의 화해 없이는 희망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대화라는 서구화가 초래한 지구파멸의 위기에, 이 한반도에서 우리의 전통 고대 자연개념 또는 생명개념에로 되돌아가야 할 더욱 당연한 이유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인은 50년 전만 해도 자연친화적이고 생명존중적인 가치관 속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5천년 동안 우리 민족의 삶 속에 결과 무늬로 새겨져 온 더불어 삶의 논리를 되새기며, 죽임의 문화가 확산되어 가는 현대에 새로운 살림의 기운을 불어넣어 생명담론과 생명운동을 펼쳐야 한다. 지구의 안부를 묻고, 다양한 생명체들의 공생을 살피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사명이며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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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지구의 안부를 묻자. 생명 중심적 삶과 실천 >, 『경햡잡지』 2012년 2월호에 실린 칼럼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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