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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생태의 충돌, 한국인 ‘살림살이’ 지혜에서 해법을 얻자 - [글로벌생명학] 3 : ‘살리는 일’을 삶의 지표로
  • 이기상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0-08-10 10:33:10
  • 수정 2020-08-10 10: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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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건 참지만 배 아픈 건 못 참는다.”


1972/73년 벨지움 루벵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일요일 성당에 미사를 갔는데 아마도 자선 주일이었던 것 같다. 한국의 굶주리는 아이들을 위해 성금을 부탁한다며 돌린 사진들이 나의 국민적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았다. 그 속에는 한국 전쟁의 포화 속에 다 찢어지고 더러워진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시커먼 먼지를 뒤집어쓰고 말라붙은 콧물로 뒤범벅이 된 예닐곱 살 된 여자아이가 동생인 듯한 두 살가량의 애기를 업고 있었다. 아직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지만 그 정도로 비참한 것은 아니었는데, 보는 이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그런 사진을 선택했다는 것이 매우 안타깝고 서글펐다. 


1950-60년대 폐허가 된 삶터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힘내라고 위로하며 어렵고 힘든 시기를 잘 견뎌냈다. 그 결과 50년 만에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내며 개발도상국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경제적 지표가 좋아질수록 사람들의 삶은 더욱 삭막해지고 불안해져 갔다. 다른 사람을 신뢰하기보다는 경쟁상대로 의식하면서 점점 시기와 견제의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남이 성공하는 것에 대해 배가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나보다 잘 사는 이웃이 있는 한 내 배는 계속 아프기 때문에 나는 더욱 악에 바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돈을 벌어야 한다. 


살벌한 경쟁의 판에서 쫓겨나 가족들로부터도 외면당하고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 신체적 장애 때문에 무시당하면서 생존을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버텨야 하는 사람들, 잘못된 방법을 쓰다 인생 망친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박탈감과 상대적 빈곤감으로 인해 절망과 외로움 속에 목숨을 끊는다. 이제 살만 한데, 무역 강대국인데,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는데, 왜 삶의 의욕을 놓아버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걸까. 이것은 근대화라는 서구화가 몰고 온 병폐 중 하나다. 근대화가 몰아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이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근대화의 물결이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지구촌 시대, 신자유주의와 신자본주의는 비켜갈 수 없는 쓰나미가 되어 인류의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근대화가 퍼뜨린 ‘죽임’의 문화 : 생태계 파괴, 생명경시, 빈부격차 심화


세계적 신학자로 인정받는 한스 큉은 그의 책 『세계윤리구상』(분도출판사)에서 전 세계를 휩쓴 근대화라는 서구화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학문은 있으나 지혜는 없다. 기술은 있으나 정신적 에너지는 없다. 공업은 있으나 생태학은 없다. 민주주의는 있으나 윤리는 없다.” 


한스 큉은 이것이 바로 근대 계몽주의적 이성의 실체라고 지적한다. 항상 자신을 절대화시키고 모든 것을 합리화하도록 강요하는 이성은 (주관성의 자유와 결합되어) 어떠한 우주와도 매여 있지 아니하고, 아무것도 신성시하지 않으며, 끝내는 자기 스스로를 파괴시킨다. 그 결과가 환경오염, 생태계파괴, 생명경시, 사회적 불안이라는 것이다.


“부자가 되어라, 빚내고 쓰고 즐겨라!”(Get rich, borrow, spend and enjoy!)라는 월가의 신자본주의의 강령은 바야흐로 99%의 평범한 시민들의 분노를 사서 그들로 하여금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월가의 똑똑한 경제학자들은 국제적인 대기업들이 돈을 많이 벌어야 그 혜택이 밑바닥까지 내려가 서민들도 떡고물을 얻어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 소위 샴페인 잔의 비유를 들어 말한다. 피라미드식으로 쌓은 샴페인 잔의 맨 위에 샴페인을 부으면 그 잔이 넘치면서 차례로 아래의 잔들을 채워 밑에까지 흘러넘친다고.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밑의 잔에는 아무런 기별이 오지 않는 것이다. 알고 보니 위의 잔들을 계속 크게 만들어서 샴페인이 밑에 오기도 전에 끝나버리는 것이다.



신자본주의의 경제논리 : 나 살고, 너 죽고!


이들이 내세우는 주장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는 생태학자인 개럿 하딘의 ‘구명보트윤리’라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하딘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재의 위기상황을 구명정에 비유한다. 선진국이 적정 수용인원을 태운 구명보트라면, 후진국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올라타서 이미 가라앉기 시작한 구명보트다. 후진국의 국민들은 배에서 내려 헤엄쳐 선진국의 구명보트에 올라타기를 희망하지만 하딘은 이들을 배에 태워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만약 그들을 태운다면 선진국의 구명보트도 과잉 승선으로 인하여 가라앉을 것이니 그들만이라도 살 수 있는 길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딘은 제3세계에 대한 식량원조를 동결하고 이민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와 신자본주의의 속셈을 보여주는 이론이며 학설이다.


이처럼 서양 사람들의 경제논리는 한마디로 ‘나 살고 너 죽고’의 논리다. 그들은 허울 좋게 “소비는 미덕이다”라고 외치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인류의 사활이 걸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비가 미덕이 되기 위해서는 욕망을 부추겨야 한다. 없는 욕망도 만들어내서 필요 없는 물건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구입하도록 조장해야 한다. 이것이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생산과 소비구조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따라가기에 바쁘다. 우리도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남을 밟고 올라가려고 한다. 여기에는 살림의 논리, 상생(相生)의 논리가 들어설 틈이 없다. 


서양 사람들은 이런 무한경쟁의 논리를 다윈의 진화론에서부터 배웠다. 다윈의 진화론은 서양인들이 자연의 생태계에서 보고 배운 삶의 논리다. 그들은 자연의 생물들이 살아가는 실상을 그렇게 보았으며 그래서 거기에서부터 진화의 원리를 끄집어내 자연도태, 적자생존, 우승열패의 원칙을 이론으로 정립해냈다. 이들은 그들이 발견한 이 논리를 인간사회에 적용하여 최고만이 살아남는다는 < 경쟁의 논리 >로 만든다. 그러기에 최고가 아닌 사람은 희생된다. 아니 마땅히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런 논리는 합리성을 앞세운 계산의 논리, 이성의 논리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80%의 사람들은 못살게 되어있다. 나만 이 80%안에 들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경제 VS 생태 : 충돌이냐 조화냐


지금 전 세계를 하나의 세계로 통합시키면서 무섭게 자신의 지배영역을 지구상 곳곳으로 뻗치고 있는 원리는 국제자본금융의 경제논리이다. 모든 것을 돈이라는 경제 단위로 단일화시킬 수 있는 이 무서운 수량화의 논리 밑바탕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표상화하고 나아가 수량화하려 한 서구의 형이상학이 깔려 있으며, 우리는 그 이념이 생활세계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고 있는 셈이다. 경제중심의 생각이 지금 인류를 무한한 욕망에로 부추기며 하나뿐인 지구를 파멸의 낭떠러지로 몰아가고 있음을 이제 서구의 지성인들도 깨닫고 어떻게 하면 경제학과 환경[생태]학을 조화시킬까 고심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경제학(Ökonomie, economy)과 환경[생태]학(Ökologie, ecology)의 어원을 보면 그것은 똑같이 그리스어 < οικος(집, 주거, 거주) >에서 유래한다. 하나는 가정경제[가계운영]에 뿌리를 두고 있고, 다른 하나는 주거관리에서 연원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가정경제와 주거관리가 있었으니, 여기에 해당되는 우리말을 찾아보면 역시 하나의 단어에서 유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단어는 바로 <살림살이>이다. 우리는 가정 살림살이, 부엌 살림살이, 학교 살림살이, 국가 살림살이, 국민 살림살이 등등 모든 형태의 경제행위를 다 살림살이라 하였다.


우리말 < 살림살이 >에는 죽지 않도록 감싸주고 보살펴 주는 우리 선인들의 삶의 철학이 담겨있다. 살리는 일, 즉 살림을 생활화해서 삶의 지표로 삼는 자세가 < 살림살이 >라는 낱말 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수량화하여 죽여 버리는 < 경제학 >이 아니라, 살도록 감싸주고 보살펴주는 < 살림살이 >에서는 생태계 파괴의 꼬투리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개별 생명체의 멸종과 지구 절멸의 위기에 봉착한 현대인이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을 생활 속에 살림을 실천해 온 이 땅의 선조들 삶의 지혜에서 배울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생활, 삶 자체를 살림살이라 이름하였다. 우리나라에는 60년대까지 쓰레기가 없었다. 모든 것은 완벽하게 재활용되었다. 그런데 생활이 서구적인 형태로 변화하면서 우리의 생활에서도 이제 이카노미(경제)와 이칼로지(생태)가 충돌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어떻게든 그 둘을 인위적으로 조화로운 상태로 올려놓아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 살림살이를 향한 여정


▲ (사진출처=SeekPNG)


우리의 조상들은 천(天)·지(地)·인(人) 합일(合一)의 삶을 살았다.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존재하는 “사이존재”이다. 옛날에는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하늘과 땅 사이에 책임을 져야 할 인간이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물이 넘쳐 홍수가 났을 때 그 물이 왜 넘쳤는지 원인을 알 수 없으면, 그 고을의 책임자가 천주(天柱)라고 하는 동헌의 기둥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찧어 인간의 잘못을 대표하여 사죄하였다. 


서양인들은 자연을 에너지의 창고라고 생각한다. 반면 우리는 자연에서 인간이 배워야 할 도리를 보았고 따라야 할 덕목을 읽어왔다. 사람에게 인품(人品)이 있듯 꽃에게도 화품(花品)이 있다고 보았다. 대나무는 절개, 모란과 작약은 부귀, 개나리와 진달래는 그 분명한 거취가 그 꽃들의 화품(花品)이다. 이러한 도덕의 범위를 짐승에까지 확대하여 벌과 개미에게는 군신의 의(義)가 있고, 원앙에게는 부부의 정(情)이 있고, 기러기에게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예(禮)가 있다고 보았다.


또한 우리의 선조들은 비가 온 뒤에 산에 갈 때에는 코가 얼기설기한 짚신을 신고 갔다. 비가 온 뒤에는 길가에 벌레가 많이 나오는데, 그 벌레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그러한 신발을 신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에 갈 때에는 요강 같은 것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 우리는 “산에 간다”라는 말 대신에 “산에 든다”라는 말을 썼다. 산에 허락 맡고 들어가는 것이지 우리 마음대로 산을 정복하기 위해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 소유, 욕망, 경쟁이라는 서구적인 삶의 문법이 우리 삶에 파고들어 죽임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 죽임의 문화가 우리 삶의 터전인 지구를 황폐화시키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몰살시키고, 우리들의 생명까지도 멸절시키기 전에 우리는 우리 삶의 문법 속에 새겨져 있던 살림살이의 원칙을 오늘날에 되살려 놓아야 한다. 살림과 섬김, 비움과 나눔의 가치관을 새롭게 다시 배우고 익혀서 삶의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살림살이 문법이 지구의 살림살이 문법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이것을 이론화시키고 체계화 시켜야 한다. 


▶ 지난 편 보기





[덧붙이는 글]
< 경제와 생태의 충돌과 그 해법. 한국인의 살림살이 지혜 >, 『경향잡지』 2012년 3월호에 실린 칼럼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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