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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동전 두 닢마저도 모두 던지지 않도록
  • 박흥순
  • 등록 2020-08-20 18: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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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는 신학 나눔의 새로운 길을 찾아 ‘사건과 신학’이라는 표제로 다양한 형식의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달, 이 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신학 이야기를 나누는 ‘사건과 신학’. 이번 주제는 ‘법과 공정’입니다. - 편집자 주



누구에게나 법 앞에 평등?


사람마다 ‘법’에 대한 온도차가 있고, 한 사건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관점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서 ‘코로나 장발장’으로 불린 구운 달걀 18개를 훔친 40대에게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을 적용해 검찰이 1년 6개월을 구형한 것에 논란이 계속되었다. 반면에 세계 최대 아동 성 착취 사이트를 운영했던 손 모씨가 1년 6개월 형량을 마쳤다는 보도는 ‘코로나 장발장’ 혹은 ‘현대판 장발장’ 사건과 비교되고 겹쳐지며 ‘사법정의’를 깊이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국민연금 수천억 원이 손해를 보았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럼에도 기소를 주저하는 검찰, 삼성 그룹에 대한 보도를 조심하는 언론의 모습에서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선언이 얼마나 허망한 구호인지 누구나 절감할 것이다. 


‘사법정의’와 ‘법 형평성’이란 수식어는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가혹했던 현실이 어긋한 적이 거의 없어 더 절망적이다. 법이 만들어진 그 정신은 무엇이며, 누구를 위해서 법이 제정되고 실현되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을 쓰는 지금 여기에(here and now) 그와 같은 질문이나 문제제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회의적 마음을 숨길 수 없어서 더 헛헛하다.

 

‘생계형 범죄’ 혹은 ‘생존형 범죄’라고 불리는 사건들을 목격하면서 법이 공의롭고 정의롭게 실현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이렇게 의심스럽고 의구심이 많은 현실에도 불구하고 사법정의나 법 형평성을 실현하려는 목소리가 담론 전면에 들려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인가? 


하지만 법이 만들어진 이유와 기준은 온도차가 심하다. 왜냐하면 “법은 보통 사람들의 상식에 바탕을 두고 그 상식에 부합”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상식적으로 수긍이 갈뿐 아니라 이해하기 쉽고 명확한 것이 법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법이란 “정의로운 태도로 일관성 있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권력과 가깝고 멀거나, 재산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동등하고, 공평하고, 일관성 있게 법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법 정신과 법 형평성이라는 잣대가 보통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동의하고, 수긍할 수 없는 것이라면 시대정신에 맞게 과감하게 바꿀 필요가 있다. 정의란 공평하고 평등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과 힘이 없는 사람들이 돈이나 권력과 가깝지 않아도 차별받지 않도록 살펴주는 실천이며 행동이기 때문이다.


힘없는 사람들 편에선 성서 가르침


구약성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계약 관계를 맺고 유기체적 공동체로 살아갈 토대로 율법을 제시한다고 소개한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율법은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할 수 있겠지만 대체로 십계명이 그 골격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1계명부터 4계명은 하나님과 관계를 명령하고, 5계명부터 10계명은 이웃과 관계를 제안한다. 유기체적 공동체로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하나님과 관계뿐만 아니라 이웃과 관계도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율법 정신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 중 하나가 바로 신명기 27장 19절이다.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하면, 모든 백성은 ‘아멘’하여라(신 27:19, 표준새번역).


소위 ‘비빌 언덕’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선언은 지금 여기에서도 유효하고 소중하다. 외국 사람으로 불릴 수 있는 난민과 노동이주자도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 고아와 과부처럼 돌봐줄 사람이 없거나 뒷배가 되어줄 사람이 없는 사람들도 정의로운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 당연한 선언인데 헛헛하고 힘이 빠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호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당위성만 이야기할 뿐 현실에서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재판 결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이 많은 재벌과 힘도 뒷배도 없는 과부가 동일한 사법정의를 기대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기는 할까? 법 정신과 사법정의를 논하는 것과 동시에 생계형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안전망을 만드는 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복지 사각지대와 사법정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더 세심하게 살피고, 한탄하며 외치는 사람들 목소리를 경청하려는 마음가짐과 실천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가난한 과부 이야기에 주목해 보자. 헌신과 희생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국교회 목사들이 즐겨 인용하는 성서 본문이다. 누가복음 21장 1절부터 4절까지 읽어보자. 


어느 날 예수께서는 부자들이 와서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보시고 계셨는데 마침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작은 동전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 저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이다.” 


이 성서 본문을 읽고 가난한 과부가 보여준 헌신과 희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가난한 과부는 이상적 제자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적 모습을 보이는가? 우선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드리는 성전은 누가복음 21장 6절에서 표현하는 것처럼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무너져 내릴 성전에 헌금을 드리는 모습을 예수께서 칭찬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럼 가난한 과부는 왜 헌금을 드린 것일까? 


이 질문에 앞서서 우리가 살펴야 할 구절은 가난한 과부가 바친 헌금이 그녀가 “가진 것 전부”였고, 그 가치는 “작은 동전 두 닢”이라는 사실이다. 작은 동전 두 닢, 즉 두 렙돈은 노동자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데나리온을 1/64로 나눈 가치다. 노동자 하루 일당을 10만원으로 환산했을 때 가난한 과부가 가진 것 전부는 1/64에 해당하는 1,560원이다. 가난한 과부가 “가진 것 전부”를 바친 것에 놀랄 일이 아니라 그녀가 “가진 것 전부”가 고작 2천원보다 적은 액수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야 한다. 


가난한 과부는 왜 그녀가 가진 전부를 바치는 결정을 했을까?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은 “그들은(율법학자들)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라는 누가복음 20장 47절에서 찾을 수 있다. 가난한 과부가 살아갈 힘과 용기를 모두 잃어버린 이유는 소위 종교지도자와 정치지도자로 자처하는 율법학자들이 과부들의 가산을 삼켰기 때문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율법학자에게 가산을 모두 빼앗긴 가난한 과부에게 살아갈 힘도 의지도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절망과 좌절과 한탄이 섞인 절규로 던진 두 렙돈이 지닌 무게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시대정신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절규를 헌신이나 희생으로 미화시키는 사회와 공동체가 과연 적절한 것인지 질문할 수밖에 없다.


빈틈과 사이를 메꾸는 회복적 정의


다시 법 정신과 사법정의라는 주제로 되돌아 가보자. 잘못하고 범죄를 저질러 벌을 받아야 하는 경우에는 징벌적 법 집행을 넘어서 “회복적 정의”에 근거한 사법정의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가 “회복적 사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빈축을 사기도 했다. 


“회복적 사법”은 오히려 생존형 범죄나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와 피해자에게 적용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에게 벌을 주는 징벌적 사법제도에서 피해자가 원상회복할 수 있는 회복적 정의를 사법제도에 적용하는 것이다. 피해자 중심으로 회복하고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도록 법 집행을 하게 된다면 가해자 또한 반성하고 성찰하고 회복할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회복적 정의는 비빌 언덕이 없는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힘이 없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보다 더 섬세하고 세밀한 관심을 갖도록 만들 것이다. 또한 회복적 사법으로 사법정의 사각지대와 복지 사각지대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다 적절한 법 적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잘못하고 죄를 지은 사람에게 동등하고 공평하게 법 집행을 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재산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권력이 있고 없음에 관계없이 누구나 수용할 수 있는 정의롭고 일관된 사법정의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보통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여건과 환경에서 동떨어져 절규하고 한탄하고 한숨 쉬는 사람들이 적어도 생계형 범죄 혹은 생존형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는 사회안전망을 만드는 일이 급선무라는 말이다. 


가진 것 전부가 고작 몇 천원밖에 없어서 더 이상 살아갈 힘도 의지도 없어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 그럼에도 이 사람들을 편들어 주는 사회와 교회 공동체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절망적이다. 한국교회 전체가 분개하며 일어나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섰다는 언론 보도를 읽고, 보고 싶다. 생계형 범죄나 생존형 범죄를 근본적으로 없앨 수 있는 법과 제도를 만들도록 정부와 정치인에게 촉구하고 행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싶다. 


재산이 많아도, 권력에 가까운 사람들이어도 엄격한 법 적용과 사법정의를 적용하라고 요구하는 언론, 정치, 종교 관련된 사람들이 곳곳에 있기를 기대한다. 복지 사각지대와 사법정의 사각지대에서 더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사회와 교회공동체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대안을 마련한다는 소식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상상을 하는 것이 너무 순진한 것인가! 


박흥순(다문화평화교육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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