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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라는 간판을 걸었다고 다 ‘교회’일까?
  • 한수현
  • 등록 2020-09-10 12:01:54
  • 수정 2020-09-10 12: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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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는 신학 나눔의 새로운 길을 찾아 ‘사건과 신학’이라는 표제로 다양한 형식의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달, 이 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신학 이야기를 나누는 ‘사건과 신학’. 이번 주제는 ‘팬데믹스: 파국의 징후들’입니다. - 편집자 주


미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시작하자 미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된 것은 방역과 개인의 자유 사이의 충돌이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 방역을 위한 봉쇄정책을 반대하는 시위대의 모습들이 뉴스를 덮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장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방역조치들을 완화했고 그것이 시발점이 되었는지 미국은 연속된 확진자의 폭발로 마비되다시피 하고 있다. 마스크를 의무화하는 것이 지나친 방역조치라는 의견들이 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무서운 전염성은 교육과 계도보다는 정부 중심의 신속한 방역 정책 아래에서 더 효과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이에 대한 부수적 작용은 신자유주의 논리의 급속한 쇄락이다. 시장경제의 자율성과 작은 정부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코로나19가 만들어내는 변수들에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개인의 선택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정부는 국민들에게 마스크를 씌우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했다. 이에 반해 방역을 강조하는 국가들에게 지켜야 할 자유란 국민을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었다. 미국과 같이 의료보험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질병의 불안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 전국민의료 보험을 의무화 했듯이 방역의 의무화는 전염의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공공의료 시스템이 살아있는 국가들에서 코로나19에 대한 방역과 치료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체제와 방역우선 국가모델의 충돌은 개신교와 정부의 정면충돌로 이어졌다. 길고긴 식민과 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개신교는 교회조직의 생존을 얻기 위해 교회가 지켜야할 대부분의 가치를 희생했다. 일제 식민체제 하에서 종교로서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받아들였고, 독재정권하에서는 정권에 대한 복종과 지지를 담보로 양적 부흥을 얻어내기도 했다. 예언자적 목소리를 포기하는 대신, 식민정권과 독재정권으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은 것이다. 


독재의 시대가 끝나자 한국 사회와 정치는 교회에게도 민주사회에 속한 조직으로서의 의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사학법과 세금징수에 대해 교회는 결사항전으로 맞섰다. 자연히 보수 정당들과 손을 잡게 되었고 정권창출을 통해 과거의 영광을 꿈꾸기도 했다. 공공성과 정치참여, 사회참여 등의 사회와 역사 참여적 교회 모델로 탈바꿈하기를 거부하고 보수 근본적 신앙과 권위적 조직을 고집한 이유는 가장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교회 모델이 변화해가는 사회와 정치로부터의 그 어떤 간섭에도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비리와 특혜는 정권에 의해 가려졌으며 성도 개인은 약하지만 교회조직은 강한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었다. 한국 사회에서 당연시 되었던 교회의 기득권은 ‘교회’라는 간판을 건 모든 단체와 조직에겐 달콤한 유혹이었다. 다양한 목소리가 어우러진 조화보다는 생존과 번영이란 가치를 중심으로 한 거대 조직이 된 한국교회는 어디에서 보아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여러 지역 교회들로 세포분열을 거듭했다.


▲ (사진출처=KBS뉴스 갈무리)


사랑제일교회를 통해 일어난 일들로 모든 한국교회가 비난받는 것을 억울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한국 교회들은 비슷한 틀로 찍어낸 붕어빵이다. “교회가 미안합니다.” 부산기독교총연합회가 부산시의 행정명령을 어기고 대면 예배를 강행할 것을 밝히자, 같은 지역의 한 교회가 정문에 내어 걸은 현수막의 내용이다. 페이스북과 각종 언론에도 교회의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사과의 내용이 담긴 반성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 모든 일들의 원인과 결과에 서 있는 사람들과 단체들은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한다. 


몇 해 전 미국의 버지니아 공대에서 33명이 목숨을 잃은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 재미 한국인 조승희 씨에 대해서 미국의 몇몇 한국인 단체가 사과한 적이 있었다. 그 이유는 ‘같은 한국인’이란 이유였다. 많은 미국사회의 구성원들이 전혀 공감하지 못했는데, 아마 그들은 개인 조승희의 범행을 다른 사람이 사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교회들조차 전광훈의 교회를 자신과 같은 ‘교회’ 중 하나라고 생각해야 하는 이 상황을 얼마나 많은 교회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교회’라는 이름은 누구나 원하면 쓸 수 있는 이름이지만 ‘교회’란 간판을 걸었다고 다 ‘교회’일까? 그 이름을 쓰는 단체나 사람들은 교회라는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있었는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교회와 생명에 대한 존중은 강하게 연결된 하나의 상식이다. 그런데 이를 정면으로 무시하는 교회가 나타났다. 그 순간 그 사회에서 교회에 대한 모든 생각은 중지된다. 그 중지된 생각은 바로 ‘과연 교회가 무엇일까?’ 또는 ‘저것이 교회인가?’로 나타나야할 질문을 오히려 ‘교회가 미안합니다’로 바꾸어 버린다.


진정한 교회의 몰락은 ‘교회’라는 이름을 쓰는 단체와 건물들이 증발하는 것이 아니다. 수십 년 간 한국 교회는 유럽을 보면서 기독교가 몰락한 곳이라 비난했다. 교회의 건물이 이제 맥주를 파는 곳이 되었다는 말을 하면서 교회가 몰락했으니 이제 곧 그 사회의 도덕과 문명도 무너질 것이라 호언장담했다. 과연 그것이 교회의 몰락일까? 


이제 곧 아무도 ‘한국교회’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 그 시대는 ‘교회’라는 간판을 찾기 어려운 시대가 아니다. 바로 ‘교회’라는 단어에 어떤 의미를 붙여도 이상하지 않는 시대이다. 비즈니스, 투기, 권력투쟁, 기회주의, 이기주의, 광신, 맹신, 미신, 극우 등등이 자연스러운 시대. 바로 그런 시대가 교회가 몰락한 시대이다.


한수현(감리교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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