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간 수요일(2021.4.14.) : 사도 5,17-26; 요한 3,16-21
오늘 독서에서는, 최고 의회가 군중의 기세에 눌려 마지못해 풀어주었던 사도들을 다시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주님의 천사가 이들을 감쪽같이 탈옥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남들을 구해 주면서 자기자신은 구하지 못한다”고 유다인들로부터 조롱을 받으신 적이 있는데,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수난을 참아 받으시더니 당신의 일을 하는 사도들이 위험에 닥치자 얼른 천사들을 시켜 구해내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이제는 베드로와 요한만이 아니라 모든 사도들이 두려움 없이 확신에 차서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대사제와 수석 사제들과 경비대장 등 악인들은 예수님을 기세 좋게 죽여 버렸을 때의 상황과는 딴판으로 막심한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오늘 복음은 빛과 어둠으로 갈리는 심판적 상황임을 알려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신 예수님을 맞이한 소수의 아나빔들은 구원을 받고 빛을 찾을 수 있었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한 다수의 군중과 극소수 악인들은 빛을 찾지 못하고 어둠에 남아 있는 그 자체로 심판의 벌을 받았습니다.
재판을 받으시던 예수님을 빌라도가 죄도 없어 보여서 풀어 주려 하는데도 굳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협박하던 유다인 군중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마태 27,25)라고 호언장담했었는데, 과연 예수 사후 한 세대 만에 이스라엘은 독립항쟁을 일으켰다가 로마군에게 철저하게 짓밟혀 나라는 멸망당하고 백성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2천 년을 떠돌이로 지내야 했습니다. 2천 년 동안의 난민 생활이 심판의 벌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심판적 상황이고 심판으로 말미암은 벌이라 하더라도, 심판은 어디까지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지 교회가 끼어들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이어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부름받았음을 자부해 온 가톨릭교회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일에 너무도 경솔하게 끼어들었습니다. 그 결과 고대로부터 중세와 근세를 거쳐 현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까지 반유다이즘은 기승을 부렸고 그 중심에 역대 교황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러한 태도를 역사적 과오로 인정하고 사과한 후, 1964년에 바오로 6세 교황은 예루살렘을 순례하며 유다교 지도자들과 화해를 청했고 2000년에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그 길을 걸었습니다. 이미 1993년에 바티칸과 이스라엘 공화국 사이에 오랜 반목을 깨고 공식 외교관계도 수립한 후였습니다.
과거에 교회는 예수님을 죽이는 데 앞장서거나 가담한 죄로 유다인들이 하느님과의 신의를 저버렸다는 판단 아래 유다교를 폐기된 종교로 간주해 왔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 신약성서도 부인하는 유다인들을 공공연하게 박해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해 왔던 종래의 태도를 바꾼 것입니다
심지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창세기에서 요셉이 했던 표현을 빌려서 유다인들을 “우리의 형들”(창세 45,4)이라고까지 불렀습니다. 야곱이 낳은 열두 아들로부터 비롯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교회는 넷째였던 유다 지파 출신의 예수님을 믿는 영적인 후손들이지만 유다교는 그 위로 세 명의 형들의 육적인 후손이라는 까닭에서입니다.
심지어 그는 “가톨릭 신자들은 영적인 유다인”이라고까지 지칭하며 화해를 이끌었습니다. 반유다주의가 가장 극심했던 폴란드 출신 교황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니까 교회 안의 반유다 분위기는 가라앉았습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를 일컬을 때,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단정적인 표현보다는 ‘참이스라엘’이라는 다소 유보적이면서 모호한 표현을 공식적으로 쓰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현재 공식적으로 가톨릭교회는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할 때마다 유다인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해 오고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역사상 처음으로 선택하셨다는 역사성의 엄중함 때문이고, 언젠가는 당신의 선택이 지닌 정당성을 보여주시리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유다인들이 당면한 과제는 가톨릭교회나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아랍 이슬람 신자들과의 해묵은 원한을 푸는 일입니다. 정치적으로는 물론 종교적으로도 이 문제는 꼬일 대로 꼬여 있어서 여간해서는 풀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어를 쓰는 약 4백 명의 가톨릭 공동체가 있습니다(1955년 설립. ‘Saint James 가톨릭 연합’). 이들은 그리스도 교회의 유다적 뿌리와 함께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다인이었다는 정체성을 그리스도인들이 인식하기를 바라면서, 자신들이 양쪽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기를 원합니다. 아울러 유다인과 아랍인 사이의 폭력과 전쟁이 난무하는 이스라엘과 중동 지역에서 평화와 정의, 용서와 화해를 위해 기도해 오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인과 이사악의 후손인 유다인도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기 때문입니다.
복잡하게 얽힌 역사적 현실에서 누가 옳고 그른지를 명쾌하게 가르기는 쉽지 않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폭력과 증오에 의지하는 한 우리 모두가 악의 어두운 감옥에 갇혀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류는 정의와 평화, 용서와 화해라는 밝은 세상으로 다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옛날 당신 사도들을 감옥에서 구해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