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15년, 프랑크푸르트시를 방문한 자리에서 에너지정책담당관을 지내고 은퇴한 나이 지긋한 노이만 박사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갤럭시 스마트폰을 꺼내어 필자에게 보여주면서 입을 열었다. “한국은 이상해요. 이렇게 기술이 발달한 나라가 어떻게 해서 에너지 전환에는 후진국인가요? 에너지 전환은 기술이 어려운 게 없습니다. 정책의 문제이지요.”
그렇다. 그 당시 지구촌은 이미 태양광이 그리드패리티를 압도적으로 달성하고 있었다. 즉 폭락한 시설비로 원전 단가를 추월하여 지구촌의 주력전기생산수단으로 등극한 것이다. 더이상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에너지 전환은 정책의 문제이자, 정치의 문제이자, 권력투쟁의 문제다. 일찍이 독일의 연방의원 헤르만 셰어가 갈파하지 않았던가. “원전이 분산형 에너지원이고, 태양광이 중앙집중형에너지원이었다면, 에너지콘체른(기득권층)은 벌써부터 태양광으로 전환했을 것이다.” 그의 지적이 말하는 것은 어느 쪽이 자본권력에게 돈벌이가 되는 수단인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강남훈 교수의 얘기처럼 RE100체제로 급속히 재편된 세계수출시장에 살아남으려면 더 늦기에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한다. 원전을 극도로 추구하는 윤석열 정부의 수명이 언제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정권이 바뀌는 즉시 바로 작동되도록 시나리오를 준비해두어야 한다.
강 교수는 다른 자리에서, “한국에서 발전 90% 넷제로 달성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후위기 시대에는 한국에서 첨단 산업 유지가 불가능하므로 한국을 떠나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모두가 힘을 합쳐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달성해야 한다. 가장 시간이 걸리는 재생발전토지 확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고, 재원 마련 방안을 찾아야 한다. 시간이 없으므로 공공투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대기업이 RE100 압력 때문에 해외로 이전하기 이전에 기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모든 자원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RE100이라는 수출경제체제에서 위기를 돌파하려면 에너지 전환을 시장에 맡겨 놓을 수는 없고 정부의 정책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기실 에너지 전환은 재생 발전이 더 싸기 때문에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후속 세대가 겪게 될 기후 재난과 경제 재난을 막기 위해서 더 비싸더라도 전환하는 것이다. 에너지 전환 정책으로 인해서 전기 가격이 상승하게 되면 화석 발전과 재생 발전의 이윤이 모두 변하게 된다. 화석 발전은 가격 상승으로 단위당 이윤이 증가하지만 산업 전체로 판매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이윤 크기는 줄어든다. 재생 발전은 단위당 이윤도 증가하고 산업 전체로 판매량이 늘어나기 때문에 이윤 크기도 증가한다”면서, “이러한 이윤의 증가는 발전 기업의 노력이나 기술 혁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정부의 전환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경제학적으로 지대의 개념으로서 일종의 불로소득이다. 바로 여기에 중대한 포인트가 있다. 이 불로소득을 전부 혹은 일부를 환수해서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으로 나누어주면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실질소득 감소를 막을 수 있고, 불평등이 증가하지 않는 에너지 전환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에너지 전환은 공급자 측면에서만 애를 써도 안 된다. 수요자 측의 적극적인 견인이 있어 주어야 활성화된다. 독일을 보자. 독일은 전국적으로 수천 개의 에너지협동조합이 그 일을 했다. 조합원에게 돌아가는 경제적 혜택이 상당 수준으로 크기 때문이다. 유럽은 어느 국가나 협동조합이 발달했다. 조합의 구성원 즉 조합원들이 협력해서 경제활동을 하는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협동조합방식이 아직 생소하다. 그러므로 에너지 전환에 따른 이득을 고르게 분배하는 일이 쉽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에너지 전환을 추동하는 힘은 다른 방향에서 모색해야 한다. 이에 근접하는 것이 연금과 비슷한 개념의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한마디로 국민이 낸 세금 혹은 공공이득을 국민이 직접 재정권을 행사하자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그동안의 ‘세금납부는 국민이, 재정운영은 정치인과 관료가’라는 등식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으니, 재정행사권을 관료에게 모두 맡기는 것은 이상하다는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은 국리민복이라는 대원칙을 이루어내는 복지적 수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공무원의 행정적 배분권력에만 의지하기에는 복잡한 세상이다. 가난을 입증하기 어려운 예술인의 자존심을 존중하고 산업구조적으로도 IT와 AI가 불러올 무한정의 실업 상태를 상당 기간 안전하게 버텨낼 ‘민복’의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항간에는 기본소득에 대해 보편적 복지냐 선택적 복지냐를 놓고 갑론을박 하는데, 그 왈가왈부는 행정이 재정의 행사권을 독점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기본소득은 그게 아니라 국민주권의 행사로 보아야 한다. 헌법 제1조의 개념이 재정에까지 확장되어야 할 세상에 온 것이다.
가령 역사적인 사건을 떠올려보자. 6.25전쟁 때 압도적인 북한 군사력을 버텨낸 국군 사기의 원동력이 생각난다. 그 원동력은 다름 아닌 해방 이후부터 줄기차게 정책논쟁이 벌어졌던 농지개혁이 전쟁 발발 직전에 실제로 이루어져서 가가호호 농지를 불하 받았던 사건 때문 아니겠는가? 그 며칠 전 분배 받은 농지를 보고는 감격에 겨워 밤잠을 설친 가족을 보면서 입대한 학도병들은 ‘내 땅’을 지키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싸우지 않았던가.
이런 기본소득이 활성화되면 에너지 전환에 상승적인 작용을 한다. 에너지 전환에 모든 국민들의 관심과 노력이 모아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단숨에 에너지 전환 선진국으로 올라설 수 있다. 기후악당에서 기후천사로 변신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네마다 분산형 에너지 프로슈머가 일상화되고 일자리도 늘어나서 지역경제의 기초가 튼튼해진다. 대기업이 가져가던 이윤이 동네 주민에게 골고루 나눠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뻔한 길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본소득이라는 국민의 재정행사권을 인정하기 싫은 관료세력이 버티고 있고, 원전 마피아들이 기득권을 지키려 마지막까지 발악을 하고 있다. 권력투쟁의 과실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줄기찬 요구와 땀 흘리는 행동이 필요한 법이다.
국토미래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