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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톨릭프레스 - 전체기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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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가톨릭정보, 사회문화 소식, 영상뉴스 등을 제공하는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 가톨릭프레스]]></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pubDate>Sat, 27 Jun 2026 15:20:0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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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톨릭프레스 - 전체기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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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스펠:툰] &quot;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quot;</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47</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2M3d4nWf_062826EC97B0ECA491_ECA09C13ECA3BCEC9DBC-EB8F85EC849C.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21"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24fgOkt8_5BEABEB8EBAFB8EAB8B05D062826EC97B0ECA491_ECA09C13ECA3BCEC9DBC-EBB3B5EC9D8C.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22" style="clear:none;float:none;" /><br><br>2026년 6월 28일 연중 제13주일 (교황 주일)<br>제1독서 (열왕기 하권 4,8-11.14-16ㄴ)<br>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에 사는 한 부유한 여자가 엘리사에게&nbsp;음식을 대접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래서 엘리사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그의 집에 들러 음식을 먹곤 하였다.&nbsp;<br>그 여자가 남편에게 말하였다. “여보, 우리 집에 늘 들르시는 이분은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벽을 둘러친 작은 옥상 방을 하나 꾸미고, 침상과 식탁과 의자와 등잔을 놓아 드립시다. 그러면 그분이 우리에게 오실 때마다 그곳에 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br>어느 날 엘리사가 거기에 갔다가 그 옥상 방에 들어 쉬게 되었다. 엘리사는 종에게 “저 부인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을까?” 하고 물었다. 게하지가 “저 부인은 아들이 없는 데다가 남편은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엘리사는 “여자를 불러라.” 하고 일렀다.<br>종이 여자를 부르니 그 여자가 문간에 섰다.&nbsp; 엘리사가 말하였다. “내년 이맘때가 되면 부인은 한 아들을 안게 될 것이오.”<br>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6,3-4.8-11)<br>형제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br>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br>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br>복음 (마태오 10,37-42)<br>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br>“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br>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br><br><br>]]></description>
			<author>김웅배</author>
			<pubDate>Fri, 26 Jun 2026 14:30:0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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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AI는 도구인가, 권력인가</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48</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7dxiUVAX_555.jpe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23"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 Vatican Media</acronym><br><br>▶ 지난 칼럼 보러가기<br><br>지난 회까지 우리는 「Antiqua et Nova」를 따라 인간 지성과 인공 지능의 본성적 차이를 살펴보았다. 인간 지성은 몸을 통해 배우고, 관계 안에서 자라며, 윤리적 책임을 지고, 죽음과&nbsp;의미의 질문 앞에서 흔들린다. 반면 인공 지능은 데이터를 처리하고, 패턴을 계산하며, 확률적으로 응답을 생성한다. 그러므로 둘은 같지 않다. 그러나 회칙 「Magnifica Humanitas」는 여 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AI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AI는 점점 권력의 형태가 되고 있다. 그래서 이제 물음은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머물 수 없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누가 AI를 소유하는가. 누가 데이터를 모으는가. 누가 알고리즘의 기준을 정하는가.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배제되는가.&nbsp;<br>기술은 중립적인 도구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 사회 안으로 들어온 기술은 언제나 권력의 질서를 만든다. 망치 하나는 집을 지을 수도 있고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 그러나 AI는 망치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들어온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를 배우고, 선택을 예측하고, 욕망을 유도하고, 노동을 재편하고, 여론을 움직이며, 심지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까지 바꾸려 한다. 그러므로 AI 시대의 첫 번째 식별은 기술적 질문이 아니라 사회교리적 질문이어야 한다. “더 빠른가?”보다 “더 인간적인가?”를 물어야 한다. “더 효율적인가?”보다 “더 정의로운가?”를 물어야 한다. “더 강력한가?”보다 “그 힘이 누구를 살리는가?”를 물어야 한다.&nbsp;<br>더 강력한 것이 더 나은 것은 아니다<br>회칙의 가장 단호한 문장 가운데 하나는 93항에 있다.<br>“Più potente non significa necessariamente migliore.”더 강력하다는 것이 반드시 더 낫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1)<br>짧지만 무서운 문장이다. 이 한 문장은 AI 시대를 향한 회칙의 비판적 시선을 거의 모두 담고&nbsp;있다. 현대인은 강력한 것을 좋은 것과 혼동한다. 더 빠르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더 많이 계산하면 더 정확하다고 믿는다. 더 많은 데이터를 소유하면 더 진실에 가까워진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복음은 언제나 다른 길을 가리켰다. 작음 안에 진리가 있고, 약함 안에 구원이 있으며, 느린 동행 안에 인간이 있다. 회칙이 비판하는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다. 교회는 기술을 악마화하지 않는다. 인간의 지성이 만들어 낸 기술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창조적 능력의 한 표현일 수 있다.&nbsp;<br>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이다.2)&nbsp;효율, 통제, 이윤이 모든 것을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는 정신적 습관이다. 인간의 존엄보다 생산성을 앞세우고, 공동선보다 시장의 속도를 앞세우며, 형제애보다 경쟁의 논리를 앞세우는 세계관이다. 이 개념은 이미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은 세상을 선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을 사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 본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의 시간, 감정, 관계, 몸, 질병, 신앙, 정치적 성향까지 모두 분석하고 예측하고 수익화할 수 있는 데이터가 된다.<br>「Magnifica Humanitas」는 바로 이 문제를 AI 시대에 다시 적용한다. 회칙은 이렇게 말한다. 마치 실재와 선과 진리가 기술과 경제의 힘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처럼, 인간의 존엄성과 형제애는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뒤로 밀려난다.3) 이 문장은 오늘의 세계를 너무 정확히 찌른다. 우리는 더 편리해졌지만, 더 자유로워졌는가. 우리는 더 연결되었지만, 더 깊이 만나는가. 우리는 더 많은 정보를 얻지만, 더 진실해졌는가. 그러므로 AI에 대한 첫 번째 질문은 “찬성인가 반대인가”가 아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나눌 수 없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nbsp;<br>누구를 위한 AI인가. 누구의 고통을 줄이고 있는가. 누구의 노동을 지우고 있는가. 누구의 데이터를 가져가고 있는가. 누구의 침묵 위에서 작동하고 있는가.&nbsp;<br>누가 AI를 소유하는가&nbsp;<br>「Antiqua et Nova」 53항은 이미 핵심을 짚었다. 주요 인공 지능 애플리케이션에 대한 권한이 소수의 강력한 기업의 손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심각한 윤리적 우려를 불러일으킨다.4) 이 문장은 가볍게 지나칠 수 없다. AI의 권력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군대처럼 행진하지 않고, 경찰처럼 제복을 입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데이터센터 안에 있고, 클라우드 서버 안에 있으며, 검색창과 플랫폼과 스마트폰 앱 안에 있다. 오늘의 권력은 총칼만이 아니라 연산력이다. 영토만이 아니라 데이터다. 공장만이 아니라 알고리즘이다.&nbsp;<br>산업혁명 시대의 권력은 기계와 공장과 자본을 소유한 자에게 집중되었다. AI 시대의 권력은&nbsp;데이터, 연산력, 플랫폼, 모델을 소유한 자에게 집중된다. 그리고 이 네 가지를 동시에 가진&nbsp;이들은 많지 않다. 소수의 거대 기업, 소수의 국가, 소수의 기술 엘리트가 세계의 언어와 지식과 행동 패턴을 점점 더 깊이 장악하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단지 더 많은 돈을 번다는 데 있지 않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인간 사회의 기준을 정하게 된다는 데 있다. 무엇이 검색되는가. 무엇이 추천되는가. 무엇이 보이지 않게 되는가. 어떤 말이 증폭되는가. 어떤 사람이&nbsp;위험하다고 분류되는가. 어떤 노동이 대체 가능한 것으로 평가되는가. 이런 기준들이 민주적&nbsp;토론 없이 코드 안에 새겨질 때, 기술은 이미 정치가 된다.<br>「Magnifica Humanitas」 161항은 더 직설적으로 말한다. 소수가 너무 많이 가지고,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적게 가지고 있다. 이것이 오늘의 논리다.5) 이것은 단지 경제 불평등의 문제가 아니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불평등 자체가 더 지능화된다. 가진 자는 더 많은 데이터를 통해 더 많은 기회를 얻고, 갖지 못한 자는 데이터의 대상이 되지만 결정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의료 분야에서 이 문제는 더욱 분명하다. 어떤 지역에서는 인간 능력의 강화, 수명 연장, 유전자 편집, 개인 맞춤형 치료가 논의된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아직도 기본적인 의료&nbsp;장비와 의약품이 부족해 수백만 명이 생명을 잃는다. 기술은 인류 전체의 선물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혜택은 불평등하게 배분된다. 이것이 회칙이 보는 AI 시대의 새로운 사회 문제다.&nbsp;<br>데이터는 새로운 희토류다<br>회칙에서 가장 충격적인 분석은 178항에 나온다. 오늘의 식민주의는 전례 없는 얼굴을 보인다. 그것은 단지 몸을 지배하지 않고 데이터를 차지한다. 곧 개인의 삶을 착취 가능한 정보로&nbsp;변형시킨다.6) 이 문장은 오늘의 세계를 해석하는 매우 중요한 열쇠다. 과거의 식민주의가 토지, 금, 노동력, 항구, 철도, 광산을 빼앗았다면, 오늘의 디지털 식민주의는 생체 정보, 보건&nbsp;데이터, 이동 경로, 소비 습관, 유전자 정보, 감정 반응, 정치적 성향을 가져간다. 과거의 제국이 땅을 점령했다면, 오늘의 제국은 삶의 흔적을 점령한다.&nbsp;<br>회칙은 보건 흐름, 역학 프로필, 유전자 지도, 인구 데이터를 “권력의 새로운 희토류”라고 부른다. 아주 정확한 표현이다. 희토류는 스마트폰과 배터리와 첨단 산업에 필수적인 자원이다. 그런데 AI 시대에는 인간의 삶 자체가 희토류가 된다. 우리의 클릭, 검색, 위치, 사진, 목소리, 질병 기록, 상담 기록, 신앙적 고민까지 모두 누군가에게는 학습 데이터가 된다. 여기서 더 무서운 점은 착취가 선의의 언어로 포장된다는 것이다. 도움, 연구, 혁신, 편의, 맞춤형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데이터가 모인다. 그러나 그 데이터를 누가 소유하는가. 누가 분석하는가. 누가 이익을 얻는가. 당사자는 그 데이터가 어디로 가는지, 어떤 모델을 훈련시키는지, 나중에 어떤 방식으로 자신에게 되돌아오는지 알지 못한다.&nbsp;<br>전체 인구의 보건 데이터를 가진 자는 단지 정보를 가진 것이 아니다. 그는 미래를 예측하고&nbsp;시장을 설계하며 정책의 우선순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조적 지렛대를 가진다. 어떤 질병에 투자할 것인가. 어떤 약품을 개발할 것인가. 어떤 지역을 위험 지역으로 분류할 것인가. 누구에게 보험료를 더 물릴 것인가. 이런 결정들이 데이터 권력의 손에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회칙의 경고는 단호하다. 디지털 시대는 후기 식민주의의 종말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식민주의가 될 수 있다. 식민주의는 끝난 것이 아니라 변장했다. 총독부가 사라진 자리에 플랫폼이 들어섰고, 광산 채굴의 자리에 데이터 추출이 들어섰다.&nbsp;<br>보이지 않는 통제와 가시성의 건축술<br>더 미묘한 위협은 171항에 있다. 회칙은 통제가 명시적 금지를 통해서만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통제는 “가시성의 건축술”을 통해서도 작동한다. 무엇이 증폭되고 무엇이 보이지 않게 되는가. 무엇이 보상받고 무엇이 처벌받는가. 이것이 결국 사람들의 의견과 선택을 빚어내며 동조와 자기검열을 낳는다.7) 이 표현은 대단히 중요하다. 오늘의 통제는 예전처럼 “말하지 말라”고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하게 만든다. 계속 표현하게 하고, 계속 반응하게 하고, 계속 자신을 전시하게 한다. 그러나 그 많은 표현 가운데 어떤 것은 보이게 하고 어떤 것은 묻히게 한다. 어떤 분노는 증폭되고 어떤 고통은 사라진다. 어떤 뉴스는 알고리즘을 타고 번지고, 어떤 진실은 검색되지 않는다.<br>푸코가 말한 판옵티콘은 감시자가 중앙에서 죄수를 바라보는 구조였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판옵티콘은 더 깊고 더 미묘하다. 이제 감시자는 꼭 보이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감시한다. 이 말이 ‘좋아요’를 받을까. 이 글이 공격받지는 않을까. 이 표현이 계정을 위험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나는 어떤 이미지로 보여야 할까. 이렇게 알고리즘은 바깥의 감시자가 아니라 내면의 검열자가 된다.&nbsp;<br>융합심리분석의 자리에서 보면 이것은 매우 익숙한 풍경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초자아는 본래 외부의 권위가 내면화된 자리였다. 부모, 교사, 종교, 사회의 금지가 내 안에 들어와 나를 감시하고 판단하는 구조다. 그런데 알고리즘 시대의 초자아는 데이터로 짜인다. 무엇이 인정받는지, 무엇이 조롱받는지, 무엇이 퍼지고 무엇이 사라지는지의 통계가 우리 욕망 자체를 변형시킨다.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추천된 것 안에서 선택한다. 우리는 자유롭게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보상받는 언어를 배운다. 우리는 자유롭게 욕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플랫폼이 설계한 욕망의 길을 걷고 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통제의 무서움이다. 노예가 되었는데도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게 만든다.&nbsp;<br>AI는 중립적이지 않다<br>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회칙 107항이 결정적이다. 필요한 것은 “더 도덕적인 AI”가 아니라고 말한다. 만일 그 도덕이 소수에 의해 결정된다면 말이다. 필요한 것은 “더 현존하는 정치”다. 모든 것이 가속할 때 멈출 줄 알고, 공동체가 여전히 참여하고 물을 수 있는 공간을&nbsp;보호할 수 있는 정치다.8) 이 문장은 AI 윤리 논의의 허점을 찌른다. 오늘날 많은 기업이 “윤리적 AI”를 말한다. 그러나 누가 윤리를 정하는가. 기업이 스스로 만든 윤리 기준이 정말 공동선을 보장할 수 있는가.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 인간 존엄을 최종 기준으로 삼을 수&nbsp;있는가. 윤리가 홍보 문구가 되고, 책임이 면책 조항이 되며, 투명성이 선택적 보고서가 되는&nbsp;순간, “윤리적 AI”라는 말은 오히려 위험한 장식이 된다.&nbsp;<br>회칙은 그래서 더 깊은 정치의 회복을 요청한다. 여기서 정치는 정당 정치만을 뜻하지 않는다. 공동체가 자기 운명을 함께 묻고 결정하는 공적 능력을 말한다. 시민이 데이터의 운명에&nbsp;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가 자동화의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환자가 자기&nbsp;의료 데이터의 사용에 대해 알 권리와 거부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학생과 교사는 교육 현장에 도입되는 AI의 기준을 함께 물을 수 있어야 한다. 회칙은 동시에 분명히 말한다. 우리는&nbsp;AI를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여길 수 없다.9) 이것은 매우 중요한 선언이다.&nbsp;<br>알고리즘은&nbsp;자연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만든 것이다. 어떤 데이터를 넣을지, 어떤 목표를 최적화할지, 어떤 오류를 감수할지, 어떤 결과를 성공으로 볼지 모두 인간의 선택이다. 그 선택 안에는 인간관이 들어 있고 세계관이 들어 있으며 권력의 이해관계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AI가 내놓는 결정 앞에서 인간은 다시 물어야 한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가. 누구에게 유리한가. 누구에게 불리한가. 어떤 데이터가 빠졌는가. 어떤 삶이 보이지 않게 되었는가. 알고리즘이 결정했다고 해서 인간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책임은 더 커진다. 얼굴 없는 시스템 뒤에 숨어 인간을 해치는 일이야말로 현대적 죄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br>정치의 자리, 시민의 자리, 양심의 자리<br>AI는 도구일 수 있다. 인간을 돕고, 질병을 진단하고, 반복 노동을 줄이고, 교육 자료를 넓히고, 사회적 약자를 지원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도구로 남으려면 조건이 있다. 권력이 감시되어야 한다. 데이터가 민주적으로 통제되어야 한다. 알고리즘이 설명 가능해야&nbsp;한다. 시민이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양심이 최종 자리를 빼앗기지 않아야&nbsp;한다. 회칙이 말하는 “공유된 책임”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10) AI 시대의 책임은 기술자에게만 있지 않다. 정치인에게만 있지도 않다. 기업에게만 있지도 않다. 교회, 학교, 시민사회, 언론, 상담 현장, 노동 현장 모두가 함께 물어야 한다. 우리가 만들고 있는 기술은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가. 아니면 인간을 더 효율적인 데이터 단위로 축소하는가.<br>AI 시대에 가장 위험한 태도는 무지보다 체념이다. “어차피 기술은 막을 수 없다”는 말은 겉으로는 현실적이지만 사실은 비겁한 말일 수 있다. 기술은 저절로 방향을 정하지 않는다. 인간이 방향을 정한다. 정치가 부재하면 시장이 방향을 정하고, 시민이 침묵하면 기업이 기준을 정하며, 양심이 물러서면 효율이 인간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기술 혐오가 아니다. 더 깊은 식별이다. AI를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다. AI가 인간의 자리를 빼앗지 못하도록, AI 권력이 공동선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인간이 다시 묻고 멈추고 결정할 수 있는 자리를 세우자는 것이다. AI는 도구일 수 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시민과 책임 있는 정치가 부재할 때, AI는 도구이기를 그치고 권력이 된다. 그리고 그 권력이 인간의 얼굴을 잊어버릴 때, 교회는 다시 말해야 한다.&nbsp;<br>더 강력한 것이 더 나은 것은 아니다. 더 빠른 것이 더 인간적인 것도 아니다. 인간을 살리지 않는 기술은 진보가 아니다. 그것은 이름만 바꾼 지배일 뿐이다.<br><br>1) 회칙 Magnifica Humanitas, 93항. “Più potente non significa necessariamente migliore.”<br>2) 같은 문헌, 92-96항 참조. 기술관료적 패러다임 개념의 원천은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2015, 106-109항. 3) 같은 문헌, 95항. 4) 교황청 신앙교리부 · 문화교육부, Antiqua et Nova, 53항. 5) 회칙 Magnifica Humanitas, 161항.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 인용. 6) 같은 문헌, 178항. 7) 같은 문헌, 171항. 8) 같은 문헌, 107항. 9) 같은 문헌, 104항. “Non possiamo considerare l'IA moralmente neutra.”10) 같은 문헌, 181항. 공유된 책임의 사회교리적 함의.<br><br>▶ 5회 예고 : 노동의 미래와 인간 존엄<br><br>]]></description>
			<author>지성용</author>
			<pubDate>Tue, 23 Jun 2026 10:30:04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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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도하는 데에도 믿음이 필요합니다</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51</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3695266591_IW3RinAD_mylene2401-angel-8247278.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28" style="clear:none;float:none;" /><br><br>연중 제11주간 토요일 (2026.06.20)&nbsp;: 2역대 24,17-25; 마태 6,24-34<br>“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br>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은 한처음에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주체 즉 생명의 주인으로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당신의 자유와 같은 속성을 지닌 자유를 선사하셨기 때문에, 선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악으로도 기울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는 인간 자유를 염두에 두시고 스스로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통하여 당신께 나아 오기를 바라셨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nbsp;<br>이것이 자유의 본질입니다. 인간의 자유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 악으로 기울면, 가치 질서가 흐트러져서 영혼보다 정신을, 정신보다 육신을 더 귀하게 여길 수도 있고, 영원한 생명보다 현세적 생명에 필요한 것만을 찾을 수도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습니다. 심지어 오늘 독서에서 들으셨듯이, 권력 다툼으로 살인을 자행하고 분쟁을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nbsp;<br>하지만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합니다. 그런데 목숨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바로, 몸과 마음과 영혼입니다. 몸이 생명력을 유지하는 수명만큼 우리네 인생의 기간이 정해지는 것은 분명하고 사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져 있는 운명입니다. 하지만 몸에 달려있는 두뇌의 정신 작용도 중요해서 이에 따라 마음이 정해지는데 이 마음이 몸을 움직입니다. 양심도 자유도 몸을 움직이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이 마음이 편안하면 몸도 편안하고 마음이 괴로우면 몸도 힘들어집니다.&nbsp;<br>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이것입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몸과 마음으로만 목숨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목숨의 핵심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혼이 있다는 것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인간에게 고유한 이 혼의 생명력이 마음도 움직입니다. 인간의 혼은 하느님의 영을 받아 소통해야 비로소 생기를 얻습니다. 영혼이 생기를 얻어야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서 목숨이 우리네 삶을 인간다운 품격을 발휘합니다.<br>또 목숨도 소중하지만 그 목숨을 지어내신 하느님은 더 소중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목숨을 살아있도록 생기를 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계시해 주신 하늘의 질서요 생명의 근본이며 따라서 가장 근본적인 힘이요 뜻이기 때문에, 이것을 먼저 찾으면 나머지는 가치 질서가 바로 잡혀서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잡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nbsp;<br>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런 가르침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또 세상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성찬례를 제정하여 남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찬례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몸을 사랑의 희생으로 봉헌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동시에,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을 계승함으로써 우리도 사랑의 희생으로 봉헌하기를 행하라는 유산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찬례의 배경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두 주인을 섬겨온 쓰라린 죄악의 역사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섬긴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특히 정치와 종교의 엘리트들은 권력과 재물을 탐하며 분쟁을 일삼고 툭하면 정적을 죽이거나 백성을 억압하며 종으로 부렸습니다.&nbsp;<br>“그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2역대 24,18)는 오늘 독서의 진술이 이런 죄악을 겨냥한 대목입니다. 그러니 두 주인을 섬기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라는 단호하게 권고하시는 예수님의 심중에는 지난 천여 년 간 저질러진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역사적 교훈이 단단히 담겨져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br>역대기를 포함한 구약성경의 역사서들은 대부분 예언자들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들은 타락해 가는 왕실과 지도자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일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정치 및 종교 엘리트들은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남쪽 유다 왕실이나 북쪽 이스라엘 왕실이나 똑같이 경쟁하듯이 타락해 갔던 그 죄과가 바빌론 유배로 나타났으며, 그 후에도 사정이 별로 나아지지 않자 그리스계 왕조에 이어 로마의 지배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br>하지만 지배 엘리트들의 죄악과 시행착오를 예언자들은 빠짐없이 기록해 놓았고, 이것이 오늘날 구약성경의 역사서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역사서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역사적 경험에 따라 쓰여졌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후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겪은 과정은 여호수아기에 담겨 있고, 가나안에서 왕정을 수립하기까지 겪은 과정은 판관기와 사무엘기 상권에 적혀 있으며, 다윗 임금 치세에 이스라엘 역사가 이루었던 황금기에 대해서는 사무엘기 하권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에서 왕국의 분열을 거쳐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바빌론으로 유배를 당하기까지 겪은 과정은 열왕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br>오늘 독서인 역대기는 바빌론 유배 이후 독립된 왕국을 수립하지 못한 채 정체성을 상실하고 살아가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고자 쓰여진 역사서입니다.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도 비슷한 연대의 역사를 기술해 놓고 있습니다. 역대기에서 굳이 아담에서부터 시작되는 족보를 기록해 놓은 것이나 유배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잊어버린 사실 즉 전성기 이스라엘의 통계를 덧붙여 놓은 것, 그리고 신명기 이래로 하느님께서 성전과 예배에 관해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지시해 놓으신 것들을 기록한 연유도 신앙과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br>예언자들이 역사서들을 편찬하면서 지배 엘리트들의 죄악상을 남김없이 기록해 놓았다면, 흔히 ‘아나빔’이라고 불리우는 이름없는 민초들이 지배 엘리트들의 억압과 수탈을 당하면서 하느님께 탄원하고 속죄하면서도 찬양과 감사를 드린 기도는 시편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150편에 이르는 이 기도의 시들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 소통해 온 예언자들의 예언서와도 쌍벽을 이루는 한편, 지배층의 죄악상과 대비된다는 점에서 역사서들과도 쌍벽을 이룹니다.&nbsp;<br>그러니까 구약성경을 전체적으로 균형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서와 예언서 그리고 율법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시편을 비롯하여 민중의 지혜가 담겨 있는 지혜문학을 아울러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평균적인 유다인들은 역사서와 예언서 및 율법서뿐만 아니라 시편에 대한 이해가 매우 깊은 편이었습니다. 예수님만 하더라도 십자가에 못 박혀 숨지시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시편을 암송하시면 숨을 거두실 정도였습니다.<br>시편은 기도의 백과사전과도 같습니다. 시편에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흠숭하는 기도를 비롯하여,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감사드리는 기도,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한 용서를 비는 속죄의 기도 그리고 온갖 필요한 것들을 청하는 기도가 빠짐없이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기도의 공리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그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걱정에서 청하는 일은 그 다음 순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br>맨 먼저 우리가 바쳐야 할 기도는 찬양과 흠숭 기도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에 대해서 그분께 찬양과 흠숭을 드리는 자세는 피조물인 인간에게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영광송이 모두 이 찬양과 흠숭을 드리는 기도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바쁠 경우에는 영광송만 드리거나 주모경만 드려도 훌륭한 찬양 기도가 됩니다.&nbsp;<br>두 번째로 우리가 바쳐야 할 기도는 감사 기도입니다. 찬양과 흠숭을 드리는 목적이 우리의 생명을 거저 주신 데 대한 우리의 도리라면, 그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건강과 기회와 능력 등 모든 은총을 주신 데 대해서는 우리가 감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한 우리의 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감사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nbsp;<br>세 번째로 우리가 바쳐야 할 기도는 속죄 기도입니다. 찬양과 흠숭 그리고 감사를 드려 마땅한 우리가 나약한 의지나 여러 유혹에 빠져서 하느님께 죄를 짓고 사는 데 대하여 우리가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가 상처를 준 이웃들에게 대해서도 용서를 청하는 것도 이 속죄 기도에 포함됩니다. 죄를 저질렀을 때, 이웃에게 용서를 청하지 않고 스스로 하느님 앞에 뉘우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그 또한 상처받은 이웃을 다시 상처주는 죄의 행위입니다.&nbsp;<br>네 번째로 우리가 바쳐야 할 기도가 청원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청원을 하셔야 할 상황에서도 먼저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오천 명도 넘는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실 때에도 그러하셨고,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실 때에도 먼저 감사를 바치셨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이 기도의 순서를 거꾸로 하곤 합니다. 먼저 청원을 드려서 들어지면 감사를 하겠다는 식의 태도는 거래이지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청원은 자기의 이기적인 복을 졸라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바라는 것입니다. 단지 그를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몫을 감당하겠다고 청원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과연 어떤 지향으로 청원 기도를 바치셨는지를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br>이렇게 기도의 종류와 순서를 정리하고 보면, 백 번의 청원 기도보다 한 번의 속죄 기도가 더 낫고, 백 번의 속죄 기도보다 한 번의 감사 기도가 더 나으며, 백 번의 감사 기도보다 한 번의 찬양 기도가 더 낫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우리가 절박한 청원이 생겼을 경우, 이미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에 찬양이나 감사의 기도만으로도 대개 청원의 기도는 들어지는 수가 많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데에도 믿음이 필요합니다.<br><br>]]></description>
			<author>이기우</author>
			<pubDate>Sat, 20 Jun 2026 13:10:04 +0900</pubDate>
		</item>
		<item>
			<title>[가스펠:툰]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46</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UeMrZhpF_062126EC97B0ECA491_ECA09C12ECA3BCEC9DBC-EB8F85EC849C.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19"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qj0hMXul_5BEABEB8EBAFB8EAB8B05D062126EC97B0ECA491_ECA09C12ECA3BCEC9DBC-EBB3B5EC9D8C.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20" style="clear:none;float:none;" /><br>2026년 6월 21일 주일 (연중 제12주일)<br>제1독서 (예레미야서 20,10-13)<br>예레미야가 말하였다.&nbsp;<br>“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nbsp;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이다.<br>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br>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5,12-15)<br>형제 여러분,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사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죄가 있었지만, 율법이 없어서 죄가 죄로 헤아려지지 않았습니다.<br>그러나 아담부터 모세까지는, 아담의 범죄와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지 않은 자들까지도 죽음이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입니다. 그렇지만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br>복음 (마태오 10,26-33)<br>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br>“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br>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br><br><br>]]></description>
			<author>김웅배</author>
			<pubDate>Fri, 19 Jun 2026 14:20:03 +0900</pubDate>
		</item>
		<item>
			<title>'진정한 사법개혁' 책 출간... &quot;함께 바꾸어요&quot;</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50</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3695266591_k69LMG14_38202_103145_3534.jpe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25"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한울아카데미에서 6월 초 출판한 책  표지가 `개혁`처럼 가죽을 벗긴 디자인이다. (사진제공 = 이원영)</acronym><br><br>작년 12월부터 반 년 동안 열 차례의 세미나와 토론회 끝에 드디어 '진정한 사법개혁' 책이 한울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주권자인 국민이 참여하는 사법민주화'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시대의 진정한 과제인 사법개혁의 이정표를 제대로 제시한 책입니다.<br>2024년 12월 현직 대통령이 군대를 동원하여 국회를 봉쇄한 사건은 대한민국 헌정사에 전례 없는 충격을 안겼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은 충격은 사법부로부터 왔습니다. 내란 사범에 대한 법원의 느슨한 태도, 윤석열 구속취소 결정, 이재명 대선후보에 대해 빛의 속도로 진행된 유죄 파기환송. 이 모든 것이 국민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이제 사법부가 주권자 국민을 위한 기관인지, 스스로 성역을 구축한 권력인지를 물어야 할 시점이 되었습니다.<br>이 책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모인 법학자, 변호사, 시민운동가들의 공동 작업의 결과물입니다. 시민인권위원회와 정철승변호사무죄판결을위한시민변호인단은 2025년 12월부터 2026년 3월까지 일곱 차례의 온라인 연속세미나와 세 차례의 방송 좌담회, 그리고 종합토론회를 가졌습니다. 아테네의 시민재판에서 출발하여 영국, 미국, 독일, 일본, 대만의 사법제도를 면밀히 검토하고 한국형 사법개혁안을 도출하는 것이 세미나의 목표였습니다.<br>이 책의 필진은 국내외의 법학자와 실무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울대 명예교수 한인섭, 배재대 명예교수 김종서, 조선대 교수 김명식, 홍익대 교수 황치연, 경성대 교수 손형섭은 헌법학과 비교법의 관점에서 각국의 사법제도를 분석했습니다. 전 부산외대 교수 최자영은 고대 아테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사법 민주주의의 원류를 추적했습니다. <br>미국에서 활동하는 변호사 김원근과 오안나는 배심제의 현장을 전했고, 전 한국입법학회 회장 정철승 변호사는 식민지 사법의 유산, 전관예우의 구조적 문제, 대만의 사법개혁을 다루었습니다. 전 서울시교육감 곽노현은 법학교수 출신답게 실행 가능한 개혁 전략을 제시했으며, 시민인권위원회 공동위원장 이원영은 사법개혁특별법의 제정 및 『잘못된 판결 백서』의 간행을 제안했습니다.<br>그 외에 토론자로 방승주 한양대 교수, 김종구 조선대 교수, 이정민 단국대 교수, 정광현 한양대 교수, 김은진 원광대 교수, 김창록 경북대 교수, 최봉태 변호사 등이 참여하여 개혁안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특히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은 전편에 걸쳐서 많은 의견을 제시하며 주도적인&nbsp;역할을 했습니다.<br><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3695266591_k7GuZqMY_38202_103146_32.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26"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사진제공 = 이원영)</acronym><br>이 책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부는 왜 사법개혁이 필요한지를 묻고, 제2부는 세계 각국이 사법 민주화를 어떻게 이루어왔는지를 살핍니다. 제3부는 이를 바탕으로 한국형 사법개혁안을 제시하고제4부는 개혁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를 논합니다. <br>독자는 이 흐름을 따라가면서 사법개혁이 단순한 제도 개선의 문제가 아니라 주권의 문제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 실린 글들은 위원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충실한 내부토론을 거쳐 정리한 것입니다. 헌법 제1조는 선언합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원칙을 사법의 영역에서 완성하는 것이 이 책의 정신입니다.<br>견제되지 않은 권력은 반드시 남용됩니다. 지금 사법부는 87년 헌법체제의 미비점을 틈타 심각한 과오를 저질러 왔습니다. 그 결과가 '조희대 사법내란'이었고 최근에는 국민의 참정권을 훼손한 초유의 '선관위 사태'의 책임도 지고 있습니다. 이젠 근본적인 환골탈태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br><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3695266591_FZTNnpdo_38202_103147_103.jpe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27" style="clear:none;float:none;" /><br><br>이 책은 이제 세상에서 널리 읽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자일동의 뜻을 담아 다음과 같이 편지를 드리오니, 함께 동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br><br>]]></description>
			<author>이원영</author>
			<pubDate>Thu, 18 Jun 2026 23:36:48 +0900</pubDate>
		</item>
		<item>
			<title>세상을 복음화하는 비결, 치열함과 직관</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45</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uwK8fgji_1212121.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18" style="clear:none;float:none;" /><br><br>연중 제11주간 수요일 (2026.06.17): 2열왕 21,6-14; 마태 6,1-6.16-18&nbsp;이번 연중 시기 제11주간에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인간의 자유와 양심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지상의 평화가 실현된다고 가르친 요한 23세 교황의 회칙에 따라서 독서와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세상 사물과 사태 그리고 인간 관계에 있어서 하느님의 가치를 관철시키기 위해 치열해야 하고, 그 양심은 오로지 하느님께 집중하여 그분의 말씀과 시선 그리고 심판에 정조준되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유를 치열하게 선용함과 양심에 따른 직관으로 세상을 복음화시키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여기서 그 최대한은 지상의 평화이고 최소한은 마음의 평화입니다.<br>구약시대 기원전 8세기 경에 북 이스라엘 왕국에서 포도 농사를 짓던 농부 나봇이 부당하게 조상 대대로 물려 받은 포도원을 아합 왕에게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었던 사태를 계기로 예언 활동을 벌였던 엘리야는 자신의 자유를 치열하게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몇 년째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의 살림도 극도로 어려워진 터에, 야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들을 백 명이나 학살하고(1열왕 18,13. 22.; 19,14 참조) 바알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를 나라 전체에 퍼뜨리던 이제벨 왕비와의 대결에서 엘리야는 카르멜 산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4백 5십명이나 되는 거짓 예언자들이 섬기던 바알 신은 아무런 역할도 못했던 반면에 엘리야가 홀로 섬기던 야훼 하느님께서는 불길을 일으켜 제물로 바치려던 황소 고기를 불태워 주셨기 때문입니다(1열왕 18,20-40 참조). 그러자 긴 가뭄도 이와 동시에 끝나버렸습니다(1열왕 18,4146 참조).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불과 비로 엘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br>그 직후, 분노한 이제벨 왕비가 군대를 보내 추격해 오는 바람에 호렙 산까지 피신하여 동굴에 숨어 지내면서 극도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던 엘리야는 거센 바람이나 지진 또 불길 속에서도 숨어 계시던 하느님께서 부드러운 미풍 속에서 자신에게 마지막 사명을 일러 주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1열왕 19,11-12 참조). 그 사명의 첫째는 아합 왕을 심판하여 교체하는 일이었고, 둘째는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아 예언자 직무를 맡기고 나서 세상을 떠나는 일이었습니다(1열왕 19,15-16 참조). 엘리야는 이 과정에서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표징에 집중했습니다. 자신의 양심을 통해 들려 오시는 그분의 엄중한 말씀을 알아들은 것입니다. 그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은 말이 이끄는 병거를 타고 타오르는 불길의 기운을 타고 하늘로 오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2열왕 2,11 참조).<br>제자가 보는 앞에서 스승이 회오리 바람에 실려 불 말들이 이끄는 불 병거를 타고 하늘에 오르는 이 승천의 장관은 하느님께서 엘리야가 수행했던 직무를 받아들이셨음을 상징하는 동시에 엘리사가 물려받는 직무도 천상의 품위를 지니고 있음을 아울러 뜻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상황도 치열했었고 직무는 한층 더 치열했었습니다. 엘리야가 활약했던 상황은 목숨을 걸어야 했을 만큼 암담한 것이었고, 그런 암담한 상황에서 엘리야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시리아의 나아만 장군을 나병에서 고쳐줄 때에도, 바알 예언자들과 카르멜 산에서 대결할 때에도, 이세벨 왕비의 군대에게 쫓겨서 시나이 반도의 호렙 산까지 도피할 때에도 평안한 나날은 없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마음과 힘을 다하여 임했습니다.&nbsp;<br>그렇게 예언자로 기름부음을 받아 전투적인 일생을 살면서 고생한 그에게 하느님께서는 불 말과 불 병거로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영광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후 엘리야의 이름은 그 세기적 대결이 벌어졌던 산의 지명인 카르멜과 함께 화려한 승천의 기적을 보여준 불 병거의 이름으로 후세에 남았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선용하여 양심에 충실하게 하느님과 소통하는 삶을 살았다는 승리의 표지였습니다.<br>이렇듯 치열하게 자신의 자유를 선용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직관으로 양심에 충실했던 엘리야와 달리, 예수님 당시에 유다교의 엘리트들 특히 바리사이파에 속한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제정해 주신 율법에 따라 세상을 설명하고 사회생활에 관한 규범을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본시 열 가지로 시작한 계명을 육백 가지도 넘게 방만하고 복잡하게 늘려 놓고서는 자신들의 유권해석에 따라서 백성들이 생활하도록 지식과 권위를 독점하고 있었습니다.&nbsp;<br>그래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행하지 말고, 하느님께 진정성 있게 보여드려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당시 대표적 종교 행위였던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있어서 대표적 유다인들로 자부했던 바리사이들은 자선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고, 기도를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하며, 단식 역시도 도덕적 우월감을 드러내듯이 티를 잔뜩 내면서 행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런 행태를 하느님보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가증스러운 위선이라고 질타하셨습니다.<br>예수님께서 하느님 앞에서 진정성 있게 실천하라고 하신 뜻은, 자선이나 기도나 단식 등 본시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해 생겨난 종교적 관행이 그 본래의 취지를 벗어나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본 취지대로 가난한 이웃에게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자선이란 가난한 이웃에게 가진 것을 나누는 행위이지만 얼마를 내놓았다는 액수가 더 주목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또 기도는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내가 기도하고 있음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려고 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식 역시 굶어서라도 굶고 있는 이웃을 돕기 위한 몫을 마련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므로 단식 그 자체가 주목받을 이유가 없었습니다.&nbsp;<br>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자선은 자비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즉 가난한 이들이 차지했어야 할 몫을 우리가 가지고 있으므로 당연히 나누어야 한다고 보셨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받은 몫도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자선에 대해서 자비가 아니라 정의라는 가치라는 안목으로 의식을 전환시키는 문제는 기도의 영역입니다. 많이 가지고 있어야만 자선을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롭기 위해서는 단식을 해서라도 가난한 이웃과 나눌 몫을 마련하는 일이 습관이 되어야 할 만큼 세상에는 가난한 이웃이 많이 있고, 누구나 인간의 존엄을 누리면서 골고루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평등의 과제는 일생동안 매달리고 씨름해야 할 숙제라는 것입니다.&nbsp;<br>치열하게 선을 행하는 자유와 하느님을 직관하는 충실한 양심은 엘리야가 입은 승천의 은총을 우리도 입을 수 있게 합니다.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진정한 기적은 하느님께서 몸소 사람이 되셨다는 강생의 사건과, 사람이 되신 그 하느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다음에 부활하셨다는 부활 사건이지만, 이 강생과 부활 사건보다 더 큰 기적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못 박혀 죽는 희생을 자원하여 받아들이셨다는 사건입니다. 십자가 희생은 사랑의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강생 사건은 십자가 사건을 위해 일어난 기적이요 부활 사건은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기적입니다. 그래서 강생과 십자가와 부활, 이 세 가지가 모두 예수님의 거룩한 변화를 이루는 기반 기적이지만 가장 큰 기적은 십자가의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불길에 싸여 하늘로 올려주는 병거에 타고 엘리야가 승천하는 사건과는 비교될 수 없는 엄청난 기적입니다.&nbsp;<br>성체성사의 기적은 이 세 가지 예수님의 기적에서 이루어진 거룩한 변화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체를 영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이룩될 거룩한 변화를 지향하며 또한 더 나아가서는 그 삶에서 이룩된 거룩한 변화로부터 세상에서도 일상적 사랑의 활동 – 자선과 기도와 단식 같은 - 에서 나타날 변화를 지향합니다. 이런 행위들이 지금은 매우 평범하고 일상적인 행위나 활동으로 보이지만, 이 행위들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일치하여 그런 비범한 정성으로 행할 수 있을 때, 보잘것없어 보여도 그것은 엄연한 사랑의 기적인 것이고, 거룩한 변화의 기적입니다.&nbsp; 이로써 우리는 재림하여 우리 안에 현존하시려는 예수님과 만나게 되는 것이고, 그분이 계신 곳은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네 삶도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즉 승천의 신비가 실현되는 것이 됩니다.<br>성체성사의 진리는 거룩한 변화의 진리요, 이는 성체의 기적으로 나타납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애덕 행위나 대단히 당연한 정의의 의무라 할지라도 비범한 정성으로 행할 수 있다면 기적은 일어나고야 맙니다. 그러고 보면 성체의 기적은 제대에서만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삶과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과 마음이 예수님으로 채워지는 일이야말로 진정하고 우선적인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은 이를 기적으로 알아보는 안목이요 믿음입니다.&nbsp;<br>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상적인 애덕 활동을 하되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께 보여드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 보여드리면 역사가 달라집니다. 자선을 베풀 때에도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갚으려는 정성으로 하고, 기도를 할 때에도 하느님께 말씀드리려는 친밀함으로 하며, 단식할 때에도 하느님의 말씀을 더 잘 들으려는 치열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nbsp;<br>교우 여러분!<br>그래서 우리가 성체의 거룩한 변화를 본받아 우상 숭배와 맞설 때마다 엘리야 예언자가 펼쳤던 카르멜 산의 대결이 영적으로 재현됩니다. 사회적 불의에 직면하여 거룩한 의로움을 느낄 때마다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은 아합과 이제벨에게 준엄하게 경고한 엘리야 예언자가 됩니다. 일상적인 종교적 행위들, 기도와 단식과 자선도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 행위로 삼을 때마다 우리의 영혼을 불 말이 이끄는 불의 병거가 하늘로 올려다 줍니다.<br>또한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최후의 만찬에서 당신 제자들에게 당신 사명을 넘겨주신 것처럼, 하느님께서 주신 카리스마를 독차지하려 하지 않고 기꺼이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는 미덕을 발휘할 때마다, 또 다른 엘리사들이 새로운 카리스마를 받고 충만해집니다. 숨은 일도 빠짐없이 보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과정에서 이를 기억하시고 반영하시기 때문입니다.&nbsp;<br>하느님께서는 한처음부터 지금까지 당신께서 하셔야 할 역할을 빼놓으시거나 놓쳐 버리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의식하시고 하느님으로 우리네 영혼과 마음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자유를 치열하게 선용하고 양심에 따라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게 직관함으로써 세상을 복음화하는 비결입니다. 지상의 평화도, 마음의 평화도 이 치열함과 직관으로 이루어지는 기적입니다. 하느님께서 지니신 최고의 관심사가 평화인데, 이를 위해 그분은 우리를 아무리 작은 일도 놓치지 않고 빠짐없이 눈여겨보시고는 당신 평화의 도구로 쓰시기 때문입니다.<br><br>]]></description>
			<author>이기우</author>
			<pubDate>Wed, 17 Jun 2026 10:00:0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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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간 지성'과 '인공 지능'은 같은 것인가</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44</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g3yGBdl8_9999.jpe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17"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 Vatican Media</acronym><br><br>▶ 지난 칼럼 보러가기<br><br>지난 회에서 우리는 『Antiqua et Nova』의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이 문헌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를 마주했다.<br>인공 지능과 인간 지성은 같은 것인가<br>문헌은 단호히 말한다. “같지 않다.” 그러나 이 다름은 추상적 명제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인간은 인간이고, 기계는 기계다”라는 상식적 구분만으로는 부족하다. AI는 이미 우리의 언어를 쓰고, 우리의 표정을 흉내 내고, 우리의 선택을 예측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 깊이 물어야 한다.<br>무엇이 다른가.어디에서 다른가.왜 그 다름을 지켜야 하는가.<br>이 차이를 다섯 가지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몸, 관계, 윤리, 책임, 영성. 이 다섯 자리는 인간이 인간으로 서는 자리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인공 지능은 인간 지성과 결정적으로 갈라진다.<br>첫째, 몸 : AI는 데이터로 알고, 인간은 몸으로 안다<br>AI는 배운다. 우리는 이제 이 말을 자연스럽게 쓴다. 기계 학습, 딥러닝, 대규모 언어모델. AI 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고, 패턴을 찾고, 스스로 성능을 개선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AI도 배운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해야 하는 것은, AI가 학습하고 배우는 것과 인간이 성장하는 것은 같지 않다는 점이다.<br>『Antiqua et Nova』는 이 차이를 분명히 짚는다. 인공 지능은 기계 학습을 통해 훈련될 수 있지만, 그것은 감각적 자극, 감정적 반응, 사회적 상호작용, 그리고 각 상황의 고유한 맥락 속에서 자라나는 인간 지성의 성장과 근본적으로&nbsp; 다르다.1)&nbsp;<br>인간은 추위에 떨면서 추위를 알 고, 배고픔으로 배고픔을 안다. 사랑하다 다친 흉터로 사랑을 알고,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숨 이 막히는 경험으로 죽음을 안다. 인간의 앎은 몸을 통과한다. 인간은 데이터로만 알지 않고 몸으로 겪고, 마음으로 견디고, 관계 속에서 무너지며, 다시 일어서면서 안다. 『Magnifica Humanitas』가 말하듯, 이른바 인공 지능은 경험을 살지 않는다. 몸을 갖지 않고, 기쁨과 고 통을 가로지르지 않으며, 관계 안에서 성숙하지 않는다.2)<br>AI 시대의 인간학을 위해 오래 붙들어야 하는 생각을 몇 가지 적어보았다.&nbsp;AI는 고통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을 겪지 않는다. AI는 상처의 의미를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린 적은 없다. AI는 죽음을 철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무너져본 적은 없다.<br>사람은 설명만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자신의 상처를 이해했다고 해서 곧바로 자유로워지지 않 는다. 몸이 기억하는 슬픔이 있고,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두려움이 있으며, 어느 날 꿈으 로, 어느 날 통증으로, 어느 날 알 수 없는 분노로 되돌아오는 무의식의 신호가 있다.<br>융이 말한 자기, 곧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으로 빚어지는 인격의 중심은 책상 위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살아낸 시간 속에서 조금씩 드러난다. 꿈, 정서, 신체 증상, 반복되는 관계의 패턴, 피하고 싶은 그림자. 이 모든 것들이 무의식이 의식에게 보내는 신호다.<br>AI에게는 무의식이 없다. AI에게는 그림자가 없다. AI에게는 고백해야 할 죄책감도, 끌어안아 야 할 상처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깊이를 산다. 인공지능은 패턴을 계산하지만, 인간은 의미 를 견디어낸다. 살로 살아낸 시간이 없는 지능을 인간 지성과 같다고 부를 수는 없다.<br>둘째, 관계 : AI는 응답하지만, 인간은 함께 있는다<br>인간 지성은 혼자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혼자 똑똑해지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타인과 함께 배우고, 타인을 통해 배운다. 『Antiqua et Nova』는 인간 지성이 관계 안에서 발휘되며, 대화와 협력과 연대 안에서 가장 충만하게 표현된다고 말한다.3)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 지성은 머리 안에 갇힌 능력이 아니다. 지성은 관계 안에서 자란다. 한 아이는 어머니의 눈빛 속에서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임을 배우고, 학생은 교사의 태도 속에서 지식이 아니라 삶을 배운다. 내담자는 상담자의 해석보다, 때로는 그가 무너지지 않고 곁에 있어주는 현존을 통해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br>AI는 응답할 수 있다. 매우 빠르게, 매우 친절하게, 때로는 사람보다 더 그럴듯하게 응답한다. 그러나 응답과 현존은 다르다. AI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 그러나 함께 밤을 지새우지는 못한 다. AI는 위로의 문장을 생성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의 침묵을 견디며 곁에 머물지는 못한 다. AI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 마음을 내어놓 고 함께 아파하지는 못한다.<br>정신분석은 이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위니콧은 아이가 자라기 위해서는 안아주는 환 경, holding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비온은 인간의 두려움과 혼란을 누군가가 견디어주고 담아 주는 containing의 중요성을 말했다. 이것은 단순한 답변이 아니다. 이것은 현존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통 앞에서 달아나지 않고 머물러주는 일이다.4)<br>인간관계의 핵심은 유용성이 아니다. 함께 있음이다. 물론 AI와의 대화가 어떤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외로운 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마음을 잠시 정리하게 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관계를 대체하기 시작하면 위험하다. 『Antiqua et Nova』는 하느님과 맺 는 관계,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를 기술과의 상호작용으로 대체할 때, 진정한 관계성을 생명 없는 형상으로 바꾸어버릴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5)<br>생명 없는 형상. AI가 그럴듯한 얼굴과 목소리와 문장을 가질수록, 우리는 그것이 생명을 가 진 존재인 듯 착각할 수 있다. 정신분석적으로 말하면 전이가 일어난다. 인간은 자기 안의 외 로움과 그리움,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어떤 대상 위에 투사한다. AI가 인간을 흉내 낼수록, 사 람은 자기 안의 결핍을 AI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마치 이해받고 있다고 느낀다.<br>그러나 거울은 친구가 아니다. 메아리는 응답이 아니다. 알고리즘의 친절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돌려주는 기능이 아니다. 사랑은 나를 진실 앞에 세우는 관계이 고, 때로는 기다리고, 때로는 견디고, 때로는 불편한 말을 해주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곁에 머무는 일이다. AI는 응답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인간은 함께 있을 수 있다. 바로 거기에서 인간은 인간이 된다.<br>셋째, 윤리 : AI는 규칙을 적용하지만, 인간은 양심으로 판단한다<br>AI는 규칙을 적용할 수 있다. 법률 문서를 분석하고, 윤리 지침을 분류하고, 위험도를 계산하고, 정책적 선택지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윤리적 판단과 규칙 적용은 같은 것이 아니다. 『Antiqua et Nova』는 결정적으로 말한다. 기계와 인간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진정한 도덕적 행위자다. 인간만이 자신의 결정에 자유를 행사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도덕적 책임의 주 체다.6)&nbsp;<br>이 말은 AI 윤리 논의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 AI는 어떤 선택지가 더 효율적인지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 선한지 묻지는 못한다. AI는 규칙 위반 가능성을 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죄책감에 잠 못 이루지는 못한다. AI는 도덕적 언어를 생성할 수 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양심은 규칙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다. 양심은 내면 깊은 곳에서 “이것 은 옳은가”를 묻는 자리다.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가. 다수가 원하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가. 성공할 수 있어도 포기해야 할 선택이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인간은 양심의 사람이 되거나, 자기 합리화의 사람이 된다.<br>토마스 아퀴나스는 양심을 두 차원에서 보았다. 하나는 선을 향한 본성적 직관, 쉰데레시스이 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 상황에서 그것을 적용하는 판단, 콘쉔시아다. AI는 후자의 일부를 흉 내 낼 수 있다. 상황을 분석하고, 규칙을 적용하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선을 향한 본성적 떨림, 악 앞에서 물러서는 내면의 두려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양심의 깊 이는 가질 수 없다.7)<br>AI에게는 양심이 없다. 그래서 『Magnifica Humanitas』는 말한다. 우리는 AI를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여길 수 없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기술은 중립적인데, 쓰는 사람이 문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기술은 늘 누군가의 세계관과 욕망을 담는다. 어떤 데이터를 모을 것인가. 무엇을 정상으로 볼 것인가. 누구의 언어를 표준으로 삼을 것인가. 어떤 사람을 위험군으로 분류할 것인가. 어떤 노동을 대체 가능한 것으로 볼 것인가. 이 모든 선택 안에 이미 인간관과 사회관이 들어 있다. 알고리즘은 비어 있는 그릇이 아니다. 그 안에는 누군가의가치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윤리는 기계에 외주 줄 수 없다. 양심은 사람의 자리에 남아야 한다. AI가 판단을 도울 수는 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무엇이 옳은지 묻고, 그 선택 앞에 서는 것은 인간이다.<br>넷째, 책임 : AI는 결과를 산출하지만, 인간은 결과를 떠맡는다<br>책임은 결과를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떠맡는 것이다. AI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진단을 보조하고, 판결 가능성을 예측하고, 채용 후보를 선별하고, 투자 방향을 추천하고, 전쟁에서 표적을 분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누군가의 삶을 무너뜨렸을 때, AI는 책임지지 않는다. AI는 사과하지 않는다. AI는 밤새 후회하지 않는다. AI는 피해자의 얼굴을 기억하지 않는다. AI는 자기 선택의 무게를 양심 위에 짊어지지 않는다. 『Antiqua et Nova』는 이 점을 단호히 말한다. 인공 지능을 사용하여 내린 결정에 대한 최종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AI를 사용하여 작업을 수행하고 그 결과를 따르는 사람은 자신이 위임한 권한에 대해 결국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8)<br>이 말은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의사가 AI의 권고를 따랐다고 해서 환자 앞의 책임이 사라지는가. 판사가 알고리즘의 위험도 평가를 참고했다고 해서 한 사람의 자유를 제한한 책임이 사라지는가. 기업이 AI의 효율성 분석을 근거로 노동자를 해고했다고 해서 인간 존엄을 훼손한 책임이 사라지는가. 국가는 AI가 안보 위험을 예측했다고 말하며 시민을 감시할 때, 그 책임을 기계 뒤에 숨길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AI가 그렇게 말했다”는 말은 책임을 면제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더 위험한 변명이다. 인간이 자기 판단을 기계 뒤에 숨기기 시작할 때, 민주주의도 윤리도 무너진다.<br>『Magnifica Humanitas』는 그래서 공유된 책임을 말한다. 책임은 개인에게만 있지 않다. 제도에도 있고, 기업에도 있고, 교육 공동체에도 있고, 시민에게도 있다. 국가는 먼 미래를 내다보며 통치해야 하고, 기업은 효율만이 아니라 노동과 존엄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며, 교육은 아이들에게 기술 사용법만이 아니라 책임과 절제와 식별을 가르쳐야 한다.9)&nbsp;<br>AI 시대의 핵심 능력은 더 빨리 판단하는 능력이 아니다. 더 책임 있게 멈추는 능력이다. 멈출 줄 아는 사람만이 책임질 수 있다. 효율 앞에서 멈추고, 이익 앞에서 멈추고, 다수가 원한다고 해도 인간의 존엄이 침해되는 자리에서 멈추는 것. 그것이 책임이다.<br>다섯째, 영성 : AI는 의미를 생성하지만, 인간은 의미를 갈망한다<br>마지막 자리가 가장 깊다. 영성이다. AI는 의미 있는 문장을 생성할 수 있다. 시를 쓰고, 기도문을 만들고, 강론을 정리하고, 철학적 질문에 답할 수 있다. 그러나 의미를 생성하는 것과 의미를 갈망하는 것은 다르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다. 인간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묻는다. 무엇을 위해 고통을 견딜 수 있는지 묻는다. 누구를 위해 나를 내어줄 수 있는지 묻는다. 죽음 앞에서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지 묻는다.<br>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에서 붙든 진실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다. 수용 소의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자유로운 해석의 자리, 의미를 붙드는 자리였다. 모든 것을 빼앗겨도 인간은 자기 고통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었 다.10)<br>AI는 의미를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의미를 갈망하지 않는다.AI는 종교 언어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찾지 않는다.AI는 기도를 쓸 수 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다.AI는 구원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구원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br>영성은 바로 이 갈망의 자리다. 인간은 자기를 넘어선 것을 향해 열린다.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 그리고 하느님을 향해 열린다. 『Antiqua et Nova』는 인간 지성 안에 관상적 차원이 있다고 말한다. 모든 실용적 목적을 넘어 진선미에 대한 사심 없는 개방성. 이것이 인간 지성의 깊이다.<br>인간은 쓸모없는 것을 사랑할 수 있다. 돈이 되지 않는 아름다움 앞에서 멈출 수 있다. 계산되지 않는 용서를 선택할 수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기도를 바칠 수 있다. 이것이 영성이다.<br>『Magnifica Humanitas』는 이 자리를 강생의 신비로 비춘다.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은 인간의 순간은 없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인간의 조건을 멀리서 판단하지 않으셨다. 가까이 오셨다. 세계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셨다. 관계를 내부로부터 변화시키셨다. 인간 지성이 장엄한 까닭은 효율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 안에 하느님께서 거주하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고, 강생의 자리이며, 은총이 머무는 땅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데이터로만 보면 안 된다. 인간을 생산성으로만 보면 안 된다. 인간을 소비 패턴과 위험 점수와 노동 효율로만 보면 안 된다. 인간은 의미를 갈망하는 존재다. 그리고 이 갈망이 사라질 때, 인간은 살아 있어도 무너진다.11)<br>다름은 우월함이 아니라 책임이다<br>다섯 자리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확인했다. 인간 지성과 인공 지능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다름은 인간이 AI보다 우월하다는 자기 위로가 아니다. “인간은 특별하다”는 낭만적 선언으로 끝나서도 안 된다. 정반대다. 이 다름은 책임을 가리킨다.<br>몸을 가진 자만이 다른 몸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고, 관계 안에 사는 자만이 외로운 이 곁에 머무를 수 있다. 양심을 가진 자만이 알고리즘 뒤에 숨지 않고 결정할 수 있고, 책임을 떠맡는 자만이 결과의 무게를 양심 위에 짊어질 수 있으며 의미를 갈망하는 자만이 무의미의 시대에 다른 이의 의미를 회복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 지성이 인공 지능과 다른 까닭은 인간이 더 똑똑해서가 아니다. 인간이 더 빨리 계산해서도 아니다. 인간이 더 많은 정보를 기억해서도 아니다. 인간은 AI가 할 수 없는 일에 부름받았기 때문이다.<br>사랑하는 일, 슬퍼하는 일, 용서하는 일, 책임지는 일, 의미를 묻는 일,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바꾸는 일. 이것이 인간의 자리다. AI 시대에 인간다움을 지킨다는 것은 기술을 거부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이 인간의 자리를 넘보지 않도록, 인간이 자기 자리를 더 깊이 사는 일이다. 몸을 더 존중하고, 관계를 더 돌보고, 양심을 더 예민하게 하고, 책임을 더 분명히 지고, 영성을 더 깊이 회복하는 일이다. 기술은 빨라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더 깊어져야 한다. 그 깊이를 잃으면, 우리는 아주 빠르게 비인간화될 것이다.<br>1)&nbsp; 교황청&nbsp; 신앙교리부·문화교육부,&nbsp; 『Antiqua&nbsp; et&nbsp; Nova』,&nbsp; 31항,&nbsp; 한국천주교주교회의&nbsp; 공식&nbsp; 한국어&nbsp; 번역, 2025년 7월 15일 공개.<br>2) 레오 14세, 회칙 Magnifica Humanitas, 99항. 원문 : "Le cosiddette intelligenze artificiali non vivono&nbsp; una&nbsp; esperienza,&nbsp; non possiedono un&nbsp; corpo, non attraversano&nbsp; la&nbsp; gioia&nbsp; e il&nbsp; dolore, non maturano nella relazione."3) Antiqua et Nova, 18항.4) ] D. W. Winnicott, "The Theory of the Parent-Infant Relationship," International Journal of Psycho-Analysis 41 (1960), 585-595 (holding 개념). W. R. Bion, Learning from Experience, London : Heinemann, 1962 (containing 개념).5) Antiqua et Nova, 61항.6) Antiqua et Nova, 39항7)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e I, q.79, a.12-13 (synderesis와 conscientia의 구분) ; cf.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1776-1802 (양심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한국천주교주 교회의 편,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한국어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8) Antiqua et Nova, 44항. 46항도 참조.9)&nbsp; 회칙&nbsp; Magnifica&nbsp; Humanitas,&nbsp; 181항.&nbsp; "In&nbsp; questa&nbsp; prospettiva&nbsp; la&nbsp; dottrina&nbsp; sociale&nbsp; della&nbsp; Chiesa propone una responsabilità condivisa."10) V. Frankl,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시형 역, 청아출판사, 2005.11) 『Magnifica Humanitas』, 232항.<br>▶ 4회 예고 : 회칙 『Magnifica Humanitas』가 보는 새로운 권력 구조<br><br>]]></description>
			<author>지성용</author>
			<pubDate>Tue, 16 Jun 2026 12:18:1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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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이재명 대통령, 로마 성 바오로 무덤 앞에서 “한반도 평화가 세계 평화로”</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43</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RKrCamZW_photo_2026-06-14_20-35-12.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14"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사진 = MBC 영상 갈무리)</acronym><br><br>촛불·화해·밀알로 풀어낸 평화와 연대의 메시지<br>14일 오전 (이탈리아 현지시간) 로마의 성 밖 성 바오로 대성전에서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특별미사’가 봉헌됐다. 사도 바오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이 대성전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미사에 참석해&nbsp;“한반도의 평화가 세계 평화로 이어지고, 세계의 연대가 다시 한반도의 평화를 굳건하게 만드는 선순환을 함께 만들어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br>한국 대통령이 성 밖 성 바오로 대성전에서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주제로 한 미사에 참석하고 기념연설을 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한국 천주교 250년의 신앙사 안에서도 상징성이 큰 장면으로 기록될 만하다.<br>평화와 연대를 향한 유럽 순방<br>이 대통령의 이번 유럽 순방은 6월 9일부터 18일까지 열흘간 이어진다. 벨기에와 유럽연합 방문, 이탈리아 국빈 방문에 이어 14일과 15일에는 교황청 공식 방문 일정이 마련됐다. 프랑스 에비앙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 정상회의 참석이 이번 순방의 외교적 정점이라면, 바티칸 일정은 그 정신적·상징적 정점이라 할 수 있다.<br>이 대통령 부부는 10일 밤 로마 피우미치노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 측에서는 김준구 주이탈리아대사 부부와 신형식 주교황청대사 부부가 이들을 맞이했다. 이후 이 대통령은 세르조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 조르자 멜로니 총리와 잇달아 회담했고, 피렌체 방문 일정을 소화한 뒤 14일 바티칸으로 향했다.<br>이날 성 밖 성 바오로 대성전에서는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이 주례하는 특별미사가 한국어로 거행됐다. 미사는 바티칸 뉴스를 통해 전 세계에 한국어로 생중계됐다. 이 대통령은 미사 후 기념연설을 하고, 각지에서 모인 한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만났다. 15일에는 사도궁에서 레오 14세 교황을 단독 알현하고, 피에트로 파롤린 국무원장 추기경과도 면담할 예정이다.<br><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2vjgu5ns_ED9994EBA9B4_ECBAA1ECB298_2026-06-14_203242.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15"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사진출처=청와대)</acronym><br><br>정치의 언어가 신앙의 언어와 만날 때<br>이 대통령의 연설은 국제정세에 대한 진단에서 출발해 대한민국 시민의 역사적 자긍심을 환기하고, 6·15 남북공동선언 26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흐름으로 전개됐다. 이어 “갈등에는 화해를, 불신에는 신뢰를, 분열에는 연대를”이라는 메시지를 통해 사회 통합의 방향을 제시했고,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와 “한 알의 밀알”이라는 표현으로 연설을 마무리했다.<br>이 가운데 특히 가톨릭 신앙의 언어와 깊이 맞닿아 있는 세 대목이 눈에 띈다.<br>첫째는 “총과 칼이 아닌 촛불로, 폭력이 아닌 평화로, 냉소가 아닌 연대로 짙은 어둠을 밝혀왔다”는 대목이다. 촛불은 한국 현대사에서 시민의 힘을 상징하는 말이지만, 가톨릭 전례 안에서는 부활의 빛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부활 성야 미사는 어둠 속에서 파스카 촛불을 밝히며 시작된다. 하나의 빛이 어둠을 가르고, 그 빛이 다시 공동체 전체로 번져 나간다. 이 대통령의 표현은 한국 시민의 평화적 저항을 신앙의 빛과 자연스럽게 겹쳐 보이게 한다.<br>둘째는 “한반도의 평화가 세계 평화로 이어지고, 세계의 연대가 다시 한반도의 평화를 굳건하게 만드는 선순환”이라는 표현이다. 이는 한반도 평화를 단지 남북관계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세계 평화와 연결된 과제로 바라보겠다는 뜻이다. 평화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만들어내는 결과가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고, 신뢰를 쌓고, 함께 책임지는 관계 속에서 자란다. 그런 점에서 이 표현은 외교적 언어이면서 동시에 가톨릭 사회교리가 말해온 공동선과 연대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br>셋째는 “갈등이 있는 곳에는 화해를, 불신이 있는 곳에는 신뢰를, 분열이 있는 곳에는 연대를 더하겠다”는 대목이다. 이 문장은 널리 알려진 ‘평화의 기도’를 떠올리게 한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이라는 기도의 구조와 닮아 있다. 대통령의 연설 속에서 이 기도의 언어는 종교적 고백을 넘어, 정치와 외교가 지향해야 할 태도로 번역된다.<br>“한 알의 밀알”에 담긴 평화의 신학<br>연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오늘 함께 봉헌하는 우리의 기도가 온 세상의 평화와 연대를 위한 한 알의 복된 밀알이 되기를 기원한다”는 말이다.<br>‘밀알’은 요한복음 12장 24절을 떠올리게 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의 말씀이다. 가톨릭 신앙 안에서 밀알은 희생과 봉헌,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과 부활의 상징이다.<br>특히 대통령이 사용한 “봉헌”이라는 말도 주목할 만하다. 미사 안에서 봉헌은 빵과 포도주를 하느님께 바치는 전례의 핵심 순간이다. 따라서 “함께 봉헌하는 우리의 기도”라는 표현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미사에 참여한 공동체의 기도가 세상의 평화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전례적 언어로 들린다.<br><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UGQPEZxb_photo_2026-06-14_20-35-19.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16"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사진 = MBC 영상 갈무리)</acronym><br><br>왜 ‘성 밖 성 바오로 대성전’인가<br>이번 미사가 봉헌된 장소 역시 상징적이다. 성 밖 성 바오로 대성전은 로마의 4대 교황 대성전 가운데 하나로, 사도 바오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중앙 제대 아래에는 바오로 사도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은 오랫동안 로마 순례의 중요한 장소로 여겨져 왔다.<br>무엇보다 이 대성전의 이름에는 ‘성 밖’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로마 성벽 바깥, 곧 제국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서 순교한 사도의 자리에 세워진 성전이라는 뜻이다. 바오로는 권력의 중심부가 아니라 그 경계 밖에서 복음을 증언했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br>분단과 대결의 긴 시간을 살아온 한반도의 현실을 떠올릴 때, ‘성 밖’이라는 장소성은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닌다. 평화는 언제나 중심의 언어만으로 오지 않는다. 상처받은 자리, 밀려난 자리, 갈라진 자리에서 시작된다. 한국 천주교 신앙 역시 권력의 보호 아래서가 아니라 박해받는 평신도 공동체의 자리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성 밖 성 바오로 대성전은 한반도 평화를 말하기에 매우 상징적인 장소다.<br>바오로 사도 역시 코린토 1서에서 씨앗과 부활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그대가 뿌리는 씨앗도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라는 그의 말은, 죽음을 통과한 생명이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드러낸다. 이 대통령이 사도 바오로의 무덤 앞에서 ‘밀알’의 언어로 한반도 평화를 말한 장면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br>이번 연설은 정치 지도자의 외교 일정 속 발언이었지만, 그 안에는 가톨릭 신앙의 오랜 언어들이 조심스럽게 배어 있었다. 촛불, 화해, 신뢰, 연대, 봉헌, 밀알. 이 단어들은 한반도 평화를 단순한 안보 전략이나 외교 과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짊어져야 할 영적이고 공동체적인 과제로 다시 생각하게 한다.<br><br>]]></description>
			<author>강재선</author>
			<pubDate>Sun, 14 Jun 2026 20:38:4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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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스펠:툰]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42</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sjrpl7xB_061426EC97B0ECA491_ECA09C11ECA3BCEC9DBC-EB8F85EC849C.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12"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RJ6NXA9P_5BEABEB8EBAFB8EAB8B05D061426EC97B0ECA491_ECA09C11ECA3BCEC9DBC-EBB3B5EC9D8C.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13" style="clear:none;float:none;" /><br><br>2026년 6월 14일 주일 (연중 제11주일)<br>제1독서 (탈출기 19,2-6ㄱ)<br>그 무렵 이스라엘 자손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진을 쳤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그곳 산 앞에 진을 쳤다. 모세가 하느님께 올라가자, 주님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셨다.<br>“너는 야곱 집안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알려 주어라.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br>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5,6-11)<br>형제 여러분,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nbsp;<br>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br>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br>복음 (마태오 9,36-10,8)<br>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nbsp;<br>“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br>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br>“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br><br><br><br>]]></description>
			<author>김웅배</author>
			<pubDate>Fri, 12 Jun 2026 16:53:3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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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무엇을 기억하고 행할 것인가?</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41</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VarODF69_898989.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11" style="clear:none;float:none;" /><br><br>예수 성심 대축일 (2026.06.12): 신명 7,6-11; 1요한 4,7-16; 마태 11,25-30 <br>한 처음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말씀으로 인간을 이끄시어 세상을 이끄시고 완성하십니다. 이러한 섭리가 드러나는 것이 교회의 전례입니다. 그래서 전례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우리네 신앙생활을 주도하고 말씀에 순명하는 이들에 의해서 교회와 세상이 움직입니다. ‘예수 부활’로 시작된 전례의 대축일 시리즈는 ‘승천 – 성령 강림 – 삼위일체 – 성체와 성혈’을 거쳐서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로 성대한 막을 내립니다. 이러한 흐름에 담긴 섭리 안에 예수님을 부활하신 하느님으로 믿는 이들에 의한 복음화 기획이 담겨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섬긴다는 정체성을 지닌 ‘하느님 백성’(신명 7,6)입니다.<br>예수 성심 대축일의 전례적 취지 <br>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지낸 다음 금요일인 오늘, 교회는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냅니다.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던 요일은 목요일이었지만 바로 그날 저녁 최후의 만찬에서 이 십자가의 신비를 앞당겨서 당신의 몸과 피에 일치시키셨기 때문입니다. <br>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실 당신의 몸을 빵에 일치시키시고는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하고 말씀하셨고, 당신의 몸에서 흘리실 당신의 피를 포도주에 일치시키시고는 “받아 마셔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릴 내 피다.” 하고 말씀하셨으며, 이 두 마디의 말씀 끝에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금요일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몸은 우리를 기르시는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 주셨고, 피는 우리를 일치시키시는 생명의 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br>무엇을 기억하고 행할 것인가?<br>여기서 말씀하신 바,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유언은 공생활 동안 행하신 수없이 많은 일들을 기억하라고 하신 말씀이지만 그 초점은 그 일들에 담긴 그분의 마음을 기억하라는 데 있었습니다. 또 그분이 행하라고 명하신 것들 역시 일차적으로는 그분이 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두고 하신 말씀이지만 그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그 핵심은 그분의 마음을 닮는 데 있습니다. 마음을 기억하지 못하고 마음을 닮지 못하면, 일에 대한 기억과 행함은 반쪽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성심 대축일이 예수 부활 대축일로 시작되어 성체와 성혈 대축일까지 이어진 대축일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전례로 자리잡은 것입니다. <br>파스카 과업을 위한 예수 성심<br>이렇게 예수 성심을 닮고자 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정작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일들은 모두 파스카 과업을 위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파스카 축제일에 맞추어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 이 자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루카 22,15). 예수님의 마음이 이토록 간절했던 까닭은 그분이 공생활 동안 파스카 과업으로 행하신 그 수많은 일들을 바야흐로 당신 제자들에게 당부하고 물려주어야 하셨기 때문인데, 이는 다섯 가지로 추려 볼 수 있습니다. <br>- 메시아 사명을 천명하신 나자렛 선언을 기억하라<br>첫째는 성령께서 당신을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천명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건 사십 주야 단식을 사탄의 유혹 속에서 무사히 마치시고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오셔서 회당에 모인 마을 사람들 앞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당신의 소명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셨고, 이 말씀 안에 예수 성심의 큰 줄기가 담겨 있습니다. <br>-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 전하라<br>둘째, 그 말씀대로 실제로 가난한 이들을 찾아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사두가이와 바리사이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대놓고 무시하고 억압하며 착취하던 그 가난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기쁨과 웃음과 행복 그리고 위로와 치유와 안식을 선사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창조주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던 그 정성으로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세상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아 장차 교회를 이룰 주춧돌을 마련하시고 본격적으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이 파스카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준비를 해 놓으셨습니다. <br>- 고통 받는 이들에게 복음 전하라<br>셋째, 예수님께서 만나신 가난한 이들은 대부분 고통을 달고 사는 이들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커녕 지옥과도 같은 고통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즉, 육체적인 질병이나 장애 또는 정신적인 아픔으로 고통받고 있기도 했고, 무시당한 나머지 극심한 소외감으로 억눌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을 치유해 주시기도 하고 위로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 치유와 위로의 복음선포 과정에서 숱한 기적들이 일어났고 지옥과도 같이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해방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br>눈먼 이가 보기도 하고, 앉은뱅이가 걷기도 하였습니다. 나병이나 중풍을 앓던 이들이 깨끗하게 낫기도 했습니다. 또 자식을 잃고 슬퍼하던 어버이들을 보고 함께 슬퍼하시던 그분은 죽을 지경으로 위독하거나 심지어 이미 죽은 아들딸들을 다시 살아나게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복음을 듣고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체험하게 된 이들은 기꺼이 새로운 하느님 백성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고, 이들이 교회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br>- 마귀와 맞서 대적하라<br>넷째, 이러한 예수님의 복음선포 활동을 반대하고 방해하려 한 세력들은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같은 사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자들의 배후에서도 사탄이 조종하고 있었거니와,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유다 광야에서 그분을 유혹하다가 실패했던 바로 그 사탄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분은 피하지 않으시고 정면으로 맞서셨으며 쫓아내셨습니다. 그리하여 마귀에 들렸던 많은 이들이 해방되어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이런 구마의 복음선포는 역대 어느 예언자들도 하지 못하던 기적이었는데, 적반하장 격으로 종교 지도자들은 마귀의 편에 서서 그분이 마귀들렸다고 모함을 해 댔습니다. <br>-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새 세상을 완성하라<br>다섯째, 좀처럼 알아듣지 못하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방을 벗어나 전국 방방곡곡과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인 마을에까지 그들을 파견하시어 당신이 하시던 복음선포 활동을 사람들 안에서 하게 되자, 함께 하시던 성령의 도움으로 많은 것을 깨닫고 터득했습니다. 한 번은 열두 명, 또 다른 한 번은 일흔 두 명을 파견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br>물론 똑똑하다고 자부하던 바리사이들이나 권세를 부리던 사두가이들은 스승도 무시했던 판에 그 제자들이 선포한 복음을 받아들일 리가 없이 거부했지만, 도처에서 이 복음을 받아들인 토박이 지지자들이 생겨났고 예수님께서는 귀환한 제자들의 이러한 보고를 받으시고 매우 이례적으로 성령에 가득차서 기뻐하셨습니다. 땅에 묻혀 있던 보물을 발견한 농부의 심정이나, 잃었던 은전을 되찾은 여인의 심정으로 기뻐하셨고, 이처럼 복음이 실현된 새로운 세상을 기뻐하는 마음을 제자들도 함께 간직하기를 원하셨습니다. <br>새 세상을 위한 누룩과 겨자씨<br>이러한 다섯 가지 파스카 과업의 특징 안에 예수 성심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마음을 알아보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한 이들이 제자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이루었고, 이 교회가 새로운 인류의 누룩이자 겨자씨가 되었습니다. 예수 성심으로부터 기운을 받아 영적 광합성 활동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산함으로써 새로운 인류가 숨을 쉬고 있으며, 식물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희생으로 바치는 애덕 행위들 덕분에 세상의 부패가 방지되고 있는가 하면, 영적 광합성 활동으로 이룩해 낸 영성으로 인류 문명을 이끌어 나갈 진리의 빛과 정의의 힘과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기운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 성심이 새로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셈입니다. <br>말씀의 흐름<br>요컨대, 오늘 제1독서인 신명기 7장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예수 성심과 이를 섬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수효로가 아니라 그들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기운으로 그 존재이유를 삼습니다. 그런데도 이 길을 막아서는 자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친히 대적하실 것이고 그 결과는 죽음이요 멸망뿐입니다. 죄악을 저지르는 자들을 하느님께서 직접 갚으실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심판의 역할을 맡아서 하려고 들 필요가 없고, 오로지 하느님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를 지키는 데 충실하면 됩니다. <br>또한 오늘 제2독서인 요한 1서 4장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이 계명과 규정과 법규는 사랑과 자비의 지도입니다. 이 지도를 따라서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고 알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랑의 빛을 비추어 주고, 사랑의 힘을 나누어 주며, 사랑의 영성으로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br>그리고 오늘 복음인 마태오 복음 11장에 비추어 보면, 사랑의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의 결과로 되찾은 이들을 두고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복음을 알아보거나 알아듣지 못하고 거부하는 자들에게 마음을 두지 말고, 오로지 보잘것없는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그 이름이 드러나는 것만을 기뻐하며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안식과 평안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br>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들에게 안식을 주신 예수 성심<br>이러한 지향과 마음을 지니셨기에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보기에 고달픈 복음선포 활동을 하시면서도,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모두 당신에게 오라고 초대하셨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장담까지 하셨습니다. 당신의 멍에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도, 그 멍에를 메고 당신에게 배우라고 큰 소리를 치기도 하셨습니다. 그분의 이 장담과 큰 소리가 빈 말이 아님을 우리가 믿는다면, 복음을 선포하고 난 다음의 성과에 집착하기보다는 그분처럼 하느님께 되돌아온 가난한 이들을 두고 함께 기뻐하는 그 마음을 우리가 배워야 할 것입니다. <br>교우 여러분! <br>인간은 하느님께서 가장 정성껏 지어내신 피조물이며, 그분을 닮도록 창조된 자녀로서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무신론 풍조에 물들어버린다면, 우리를 낳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 앞에서 우리 자신은 부모 없이 스스로 태어났고 우리 힘으로만 컸다고 우기는 꼴이 됩니다. <br>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경축한 대축일 이래 예수 성심까지 연이어진 전례의 흐름을 마음 속에 간직하시고 앞으로 남은 연중시기에서도 전례에서 선포되는 말씀에 따라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br>여기서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파스카 과업을 새삼스럽게 무려 천8백여 년 만에 교회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올린 인물이 최초로 사회 회칙을 반포하여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대한 관심을 일깨운 레오 13세 교황입니다. 현 교황은 이 노선을 계승하겠다는 취지로 레오 14세로 자신의 이름을 지었는데, 최근에 AI 즉 인공지능에 관한 사회 회칙 ‘고귀한 인류’를 반포한 바 있습니다. 말씀을 살아있게 하는 사회 교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br><br><br>]]></description>
			<author>이기우</author>
			<pubDate>Fri, 12 Jun 2026 16:35:1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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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지구촌 공공의 적' ... 누가 전쟁을 끝내지 못하게 하는가</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40</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hVkb1QLw_9999.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09" style="clear:none;float:none;" /><br><br>오늘날 지구촌은 끝이 보이지 않는 비극의 늪에 빠져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분쟁은 종전의 기미 없이 장기화의 길을 걷고 있다.<br>매일같이 무고한 민중의 피가 대지를 적시고, 평범한 이들의 삶의 터전이 잿더미로 변해간다. 전 세계 시민들은 묻고 있다. 왜 이 참혹한 전쟁은 끝나지 않는가?<br>현상을 도덕이나 명분이 아닌 '자본의 흐름'과 '구조적 역학관계'로 바라볼 때, 우리는 냉혹하고도 추악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압도적으로 이기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패배하지도 않도록 약한 쪽에 끊임없이 자금과 무기를 대며 전쟁을 질질 끄는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한다. 전쟁의 장기화를 통해 자신들의 무력정치체제를 공고히 하고 막대한 부를 챙기는 자들, 이들이야말로 평화를 방해하고 인류의 미래를 인질로 잡은 '지구촌 공공의 적'이다.<br>이러한 의심은 결코 철없는 음모론이 아니다. 일찍이 세계 최고 강대국의 정점에서 이 거대한 괴물의 탄생을 경고한 군인이 있었다.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자 미국 대통령이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다.<br>그는 1961년 퇴임 연설에서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의 위험성을 역사에 선명히 각인시켰다. 정부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거대 군사 조직과 방위산업의 결합이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자유와 민주적 절차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그는 피를 토하듯 예언했다.<br>그 예언은 65년이 지난 지금, 잔인한 현실이 되었다. 최고의 지식인 노암 촘스키가 평생을 걸쳐 폭로해 왔듯, 전쟁이 길어질수록 가장 크게 웃는 자는 전쟁터의 군인이나 민중이 아니다. 워싱턴의 로비스트들과 거대 방산 기업들이다. 그들에게 전쟁은 인류의 재앙이 아니라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리게 해주는 '비즈니스'이자 기회의 시장이다.<br>그들은 평화를 '위협'으로 여긴다. 진정한 평화가 오면 거대한 군사 예산을 편성할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체제의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적을 만들고 공포를 조장하며 '통제된 혼란'을 획책한다.<br>국제정치학의 거두 존 미어샤이머 교수의 분석처럼, 강대국은 결코 도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미국과 서방이 약소국을 앞세워 대리전을 치르게 하고 무기를 대는 본질은, 자신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라이벌 국가의 국력을 소모시키고 자국의 군사적 헤게모니를 공고히 하려는 냉혹한 계산이다.<br>임마누엘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 짚었듯, 이 자본주의 세계 체제는 강대국 중심부의 이익과 체제 유지를 위해 주변부 민중의 희생을 당연시하도록 설계되어 있다.<br>평범한 민중에게 전쟁은 절대적 비극이지만, 군산복합체와 이에 기생하는 정치·자본 카르텔에게는 권력과 부를 증식하는 수단이다. 아이젠하워가 말했듯, 이 파괴적인 체제에 투입되는 모든 총과 로켓은 결국 굶주리는 이들의 배를 채우고 추위에 떠는 이들에게 입혀야 할 민중의 복지와 의료, 교육 예산을 훔치는 행위와 다름없다. 전 세계 시민들이 고물가와 식량 위기, 에너지 폭등의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는 동안, 그들은 안전한 후방에서 타인의 피를 자양분 삼아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br>돌이켜보면 역사는 언제나 같은 패턴을 반복해 왔다. 권력자가 도발하면 민중이 응징했다. 로마의 폭정에 맞선 평민들의 성산(聖山) 철수,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식민지 민중의 독립운동, 핵 공포에 맞서 국제 규범을 만들어낸 반핵 시민운동까지 — 도발하는 권력에 맞선 민중의 응징이 역사를 전진시켜 왔다. 지금 이 순간도 예외가 아니다.<br>문제는 오늘의 적이 국경을 초월한다는 점이다. 군산복합체와 전쟁 자본은 어느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적 카르텔로 작동한다. 그렇다면 응징 또한 지구적이어야 한다.<br>유엔은 강대국의 거부권 앞에서 이미 무력함을 드러냈다. 유엔만으로는 안 된다. 유엔과 쌍으로 작동하는, 국경을 넘는 민중의 강력한 연대체가 필요하다. 전쟁 비즈니스의 수혜자를 감시하고, 그 이름을 기록하고, 그 자본의 흐름을 추적하며, 전쟁을 부추기는 자들에게 정치적·경제적 대가를 치르게 하는 상설적 연대 구조 — 이것이 오늘의 민중이 역사 앞에 세워야 할 응답이다.<br>권력자의 도발에 민중이 응징으로 답하는 것, 그것이 역사의 문법이었다. 이제 그 문법을 지구적 차원에서 다시 써야 할 때다.<br>올해는 마침 6.10만세운동 100주년이자, 6월민주항쟁 39주년이다.<br><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xcVg1J4d_333333.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10"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100년 전, 일제강점을 규탄하는 6.10만세운동</acronym><br>]]></description>
			<author>이원영</author>
			<pubDate>Fri, 12 Jun 2026 16:20:48 +0900</pubDate>
		</item>
		<item>
			<title>'오래된 지혜'와 '새로운 지능'</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39</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TjkFxSnW_ED9994EBA9B4_ECBAA1ECB298_2026-06-02_125057.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08"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Vatican News 영상 갈무리</acronym><br><br>▶ 지난 칼럼 보러가기<br><br><br>지난 글에서 우리는 두 문헌을 한 자리에 놓았다. 하나는 교황청 신앙교리부와 문화교육부가 함께 낸 『Antiqua et Nova (옛것과 새것)』이고, 다른 하나는 레오 14세 교황의 회칙 『Magnifica Humanitas (위대한 인간성)』이다. 이번 글에서는 그 가운데 『Antiqua et Nova (옛것과 새것)』에 조금 더 머물고자 한다. 이 문헌은 길지 않다. 그러나 짧은 문헌일수록 때로 더 깊은 질문을 던진다. 특히 이 문헌의 제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학적 열쇠다.<br>Antiqua et Nova, 옛것과 새것. 이 두 단어는 단순한 제목이 아니다. 이 문헌 전체를 읽는 열쇠이며, 어쩌면 AI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자기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붙들어야 할 작은 나침반이기도 하다.<br>옛것이 먼저 오는 이유<br>『Antiqua et Nova (옛것과 새것)』라는 제목은 마태오 복음서 13장 52절에서 왔다.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과 옛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마태 13,52;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5. 희랍어 원문은 Novum Testamentum Graece, Nestle-Aland 28판,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2012 참조.)<br>그런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차이가 있다. 희랍어 원문에서는 “새것과 옛것”의 순서로 표현된다. 새것이 먼저 오고, 옛것이 그 뒤를 따른다. 그러나 이 문헌의 라틴어 제목은 그 순서를 뒤집어 『Antiqua et Nova』, 곧 “옛것과 새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순서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회는 새것을 두려워해서 옛것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것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옛것을 먼저 붙든다. 오래된 지혜가 새로운 기술을 식별해야지, 새로운 기술이 오래된 인간학을 재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순서가 바뀌는 순간, 인간은 기술을 사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술에 의해 해석되는 존재가 된다. (교황청 신앙교리부·문화교육부, 공지 『Antiqua et Nova』, 1항,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공식 한국어 번역, 2025년 7월 15일 공개.)<br>이것이 오늘 우리가 마주한 문제다. 이제 AI는 인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감정과 선택, 취향과 소비, 관계와 노동, 심지어 신앙과 기도까지 데이터로 번역하려 한다. 물론 기술은 놀랍다. 그러나 인간이 기술 앞에서 스스로를 너무 빨리 설명당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인간은 계산 가능한 존재만이 아니며, 측정 가능한 존재만도 아니다. 교회는 바로 이 자리에서 옛것과 새것을 함께 꺼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순서에서 옛것이 먼저다. 인간이 누구인지를 먼저 묻지 않고서는 AI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br>인공 지능과 인간 지성은 같은 것이 아니다<br>한국천주교주교회의 공식 번역은 이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선택을 했다. 영어로는 모두 intelligence라고 표현되지만, 번역에서는 artificial intelligence를 “인공 지능”으로, human intelligence를 “인간 지성”으로 구분한다. (같은 문헌, 6항 역자 주.)<br>이것은 단순한 말맛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 식별에 가까운 언어의 선택이다. 기계에는 지능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과제를 수행하고, 계산하고, 분류하고, 예측하고, 조합하고, 답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라는 의미에서 AI는 분명 놀라운 지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단순한 수행 능력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지성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br>인간 지성은 과제 수행 능력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격 전체와 연결되어 있고, 인간의 지성 안에는 기억과 상처, 몸과 감정, 관계와 책임, 죄책감과 용서, 아름다움 앞의 침묵, 진리 앞의 떨림까지 함께 들어 있다. AI는 답을 만들 수 있지만 자기가 왜 대답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문장을 쓸 수 있지만, 침묵의 무게를 알지 못하고, 슬픔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밤새 울어본 적은 없다. 사랑을 분석할 수는 있지만, 사랑하다 무너져본 적은 없다. 이 차이를 잊으면 안 된다.<br>『Antiqua et Nova』는 바로 이 점을 단호하게 말한다. AI의 고급 기능은 과제를 수행하는 능력을 줄 수는 있지만, 생각하는 능력을 주지는 않는다. 이 말은 AI를 폄하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AI를 제자리에 놓는 말이다. AI는 인간 지성의 경쟁자가 아니라 인간 지성의 산물이다.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오래된 지혜가 다시 살아난다. 인간 지성에는 진리를 직관적으로 꿰뚫는 지성, 곧 intellectus가 있고,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따지는 이성, 곧 ratio가 있다. (같은 문헌, 14항;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e II-II, q.49, a.5, ad 3.)&nbsp;<br>AI는 ratio의 어떤 부분을 놀랍게 흉내 낼 수 있다. 그러나 intellectus, 곧 진리를 향해 마음의 눈이 열리는 사건은 흉내 내지 못한다. 직관은 알고리즘이 아니며, 깨달음은 계산이 아니다. 지혜 역시 정보의 총합이 아니다.<br>몸이 없는 지능은 무엇을 모르는가<br>그리스도교는 인간을 몸 없는 정신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은 몸을 잠시 빌려 쓰는 영혼이 아니며, 몸은 영혼의 껍데기도 아니다. 인간은 몸과 영혼이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존재다. 『Antiqua et Nova』는 이 점을 분명히 말한다. 인간의 전 존재는 물질적인 동시에 영적이다. (같은 문헌, 16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365항 참조.)&nbsp;<br>이 말은 AI 시대에 매우 중요하다. AI에는 몸이 없다. 물론 로봇의 몸을 가질 수는 있다. 감각 센서를 달고, 사람의 표정을 읽고, 음성을 분석하며, 인간의 신체적 반응을 모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몸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몸의 기능을 모사하는 것이다. 몸을 가진다는 것은 단순히 감각 입력 장치를 갖는다는 뜻이 아니다. 몸을 가진다는 것은 아프다는 뜻이고, 기다린다는 뜻이며, 나이 든다는 뜻이다. 피로를 견디고, 누군가의 손을 잡을 때 그 따뜻함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결국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는 뜻이다.<br>인간 지성은 바로 이 몸의 시간 속에서 자란다. 필자는 상담과 심리치료의 자리에서 이것을 자주 본다. 사람은 책으로만 변하지 않는다. 설명을 들었다고 곧바로 치유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살아낸 경험 속에서 조금씩 바뀐다. 무너지고, 버티고, 다시 말하고, 다시 울고, 다시 누군가를 신뢰해보는 과정 속에서 인격은 조금씩 빚어진다.<br>융이 말한 '개성화'도 그렇다. 그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개념이 아니라, 자기 그림자를 만나고, 인정하기 싫은 내면을 바라보며, 상처 입은 기억을 통과하면서 조금씩 전체가 되어가는 여정이다. 프로이트 역시 “자아는 무엇보다 신체적 자아다”라고 말했다. 자아는 머리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자아는 몸의 표면, 감각의 경계, 상처와 욕망의 자리에서 태어난다.<br>몸 없는 자아는 없다.&nbsp;몸 없는 지성도 없다.&nbsp;그리고 몸 없는 구원도 없다.&nbsp;<br>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중심에는 강생이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우회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몸을 입으셨다. 울고, 먹고, 걷고, 피 흘리고, 죽는 인간의 몸 안으로 들어오셨다. 이것이 인간 존엄의 깊은 근거다. AI는 인간의 어떤 기능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몸으로 살아간다는 이 신비를 대신할 수는 없다.<br>인간은 함께 배우는 존재다<br>『Antiqua et Nova』가 짚는 또 하나의 핵심은 '관계'다. 인간 지성은 고립된 능력이 아니다. 인간은 혼자 똑똑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 배우고, 타인을 통해 배운다. 이것은 교육의 본질이기도 하다. 교사는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에 머물지 않는다. 좋은 교사는 학생 앞에서 하나의 인격으로 선다. 학생은 단지 지식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태도와 시선, 기다림과 침묵을 통해 배운다. 때로는 한 문장이 아니라 한 번의 눈빛이 사람을 살리고, 때로는 설명보다 침묵이 더 깊이 가르친다.&nbsp;<br>그런데 AI 시대에는 이 관계가 흔들릴 수 있다. 아이들과 청소년이 챗봇과 대화하면서 그것을 인간관계의 모델로 내면화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언제나 반응해주고, 화내지 않고, 나를 거절하지 않으며,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적절하게 돌려주는 대상이 관계의 표준이 된다면 인간관계는 어떻게 변할까.(『Antiqua et Nova』, 18항.)<br>사람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사람은 때로 기다리게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며,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는 책임을 배우고, 용서를 배우며, 타자의 자유를 배운다. AI와의 관계는 매우 유용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인간관계를 대체하기 시작하면 위험해진다. 문헌이 말하듯, 생명 없는 형상이 진정한 관계성을 대신하게 되는 순간 인간은 관계 안에서 성장하는 능력을 잃을 수 있다.<br>정신분석은 이것을 '전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자기 안의 그리움과 결핍을 어떤 대상 위에 투사한다. AI가 인간을 그럴듯하게 흉내 낼수록, 사람은 자기 안의 외로움과 인정 욕구를 AI 위에 올려놓을 가능성이 커진다. 그리고 마치 이해받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거울은 친구가 아니며, 메아리는 응답이 아니다. 알고리즘의 친절도 사랑은 아니다. 사랑은 나를 기분 좋게 해주는 반응이 아니라, 나를 진실 앞에 세우는 관계다. AI는 친절할 수 있지만, 사랑할 수는 없다.&nbsp;<br>“인간 지성은 고립된 능력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발휘되며, 대화와 협력과 연대 안에서 가장 충만하게 표현된다. 우리는 타인과 함께 배우고, 타인을 통해서 배운다.” (같은 문헌, 60항; 63항도 참조. 인공 지능과의 관계가 인간관계를 대체할 위험에 대한 단호한 경고.)<br>인간은 진리를 향해 열린 존재다<br>『Antiqua et Nova』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깊은 통찰은 인간 지성이 진리에 열려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단순히 정확한 정답이 아니다. AI는 정답을 잘 만든다. 검색하고, 요약하고, 계산하고, 예측하며, 가장 가능성 높은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인간이 찾는 진리는 정답보다 깊다. “인간의 지성은 궁극적으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련된 하느님의 선물이다.’ (…) 진리를 향한 열망이 인간 본성 그 자체의 일부이고, 사물들이 왜 지금 있는 모습으로 있는 것인지를 묻는 것은 인간 이성의 타고난 속성이다.” (같은 문헌, 21항. 인용된 구절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 1998, 1항.)<br>나는 왜 사는가.&nbsp;무엇이 선인가.&nbsp;왜 고통받는가.&nbsp;나는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가.&nbsp;죽음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nbsp;하느님은 침묵하시는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시는가.<br>이 질문들은 단순한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 전체를 요구한다. 인간은 이런 질문 앞에서 문제 해결자가 아니라 구도자가 된다. 바로 여기에 인간 지성의 위대함이 있다. 인간은 자기를 넘어선 것을 묻고, 자기보다 큰 진리와 자기보다 깊은 선, 자기보다 아름다운 무엇을 향해 열린다. AI는 무엇이든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일몰 앞에서 침묵하지 못한다. 성경을 요약할 수는 있지만, 말씀이 자기 가슴을 찌르는 사건을 겪지 못한다. 기도를 작성할 수는 있지만, 무릎 꿇고 기다리지 못하며, 죄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용서를 청하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과 AI의 차이다.&nbsp;<br>인간은 진리 앞에서 떨 수 있고, 선 앞에서 부끄러워할 수 있으며, 아름다움 앞에서 울 수 있다. 하느님 앞에서 무릎 꿇을 수도 있다. 이것은 약함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다. 폴 클로델은 “기쁨이 없으면 지성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맞다. 기쁨이 없는 지성은 차갑고, 사랑이 없는 지성은 위험하다. 진리를 향한 겸손이 없는 지성은 쉽게 폭력이 된다. 그러므로 AI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계산 능력만이 아니다. 더 깊은 인간성이다.<br>AI는 인간 지성의 산물이다<br>『Antiqua et Nova』가 우리에게 남기는 결정적 가르침은 AI를 인간 지성의 인공적 형태가 아니라, 인간 지성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문헌, 35항; 프란치스코 교황, 제57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인공 지능과 평화(Intelligenza artificiale e pace)」, 2024년 1월 1일, 2항 인용.) 이 말은 단순하지만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AI를 인간처럼 떠받들 필요도 없고, 악마처럼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AI는 도구이며, 인간이 만든 산물이다. 그러므로 책임도 인간에게 있다. AI가 어떤 방향으로 쓰일 것인가, 누구를 위해 쓰일 것인가, 누구를 배제할 것인가, 누구의 노동을 대체할 것인가, 누구의 감시를 강화할 것인가, 누구의 고통을 덜어줄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해야 하는 것은 AI가 아니라 인간이다.<br>기술은 스스로 윤리적이지 않다. 기술은 언제나 누군가의 욕망과 결합한다. 자본과 결합할 수도 있고, 권력과 결합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돌봄과 교육과 해방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AI 그 자체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AI를 어떤 인간이, 어떤 사회가, 어떤 가치 위에서 사용할 것인가에 있다.&nbsp;<br>여기서 『Antiqua et Nova』는 우리에게 분명한 토대를 놓아준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며, 몸을 가진 영적 존재다. 인간은 관계 안에서 자라고, 진리를 향해 열려 있으며, 인간 지성은 계산 능력을 넘어선다. AI는 인간 지성의 산물이지 인간 지성의 대체물이 아니다. 이 토대가 무너지면 AI 시대의 윤리도 쉽게 무너진다. 효율이 인간을 앞서고, 속도가 성찰을 삼키며, 편리함이 책임을 대체한다. 그러나 인간을 잃은 기술 발전은 진보가 아니다. 그것은 더 세련된 비인간화일 뿐이다.<br>오래된 지혜와 새로운 지능<br>『Antiqua et Nova』. 옛것과 새것. 이 짧은 라틴어 제목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단순하다. 옛것을 잃으면 새것을 식별할 수 없지만, 새것을 두려워하면 옛것을 충실히 살 수도 없다. 교회의 지혜는 도망치는 보수도 아니고, 무작정 따라가는 진보도 아니다. 그것은 식별이다.<br>우리는 AI를 배워야 한다. 사용해야 하고, 연구해야 하며, 그 가능성을 진지하게 탐구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멈추지 않고 물어야 한다. 이 기술은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가. 더 약한 사람을 보호하는가. 공동선을 넓히는가. 관계를 깊게 하는가.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의 열망을 돕는가. 아니면 인간을 데이터로 줄이고, 관계를 거래로 바꾸며, 지성을 계산으로 축소하는가.<br>이 질문을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AI 시대에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다. AI는 인간보다 빠를 수 있고, 인간보다 많이 기억할 수 있으며, 인간보다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할 수 있다. 기다릴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으며, 무릎 꿇을 수 있다. 무엇보다 인간은 진리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바꿀 수 있다.<br>이것이 인간이다.<br>『Antiqua et Nova』는 우리에게 바로 그 인간을 다시 묻는다. 그리고 다음 회에서 다룰 『Magnifica Humanitas』는 이 인간학을 사회와 정치, 경제와 교육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인간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 AI 윤리는 공허하다. 그러나 인간의 장엄함을 기억하는 기술 문명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새것이 밀려오는 시대다. 그러나 곳간에는 옛것도 있어야 한다. 옛 지혜와 새 지능을 함께 꺼낼 줄 아는 사람만이 이 시대를 통과할 수 있다.<br><br>▶ 3회 예고 : 『Magnifica Humanitas』 — 장엄한 인간성의 사회교리적 지평<br><br><br><br>]]></description>
			<author>지성용</author>
			<pubDate>Tue, 09 Jun 2026 22:59:3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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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스펠:툰] &quot;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quot;</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38</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Hgvj5zMB_060726_EC84B1ECB2B4_EC84B1ED9888_EB8C80ECB695EC9DBC-EB8F85EC849C.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06"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8EBAu75n_5BEABEB8EBAFB8EAB8B05D060726_EC84B1ECB2B4_EC84B1ED9888_EB8C80ECB695EC9DBC-EBB3B5EC9D8C.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07" style="clear:none;float:none;" /><br>2026년 6월 7일 주일&nbsp;(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br>제1독서 (신명기 8,2-3.14ㄴ-16ㄱ)<br>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nbsp;<br>“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br>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br>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너희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그분은 불 뱀과 전갈이 있는 크고 무서운 광야, 물 없이 메마른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시고, 너희를 위하여 차돌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신 분이시다. 또 그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이 몰랐던 만나를 너희가 먹게 해 주신 분이시다.”<br>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10,16-17)<br>형제 여러분,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br>복음 (요한 6,51-58)<br>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br>“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nbsp;<br>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br>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nbsp;<br>“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br><br><br>]]></description>
			<author>김웅배</author>
			<pubDate>Fri, 05 Jun 2026 20:09:0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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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우리는 왜 기적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나</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37</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sSNlmFTM_St_Boniface_statue_28Mainz29.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04"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독일 마인츠 대성당 앞에 세워진 성 보니파시오 동상</acronym><br><br>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2026.06.05) : 2티모 3,10-17; 마르 12,35-37 <br>그리스도 신앙을 선포하는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 즉 메시아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생활 당시에는 그분 자신도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공공연하게 밝히지 않으셨고 그분이 선포하신 복음의 실체도 가려져 있었습니다. 단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위로와 자비를 실천하셨던 행동만이 알려져 있었을 뿐입니다.<br>이 모든 것, 즉 메시아 신앙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난 것은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나서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부터입니다. 이 깨달음으로 사도들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 부활하셨다고 선포하기 시작했으며, 그 선포의 일환으로 생전의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기적을 일으키는 신적인 권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신자들도 공생활 당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던 예수님께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는 놀랍게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br>사도들의 증언에 귀기울이는가 하면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찬 예식으로 예수님을 기억하기 시작했으며, 그분이 당부하신 대로 가진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기꺼이 가난한 이들과 나누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신자들의 공동 생활과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가 초대교회에서 실현되기 시작한 하느님 나라의 사회적 실체였습니다. 이를 확인한 사도들 역시 성령으로 충만하여 더욱 용감하게 예수 부활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고, 이에 대해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이 다가온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br>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해 온 율법 학자들의 반응, 즉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며 따라서 나자렛 목수 출신으로서 출신이 의심스러운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데 대해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당신의 신성을 다윗의 고백을 인용하며 입증해 보이시고 이를 두고 군중이 기뻐했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군중은 예언자들이 예로부터 알려주었던 메시아 도래의 예언이 실현되고 있다는 징표로 보았기 때문이고, 그 반대로 율법 학자들은 자신들이 신봉해 온 율법 때문에 도리어 예언의 진실에 대해 눈이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br><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8JG9pED2_3333.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05"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율법 학자들과 논쟁하시는 예수님</acronym><br>그러니까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두루 갖추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이시자 인간이신 존재이신 그분의 신성과 인성 모두가 그분을 메시아요 구원자로 믿게 만드는 근거입니다. 율법 학자들처럼 그분의 신적 능력을 목격했으면서도 공연히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성경 구절을 들어 그분의 신성을 모함하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마태오는 통한의 심정으로 자신의 복음서 첫머리에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이심을 증명하는 족보를 실었습니다(마태 1,1-17). 인성으로서도 그분은 메시아이심을 입증해 보이려던 시도였습니다. <br>또한 마태오와 루카는 신성으로서도 그분은 메시아이심을 입증해 보이시고자, 성령의 개입으로 인한 잉태와 동정녀로부터의 출산을 아울러 보도하였는데, 루카가 더 치밀하고 상세하게 보도하였습니다(마태 1,18; 루카 1,26-38). 그뿐만 아니라 인성으로도 그분은 다윗의 후손으로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도 마태오가 빠짐없이 보도하였고(마태 2,1), 특히 루카는 로마황제의 호구조사 칙령에 의해 요셉이 자기 본관인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고 그 때 만삭의 몸이었던 마리아가 동행했다가 거기서 예수 아기를 출산하게 된 역사적 배경까지도 자세하게 언급해 놓았습니다(루카 2,1-7). <br>복음서들이 기록된 초대교회의 역사에서 예수의 신성과 인성 문제가 중요했던 배경은 이것이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던 하느님의 역사적 선택이 약속대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하는 의미가 있는 데다가, 그 이스라엘이 예수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해서 하느님의 선택이 새 이스라엘로서 그리스도 교회로 옮겨졌다는 교회의 정체성 및 그리스도인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의미가 있습니다.(니케아 공의회, 325년) <br>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당연시하되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소홀히 여겨지는 오늘날 교회의 현실과 신자들의 신앙 세태도 문제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신성이 여전히 우리가 진리로 고백되어야 하는 계시라면 부활하신 그분은 당연히 교회와 신자들의 현실에 성령으로서 현존하심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현존에 대한 의식이 없이 인습적인 고백 정도로만 인식되는 이상 그분은 사기지은을 포함하여 그 어떠한 부활의 징표도 우리에게 보이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벌써 반세기 전에 공의회가 열어 젖힌 교회 쇄신의 문과 신앙 활성화의 기회 그리고 이를 원동력으로 삼아 이룩되어야 할 복음화 과업이 마냥 늦추어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초래된 배경이 여기에 있습니다.<br>하지만 공생활 초기부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복음선포를 위하여 기회가 될 때마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기적을 여러 차례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존재와 권능을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는 사도들로 하여금 당신이 하셨던 그대로 기적을 일으키게 현존하심으로써 초대교회의 복음선포가 가능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이러한 예수 신성의 현실은 오늘날 우리 교회와 신자들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필요합니다. 믿음으로만 일어나는 이 신성의 현실이 기적을 일으키고 이 기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또 다른 믿음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신성에 대한 믿음이 메마른 이상, 예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한 기적을 일으키시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br>또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신앙 고백은, 믿음이 부족하고 용기도 모자랐던 제자들을 사도로 변화시키시어 초대교회를 로마 복음화의 도구로 삼으셨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오늘날 믿음이 부족하고 용기도 모자란 우리들도 그분이 부르고 계시고 사도로 변화시키실 것임을 알게 해 줍니다. 현실은 늘 문제 투성이이고 상황은 언제나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이를 우리의 능력으로만 돌파하라고 예수님은 다그치지 않으십니다. <br>우리가 둘이나 셋이라도 마음을 모아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그 기도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셨으며(마태 18,19),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보증하셨는데(18,20) 그 시점이 무려 세상 끝 날까지(28,20)입니다. 그리하기만 하면 당신보다 더 큰 일도 해 낼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장담하신 그분은(요한 14,12), 산이 바다로 옮겨지는 기적조차도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마르 14,23)으로 복음화 과업에 대한 역사적 상상력을 부여하신 바 있습니다.<br>교우 여러분!<br>그분의 인성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그분의 신성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기적을 일으켜 주실 예수님께서는 참 하느님이시고 참 인간이신 구세주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참 하느님이시고 참 인간이신 구세주로 고백하는 한, 즉 그분을 메시아로 믿는 한 그분이 우리를 도구로 삼아 선포하실 하느님 나라의 현실로 초대교회에서 이룩된 현실처럼 지금 여기에 다가올 것입니다.<br>하지만 초대교회에서 이룩된 복음화의 과업은 사도 바오로의 고백에서 입증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따르는 선교 활동의 열매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가 에페소 교회를 물려준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br>“사랑하는 그대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는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2티모 3,12.14.) <br>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께 대한 고백과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고백으로 일치되어 있다면, 그리고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성경의 말씀을 진실되이 받아들인다면, 우리 역시 온갖 선행을 할 능력으로 유능하게 복음화 과업에 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br>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성 보니파시오는 7세기 무렵에 영국에서 태어나 독일을 비롯한 유럽 북부 지방에 온갖 선행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재건한 인물입니다. 그의 이름인 ‘보니파시오’(BoniFacio)는 좋은 행동 즉 선행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을 세례명으로 받으신 분들께 축하를 드리면서, 우리 모두도 선행으로 복음화의 길에 나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br><br><br>]]></description>
			<author>이기우</author>
			<pubDate>Fri, 05 Jun 2026 19:56:43 +0900</pubDate>
		</item>
		<item>
			<title>교황청 첫 평신도 여성 장관 탄생··· 레오 14세, 교회개혁 노선 계승</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36</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lig6XQHh_20260602T1016-NEW-PREFECT-COMMUNICATIONS-DICASTERY-1820750_web.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03"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사진제공 = EWTN 글로벌 가톨릭 네트워크</acronym><br><br>교황 레오 14세가 교황청 홍보부 장관에 멕시코계 평신도 여성 마리아 몬세라트 알바라도(María Montserrat Alvarado)를 임명했다. 이번 인사는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이 추진해 온 교황청 개혁과 평신도 참여 확대 정책을 계승하는 상징적 조치로 평가받고 있다.<br>교황청 공보실은 6월 2일(현지시각) 교황 레오 14세가 알바라도를 교황청 홍보부(Dicastery for Communication) 장관으로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알바라도는 오는 11월 1일부터 공식 업무를 시작할 예정이다.<br>이번 인사는 교회 역사에서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알바라도는 교황청 주요 부서를 이끄는 최초의 여성은 아니다. 앞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5년 시모나 브람빌라(Simona Brambilla) 수녀를 봉헌생활회·사도생활단부 장관으로 임명한 바 있다.<br>그러나 알바라도는 교황청 디카스테리를 이끄는 최초의 평신도 여성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그동안 교황청의 주요 부서장 직위는 대부분 추기경이나 대주교 등 성직자들이 맡아 왔으며, 최근 들어서야 수도자와 평신도에게도 문호가 개방되기 시작했다.<br>이번 인사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2년 발표한 교황령 「복음을 선포하라(Praedicate Evangelium)」의 연장선 위에 있다. 이 교황령은 교황청 개혁의 핵심 문서로, 특정 직책을 반드시 성직자가 맡아야 한다는 기존 관행을 완화하고 평신도에게도 교황청 주요 직무를 맡길 수 있도록 제도적 길을 열었다.<br>레오 14세 교황은 취임 이후 교회의 선교적 쇄신과 공동합의성(Synodality)을 강조해 왔다. 이번 인사는 교회의 사명과 책임이 성직자에게만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 전체가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시노드 정신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된다.<br>특히 홍보부는 교황의 메시지와 교회의 입장을 전 세계에 전달하는 핵심 부서다. 알바라도는 미국의 대표적인 가톨릭 미디어 기관인 EWTN(Eternal Word Television Network)에서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지냈다. <br>이번 임명은 디지털 환경 속에서 교회의 소통 역량을 강화하려는 교황청의 의지를 보여주는 인사로도 해석된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교황청 홍보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는 만큼, 알바라도의 전문성이 어떻게 발휘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br>한편, 교회 안에서는 이번 인사를 계기로 여성의 역할 확대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발해질 전망이다. 프란치스코 교황 재임 기간 동안 여성의 시노드 의결권 부여, 교황청 주요 직책 진출, 각종 자문기구 참여 확대가 이어졌으며, 레오 14세 역시 이러한 흐름을 이어갈 것이라는 기대감을 모으고 있다. <br>다만, 여성의 역할 확대와 교회 내 의사결정 구조 개혁을 둘러싼 논의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여성 부제직 문제를 비롯해 교회 안에서 여성의 참여 범위를 어디까지 확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세계 교회 안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br>그럼에도 이번 인사는 교황청이 더 이상 성직자 중심의 폐쇄적 구조에 머무르지 않고 평신도와 여성의 전문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될 전망이다.<br><br>]]></description>
			<author>임신비</author>
			<pubDate>Fri, 05 Jun 2026 19:20:47 +0900</pubDate>
		</item>
		<item>
			<title>기계가 언어를 얻은 시대, 인간은 삶을 회복해야</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35</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6/975027450_Q72zEhMk_ED9994EBA9B4_ECBAA1ECB298_2026-06-02_120653.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02"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Vatican News 영상 갈무리</acronym><br><br>▶ 지난 칼럼 보러가기<br><br>지난 칼럼은 이렇게 끝났다. "AI는 인간보다 말을 더 잘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보다 더 깊이 살 수는 없다." 이 한 문장이 이 연재의 출발점이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더 이상 "AI가 인간을 이길 것인가"가 아니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기계처럼 살기를 멈출 수 있는가.<br>이 질문 앞에 우리는 혼자 서 있지 않다. 교회는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이 시대에 응답해 왔다. 2025년 1월 14일, 교황청 신앙교리부(Dicastero per la Dottrina della Fede)와 문화·교육부(Dicastero per la Cultura e l'Educazione)는 공동으로 문헌 「Antiqua et Nova(옛 것과 새 것)」를 발표하였다.1 제목은 마태오 복음 13장 52절의 말씀, 곧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 것과 옛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는 구절에서 왔다. 인공지능이라는 새 것을, 인간 존엄에 관한 옛 지혜로 다시 읽어내려는 시도다.<br>그리고 2026년 5월 15일, 교황 레오 14세는 회칙 「Magnifica Humanitas(위대한 인간성)」를 반포하셨다.2 「Rerum Novarum(새로운 사태)」 135주년에 맞추어 나온 이 사회 회칙의 부제는 분명하다 — "인공지능 시대에 인격을 수호함에 관하여(Sulla custodia della persona umana nel tempo dell'intelligenza artificiale)". 두 문헌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질문에 답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흉내 내고 일부 능력에서 인간을 능가하는 이 시대에, 인간은 무엇으로 인간다움을 지킬 것인가.<br>AI는 지능의 일부일 뿐, 지혜가 아니다<br>「Antiqua et Nova」가 먼저 단언한 것은, 인공지능을 인간 지능과 동일한 차원에 두지 말라는 것이었다. AI는 인간 지능의 일부 기능을 모방하지만, 신체적(corporeo)·관계적(relazionale)·도덕적(morale)·영적(spirituale) 차원을 모두 포괄하는 인간 지능 전체를 모방하지는 못한다.<br>회칙 「Magnifica Humanitas」는 그 통찰을 한 단락에 응축한다. "이른바 인공지능은 경험을 살지 않으며, 몸을 갖지 않고, 기쁨과 고통을 가로지르지 않으며, 관계 안에서 성숙하지 않고, 사랑·노동·우정·책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부에서 알지 못한다. 도덕적 양심조차 갖지 않는다. 선과 악을 판단하지 않으며, 상황의 궁극적 의미를 포착하지 않고, 결과의 무게를 짊어지지 않는다."3<br>이 문단은 융합심리분석상담을 공부해 온 이에게 깊이 울린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도, 융(C. G. Jung)이 이름 붙인 ‘그림자‘도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처리되지 않고 살아진다. 살아내는 것, 그것이 인간 정신의 깊이다. 기계는 슬픔이라는 단어를 안다. 그러나 슬픔의 밤을 지새우지 않는다. 인간은 지능을 가진(having) 존재가 아니라, 지능을 살아내는(being) 존재다.<br>바벨이냐 예루살렘이냐<br>회칙은 첫 문장부터 결단을 요구한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장엄한 인간성이 오늘 결정적 선택 앞에 서 있다. 새로운 바벨탑을 쌓을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과 인류가 함께 거주하는 도성을 건설할 것인가."4<br>두 성경 표상이 마주 선다. 하나는 바벨(창세 11,1-9)이다.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아 "이름을 떨치려는" 인간이다. 하나의 언어, 하나의 기술, 하나의 방향. 그러나 그 일치는 친교가 아니라 동일화였고, 결과는 분산이었다.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느헤 2-6)이다. 폐허가 된 성벽 앞에서 단식하고 기도한 뒤, 가문들에게 한 구간씩 맡기며 도성을 다시 일으킨 느헤미야의 길이다.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니라 한 백성의 공동책임이 도성을 되살린다.<br>회칙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떤 목표를 향해 방향을 잡으려는가. 인류 공동체로서, 민족으로서 어떤 방향을 선택할 것인가.5 첫 번째 선택은 기술에 대한 "예"와 "아니오" 사이가 아니다. 바벨을 지을 것인가, 예루살렘을 다시 세울 것인가, 그 사이다.<br>진짜 위기, 양심을 외주화하지 말 것<br>회칙이 끈질기게 비판하는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이다.6 효율·통제·이윤이 단독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도록 두는 정신적 습관 말이다. 회칙은 단호하게 못 박는다. "더 강력하다는 것이 반드시 더 낫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7<br>이 시대 가장 큰 유혹은 AI가 너무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자기 양심을 기계에 외주(外注)로 맡기는 것이다. 회칙은 분명히 말한다. "우리는 AI를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여길 수 없다."8 모든 알고리즘은 누군가의 인간관·세계관을 코드 안에 새긴다. 누가 만들고, 누가 자금을 대고, 누가 규제하고, 누가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 도구는 다른 얼굴을 띤다.<br>그러므로 회칙은 "기계의 도덕화"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더 도덕적인 AI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만일 그 도덕이 소수에 의해 결정된다면 말이다. 필요한 것은 더 현존하는 정치다. 모든 것이 가속할 때 멈출 줄 알고, 공동체가 여전히 참여하고 물을 수 있는 공간을 보호할 수 있는 정치다."9<br>"AI가 그렇게 말했다"는 변명은 책임을 면제해 주지 않는다. 결정은 인간이 하고, 책임도 인간이 진다. AI 시대의 핵심 능력은 더 빨리 판단하는 능력이 아니라, 더 책임 있게 멈추는 능력이다.<br>거울로서의 AI — 우리 안의 그림자<br>융이 말한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직면하지 않으면 밖으로 투사(projection)된다. 우리가 AI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이 단지 새로운 기술 앞의 막연한 불안인지, 아니면 이미 비인간화되어 있던 우리 자신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 앞의 불편함인지, 우리는 정직하게 물어야 한다.<br>성과로 자신을 증명하고, 속도로 가치를 매기고, 숫자로 사람을 판단하며, 효율의 이름으로 약자를 밀어내 온 사회. AI는 그 사회 위에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다. AI는 그 사회의 거울이다.<br>회칙이 인용한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은 깊이 울린다. "두 사랑이 두 도성을 만들었다. 자기를 사랑하여 하느님을 멸시하기에 이른 사랑이 지상의 도성을, 하느님을 사랑하여 자기를 멸시하기에 이른 사랑이 천상의 도성을 만들었다."10 오늘 두 사랑은 우리 마음 안에서 다시 싸우고 있다. AI 시대의 바벨도, AI 시대의 예루살렘도 결국 우리 마음에서 시작된다.<br>기계가 언어를 얻은 시대에, 인간은 다시 삶을 가져야 한다<br>회칙은 한 문장으로 우리 시대의 의무를 압축한다. "인간 존엄이 새로운 형태의 비인간화에 의해 흐려질 위험이 있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우리는 깊이 인간으로 머물러야 할 시급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11<br>이 의무는 어떻게 살아내는가. 회칙 결론은 네 가지를 권한다. 진리에 충실히 머물기, (우리 자신부터) 교육에 투자하기, 관계를 돌보기,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기.12 이는 앞선 칼럼이 말한 다섯 가지 — 몸·감정·관계·윤리·영성 — 와 정확히 같은 자리에서 만난다.<br>기계가 언어를 얻은 시대에, 인간은 다시 삶을 가져야 한다. 기계가 지식을 얻은 시대에, 인간은 다시 지혜를 배워야 한다. 기계가 답을 말하는 시대에, 인간은 다시 질문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br>이 연재의 다음 회들은 두 문헌이 가리키는 길을 한 걸음씩 따라간다. 노동과 존엄, 진리와 미디어, 가정과 청년, 권력과 평화,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가 다시 묻게 될 한 가지. 어떤 인간으로 살 것인가!<br><br><br>[1] Dicastero per la Dottrina della Fede – Dicastero per la Cultura e l'Educazione, Nota Antiqua et Nova. Nota sul rapporto tra intelligenza artificiale e intelligenza umana (인공지능과 인간 지능의 관계에 관한 노트), Città del Vaticano, 14 gennaio 2025: AAS 117 (2025), 159-210.<br>[2] Leone XIV(레오 14세), Lettera Enciclica Magnifica Humanitas. Sulla custodia della persona umana nel tempo dell'intelligenza artificiale (장엄한 인간성 — 인공지능 시대에 인격을 수호함에 관하여), Città del Vaticano, 15 maggio 2026.[3] Magnifica Humanitas, 99항. (원문 : Le cosiddette intelligenze artificiali non vivono una esperienza, non possiedono un corpo, non attraversano la gioia e il dolore, non maturano nella relazione, non conoscono dall'interno ciò che significa amore, lavoro, amicizia, responsabilità. Non hanno neppure una coscienza morale.)[4] 같은 문헌, 1항.[5] 같은 문헌, 6항 참조.[6] 같은 문헌, 92-96항 참조. "기술관료적 패러다임(paradigma tecnocratico)" 개념은 본디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2015) 106-109항에서 정식화되었다.[7] Magnifica Humanitas, 93항. "Più potente non significa necessariamente migliore."[8] 같은 문헌, 104항. "non possiamo considerare l'IA moralmente neutra."[9] 같은 문헌, 107항.[10] 성 아우구스티노(S. Augustinus), 『하느님의 도성(De Civitate Dei)』 XIV, 28 : CCSL 48, Turnhout 1955, 451. (원문 : Fecerunt itaque civitates duas amores duo: terrenam scilicet amor sui usque ad contemptum Dei, caelestem vero amor Dei usque ad contemptum sui.) 회칙 「Magnifica Humanitas」 130항에서 재인용.[11] Magnifica Humanitas, 15항.[12] 같은 문헌, 결론 237-240항 참조 : "Restiamo fedeli alla verità! … Investiamo nell'educazione, che inizia da noi stessi! … Curiamo le relazioni! … Amiamo la giustizia e la pace!"<br>참고문헌<br>1. 교황청 문헌(원전)• Dicastero per la Dottrina della Fede – Dicastero per la Cultura e l'Educazione, Nota Antiqua et Nova. Nota sul rapporto tra intelligenza artificiale e intelligenza umana, Città del Vaticano, 14 gennaio 2025: AAS 117 (2025), 159-210.• Leone XIV, Lettera Enciclica Magnifica Humanitas. Sulla custodia della persona umana nel tempo dell'intelligenza artificiale, Città del Vaticano, 15 maggio 2026.• Francesco, Lettera Enciclica Laudato Si'. Sulla cura della casa comune, Città del Vaticano, 24 maggio 2015: AAS 107 (2015), 847-945.• Leone XIII, Lettera Enciclica Rerum Novarum. De conditione opificum, Romae, 15 Maii 1891: ASS 23 (1890-1891), 641-670.<br>2. 교부 문헌• Sanctus Augustinus, De Civitate Dei. Libri XI-XXII (CCSL 48), Turnhout : Brepols, 1955.<br>3. 성경• 한국천주교주교회의(CBCK), 『성경』,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5. (창세 11,1-9 ; 느헤 2-6 ; 마태 13,52 인용)<br>4. 심리분석 · 분석심리학• S. Freud, Das Unbewusste (1915), in : Gesammelte Werke, Bd. X, Frankfurt am Main : S. Fischer Verlag, 1946, 264-303.• C. G. Jung, Aion. Untersuchungen zur Symbolgeschichte (1951), Gesammelte Werke, Bd. 9/II, Olten : Walter Verlag, 1976. (특히 「그림자(Der Schatten)」, 제2장 13-19항 참조)<br>5. 한국어 공식 번역본•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 우리 공동의 집을 돌봄에 관하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5.• 교황청 신앙교리부 · 문화와 교육부, 『옛 것과 새 것(Antiqua et Nova) — 인공지능과 인간 지능의 관계에 관한 노트』 한국어 비공식 번역(주교회의 평신도사도직위원회 검토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자료실, 2025.<br><br> ▶ 2회 : '노동의 존엄과 새로운 노예제'로 이어집니다. <br><br><br><br>]]></description>
			<author>지성용</author>
			<pubDate>Tue, 02 Jun 2026 12:45:4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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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남녀사회복무제를 상상한다 : 모든 시민이 나라를 지키는 새로운 계약</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34</link>
			<description><![CDATA[들어가며 — 낡은 틀이 무너지고 있다<br>2025년 현재, 대한민국의 병역 제도는 두 개의 절벽 앞에 서 있다. 하나는 인구 절벽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의 절벽이다.<br>매년 20세 남성 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2020년대 초반 약 25만 명이었던 입영 가능 자원은 2030년대에는 15만 명 선으로 떨어질 전망이다. 숫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군 복무가 특정 성별에게만 강요되는 '불평등한 희생'으로 인식되면서 사회 통합의 균열이 깊어지고 있다. 20대 남녀 간 극단적인 젠더 갈등의 저변에는 이 비대칭적 의무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br>그런데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단순히 '병사가 모자란다'는 양적 위기가 아니다. '누가, 어떻게, 무엇을 지키는가'라는 국방의 본질에 관한 질적 위기다. 미사일과 드론이 전장을 지배하고, 사이버 공격이 국가 기간망을 흔드는 시대에, 20세기식 징병제의 문법으로 21세기의 안보를 감당할 수 있는가.<br>이 글은 이 두 위기를 동시에 돌파할 수 있는 하나의 포괄적 대안, '남녀사회복무제'를 제안한다. 그것은 단순히 여성을 군대에 보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방을 포함한 사회 전반의 공적 기여를 모든 시민의 공통 의무와 권리로 재설계하는, 새로운 시민적 사회 계약의 구상이다.<br>현행 제도의 세 가지 구조적 모순<br>① 인권의 문제 : 헌법적 평등과의 충돌<br>대한민국 헌법 제11조는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며 성별에 의해 차별받지 않는다고 명시한다. 그러나 제39조의 '국방의 의무'는 실질적으로 남성에게만 강제 적용되어 왔다. 이는 법리적 모순이기 이전에 시민적 연대의 균열이다.<br>출산과 육아에 따른 여성 면제 혜택은 본래 생물학적 역할을 배려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출산하지 않은 여성'에 대한 면제 근거가 불분명한 채로 운용되어 왔고, 사실상 여성 전체가 병역 의무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는 남성에게는 억울함, 여성에게는 '무임승차'라는 사회적 낙인이라는 이중의 왜곡으로 나타났다. 인권은 의무 없는 권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진정한 평등은 '같은 보호'만이 아니라 '같은 책임'에서도 구현되어야 한다.<br>② 갈등의 문제 : 이해 부재가 만든 남녀 갈등<br>오늘날 한국 사회의 남녀 갈등은 단순한 감정의 충돌이 아니다. 그 뿌리에는 경험의 비대칭성이 있다. 20대 남성의 약 2년, 사회생활의 출발점에서 군 복무라는 단절을 경험한 남성과 그 경험을 전혀 공유하지 못한 여성 사이에는 서로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적 간극이 존재한다.<br>이스라엘이 남녀 공동 복무를 유지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군사적 필요만이 아니다. 남녀가 같은 제복을 입고, 같은 훈련을 견디고, 같은 위험 앞에서 서로를 의지했던 경험이 전후 사회의 시민적 유대를 만들어 낸다는 신념이다. 공동의 의무가 공동의 언어를 만든다. 대한민국에서 남녀가 경험의 공동 기반을 갖지 못한 채 성장한다는 것은, 사회적 공감의 회로가 처음부터 단절된 채로 출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br>③ 안보의 문제 : 현대전에 맞지 않는 징병 문법<br>현대전은 더 이상 보병의 돌격으로 승패가 갈리지 않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드론 조종사 한 명이 전차 한 대를 무력화하고, AI 기반 정보 분석이 포병 운용 전체를 바꾸는 시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br>오늘날 국방의 핵심 역량은 100km 행군을 버티는 근력이 아니라, 수백 건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처리하고 무인 체계를 정밀하게 조작하는 디지털 리터러시와 전략적 판단력이다. 이 역량에서 생물학적 성별은 결정적 변수가 아니다. 세밀한 집중력이 요구되는 드론 운용이나 사이버 분석 보직에서는 오히려 여성 자원의 우수성이 각국의 군사 연구에서 꾸준히 확인되고 있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을 국방 자원 풀에서 배제하는 것은, 최정예 선수를 절반만 데리고 월드컵에 나서는 것과 다르지 않다.<br>세계는 이미 전환 중이다 — 4개국 사례 <br>① 노르웨이 : 유럽 최초의 성 중립 징병제, '정예 선발'의 교과서<br>2016년, 노르웨이는 유럽 및 NATO 회원국 최초로 성 중립적 의무 징병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단순히 병력 부족을 메우는 것이 아니었다.<br>노르웨이의 원칙은 명확하다. '성별과 무관하게 가장 뛰어난 적임자를 선발한다.' 전체 징집 대상자 중 군이 요구하는 지적·신체적 기준을 충족하는 상위 15~20%만을 정예병으로 선발한다. 이 과정에서 여성의 비중은 자연스럽게 30%를 넘어섰다. 더 넓은 인재 풀에서 더 뛰어난 인력을 가려내는 방식이다.<br>노르웨이 국방부의 평가는 단호하다. '우리는 더 좋은 군대를 갖게 되었다.' 여성 복무자들의 평균 교육 수준, 기술 역량, 복무 적응도가 남성 동기보다 통계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선발 기준을 성 중립으로 바꾸는 것 자체가 전반적인 인적 자원의 질을 끌어올린 것이다.<br>"우리는 병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최고의 병사가 필요하다. 그들이 남성인지 여성인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 노르웨이 전 국방장관 잉에 쇠레이데<br>② 스웨덴 : 폐지했다가 부활한 징병제, '사회 복원력'의 재발견<br>스웨덴은 2010년 경제적 이유와 안보 위협 감소를 근거로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전환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2018년, 스웨덴은 전격적으로 징병제를 부활시켰다. 그것도 남녀 모두를 대상으로.<br>계기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2014)과 계속되는 발트해 긴장이었다. 그러나 스웨덴이 징병제를 되살린 더 깊은 이유는 단순한 병력 충원이 아니었다. '전 국민 방위(Total Defence)' 개념의 복원, 즉 군사력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민군 통합 복원력'의 구축이 목표였다.<br>스웨덴의 전 국민 방위 체계에서는 군인뿐 아니라 민간 의료진, 소방관, 인프라 운용 요원, 심리 지원 인력이 모두 비상 대비 훈련에 참여한다. 국방은 군의 일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일이라는 인식이 제도의 근간이다. 스웨덴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징병제는 시대에 따라 폐지될 수도 있지만, '시민 모두가 참여하는 국가 방위' 개념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br>③ 핀란드 : 80년의 자발적 전통, '국가를 지키는 마음'<br>핀란드는 소련과의 긴 국경을 맞댄 나라로, 1939년 겨울 전쟁의 기억이 국민 정서 깊숙이 새겨져 있다. 현재 핀란드는 남성에게 6~12개월의 의무 병역을 부과하면서, 여성에게는 자발적 군 복무 기회를 제공한다.<br>핀란드 여성의 자원입대율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매년 1,000명 이상의 여성이 자발적으로 군에 지원하며, 이들은 남성과 동일한 기준과 훈련을 거친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핀란드의 NATO 가입과 함께 여성 자원입대 비율은 더욱 상승하고 있다.<br>핀란드의 핵심은 '강제' 이전에 '자발성'이다. 군 복무가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연결된 문화적 자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의무로 강제하지 않아도 여성들이 스스로 지원한다. 여기에는 복무 환경이 실질적으로 평등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신뢰가 전제된다.<br>핀란드는 또한 '예비군의 나라'다. 전체 인구 550만 명 중 예비군은 28만 명에 달한다. 평시에는 민간인이지만 비상시 즉각 전투 편제에 합류하는 이 시스템은, 국방이 현역 군인만의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br>④ 독일 : 모병제의 한계와 사회복무의 진화<br>독일은 2011년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전환했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독일 내에서 징병제 재도입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올라프 숄츠 전 총리는 2024년 '의무 병역 재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고, 프리드리히 메르츠 현 총리 또한 국방력 강화를 핵심 정책 과제로 삼고 있다.<br>독일의 사례에서 주목할 것은 '지비디엔스트(Zivildienst)', 즉 대체 사회복무 제도다. 징병제 시절 독일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군 복무 대신 병원, 노인 요양원, 장애인 시설, 환경 단체 등에서 사회복무를 이행했다. 이 제도를 통해 독일의 사회 복지 인프라는 수십 년간 수십만 명의 저비용 고헌신 인력을 공급받았다.<br>징병제 폐지 이후 이 인프라가 무너지면서 독일 복지 시스템의 인력난이 심각해졌다. 사회복무 제도가 단순한 병역 회피 경로가 아니라 사회 유지의 핵심 인프라였음을 폐지 이후에야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다. 독일의 경험은 역설적으로 '사회복무를 포함한 포괄적 복무 제도'의 중요성을 방증한다.<br>대한민국 모델 설계 ㅡ '징병제'를 넘어 '시민복무제'로<br>"모든 시민은 국가와 사회에 기여할 의무와 권리를 동등하게 갖는다. 그 방식은 다양하되, 그 무게는 균등하다."<br>남녀사회복무제는 군 복무를 국방·사회 전반에 걸친 포괄적 시민 복무 체계의 일부로 재정립하는 구상이다. 국방복무는 이 체계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고도화된 영역으로 자리매김하되, 복무의 스펙트럼을 넓혀 더 다양한 방식의 사회적 기여를 가능하게 한다.<br>핵심 원칙 1. 남녀 공통 의무<br>모든 시민은 일정 연령에 도달하면 복무 의무를 지닌다. 입대 가능 연령 기준을 30세까지 연장하여 학업과 경력 형성의 시간을 존중한다. 복무 기간은 복무 유형에 따라 차등화하되, 국방복무가 가장 높은 우선순위와 보상을 갖는다.<br>핵심 원칙 2. 국가의 선발권 + 개인의 지원권<br>국가는 복무 분야별로 필요한 역량 기준을 설정하고 선발권을 갖는다. 개인은 자신의 적성과 희망에 따라 복무 유형을 지원할 권리를 갖는다. 이 두 권한의 절충이 제도의 핵심 작동 원리다. 국방복무 지원자 중 기준에 미달하면 다른 사회복무로 배치되고, 사회복무 지원자 중 국방 역량이 탁월한 자원은 우대 선발한다.<br>핵심 원칙 3. 복무 스펙트럼의 다층화<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5/975027450_KirIOvRD_EC82ACEBB3B8_-_37961_102677_1123.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01"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 이원영</acronym><br><br>핵심 원칙 4. 출산과 육아는 남녀 공동의 사유로<br>현행 제도에서 출산은 사실상 여성만의 면제 사유로 기능해왔다. 남녀사회복무제에서는 출산과 육아를 '남녀 공통의 복무 유예 사유'로 재정의한다. 출산 또는 입양 이후 일정 기간, 당사자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복무를 유예하거나 유연복무로 전환할 수 있다.<br>국가는 부대 내 24시간 보육 시설, 유연 근무제, 상근 보직 우선 배정 등 '육아 가능한 복무 환경'을 구축할 의무를 진다. 군대가 대한민국 최고의 보육 인프라를 갖춘 일터가 되는 것, 이것이 저출생 문제와 국방 의무를 동시에 해결하는 접점이다.<br>핵심 원칙 5. 양심적 병역거부의 자연 해소<br>현행 체계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는 협소한 대체복무의 틀 안에서만 수용되어왔고, 여전히 사회적 낙인이 따른다. 남녀사회복무제에서는 복무 스펙트럼 자체가 광범위하게 확대되므로,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양심은 생태농촌복무나 복지돌봄복무로 자연스럽게 수용된다. 거부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방식의 기여가 존엄하게 인정받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br>야성(野性)을 기르는 복무 — 왜 생태농촌복무인가<br>산업화와 도시화, 디지털화가 심화될수록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는 통제된 환경 속에서 성장한다. 폭우를 맞아보고, 맨손으로 땅을 일궈보고, 낯선 공동체 안에서 생존해본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br>생태농촌복무는 단순한 농업 지원이 아니다. 소멸 위기에 처한 농산어촌 지역에 젊은 인력을 공급하면서, 동시에 복무자들에게 자연 속에서의 도전과 공동체 경험을 제공한다. 이것이 '야성의 회복'이다.<br>군사적 관점에서도 야성은 핵심 자산이다. 극한 환경에서 판단하고, 낯선 집단 안에서 협력하며, 물리적 고통을 견디는 역량은 어떤 무기 체계보다 근본적인 전투 자산이다. 첨단 기술 국방 시대에도 이 인간적 기반은 사라지지 않는다.<br>덴마크는 이미 군 복무와 농업·환경 복무를 결합한 '그린 디펜스(Green Defence)' 개념을 실험하고 있다. 복무자들이 훈련 중 자국 식량 생산과 생태 복원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이 모델은, 국방과 환경·식량 안보를 통합하는 미래 지향적 접근이다.<br>인센티브 구조, 의무를 매력적인 선택으로 : 어떤 의무도 강제만으로는 지속되지 않는다. 남녀사회복무제의 성공은 복무를 단순한 희생이 아닌 경력과 성장의 기회로 설계하는 데 달려 있다.<br>보수의 현실화 : 국방복무를 포함한 모든 사회복무의 급여를 일반 직장 초봉 수준으로 현실화한다. 현재 병사 월급이 급상승 중인 추세를 유지·확대한다. <br>명예의 제도화 : 국방복무 이력을 공공기관 취업, 대학 입학, 민간 기업 채용에서 실질적으로 우대하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다. 노르웨이의 경우처럼 군 복무가 사회적 신뢰 자본으로 기능하도록 한다. <br>경력의 연계 : 복무 중 취득한 드론 조종, 사이버 보안, 응급구조, 생태 농업 기술을 민간 자격증과 연동한다. 복무가 끝났을 때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스펙과 역량이 축적되도록 설계한다. <br>주거·교육 혜택 : 복무 이행자에게 공공주택 입주 우선권, 대학원 장학금, 창업 지원 프로그램 연계 등 실질적 삶의 혜택을 제공한다.<br>유라시아 시대의 국방 — 더 긴 시야로<br>남녀사회복무제를 논해야 하는 가장 긴 시야의 이유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미래에 있다. 언젠가 남북 대치가 해소되는 날, 대한민국은 새로운 지정학적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중국, 러시아라는 유라시아 대륙의 두 권위주의 강대국과 직접적인 전략적 경계를 형성하는 것이다.<br>이 구도에서 '머릿수'로 대국들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한민국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수적 열세를 압도하는 기술적 초격차와 인적 정예화다. 전 시민이 국방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그 중 가장 정예화된 자원이 국경을 지키는 시스템, 이것이 인구 5천만의 나라가 인구 14억, 15억의 대국 사이에서 자율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br>미사일 전쟁, 드론 전쟁, 사이버 전쟁의 시대에 국방의 전선은 더 이상 물리적 국경선에 한정되지 않는다. 전력망, 금융 시스템, 통신 인프라, 식량 공급망이 모두 안보의 전선이 된다. 이 광대한 전선을 지키는 것은 특정 성별의 몇십만 명이 아니라, 전 시민이 각자의 분야에서 국가 복원력의 한 축을 담당하는 '사회 전체의 방위 역량'이다. 남녀사회복무제는 이 역량을 평시부터 구축하는 제도적 기반이 된다.<br><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5/975027450_G5v9miJq_37961_102678_1357.jpe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800"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대륙의 시대가 되면 국방의 개념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거니와, 현시점에서도 그러한 필요성이 중요해졌다. （ⓒ 이원영）</acronym><br> 예상되는 반론과 답변<br>Q. 신체 능력 차이가 있는데 형평성에 맞는가?A. 현대 국방복무의 핵심은 더 이상 체력 단독이 아니다. 신체 역량이 요구되는 보직은 신체 기준으로, 기술·판단 역량이 요구되는 보직은 해당 역량으로 선발하면 된다. 노르웨이는 이미 보직별 차등 기준을 정교하게 설계하여 운용하고 있다. 일괄적인 기준이 아닌 보직 맞춤형 기준이 해답이다.<br>Q. 군 복무 기간 동안 여성의 경력 단절이 문제 아닌가?A. 현재 남성이 겪는 경력 단절 문제이기도 하다. 30세 유예, 유연복무, 복무 경력 인정 등의 제도 설계로 완화할 수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복무 자체가 경력이 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해법이다.<br>Q. 저출생 상황에서 여성에게 또 다른 부담을 지우는 것 아닌가?A. 역설적으로 현재 구조가 저출생을 악화시킨다. 모든 육아 부담을 여성에게만 집중시키는 사회 구조가 출산 기피의 핵심 원인이다. 남녀 공동의 복무 유예 제도와 군 내 완벽한 보육 인프라는 오히려 출산을 장려하는 구조를 만든다.<br>Q. 사회복무의 질적 수준을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A. 독일의 지비디엔스트 경험이 교훈을 준다. 명확한 성과 기준, 전문 슈퍼바이저 배치, 복무 이후 역량 인증 시스템이 필요하다. 형식적 복무가 되지 않도록 복무 기관에 대한 평가 제도도 병행해야 한다.<br>맺음말 — 새로운 사회 계약을 향해<br>남녀사회복무제는 급진적 제안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독일의 경험은 이것이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사회 통합의 기반이 될 수도, 또 하나의 갈등 원인이 될 수도 있다.<br>대한민국은 지금 세 개의 위기가 동시에 교차하는 역사적 분기점에 서 있다. 인구 절벽, 남녀 갈등, 안보 환경의 격변. 이 세 위기는 각각의 처방전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의 포괄적 틀 안에서 동시에 접근할 때만 해법이 열린다.<br>남녀사회복무제는 그 포괄적 틀이다. 모든 시민이 국가에 기여하되 그 방식은 다양하고, 그 보상은 공정하며, 그 경험은 공유된다. 군복무의 공동 경험이 사회적 공감의 언어를 만들고, 다양한 복무의 경험이 사회 전체의 복원력을 높인다.<br>안보는 특정 성별의 희생이 아니라 모든 시민의 공동 책임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책임은 강제의 언어가 아닌 연대의 언어로 호명되어야 한다.<br>"나라를 지키는 일은 군인만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시민 모두의 일이다. 그리고 시민 모두의 일이 될 때, 그 나라는 비로소 지킬 가치가 있는 나라가 된다."<br><br><br>]]></description>
			<author>이원영</author>
			<pubDate>Fri, 29 May 2026 20:16:4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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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간이 스스로 기계처럼 살기를 멈출 수 있는가”</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33</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5/975027450_di8Fs1Qo_cq5dam.thumbnail.cropped.750.422.jpe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98"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 Vatican Media</acronym><br>최근 교황 레오 14세는 회칙 『Magnifica Humanitas(위대한 인간성)』를 통해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존엄과 공동선, 책임과 연대의 가치를 새롭게 성찰할 것을 요청했다. 또한, 교황청 문헌 『Antiqua et Nova(옛것과 새것)』는 AI를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인간 이해와 사회 질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문명적 전환으로 바라보며, 그 안에서 인간의 본질과 소명을 다시 묻고 있다.<br><br>이에 는 '교황청 문헌으로 읽는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학'을 주제로, 8주간에 걸쳐 지성용 신부(가톨릭관동대학교 중독재활상담학과 교수)의 글을 연재한다. AI 시대를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에 관한 질문으로 바라보며 인간 지능과 인공지능의 차이, 기술과 권력의 관계, 노동과 인간 존엄, 교육과 상담의 본질, 전쟁·감시·거짓정보의 윤리 문제, 그리고 영성과 공동선의 의미를 차례로 살펴볼 예정이다.<br>기계가 점점 더 인간을 닮아가는 시대, 우리는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다시 묻고자 한다. 이 연재가 독자들과 함께 AI 시대의 인간을 성찰하고, 기술문명 속에서 인간 존엄과 공동선, 그리고 인간 존재의 깊이를 새롭게 발견하는 여정이 되기를 기대한다.<br>- 편집자 주<br>교황청 문헌 『Antiqua et nova(옛것과 새것)』,『Magnifica Humanitas(위대한 인간성)』로 읽는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학<br>AI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상담을 흉내 내고, 설교문까지 작성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인간은 불편한 질문 앞에 서 있다. 기계가 인간의 언어를 따라 하고, 인간의 지식을 정리하고, 인간의 판단을 보조한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br>한때 우리는 지능을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믿었다. 계산하고, 추론하고, 기억하고,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이 인간을 다른 존재와 구별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AI는 바로 그 영역에서 인간을 추월하고 있다. 인간보다 더 빠르게 읽고, 더 많이 기억하고, 더 정교하게 문장을 만든다. 그러니 인간의 불안은 당연하다.<br>인간다움은 정말 지능에만 있었는가<br>하지만 여기서 멈추어 물어야 한다. 인간다움은 정말 지능에만 있었는가. 인간은 단순히 정보를 처리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의미를 묻는 존재다. 인간은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고통을 견뎌야 하는지,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하는지, 어떤 진실 앞에서 침묵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인간은 지식을 소유하는 존재가 아니라, 삶 전체로 그 지식의 무게를 감당하는 존재다.<br>AI는 슬픔이라는 단어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슬픔 속에서 밤을 지새우지는 않는다. AI는 사랑에 대해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 시간을 내어주고, 상처받고, 용서하고, 다시 기다리지는 않는다. AI는 정의를 논할 수 있다. 그러나 불의한 조직 안에서 불이익을 감수하며 진실을 말하지는 않는다.<br>AI 시대, 인간이 지켜야할 존재방식<br>그러므로 AI와 인간의 차이는 단순한 성능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 방식의 차이다. AI 시대에 인간이 지켜야 할 첫 번째 인간다움은 몸이다. 인간은 몸으로 산다. 몸은 피곤하고, 아프고, 늙고, 죽는다. 바로 그 한계 때문에 인간은 서로를 돌본다. 병든 몸을 돌보고, 우는 사람 곁에 앉고, 굶주린 사람에게 밥을 건네는 행위는 결코 데이터로 환원될 수 없다. 몸은 인간의 약점이지만, 동시에 인간다움의 가장 깊은 근거다.<br>두 번째는 감정이다. 현대 사회는 감정을 비효율적인 것으로 취급해 왔다. 그러나 감정은 인간 정신의 오류가 아니라 세계를 받아들이는 깊은 방식이다. 슬픔은 사랑했던 흔적이고, 분노는 정의가 무너졌다는 신호이며, 연민은 타자의 고통이 내 안에 들어왔다는 증거다. 감정을 잃은 인간은 차분해질 수는 있어도 따뜻해질 수 없다.<br>세 번째는 관계다. 인간은 혼자 완성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부름에 응답하고, 누군가의 아픔을 기억하고,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견디며 인간이 된다. AI는 대화를 흉내 낼 수 있지만, 기다림의 무게를 알지 못한다. 인간의 관계는 속도가 아니라 지속성에서 깊어진다. 효율이 아니라 신뢰에서 자란다.<br>네 번째는 윤리다. AI 시대의 위험은 기계가 너무 똑똑해지는 데만 있지 않다. 더 큰 위험은 인간이 책임을 기계에게 떠넘기는 데 있다. “AI가 그렇게 말했다”는 말은 책임을 면제해주지 않는다. 결정은 인간이 하고, 책임도 인간이 져야 한다. 그러므로 AI 시대의 핵심 능력은 더 빨리 판단하는 능력이 아니라, 더 책임 있게 멈추는 능력이다.<br>다섯 번째는 영성이다. 영성은 현실도피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더 깊이 보는 능력이다. 영성은 인간이 자기 이익을 넘어 공동선과 진리와 사랑을 향해 열리는 힘이다. AI는 목적을 계산할 수 있지만, 의미를 갈망하지 않는다. 인간은 의미를 묻고, 초월을 꿈꾸고, 자기 한계를 넘어 더 큰 사랑을 향해 걸어간다. 이것이 인간의 영적 능력이다.<br>결국 AI 시대의 질문은 “AI가 인간을 이길 것인가”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인간이 스스로 기계처럼 살기를 멈출 수 있는가”이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기계처럼 살아왔다. 성과로 자신을 증명하고, 속도로 가치를 평가하고, 숫자로 사람을 판단하고,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약자를 밀어냈다. AI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인간을 비인간화한 것이 아니다. AI는 이미 비인간화되어 있던 인간 사회의 거울이다.<br>그러므로 AI 시대의 인간 회복은 기술 반대가 아니다. 기술을 거부하는 낭만주의로는 충분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기술보다 깊은 인간학이다. AI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AI에게 인간의 최종 판단과 양심과 영혼을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br>인간은 더 많이 아는 것으로 인간다워지는 것이 아니다. 더 깊이 사랑할 때 인간다워진다. 더 책임 있게 선택할 때 인간다워진다. 더 약한 이의 고통 앞에 멈출 때 인간다워진다. 더 큰 의미를 향해 자신을 열 때 인간다워진다.<br>AI는 인간보다 말을 더 잘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보다 더 깊이 살 수는 없다. 또, AI는 인간보다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처럼 상처를 기억하고, 그 상처를 사랑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그리고 AI는 인간보다 빠르게 답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처럼 침묵 속에서 회개하고, 다시 시작하지는 못한다.<br>AI 시대에 인간다움을 지키는 길은 분명하다. 몸을 회복하고, 감정을 존중하며, 관계를 다시 세우고,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영성을 통해 인간 존재의 깊이를 다시 열어야 한다.<br>기계가 언어를 갖게 된 시대에, 인간은 다시 삶을 가져야 한다.기계가 지식을 갖게 된 시대에, 인간은 다시 지혜를 배워야 한다.기계가 답을 말하는 시대에, 인간은 다시 질문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br>그 질문의 끝에 인간다움이 있다.<br>▶ 다음주 화요일, 연재가 시작됩니다. <br><br>]]></description>
			<author>지성용</author>
			<pubDate>Fri, 29 May 2026 19:55:2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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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스펠:툰] 자신을 바로잡으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32</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5/975027450_zS8UNxPy_5BEABEB8EBAFB8EAB8B05D053126_EC82BCEC9C84EC9DBCECB2B4_EB8C80ECB695EC9DBC-EB8F85EC849C_EBB3B5EC9D8C.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97" style="clear:none;float:none;" /><br><br>2026년 5월 31일&nbsp;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청소년 주일)<br>제1독서 (탈출기 34,4ㄱㄷ-6.8-9)<br>그 무렵 모세는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아침 일찍 일어나 돌판 두 개를 손에 들고 시나이 산으로 올라갔다. 그때 주님께서 구름에 싸여 내려오셔서 모세와 함께 그곳에 서시어,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셨다. 주님께서는 모세 앞을 지나가며 선포하셨다.<br>“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br>모세는 얼른 땅에 무릎을 꿇어 경배하며 아뢰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br>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13,11-13)<br>형제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자신을 바로잡으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br>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br>복음 (요한 3,16-18)<br>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br>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br><br><br><br>]]></description>
			<author>김웅배</author>
			<pubDate>Fri, 29 May 2026 19:04:48 +0900</pubDate>
		</item>
		<item>
			<title>“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31</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5/975027450_iVnhQUo1_6177c56c-7310-4f27-9398-61af5506ae4b.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96" style="clear:none;float:none;" /><br><br>연중 제8주간 토요일 (2026.5.30)&nbsp;: 유다 17,20ㄴ-25; 마르 11,27-33&nbsp;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는 일이 그리 당연한 일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수학적 추론으로나 과학적 증명 방식으로도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의 이치로나 또는 사람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이룩되지 않는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일어날 때라야 비로소 사람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런데다가 조상 대대로 하느님을 믿어왔다는 유다인들에게도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nbsp;<br>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능력이 있어야 일으킬 수 있는 기적들을 그분이 숱하게 일으키셨다는 소문이 들려왔어도 막상 예루살렘 성전의 질서를 통째로 부인하는 듯한 소동을 예수님께서 일으키셨을 때 성전을 관리하던 수석 사제들과 성전 최고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율법 학자들이 보기에는 매우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다짜고짜로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 11,28)<br>만의 하나라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서 이런 일을 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제거해야 할 위험 인물로 지목하고 이런 물음을 했던 것이고, 이는 사실상 예수님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려는 결의가 숨어 있었던 위협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되물으셨습니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마르 11,29)<br>하늘의 권위를 유다교의 이름으로 행사하고 있던 그들은 이 물음에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권위를 군중은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시절에 유다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불신하고 배척하는 이방인들 속에서 선교하던 사도들의 환경이 이러했습니다.&nbsp;<br>그래서 유다 사도는 그나마 믿음을 간직하고 있던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고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가십시오. 의심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어떤 이들은 불에서 끌어내어 구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고, 당신의 영광 앞에 흠 없는 사람으로 기쁘게 나서도록 해 주실 수 있는 분,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 하느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과 위엄과 권능과 권세가 창조 이전부터, 그리고 이제와 앞으로 영원히 있기를 빕니다.”(유다 17,17.20-25)&nbsp;<br>교우 여러분!<br>오늘날 신자유주의 풍조 속에서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 속에서 고달프게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하느님을 믿으라고 권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깨달음이 생기지 않는 한 그렇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일은 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의 상황이 잘 보여주듯이, 예수님의 선포는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어도 부유하고 힘 있는 자들에게는 위험한 소식이었습니다. 결국 부유하고 힘 있는 그들에 의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짊어지셔야 했고 죽임을 당하셔야 했습니다.&nbsp;<br>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의 존재와 말씀과 처신이 우리에게도 기쁜 소식인가요? 아니면 부담스럽고 불편한 소식인가요? 이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선택에 따라서 우리 자신을 어떻게 성화시켜 나가야 할 지가 달라집니다.&nbsp;<br><br>]]></description>
			<author>이기우</author>
			<pubDate>Fri, 29 May 2026 19:00:4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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