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rss version="2.0" xmlns:dc="http://purl.org/dc/elements/1.1/">
	<channel>
		<title>가톨릭프레스 - 전체기사</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list.php?mcode=msub1</link>
		<description><![CDATA[가톨릭정보, 사회문화 소식, 영상뉴스 등을 제공하는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 가톨릭프레스]]></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pubDate>Sun, 10 May 2026 08:10:00 +0900</pubDate>
		<image>
			<title>가톨릭프레스 - 전체기사</title>
			<url>http://catholicpress.kr/data/file/logo/235254112_6KGpauqN_cp_h.png</url>
			<link>http://catholicpress.kr/news/list.php?mcode=msub1</link>
		</image>
		<item>
			<title>목숨을 내어놓는 사랑</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23</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5/975027450_f1GUCFDS_ED9994EBA9B4_ECBAA1ECB298_2026-05-08_161859.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83" style="clear:none;float:none;" /><br><br>부활 제5주간 금요일 (2026.05.08)&nbsp;: 사도 15,22-31; 요한 15,12-17<br><br>초대교회에서 이방인 입교자들의 할례 문제로 열린 사도회의는 자칫하면 신생 교회가 분열될 뻔했던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교회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사도들의 후계자들인 주교들이 모여서 숙의하는 전례가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에는 공의회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20세기 후반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스물 한 번째 공의회입니다. 2천 년 교회 역사에서 평균 백 년에 한 번꼴로 열린 셈입니다. 이 전통에서 교회의 문제를 다루는 기준이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br>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켜야 할 계명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우선 이 사랑의 계명은&nbsp;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요한 15,9) 하신 말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한 이 계명은 다른 복음사가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전해 주었던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서, 요한 복음사가는 “서로 사랑하라”는 한 가지 계명으로 간추려 가르치셨음을 전해 주었습니다.&nbsp;<br>그런데 이 사랑의 계명에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분명한 기준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풀이하여 말씀하시기를,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하셨는데, 과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목숨을 바칠 만큼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사랑의 계명입니다.&nbsp;<br>예수님께서 공생활 전반부에는 불특정 다수의 유다인 군중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시던 활동(케리그마)에 정성을 기울이셨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열두 명을 눈여겨보신 다음에 이들로 제자를 사도로 양성하시던 활동(디다케)에 정성을 쏟으신 것이 그 첫째요, 제자 중 하나인 이스카리옷 유다의 밀고로 말미암아 초래된 때이른 죽임을 저항하거나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신 것이 그 둘째이며, 유다만큼은 아니어도 수제자 베드로를 비롯하여 나머지 제자들 모두가 체포되어 가시는 예수님을 보호해 드리지 않고 도망쳐버렸는데도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까지 단 한 번도 제자들을 원망하지 않으셨고 도리어 제자들을 포함하여 당신의 죽임에 가담한 모든 유다인과 이방인들을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시고 돌아가신 것이 그 셋째입니다. 특히 이 셋째의 용서 행위가 제자들을 크게 회개시켰습니다.&nbsp;<br>그리하여 제자들도 더 이상의 비겁함과 소심함을 떨쳐버리고 담대한 믿음을 지닌 사도로 변신하여 용감하게 자기 목숨을 예수님을 위하여 바쳐드렸습니다. 요한 사도만이 성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박해를 받아가며 선교하다가 백 살 무렵에 죽었고, 나머지 열 사도는 모두 순교하였습니다. 결국 예수님과 열한 제자는 서로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것입니다.&nbsp;<br>이렇듯 우리에게 목숨 바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인간의 눈높이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그분은 늘 기도로써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통공하셨고, 하느님께서 일러주시는 말씀을 가르치셨으며, 하느님께서 하라고 분부하시는 대로 행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 이룬 하느님 아버지와의 통공을 바탕으로, 제자들과도 통공하는 가운데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스승의 갑작스럽고 억울한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한결같은 사랑으로 대해 주시려던 그 사랑을 뒤늦게 깨닫고나서 제자들은 완전히 바뀌어 스승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각오로 살았습니다. 스승의 사랑을 깨달은 그 힘이 그들을 사도로 부활시킨 것입니다.<br>오늘 독서에서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면제하는 결정을 한 사도들이 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바르나바와 바오로에 대해서도 이렇게 신원을 보증하였습니다: “이 두 사도 역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사도 15,26). 그러니까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을 담은 유일한 계명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 척도는 “목숨을 내놓는 사랑”입니다.&nbsp;<br>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실증한 바 사랑에 관한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아시아의 전통적 가치로 알려진 불가(佛家)의 자비(慈悲)나 유가(儒家)의 인(仁)과 비교할 때, 그 선명한 생애와 실제 죽음의 역사성에 있어서 뚜렷하게 대비되는 진리입니다. 바로 이 점이 아시아인들, 특히 불교적 가치관과 유학적 가치관을 신봉하는 아시아 종교인들과 대화하고 협력할 때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으로 가르치거나 행동으로 입증해 보여야 할 가치입니다.&nbsp;<br>고대와 중세 또 근세 이래 동방에 선교하려던 서방 교회의 행동 동기는 유럽식의 교회 모델과 서구적 가치를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식민정책에 기대어 일방적으로 강요하려던 것이었습니다(아시아 교회, 9항). 아시아에 선교하고자 하면서도, 그들은 자비(慈悲)나 인(仁)과 같은 아시아적 전통 가치를 존중하지 않았음은 물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계명대로 아시아인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도 증거하지 않았습니다.<br>이는 오늘 독서에서 예루살렘에 모인 유다인 사도들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그리스적 가치의 건전한 윤리를 보전하도록 관용을 베풀면서 그리스도 신앙을 지키도록 선교한 행동 동기와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가톨릭교회의 아시아 선교는 성공할 수 없었고 아시아의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당해야 했는데,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신앙을 증거하려던 치명자들의 순교조차도 아시아에서 만난 이웃을 위한 사랑의 동기로 여겨지지 못하고 그저 자기네 종교를 위한 충성으로만 보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103위 순교 성인과 124위 순교 복자를 공경하는 한국 천주교 신자들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그러합니다. 이제 아시아의 가톨릭 신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질 아시아 복음화는&nbsp; 인류와 아시아인들의 구원, 그리고 궁극적으로 가톨릭적이고자 하는 우리 교회의 미래가 이 사랑의 가치를 증거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1,2,50항).&nbsp;<br><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5/975027450_i4gU7YA0_3731121058_q1HsT9yE_DSC_3568.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84" style="clear:none;float:none;" /><br><br>이 미래를 전망함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인물이 하느님 사랑으로 겨레 사랑을 목숨 바쳐 증거한 안중근 토마스입니다. 그는 백여 년 전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하면서 조선 백성 2천 만의 가슴에 나라 사랑의 불을 질렀습니다. 프랑스 선교사가 교회 책임자로 있던 그 시절에 한때 그는 살인죄를 범한 죄인으로 몰렸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역대 교구장 주교들이 시복 시성 대상자로 올릴 만큼 명예가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세상에서는, 조선은 물론 중국과 심지어 일본 내 일부에서도, 그를 동양평화의 아이콘으로 삼아 왔습니다.&nbsp;<br>우리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게 국권을 빼앗긴지 겨우 십여 년만에 삼일만세운동이 거족적으로 일어난 배경, 그것도 비폭력적인 평화 시위로 일어난 배경에는 분명이 안중근 토마스의 의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 전쟁을 치룰 당시에 프랑스 백성을 이끌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쟌 다르크 성녀에 그를 비교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순교자의 후손답게 목숨을 바쳐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겨레를 사랑했던 안중근 토마스처럼, 진정성 있게 민족의 공동선을 위하여 하느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 민족 복음화의 지름길입니다.<br><br><br>]]></description>
			<author>이기우</author>
			<pubDate>Fri, 08 May 2026 16:23:44 +0900</pubDate>
		</item>
		<item>
			<title>꿀벌은 꿀만 만들지 않는다</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22</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5/975027450_WtNp1hBA_3333.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82" style="clear:none;float:none;" /><br><br>봄날 공원을 걷다 보면 꿀벌이 꽃에서 꽃으로 바쁘게 날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꿀벌은 꿀을 모으기 위해 움직인다. 그러나 그 이동 과정에서 꽃가루를 옮겨 식물의 번식을 돕는다. 꿀벌이 의도하지 않은 이 '수분(授粉) 효과' 없이는 꽃도, 과실도, 농업도, 생태계 전체도 유지될 수 없다. 꿀벌이 만드는 꿀의 경제적 가치는 수백억 원이지만, 꿀벌이 수분을 통해 유지시키는 생태계의 경제적 가치는 수천조 원에 이른다는 추계도 있다.<br>프랑스 경제학자 얀 물리에르-부탕(Yann Moulier-Boutang)은 이 꿀벌 이야기를 현대 인간 경제에 적용했다. 그의 2011년 저서 는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그동안 꿀만 보고 수분을 무시해온 것은 아닌가?<br>논쟁의 지형<br>최근 기본소득 논의가 다시 활발하다. 기술 발전, 일자리 불안, 불평등 심화 등이 주요 배경이다. 그런데 기본소득을 두고 의견은 여전히 크게 갈린다.<br>찬성 측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존엄한 존재이며, 최소한의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 자동화로 일자리가 사라지는 시대에 기본소득은 강력한 안전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대 측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낸 세금으로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돈을 준다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노동 의욕을 떨어뜨리고 재정 부담만 키울 뿐"이라고 비판한다.<br>이 논쟁을 오래 지켜보면서 한 가지 아쉬움이 든다. 양측 모두 '노동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찬성론은 자동화의 피해자를 구제하는 '도덕적 자비'의 언어에 기대고, 반대론은 '노동 대가의 공정성'이라는 언어로 맞선다. 그러나 이 논쟁은 결정적인 질문 하나를 빠뜨리고 있다.<br>'우리는 정말 노동할 때만 경제에 기여하는가?'<br>꿀벌이 남기는 것<br>물리에르-부탕은 말한다. 고전 경제학은 꿀만 계산했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고, 논밭에서 곡식을 거두고, 사무실에서 계약을 성사시키는 직접적 생산 — 이것만이 가치 창출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경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로 움직인다.<br>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행위를 생각해보자. 한 사람의 이동은 교통 데이터를 만들고, 카드 결제는 소비 패턴 데이터를 남기며, 스마트폰 위치 정보는 도시 인구 흐름의 지도를 그린다. 이 데이터들은 교통 시스템을 최적화하고, 상권을 분석하고, 도시 계획을 수립하는 데 활용된다. 카카오맵이 수백만 명의 경로 데이터를 바탕으로 '현재 교통 상황'을 보여줄 수 있는 것도, 그 수백만 명이 매일 이동하며 데이터에 '기여'했기 때문이다.<br>점심시간에 식당 리뷰를 남기는 행위는 어떤가. 그 리뷰는 알고리즘이 음식 취향을 학습하는 훈련 데이터가 되고, 식당의 신뢰도를 구성하며, 지역 상권 전체의 생태계에 영향을 미친다. 저녁에 넷플릭스에서 어떤 영화를 선택하고 어느 장면에서 멈추는지는 콘텐츠 산업 전체의 제작 방향을 조형한다.<br>이것이 수분이다. 꿀벌이 꿀을 모으려는 의도로 날아다니지만 수분이라는 부산물로 생태계 전체를 살리듯, 우리는 각자의 목적으로 살아가지만 그 과정에서 경제 생태계 전체가 작동하는 데 필수적인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br>물리에르-부탕은 이것을 '인지 자본주의'의 핵심으로 본다. 지식, 정보, 네트워크, 관계가 가치의 원천이 된 시대에, 단순한 근육 노동이 아닌 인간의 존재 방식 전체가 경제적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이다.<br>세 가지 수분 효과<br>이 시각으로 보면, 인간의 경제 기여는 소비에 그치지 않는다. 적어도 세 가지 차원에서 '수분 효과'가 일어난다.<br>첫째, 정보 유통<br>사람들이 검색하고, 공유하고, 댓글을 달고, 소셜미디어에서 반응하는 모든 행위는 정보 생태계를 유통시킨다. 미국의 기술사상가 재런 러니어(Jaron Lanier)는 (2013)에서 이를 '데이터 노동(data labor)'으로 명명했다. 우리가 구글을 '무료'로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검색 데이터로 구글 AI를 훈련시키며 '노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노동은 지금 이 순간도 진행 중이지만, 임금은 한 번도 지급된 적이 없다.<br>둘째, 공간 이동<br>도시학자 마누엘 카스텔스(Manuel Castells)는 현대 경제를 '흐름의 공간(space of flows)'으로 개념화했다. 사람들이 도시를 걷고, 버스를 타고, 공항을 통과하는 이동 자체가 네트워크 가치를 만든다. 실제로 우버, 에어비앤비, 배달 플랫폼의 기업 가치는 수백만 명의 이동 데이터와 위치 데이터가 축적된 결과다. 이 데이터를 '기증'한 것은 우리 모두지만, 그 가치를 독점하는 것은 플랫폼 기업들이다.<br>셋째, 연결과 관계<br>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Hardt & Negri)는 (2004)에서 현대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은 관계, 돌봄, 소통, 신뢰 같은 '비물질 노동'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부모가 아이를 키우고, 이웃이 서로를 돕고, 시민이 지역 공동체를 유지하는 행위들은 사회적 자본을 만들고 경제가 작동하는 토대를 형성한다. 이 역시 측정되지 않고, 보상받지 못한 수분 효과다.<br>배당의 논리<br>이 세 가지 수분 효과를 종합하면, 기본소득에 대한 새로운 정당화 논리가 열린다. 기본소득은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는 자비'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이미 수행하고 있지만 한 번도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한 기여에 대한 '사회적 배당'이다.<br>이 관점은 역사적 선례가 있다. 18세기 말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은 토지를 인류 공동의 자산으로 보고, 그것을 사용하는 대가로 모든 시민에게 배당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영국의 G.D.H. 콜(Cole)은 시민을 생산자이기 이전에 소비자이자 사회적 존재로 인식하고, 공동체 기여에 기반한 사회적 배당을 제안했다. 제임스 미드(James Meade)는 공동 자산에서 발생한 수익을 국민 모두에게 돌려주는 방식을 경제 모델로 정식화했다.<br>페인이 토지를 공동 자산으로 봤다면, 오늘의 공동 자산은 무엇인가. 그것은 수십억 명의 이동 데이터, 검색 기록, 소셜 관계, 소비 패턴이 쌓여 만들어진 디지털 생태계다. 물리에르-부탕의 언어로 하면, 우리 모두가 수분 노동을 통해 함께 가꾼 '인지 공유지(cognitive commons)'다. 기본소득은 이 인지 공유지의 수익을 다시 모두에게 돌려주는 메커니즘이다.<br>반론과 현실<br>물론 이 관점도 만능은 아니다. "그렇다면 가치 기여를 어떻게 측정하느냐"는 질문이 즉각 제기된다. 모든 사람의 수분 기여가 동일하지 않을 텐데, 획일적 기본소득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도 남는다.<br>재정 문제도 현실이다. 기본소득의 재원을 어디서 마련하느냐는 질문에 "데이터 배당"이라는 개념이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다. 구글, 메타, 아마존 같은 플랫폼 기업들이 무료로 수취해온 데이터 노동에 세금을 매기거나, 알래스카 영구기금처럼 공동 자산의 수익을 모든 시민에게 배분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이미 일부 정책 실험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는 방안이기도 하다.<br>노동 의욕 저하 우려도 있다. 그러나 수분 비유는 이 반론을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꿀벌에게 꿀 이외의 보상을 준다고 해서 꿀을 모으지 않는 게 아니듯, 기본소득은 사람들이 의미 있는 활동을 그만두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존의 공포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고 창의적인 기여를 가능하게 한다.<br>보이지 않는 노동의 시대<br>꿀벌이 꿀만 만드는 것이 아니듯, 인간은 공식적인 노동을 할 때만 경제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걷고, 이동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정보를 공유하고, 관계를 맺는 — 살아가는 행위 전체가 경제 생태계를 유지하는 수분 효과를 만들어낸다.<br>이 사실을 사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기본소득 논쟁의 진정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날이 온다면, 기본소득은 더 이상 '게으른 자에 대한 자비'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가꾼 공유지에 대한 배당'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그 논쟁은 지금보다 훨씬 따뜻하고 건설적인 언어로 이루어질 것이다.<br><br>]]></description>
			<author>이원영</author>
			<pubDate>Fri, 08 May 2026 13:48:09 +0900</pubDate>
		</item>
		<item>
			<title>[가스펠:툰]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21</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5/975027450_EB9x0yLk_051026_EBB680ED999C_ECA09C6ECA3BCEC9DBC-EB8F85EC849C.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80"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5/975027450_ArjFpQEc_5BEABEB8EBAFB8EAB8B05D051026_EBB680ED999C_ECA09C6ECA3BCEC9DBC-EBB3B5EC9D8C.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81" style="clear:none;float:none;" /><br><br>2026년 5월 10일 부활 제6주일&nbsp;제1독서 (사도행전 8,5-8.14-17)<br>그 무렵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br>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내려가서 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였다. 그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그들 가운데 아직 아무에게도 성령께서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br>제2독서 (베드로 1서3,15-18)<br>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그러나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선한 처신을 비방하는 자들이, 여러분을 중상하는 바로 그 일로 부끄러운 일을 당할 것입니다.<br>하느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br>복음 (요한 14,15-21)<br>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nbsp;<br>“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br>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br><br><br><br>]]></description>
			<author>김웅배</author>
			<pubDate>Fri, 08 May 2026 13:43:58 +0900</pubDate>
		</item>
		<item>
			<title>노동자 성요셉, 노동의 존엄성을 위하여</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20</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5/975027450_teR01qIi_453cfee2-7726-49a8-a011-628134be191b.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78" style="clear:none;float:none;" /><br><br>노동자 성요셉 (2026.5.1) : 창세 1,26-2,3; 마태 13,54-58<br>성모성월을 시작하는 오늘, 교회는 성모 마리아의 정배이신 노동자 성 요셉을 기리는 특별 지향으로 미사를 봉헌합니다. 이러한 전례적 취지는 1886년 5월 1일에 미국 시카고에서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역사상 처음으로 외쳤던 사건을 기억하여 그 2년 후인 1888년부터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노동절로 기념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는 노동의 존엄성과 노동자의 인권을 당사자들이 주장한 역사상 첫 움직임입니다.<br>오늘 미사의 전례적 취지는 노동절 제정에 담긴 시대의 징표를 외면하기 어려웠던 가톨릭교회에서 시카고 사건 발생 70년 만인&nbsp;20세기 중반부터 요셉 성인을 노동자들의 주보성인으로서 전례적으로 소환하게 된 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비오 12세, 1955년).&nbsp; 전례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일어난 하느님의 섭리적 사건들을 기념하는 것이지만, 세상에서 일어난 사건들 가운데에서 신앙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일을 골라서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뜻을 기리기도 합니다.<br><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5/975027450_gZjot2Hy_1111.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77"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사진출처 = University of Illinois Library)</acronym><br><br>노동절의 기원이 되었던 시카고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습니다. 1886년 5월 1일에 미국 시카고에서 8만 여명의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8시간 노동제 쟁취’ 구호를 내걸고 궐기하여 총파업을 벌였는데, 경찰과 군대가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는 유혈 사태가 발생했고, 주동자들이 체포되어 장기징역형과 사형을 선고받았었습니다. 7년 후에 이들은 모두 무죄로 석방되었는데, 이는 그 사건에 당국의 무자비한 진압과 사법적 보복을 지탄하는 여론이 국내외적으로 들끓었기 때문입니다.&nbsp;<br>즉, 시카고 시위 2년 후 같은 날에 모든 나라, 모든 도시에서 같은 구호를 내건 국제 시위가 조직되고, 각국 노동자 대표들이 이날을 노동절로 선포하는 제1회 국제대회를 치르는 등 반향이 거세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1년 후인 1891년에는 레오 13세 교황도 노동자의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는 ‘새로운 사태’ 회칙을 반포했습니다. 이는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을 대표하는 교회의 최고 수장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강경한 발언이었고, 이후의 가톨릭교회의 선교 노선을 노동자 계층의 권익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전환시키게 된 엄중한 조치였습니다.<br>이 시카고 시위는 지옥과도 같은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노예처럼 장시간 동안 일하고도 최저수준 이하로 살아야 하는 노동자의 처지에 가톨릭교회가 관심을 기울이게 된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nbsp;<br><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5/975027450_RVO0GPj8_ac785a11-dd7d-49f0-b8e1-3cca192d3b13.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79" style="clear:none;float:none;" /><br>그리하여 레오 13세 이후 역대 교황들은 이러한 사회문제 개입의 노선을 이어 받았습니다. 가톨릭교회 역사상 사회문제를 주제로 해서 그 수장인 교황이 최고의 권위로 무게를 실어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회칙을 반포한 이 노력을 기점으로 교회는 가난한 이들과 노동의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주이심과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그리고 성령의 이끄심을 신앙으로 고백한 이래 천8백 년 만에, 그 동안 감추어졌던 신앙 진리의 새로운 국면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 것이었습니다.<br>그것은 이미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기억이었고, 초대교회는 그렇게 해서 복음을 들은 가난한 이들이 서로 나누고 섬기는 공동체로 출발했었다는 기억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노동절의 사회적 의미를 노동자의 주보로서 성 요셉을 기억하는 전례적 취지는 가톨릭교회의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는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도신경에 빠졌던 주요 계시 중 하나를 천8백&nbsp; 년 만에 보완하는 획기적인 변화였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유언이었는데, 이는 또한 성전과 제사가 아니라 삶의 현장과 가난한 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하느님의 길을 찾으시던 예수님의 삶을 상기시키려는 노력이었습니다.&nbsp;<br>또한 노동자들은 안식을 누릴 권리를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가르침이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세 번째 계명에 담겨 있었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상기했으며, 더 근본적으로는 하느님께서도 엿새 동안 창조의 노동을 하시고 이렛날에는 안식을 누리며 쉬셨다는 성경 해석까지 나왔습니다. 성경을 바라보는 눈이 더 깊어진 것입니다.<br>이러한 교회적 각성 분위기가 퍼져 나가는 가운데, 1919년에 국제노동기구가 발족되었습니다. 후임 교황 비오 11세도 1931년에 ‘사십 주년’ 회칙을 반포하는 등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부각시키자, 이런 가톨릭교회의 움직임이 일종의 ‘방아쇠 효과’를 발생시켰습니다.&nbsp; 첫 사회 회칙 ‘새로운 사태’ 반포 100 주년을 기념하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1년에 ‘백주년’ 회칙을 통해 가톨릭 사회교리가 사회적 복음임을 부각시켰으며, 그 후 백 년 동안 반포된 사회 회칙들을 집대성하는 작업을 한 끝에 지난 2006년에는 『간추린 사회교리』를 펴냈습니다. 이 문헌은 가난한 노동자들로 말미암아 상기하게 된 이 새로운 계시의 종착점을 ‘사랑의 문명’이라고 제시했습니다(580-583항).&nbsp;<br>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먹고 사는 일입니다. 원시 시대에 야생 동물을 사냥하거나 야생 식물을 채취하던 생활을 하던 인류가 야생 동물을 가축으로 길들이거나 야생 작물을 경작하여 재배하는 농업혁명을 일으키면서 인구가 증가해도 먹여 살릴 수 있게 되었으나, 더불어 발생한 잉여 농산물을 분배하기 위한 권력이 필요해지면서 씨족 공동체는 부족 사회로, 다시 국가로 커졌는데, 영토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 잦아지면서 패배한 세력이 노예라는 신분으로 제도적으로 착취당하게 되었고, 이 무렵부터 구조적으로 가난한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늘어난 잉여 생산물을 자본가 계급이 독점하게 되면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이 과거의 노예 신분보다 더 늘어나게 되었습니다.<br>자본주의 체제라 일컬어지는 현 인류의 물질문명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인류가 생산해 낸 잉여 가치를 이미 부유한 개인들이나 국가가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욕심의 매카니즘입니다. 자본주의 경제학자들 중 누구도 간파하지 못한 이 매카니즘에 주목한 마르크스의 눈은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장헸던 계급투쟁론이나 유물사관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더 가지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이미 가진 것을 나누려고 애를 써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세상을 이룩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바 있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진지하게 성찰했어야 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이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마르 1,15)고 선포하신 복음의 요체인데, 인류 역사에 있어서 혁명적인 이 가르침을 사회경제적인 차원에서 실체화시킨 것이 교회였습니다.&nbsp;<br>그런데 가난한 노동자들이 억눌리다 못해 들고 일어나게 된 노동절 사태가 자신의 역사적 뿌리를 잊어버려 가던 가톨릭교회로 하여금 가난과 노동의 문제에 관한 시대의 징표를 새삼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 두 문제는 욕심과 착취의 매카니즘을 지닌 현대 물질문명을 나눔과 섬김의 매카니즘을 지닌 사랑의 문명으로 바꾸어야 할 파스카 과업의 요체라는 것이 가톨릭 사회교리의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노동절 사태를 일으킨 노동자들은 가톨릭교회의 정체성을 일깨워 준 은인들인 셈입니다.<br>교우 여러분!<br>이것이야말로 노동절 제정에 담긴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여, 노동이 사회 문제의 중심이고, 노동자가 사회의 중핵임을 알아야 함을 일깨우고자 노동자의 주보이신 성 요셉 기념일을 전례에 도입한 교회의 취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복음 진리를 가난한 노동자들의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교회와 신앙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류 역사와 개인 인생은 모두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섭리와 뜻대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요, 이를 앞당겨 보여주신 징표가 바로 ‘예수 부활의 복음’입니다.&nbsp;<br>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의지와 이성 그리고 신앙은 이 흐름을 알아차리고 이 복음에 부합할 수 있도록 총동원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고 빛을 발합니다. 이렇듯이 하느님 섭리에 순응하는 삶이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닮은"(창세 1,26) 존재가 되는 길입니다. 노동 후의 안식은 바로 이를 위해 주어진 거룩한 시간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으려는 목적 의식과 노동과 안식의 조화를 통해 세상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명 의식,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에서만 기적이, 사랑의 기적이 일어납니다(마태 13,58).<br>교우 여러분!<br>전통적으로 종교적 질서를 따라서 거행되어 온 전례의 흐름을 벗어나서, 사회에서 일어난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여 제정된 ‘성 요셉 기념일’ 미사의 취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전례적 취지 안에 들어 있는 더 근본적인 교회의 가르침, 즉 노동의 영성에 대해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노동은 사랑과 함께 창조주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근본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닮기 위한 길이 바로 노동입니다.<br>인간은 노동하는 존재입니다. 그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보면, 누군가에 의해 고용되어 노동하는 임금 노동자와 자신의 잉여 소득으로 고용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경영 노동자로 구분할 수는 있습니다. 노동에 의한 소득이 없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전업 주부도 가사 노동자요, 아직 어린 학생도 학습 노동자입니다. 퇴직하여 노후를 취미 활동이나 봉사 활동으로 소일하는 노인들도 역시&nbsp; 마찬가지입니다.&nbsp;<br>노동, 즉 일을 하지 않고는 인간이 동물보다 더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에 대한 하느님의 관점을 회복해야 합니다. 인간은 경제적 조건이나 나이 또는 소득과 상관없이 노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자신의 인격을 수련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동시에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면서 자아를 실현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도 창조의 노동을 하셨고, 인류의 역사를 이끄시는 노동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노동의 영성입니다.<br>노동의 영성에 따르자면 인간 노동에 대한 성찰은 이러합니다. 동물의 움직임과 달리 인간의 노동은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인류 문명은 옛날에 비해 찬란한 지경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물질적인 차원에서 이 찬란한 발달상은 가치적인 차원에서는 여전히 약육강식의 논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동의 생산성 향상에 따라 얻어진 잉여 가치가 힘 있고 가진 자들에게 편중되게 분배되는 탓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노동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기도와 사색, 외침과 나눔, 교육과 홍보 등의 노동으로 세상의 인류가 발달시키고 있는 물질 문명을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등이라는 하느님의 최고선 가치에 걸맞는 사랑의 문명으로 진화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입니다.&nbsp;<br>이어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표한 2026년 노동절 담화문을 인용합니다.&nbsp;<br>&nbsp;“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1베드 5,8)<br>하느님의 창조 사업과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노동자와 선의를 가진 모든 형제자매 여러분,<br>수단이 아닌 존재로서 노동을 위하여 오랫동안 연대해 온 결과 ‘노동절’이라는 이름을 되찾은 오늘, 저는 이 땅의 모든 노동자와 함께 기뻐합니다. 더불어 이 기회에 ‘기후변화와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사태’에 관하여 여러분과 함께 교회적이고 영성적인 고민과 성찰을 나누고자 합니다.<br>기후변화가 현시대에 얼마나 시급한 문제인지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후와 환경과 노동 문제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후와 환경 위기 앞에서 경제적 이유로 인간과 노동자를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시장 경제’ 논리가 우리 안에 팽배해 있습니다. 탄소 중립이라는 대의를 내세우지만 석탄 화력 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과 처우는 외면당하고 있으며, 폭염과 한파, 홍수에 따른 피해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한편, 유해 물질 산업을 저개발국으로 떠넘기는 정의롭지 못한 ‘공해 수출’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최소한의 윤리 감각조차 없는 듯합니다.<br>한편, 우리는 인공지능 시대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변화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오직 하느님의 선물인 지성을 통한 전인적 성장과 공동선을 위하여, 인간과 인간의 도덕적 가치에 따라 결정되어야 합니다. 만일 ‘인간의 책임과 가치관과 양심의 발전’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의 경우, 우리가 경험한 그 어떠한 것보다도 우리 사회 전반에 끼치는 영향력과 파괴력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더구나 인공지능을 경제 논리로만 이해하려는 현 구조는 노동자를 ‘효율성의 노예’나 시스템으로 통제되는 ‘종속적 노동자’로 전락시킬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고용에는 무관심하고, ‘복지’만으로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노동은 단순히 생계 비용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물질적 필요와 더불어 지성적, 도덕적, 정신적, 종교적 생활의 요구 등이 모두 포함된 전인(totus homo)에 대한 봉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br>노동자 그리고 형제자매 여러분,&nbsp;<br>대전환의 시대에 우리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적 가치인 ‘인간 존엄성’을 지켜야 합니다. 또한 “노동자의 존엄에 대한 존중, 개인과 가정과 사회의 경제적 안녕을 위한 고용의 중요성, 고용 안정과 공정 임금을 우선순위로 삼아야 합니다”(제57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5항). ‘새로운 사태’를 회피하기보다는 오히려 마주하는 용기를 가져야 하고, 선의를 지닌 이들과 윤리적 연대를 강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편적 형제애’를 지닌 ‘공동 책임자’로서 가난하고 약한 이를 ‘굶주린 사자’(1베드 5,8 참조) 앞에 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뜨거운 연대로, 불확실한 미래를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희망의 터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 모두의 축제인 노동절을 축하하며, 주님의 크신 축복과 은총을 기원합니다.<br>노동자의 수호자 성 요셉,노동자와 그의 가족 그리고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br>2026년 5월 1일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김 주 영 주교<br><br>]]></description>
			<author>이기우</author>
			<pubDate>Fri, 01 May 2026 13:14:06 +0900</pubDate>
		</item>
		<item>
			<title>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다시 인간을 묻다</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19</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5/975027450_1uJnfsVp_20004_67738_1234.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76"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사진제공 = 백악관 (Official White House Photo by Molly Riley)</acronym><br><br>인류의 학명은 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에서 끝나지 않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로 한 번 더 반복될까. 라틴어 sapiens는 ‘지혜로운’, ‘분별하는’, ‘아는 존재’를 뜻한다. 직역하면 “지혜로운 인간, 더욱 지혜로운 인간”이다. 단순한 생물학적 명칭처럼 보이지만, 이 이름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숨어 있다. 인간은 단지 생존을 위해 진화한 존재가 아니다. 배고픔을 해결하고, 추위를 피하고,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만으로 인간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이라면 다른 동물들도 이미 해내고 있다.<br>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것은 두 번째 사피엔스다<br>첫 번째 사피엔스가 감각의 세계를 살아낸 존재라면, 두 번째 사피엔스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한 존재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말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계획하며, 죽은 이를 기억하고, 태어나지 않은 세대를 걱정하는 능력. 정의, 자유, 사랑, 희망 같은 비가시적 가치를 위해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존재. 바로 그것이 인간이다. 우리는 눈앞의 빵만으로 살지 않았다. 정의를 위해 싸웠고, 자유를 위해 희생했으며, 사랑을 위해 삶을 바쳤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br>나는 왜 사는가. 고통은 왜 존재하는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nbsp;<br>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br>이 질문들이 종교를 만들었다. 종교는 인간의 불안을 달래고, 공동체를 결속시키며, 윤리와 자비를 가르쳤다. 수도원은 문명을 지켰고, 사찰은 마음의 평화를 가르쳤으며, 성당과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인간이 짐승으로 추락하지 않도록 붙잡아 준 힘 가운데 하나가 종교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종교는 언제나 빛만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진리를 독점하려 할 때 종교는 폭력이 되었다. 의식은 목적이 되었고, 권력은 신의 이름을 빌렸으며, 맹신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역사는 십자군과 종교전쟁, 이단 심문과 박해, 차별과 혐오의 기록도 함께 남겼다.&nbsp;<br>종교의 타락, 민주주의의 위기<br>오늘의 세계 역시 그 오래된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 정치의 한복판에서는 종교가 권력을 위한 소품처럼 소비되곤 한다. 트럼프는 자신을 구원자처럼 연출하며 신앙의 언어를 정치적 동원 수단으로 사용해 왔다. 지도자가 자신을 메시아처럼 포장하는 순간, 시민은 신도가 되고 민주주의는 변질된다.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숭배하게 되는 것이다. 교황, 레오 14세와의 갈등 역시 상징적이다. 종교의 본래 언어가 평화와 연대, 인간 존엄에 있다면, 권력의 언어는 승리와 복종, 적대의 언어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 충돌 속에서 지금 세계는 묻고 있다. 종교는 권력의 시녀인가, 양심의 예언자인가.&nbsp;<br>중동에서는 더욱 비극적인 현실이 펼쳐진다. 네타냐후의 강경한 권력 정치와 지역 패권 경쟁은 중동 전쟁의 악순환을 키워 왔다. 폭격 아래 쓰러지는 아이들, 폐허가 된 도시, 증오를 유산처럼 물려받는 세대들 앞에서 어느 종교도 무죄를 선언할 수 없다. 신의 이름으로 피를 흘리게 하는 순간, 그 신앙은 이미 자신을 배반한 것이다. 종교가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날 때, 위기는 신앙 내부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곧 민주주의의 위기로 번진다. 시민이 스스로 판단하는 주권자가 아니라 지도자를 추종하는 신도가 될 때, 비판은 불경으로 취급되고 토론은 배신으로 낙인찍힌다.&nbsp;<br>사실과 이성의 공론장은 음모론과 선동에 잠식되며, 선거는 정책 경쟁이 아니라 구원 서사를 둘러싼 신앙 전쟁으로 변질된다. 권력을 견제해야 할 종교가 오히려 권력을 신성화하는 순간, 민주주의의 핵심인 자유·다원성·책임정치는 무너진다. 종교가 인간을 해방시키지 못하고 맹목적 복종을 가르칠 때, 그것은 더 이상 구원의 통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좀먹는 위험한 우상이 된다.<br>한국 사회도 다르지 않다. 통일교의 정치 네트워크 논란, 신천지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 그리고 극우 개신교 세력의 혐오 선동과 폭언은 종교가 어떻게 공공성을 잃고 진영의 무기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십자가가 사랑의 표지가 아니라 분노의 깃발로 사용될 때, 종교는 사회 통합이 아니라 사회 파괴의 도구가 된다.<br>대한민국의 새로운 길 찾기<br>대한민국은 지금 높은 기술력과 낮은 행복감 사이에 서 있다. 경제 규모는 커졌지만, 삶의 의미는 흔들리고, 정보는 넘치지만, 지혜는 줄어들었다. 연결은 많아졌지만 외로움은 깊어졌고, 종교는 넘치지만, 위로와 돌봄은 희미해졌다. 목소리는 커졌으나 자기 성찰은 줄어들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예산의 팽창이나 거대한 종교건물의 확장이 아니다. 디지털 문명의 한가운데에서 인간의 존엄과 삶의 의미를 지켜낼 영성의 확장이다.<br>영성은 특정 종교나 교단의 전유물이 아니다. 영성은 인간이 자기 욕망을 넘어 더 큰 가치와 연결되는 능력이다. 타인의 고통을 내 일처럼 느끼는 감수성, 눈앞의 이익보다 공동선을 선택하는 용기, 속도보다 방향을 묻는 지혜, 소유보다 존재를 귀하게 여기는 태도다. 영성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더 깊이 책임지는 힘이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는 새로운 흐름이 시작되고 있다. 명상과 치유, 생태 감수성, 공동체 회복, 청년들의 의미 탐색, 종교를 넘어선 연대와 봉사, 삶과 죽음을 함께 성찰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교리의 반복만을 원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삶의 의미를 원한다. 경쟁의 승리가 아니라 존재의 충만을 갈망한다.<br>AI 시대가 깊어질수록 인간은 더 인간다워져야 한다. 알고리즘이 계산할수록 우리는 더 양심적이어야 하고, 권력이 과장될수록 시민은 더 깨어있어야 한다. 종교가 타락할수록 영성은 더 넓고 깊어져야 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살아남은 종이었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종이어야 한다. 그 질문을 잃은 사회는 번영해도 공허하다. 그 질문을 회복한 사회만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nbsp;<br>대한민국의 다음 시대는 경제 성장률만으로 오지 않는다. 기술 혁신만으로도 오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성숙, 공동선에 대한 감각, 서로의 존엄을 지키려는 시민의식, 그리고 삶의 의미를 회복하려는 영성적 각성 위에서 시작될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의 새로운 길은 더 많이 가지는 길이 아니라, 더 깊이 사는 길이어야 한다.<br><br><br>]]></description>
			<author>지성용</author>
			<pubDate>Fri, 01 May 2026 12:54:32 +0900</pubDate>
		</item>
		<item>
			<title>[가스펠:툰] &quot;여러분은 선택된 겨레, 거룩한 민족입니다&quot;</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18</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5/975027450_XIfR10Ls_0503236EBB680ED999C_ECA09C5ECA3BCEC9DBC-EB8F85EC849C.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73"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5/975027450_r6SbMzJF_5BEABEB8EBAFB8EAB8B05D050326_EBB680ED999C_ECA09C5ECA3BCEC9DBC-EBB3B5EC9D8C.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74" style="clear:none;float:none;" /><br><br>2026년 5월 3일 부활 제5주일 (생명주일)<br>제1독서 (사도행전 6,1-7)<br>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br>“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br>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br>제2독서 (베드로 1서 2,4-9)<br>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 그래서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br>“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선택된 값진 모퉁잇돌이다. 이 돌을 믿는 이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br>그러므로 믿는 여러분에게는 이 돌이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하는 그 돌이며, 또한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입니다.<br>그들은 정해진 대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그 돌에 차여 넘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br>복음 (요한 14,1-12)<br>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br>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br>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br>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br>“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br><br><br>]]></description>
			<author>김웅배</author>
			<pubDate>Fri, 01 May 2026 12:37:40 +0900</pubDate>
		</item>
		<item>
			<title>게임의 룰을 선수가 정하는 정치, 이대로 둘 것인가</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17</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5/975027450_e4aLibxF_37679_102157_521.jpe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71"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2026년 4월 24일, 전태일기념관 교육실에서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이 4·19 66주년 기념 초청강연을 하고 있다. 주제는 `국회의 헌법·선거법 셀프입법 특권,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 ⓒ 시민인권위원회</acronym><br><br>2026년 4월 24일 금요일, 오후 청계천 곁의 전태일기념관 교육실에는 20명 남짓의 시민이 앉아 있었다. 스크린에 떠 있던 강연 포스터의 제목은 평범하지 않았다. 「국회의 헌법·선거법 셀프입법 특권,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 그리고 「국민발안과 시민의회가 해법이다」. 4·19혁명 66주년을 기념하는 초청강연이었다. 공동주최는 시민의회 전국포럼, 시민인권위원회, 촛불행동.<br>김정희 시민인권위 공동위원장의 인사말에 이어 강단에 선 사람은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 2010~2012년 서울시 교육감으로서 무상급식과 학생인권조례의 시대를 연 그 사람이다. 이상한 판결로 오랜 야인의 시기를 거친 뒤, 이제는 정치개혁의 이론가이자 시민의회 운동의 선창자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두 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이야기했다.<br>강의의 구호는 단순했다. "대리운전 권력을 주인이 되찾자." 그러나 그 단순한 구호 뒤에는, 한국 정치가 지난 40년 동안 왜 바뀌지 않았는가에 대한 꽤 긴 설명이 필요했다.<br>검찰개혁 다음의 전장<br>2024년 말의 '빛의 혁명' 이후 한국 사회는 숨 가쁜 제도 개혁의 시기를 통과해 왔다. 검찰의 수사권은 거의 전면 이관되었고, 사법부를 겨냥한 법왜곡죄와 재판소원 제도가 신설되었으며, 대법관 수는 증원되었다. 언론과 유튜브는 이 격변의 주인공들 — 대통령과 법무장관, 총리와 정당 대표 — 을 돌아가며 비추었다. 그러나 곽노현이 보기에, 한국 정치의 가장 견고한 성채는 아직 손도 대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br>그 성채의 이름은 '국회'다. 정확하게 말하면, 국회의원들이 스스로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정하고, 스스로 게임의 룰을 바꾸고, 스스로 자신들의 월급을 정하는 — 한마디로 셀프 입법(self-legislation)의 체제다. '검찰 개혁이 어려웠다면 사법 개혁은 더 어려웠고, 사법 개혁이 어려웠다면 정치 개혁은 그보다도 더 어렵다'는 것이 곽노현의 진단이었다.<br>왜 정치 개혁이 가장 어려운가. 답은 단순하다. 다른 모든 개혁은 국회가 했지만, 정치 개혁은 국회가 자기 자신에게 칼을 대는 일이기 때문이다. 국정원 개혁은 문민정부가 시작했고, 검찰 개혁은 두 번의 시민 혁명이 완수했으며, 사법 개혁은 '내란 사법'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밀어붙였다. 모두 외부의 힘이 내부의 저항을 이긴 결과였다. 그러나 정치 개혁은 그 외부의 힘을 빌릴 통로조차 제도화되어 있지 않다. 국민발안도 없고, 시민의회도 없다. 그래서 국회는 지난 40년 내내, 마치 어떤 비밀 협약을 맺은 듯, 자신들의 편에 서 있는 룰을 건드리지 않았다.<br>그는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br>'지독한 백성'의 역설<br>한국 유권자는 지독한 사람들이다. 지난 40년 동안 대통령을 5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갈아치웠고, 300명 국회에서 4년마다 평균 100명 — 물갈이율 30% 이상 — 을 교체해 왔다. 이는 전 세계 선진국 의회 중 단연 최고 수준이다. 미국 의회 물갈이율은 5% 남짓이고, 유럽 대륙의 주요국들도 대개 10%를 넘지 않는다.<br>직접 대통령을 감옥에 보낸 적도 있고, 대통령을 보내지 않으면 대통령의 자식이라도 보냈다. 그것도 평화적으로 했다. 권력에 대한 응징의 강도로 보자면 한국 시민은 어느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보다도 맹렬했다. 그러나 그 맹렬한 응징에도 불구하고, 정치판은 바뀌지 않았다. 얼굴은 바뀌었지만, 판은 그대로였다.<br>노회찬의 유명한 비유처럼, 한국 정치는 '낡은 불판'에 고기 종류만 계속 바꿔 올리는 것과 같았다. 고기는 늘 새로웠지만, 불판이 바뀌지 않으니 맛은 매번 질겼다. 곽노현은 이 비유를 이어받아 물었다. "왜 불판이 안 바뀝니까?" 그리고 스스로 답했다. "사람 탓이 아닙니다. 제도 탓이에요. 제도 뒤에 버티고 있는 법과, 그 법이 주는 이해관계와, 그것을 정당화하는 관념의 탓입니다."<br>여기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 제도를 만드는 사람들 — 국회의원 — 이 바로 그 제도로부터 이익을 얻는 당사자다. 그들에게 제도를 바꾸라는 것은, 자기 손에 쥐어진 권력과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으라는 것과 같다. 그런 일을 기대하는 것은, 그가 보기에, "약 먹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바꿀 수 있는가. 이 질문이 곧 이 강연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었다.<br>특권의 재분류 — 진짜 표적은 따로 있다<br>의원 특권 하면 흔히 떠올리는 것은 불체포특권과 면책특권이다. 회기 중 국회의원을 함부로 체포할 수 없게 한 특권과, 공식 회의에서의 발언을 면책하는 특권. 두 가지 모두 헌법에 규정된 특권이며, 시민들은 대체로 이 두 특권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다. 부패 비리 정치인들이 걸핏하면 불체포특권의 방패 뒤에 숨어 온 기억 때문이다.<br>그러나 곽노현은 이 통념을 뒤집었다. "불체포특권과 면책특권은 나쁜 특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필요한 장치입니다." 그의 근거는 최근의 기억에서 나왔다. 윤석열 정부 시절, 야당 의원들이 검찰과 정권의 전방위적 압박에 노출되어 있을 때, 만약 불체포특권이 없었다면 야당의 저항은 더 일찍 무너졌을 것이다. 면책특권이 없었다면 의원들은 대통령 비판을 꺼렸을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관철되는 국면에서, 이 두 특권은 소수파 야당을 보호하는 거의 유일한 방벽이었다는 것이다.<br>그러면서 그는 한 사람을 구체적으로 거명했다. 당시 민주당 혁신위원회 위원장(김ㅇㅇ)이 이재명 당시 대표에게 "불체포특권을 포기하고 검찰에 출두하라"고 요구했던 일이었다. 곽노현의 평가는 가혹했다. "그 특권이 뭔지 모르는 겁니다. 쥐뿔도 모르는 사람이 혁신위원장이랍시고 앉아 있었던 거예요." 이 지점에서 곽노현은 특권을 재분류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헌법상 불체포·면책특권은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진짜 없애야 할 특권은 따로 있다. 그것이 바로 이날 강연의 핵심어, 셀프 입법 특권이었다.&nbsp;셀프 입법 특권 — '자기대리 금지 원칙'의 중대한 예외<br>곽노현은 법학자답게 근본 원칙에서 출발했다. 법의 역사에는 두 개의 오래된 금지 원칙이 있다. 하나는 '자기재판 금지의 원칙'이다. 재판관은 자기 사건을 재판할 수 없다. 이해관계가 있는 당사자가 판단자가 되면 그 판단은 공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대리 금지의 원칙'이다. 대리인은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에서 주인을 대리해 결정할 수 없다. 민법의 쌍방대리 금지가 그 한 예다.<br>이 원칙을 입법 영역에 적용해 보자.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기입법 금지의 원칙'이 도출된다. 대리인이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스스로 정할 수 없다면, 국민의 대리인인 국회의원 역시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스스로 정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원칙이다.<br>그런데 현실은 정반대다. 한국에서는 국회의원의 권리·의무를 국회의원이 정한다 (국회법, 공직자 처우 관련 법들). 또, 정당의 권리·의무를 국회의원이 정한다 (정당법, 정치자금법). 또, 국회의 권한을 국회의원이 정한다 (국회법, 각종 국회조직법). 나아가 헌법조차 국회의원이 사실상 독점적으로 발의·심의·의결한다. 국민투표는 형식에 불과하고, 대통령 발의권은 실질적 견제력이 없다.<br>"제가 이것을 셀프 입법 특권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전 세계 어떤 비교정치학 논문이나 헌법 논문에서도 이 용어를 쓰는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곽노현의 말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선거 대의정(代議政)의 쥐약이자 아킬레스건'이다. 아무리 유권자가 4년마다 국회의원을 갈아치워도, 새로 뽑힌 국회의원이 게임의 룰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정하는 한, 판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이것이 지난 40년간 한국 정치개혁 실패의 1번 원인이다. 그리고 이 셀프 입법 특권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영역이 있다. 선거법이다.<br>게임의 룰 — 왜 소선거구 단순다수제는 바뀌지 않는가<br>야구에서 3아웃을 4아웃으로 바꾸면 게임이 완전히 달라진다. 사사구를 삼사구로 바꾸어도 마찬가지다. 룰이 곧 게임이다. 선거도 그렇다. 선거 제도에는 101가지의 변수가 있지만, 한국인들은 초등학교 반장 선거에서부터 어른들의 대통령 선거까지, 하나의 룰에만 익숙해져 있다. 단순다수대표제, 즉 "한 표라도 더 얻으면 당선"이라는 룰이다.<br>그런데 이 룰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매우 드물다. 미국, 영국, 프랑스 정도에 불과하다. 이 세 나라에는 공통의 '원죄'가 있다. 이들은 전 세계가 절대군주정이던 시절에 가장 먼저 왕이 없는 정치 체제를 실험했다. 영국은 1688년 명예혁명으로 입헌군주제와 의회 중심 제도를, 미국은 1776년 독립혁명으로 '임기 있는 왕' 즉 대통령제를 창안했다. 프랑스는 1789년 이후 여러 차례 공화국을 시도했다. 그 시대에 가장 이해하기 쉬운 집계 방식이 단순다수였다. 그 뒤로 경로 의존성이 너무 강해져, 이 나라들은 이제 와서 제도를 바꾸지 못하고 있다.<br>반면 유럽 대륙 국가들은 이야기가 다르다. 1차 세계대전 직전후인 1910~1925년 사이, 독일·벨기에·네덜란드·스웨덴 등 거의 모든 대륙 국가들이 '비례대표제'로 전환했다. 결정적 계기는 노동 운동의 성장과 도시 인구의 폭증이었다. 단순다수 소선거구제 아래에서는 재산이 적고 인구 밀집도가 낮은 귀족 영지가 과대 대표되는 반면, 노동자와 빈민이 밀집한 도시 선거구는 과소 대표되었다.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이 보통선거권을 요구했듯, 대륙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 '인구 비례에 따른 의석 배분 — 비례대표제'가 답이라는 합의가 형성되었다.<br>한국은 어느 쪽인가. 한국은 미국·영국을 모델 삼아 출발했다. 그래서 소선거구 단순다수제가 지금도 국회와 지방의회 지역구 선거의 기본 골격이다. 비례 의석은 국회에서 13~16%, 광역의회에서 10% 수준에 불과하다. 이 제도의 폐단은 잘 알려져 있다.<br>첫째, '사표 심리'가 유권자의 소신 투표를 억누른다. 둘째, '일당 독식' 현상이 반복된다. 이론상 51% 지지율의 정당이 49% 지지율의 정당을 모든 선거구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제3당의 의회 진입이 구조적으로 봉쇄'된다. 한국에서 이 현상은 지방선거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곽노현이 제시한 수치는 충격적이다.<br>2018년 문재인 정부 1년차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서울시의회 지역구 100석 중 97석을 석권했다(비례 10석을 포함하면 110석 중 105석). 경기도의회에서도 135석 중 130석 이상을 가져갔다. 수도권 광역의회에서 국민의힘 계열은 원내 교섭단체조차 구성하지 못했다. 원내 교섭단체 기준은 20석인데, 5~7석에 그쳤기 때문이다.<br>그로부터 4년 뒤인 2022년 지방선거에서는 정확히 반대 현상이 일어났다. 윤석열 당선 직후의 바람을 탄 국민의힘은 17개 광역 중 10곳을 석권했고, 서울·인천에서 70% 이상을 득표했다. 이후 이들 광역의회에서는 학생인권조례, 도시인권조례, 무상급식조례, 탈시설조례 등이 시장·지사의 거부권을 3분의 2 재의결로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잇따라 폐지되었다.<br>이것은 민주주의인가. 곽노현의 진단은 단호하다. "이건 일당 독재입니다. 국민들에게 좋은 일이 아니에요. 견제가 없으니 마음 놓고 해 먹는 구조죠." 그런데 정작 국회의원들은 이 문제를 방치한다. 왜인가. "4년 있다가, 아무리 오래 걸려도 8년 있으면 풍향이 바뀌어 이번엔 내가 싹쓸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계산이 여야의 암묵적 공모를 낳았다.<br>민주주의의 두 얼굴 —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br>이 지점에서 그는 2천 몇백 년 전의 한 철학자를 호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아테네 민주정의 현장을 관찰하며 이렇게 정리했다. "선거는 귀족정의 원칙이다. 추첨은 민주정의 원칙이다." 곽노현은 이 한 문장을 "너무 깔끔하고 명쾌하다"고 칭찬했다. 선거는 반드시 '탁월한 자', 즉 귀족 을 뽑는 장치다. 유권자는 자연스럽게 더 뛰어나 보이는 사람, 돈을 많이 벌었거나 유명하거나 학벌이 좋거나 혹은 최소한 10번 떨어져도 포기 않는 끈기라도 있는 사람을 뽑는다. AI 수석으로 영입되는 하정우 같은 전문가, 배우 이순재나 코미디언 이주일 같은 유명인이 국회에 입성하는 이유도 같다. 그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탁월했기 때문이다.<br>그렇다면 왜 우리는 선거를 민주주의의 수단으로 생각하는가. 답은 단 하나, 1인 1표라는 평등 원리에 있다. 이 세상에서 남녀노소 빈부 교육 성격이 모두 다른 인간들을 평등하게 대우하는 거의 유일한 제도가 1인 1표다. 이 점에서 선거는 민주주의적이다. 그러나 그 한 표로 뽑아 올리는 결과물은 여전히 귀족, 정확히는 '임기(任期) 있는 귀족' 이다.<br>이 통찰이 왜 중요한가. 곽노현은 이 대목에서 갑작스레 미래 예측으로 도약했다. 지금의 기술관료주의와 인공지능 시대가 그대로 진행된다면, 향후 30년 안에 1인 1표 원칙이 허물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무식한 놈들이 뭘 안다고 표를 행사하나, 꺼져, 이렇게 되거나, 아니면 재산 1억당 한 표씩 줘서 100억 가진 사람이 100표를 행사하는 식으로 갈 겁니다. 지금 같은 추세면 막을 힘이 없기 쉬워요." 물론 이 예측의 정확성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권위주의적 퇴행이 세계 곳곳에서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관찰은 반박하기 어렵다. 곽노현의 결론은 이렇다. 지금의 대의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강화하지 않으면, 민주주의 자체가 허물어질 것이다. 그 강화의 구체적 내용이 바로 이날 강연의 남은 절반을 차지했다.<br>게임의 룰을 바꾸는 법 — 순위투표제라는 발명<br>어떻게 선거제도를 개혁할 것인가. 곽노현이 제시한 답은 순위투표제(Ranked Choice Voting, RCV) 와 이를 중선거구에 확장한 단기이양식 투표제(Single Transferable Vote, STV)였다. 순위투표제의 작동 방식은 단순하다. 유권자는 후보들에 대해 1순위, 2순위, 3순위… 하는 식으로 순위를 매긴다. 개표는 이렇게 진행된다.<br>1) 1순위 표를 집계한다. 과반수 득표자가 있으면 당선 확정.2) 과반수가 없으면 최저 득표자를 탈락시키고, 그 후보를 1순위로 찍은 표들의 2순위를 살아남은 후보들에게 이양한다.3) 이 과정을 과반수 득표자가 나올 때까지 반복한다.<br>이 단순한 룰이 만들어 내는 효과는 놀랍다. 승자에게는 과반수의 정당성이, 유권자에게는 사표 없는 소신 투표와 투표 효능감이, 정당에게는 정책 선거의 강제가 주어진다. 왜 정책 선거가 강제되는가. 네거티브 선거를 하면 2·3순위 표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 후보의 지지자들로부터 2순위 표를 얻으려면,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br>곽노현은 이 제도의 '모범생'을 그가 아끼는 말투로 소개했다. 뉴욕시장 조란 맘다니(Zohran Mamdani)다. 맘다니는 2025년 뉴욕시 민주당 경선에서 이 순위투표제의 수혜자가 되어 2라운드 만에 과반수를 확보했다. 그 이전 뉴욕시장 민주당 경선에서는 후보가 13명 출마했고 5순위까지 기표했는데, 8차례 개표 끝에 50.6%로 당선자가 결정되었다. 8차까지 이양된 표가 여전히 살아 있었다는 것, 이것이 순위투표제의 매력이다. 사표가 없기 때문이다.<br>비슷한 원리를 여러 명을 뽑는 중선거구에 확장하면 단기이양식 투표제(STV)가 된다. n명을 뽑는 선거에서 당선 확정 득표율(쿼터)은 1/(n+1)에 한 표를 더한 값이다. 4인 선거구라면 20% + 1표, 5인 선거구라면 약 17% + 1표가 당선선이다. 1순위 표가 쿼터를 초과한 후보의 잉여표는 차순위로 이양되고, 탈락 후보의 표 역시 차순위로 이양된다. 그 결과는 거의 정확한 비례대표제다. 다만 유권자는 정당 명부가 아니라 사람에게 직접 기표하므로 '투표의 손맛'이 살아 있다.<br>그는 이 지점에서 가짜 개혁론자를 가려내는 리트머스 시험을 제시했다. "선거제 개혁을 말하지 않으면서 권력 구조 개혁을 외치는 자들은 모두 가짜입니다. 내각책임제로 바꾸자면서 국회의 비례대표제화를 말하지 않는 자도 마찬가지예요. 권력의 단물만 노릴 뿐, 실제로 바뀌는 게 없거든요."<br>밴쿠버의 91% — 시민이 시민을 대표했을 때<br>곽노현이 한국 청중에게 가장 강렬하게 권하고 싶어 했던 사례는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BC)주 시민의회였다.<br>배경은 이렇다. BC주는 79석 단원제 내각책임제 주의회를 운영한다. 1996년 선거에서 BC자유당(당수 고든 캠벨)이 득표율 41%로 38%의 상대를 앞섰다. 그러나 소선거구제의 농간으로 BC자유당은 오히려 6석 차로 패배했다. 득표 1등, 의석 2등이 된 것이다. 불합리를 경험한 캠벨은 4년 뒤 2001년 선거에서 79석 중 77석을 싹쓸이하며 복귀했다. 그리고 공약대로 선거제 개혁 프로세스를 출범시켰다.<br>BC주가 택한 방식은 주의회가 아니라 '시민의회'였다. 남녀 동수, 지역·연령 비례를 맞춘 160명의 시민 대표를 무작위 추첨으로 선발했다. 이들은 11개월 동안 매주 주말 200시간 이상 학습하고, 토론하고, 상반된 견해의 연구자들로부터 자문을 들었다. 사람들은 결과를 두고 내기를 벌이기도 했다. 대세는 당시 뉴질랜드가 1996년에 도입한 독일식 혼합연동형 비례대표제였다. 그런데 뚜껑을 열었을 때 시민 대표들의 선택은 다른 곳에 있었다. 2~7인 중선거구제 + 단기이양식 순위투표제(STV). 찬성 146명, 반대 7명, 기권 7명. 찬성률 91%였다.<br>곽노현은 이 수치의 의미를 짚었다. "독재사회가 아닌 이상 90%는 사실상 100%에 가까운 합의입니다." 보통 사회적 합의로 인정되는 기준은 3분의 2, 약 66%다. 시민의회 권고 채택 기준은 통상 70%다. 91%는 그 모든 기준을 압도적으로 넘는다.<br>왜 시민들은 독일식이 아니라 STV를 택했는가. 곽노현의 해석은 설득력이 있다. 독일식 비례대표제는 결국 정당 명부에 기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권자에게 '사람을 뽑는 손맛'을 주지 않는다. 반면 STV는 사람에게 직접 순위를 매기면서도 2·3순위 이양을 통해 비례대표제의 효과를 낸다. 전문가들이 이론적으로 우아하다고 본 독일식보다, 시민들은 유권자 효능감과 비례성의 조합을 택한 것이다. "일반 시민이 바보가 아닙니다. 정확하게 본인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봐요."<br><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5/975027450_y8wLdK4B_37679_102160_5845.jpe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72"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 시민인권위원회</acronym><br><br>시민의회 —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가능한가<br>BC주 사례가 한국에 주는 시사점은 분명했다. 국회의원이 자기 게임의 룰을 스스로 바꾸지 않는다면, 다른 주체가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 그 다른 주체가 곧 시민의회다. 그런데 한국 헌법에는 국민발안이 없다. 국민청원은 있지만, 21대 국회가 임기 말에 적법하게 성립된 시민청원 120여 건을 회기 종료 하루 전날 일괄 기각한 사례에서 보듯, 실질적 구속력이 없다. 그러므로 시민의회가 현실적 유일 경로다.<br>곽노현이 제안하는 한국형 시민의회의 구성은 이렇다. 300명의 시민 대표로 남녀 50%, 연령별·지역별·교육수준별·정치성향별로 인구통계학적 대표성을 반영한 무작위 추첨. 100시간 이상의 학습과 토론, 숙의. 그리고 입법 권고를 국민투표에 붙여 확정짓거나, 국회가 심의·의결하게 하되 수정은 극히 제한하는 것.<br>이 시민의회의 특징은, 그 대표들이 1인 1표로 뽑힌 대표가 아니라 인구통계학적으로 국민을 대표하는 '미니 국민'이라는 점이다. 여론조사가 표집을 통해 국민의 의사를 추정하듯, 시민의회는 추첨을 통해 국민의 의사를 숙의된 형태로 형성한다. 결정적 차이는, 그들에게 이해관계도, 권력 욕망도, 정당 기율도 없다는 것이다. 곽노현의 표현대로, 그들은 "일당 받으면서 공부하는 사람들"일 뿐이다.<br>질문이 나왔다. 한 참석자가 물었다. "국회의원들은 절대로 이런 제도를 만들어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실현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오래된 딜레마였다. 제도를 바꿀 제도가 없는 상태에서 제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곽노현의 대답은 한 사람의 정치 지도자에게로 향했다. 이재명 대통령이었다.<br>"이 양반은 지지율 70% 아닙니까? 호루라기 하나 불면 권리당원 150만 명의 70%가 움직이는 절대 권력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더 할 대통령 자리가 없습니다. 권력욕으로부터 자유로운 거예요. 그러니 이 사람이 시민의회 시대를 열겠다고 결단해도 권력에 누가 되지 않아요. 오히려 위대한 대통령의 길이 열리는 겁니다."<br>정치적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이 논리 구조 자체는 흥미롭다. 셀프 입법 특권을 가진 자들이 그 특권을 내려놓지 않을 때, 이미 그 특권의 수혜 단계를 지나 더 바랄 것이 없는 자만이 제도 개혁을 앞장설 수 있다는 것이다. 권력을 내려놓는 조건은 오직 권력의 정점뿐이라는, 역설적이지만 꽤 설득력 있는 진단이었다.<br>파생 특권들 — 셀프 입법의 그림자<br>강연 후반부에서 곽노현은 셀프 입법 특권이 낳은 파생 특권들을 하나씩 짚었다. 이것들은 언론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이런 거 10개쯤 더 얘기해줄 수 있는" 목록의 일부였다.<br>첫째, 세비 자기결정권. 국회의원의 급여는 '월급'이 아니라 '세비'라고 불린다. 이 세비와 각종 수당을 누가 정하는가. 국회의원 자신이다. 월급쟁이가 자기 월급을 스스로 정하는 제도가 이 세상 어디에 또 있는가. 곽노현의 표현을 빌리면, "이게 특권이 아니고 뭐가 특권입니까?"<br>둘째, 징계 면책 특권. 국회의원의 징계는 국회 윤리특별위원회가 담당한다. 그런데 이 윤리특위는 전원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처리 기한이 없다. 징계안이 접수되어도 그냥 묵혀 두다 4년 임기가 끝나면 자동 폐기된다. 민주화 이후 국회 윤리특위가 실제로 의결한 징계 사례는 사실상 전무하다. 1979년 유신 말기에 김영삼 총재가 본회의 의결로 제명당한 것이 예외적인 한 건일 뿐이다.<br>셋째, 무기명 투표 관행. 국무총리·대법원장·헌법재판관·대법관 임명동의 등 가장 중대한 인사 사안을 국회는 무기명으로 표결한다. 미국 상원과 하원에는 무기명 투표가 없다. 명부를 알파벳 순으로 호명해 예(yea)와 아니오(nay)를 소리 내서 표시하는 네이 롤(Nay Roll) 방식이다. 의원 100명이 공개리에 자기 입장을 밝힌다. 가장 공적인 결정을 프라이버시 뒤에 숨기는 한국의 관행은, 곽노현이 보기에 "대법원장 인준처럼 중대한 결정일수록 반드시 공개되어야 한다"는 원칙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심지어 국회의장·상임위원장 선출까지 무기명이다.<br>넷째, 장관 겸직 특권. 대통령제는 입법부와 행정부의 엄격한 분리를 원칙으로 한다. 미국은 현역 상·하원 의원을 장관으로 발탁할 수 없다. 그런데 한국은 국회의원의 장관 겸직을 법으로 보장한다. 이 제도는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 여당 중진 의원과 대통령 양쪽 모두다. 3선 이상의 여당 중진에게 장관 자리는 4선을 보장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다. 대통령에게는 그 중진들의 쓴소리를 틀어막는 입마개다. 초선은 감히 대통령에게 비판할 엄두를 못 내고, 재선 이상으로 대통령을 꿈꾸는 중진만이 쓴소리를 할 수 있는데, 그 입을 장관 자리로 틀어막으면 여당 내부 견제가 사실상 소멸한다.<br>곽노현의 결론은 이렇다. "셀프 입법 특권을 인정하는 순간, 이 모든 파생 특권이 불가피해집니다. 이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진짜 없애야 할 특권은 불체포특권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에요."<br>삼종 혼합 민주정 — 공화주의 신화를 넘어<br>강연의 마지막 10분은 곽노현 자신의 민주정 구상이었다. 그는 이 구상을 삼종(三種) 혼합 민주정이라 이름 붙였다. 출발점은 공화주의 신화에 대한 비판이었다. 일부 공화주의자들은 고대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 — 집정관의 군주정적 요소, 원로원의 귀족정적 요소, 민회의 민주정적 요소가 결합된 — 이라 찬양한다. 그리스 역사가 폴뤼비오스 이래의 관찰이다. 곽노현의 반론은 단호했다.<br>"로마 공화정이 군주정·귀족정 요소를 포함했던 것은 당시 주변 국가들이 모두 군주정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타협한 결과입니다. 익숙해서 타협한 거죠. 그런데 후세 사람들이 이걸 금과옥조처럼 받들어요. 창피한 일입니다. 군주정 요소와 귀족정 요소는 지금도 남아 있다면 극복 대상이지, 어떻게 찬양 대상이 됩니까?"<br>그가 제안하는 새로운 혼합정은 이렇다.<br>1) 대의민주정을 근간으로 삼는다. 단, 선거제도는 STV 등 비례성 높은 방식으로 개혁하고, 제왕적 대통령제와 제왕적 대법원장제는 수술한다.2) 추첨 민주정을 결합한다. 국회의원·정당·국회의 권리 의무를 정하는 정치관계법은 이해관계자가 결정할 수 없으므로, '시민의회의 입법 권고 + 국민투표 확정'으로 돌파한다.3) 직접 민주정을 추가한다. 국민발안권·국민거부권·국민소환권을 헌법에 명문화한다.<br>이 세 가지를 결합한 것이 삼종 혼합 민주정이다. 곽노현은 이를 "보관(補冠)된 민주주의 대폭발"이라 표현했다. 왕관 대신 관(冠)을 씌운다는 뜻이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런 민주주의 대폭발이 일어날 때만, 앞서 말씀드린 1인 1표가 사라지는 기운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술관료주의와 인공지능 시대는 반드시 1인 1표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허물고야 말 것입니다."<br>그는 또한 국민발안·국민거부·국민소환이 결코 이상주의적 공상이 아니라는 점을 역사적 사실로 뒷받침했다. 스위스는 1880년대에 연방헌법 차원의 국민발안제를 도입했다. 미국은 1910년대 진보주의 시대(Progressive Era) 에 19개 주 이상이 이 삼권을 주헌법에 명문화했다. 캘리포니아주가 대표적이다. 우리가 미국보다, 스위스보다 130년 뒤처질 이유는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br>한국에도 이미 지방정치 차원에서는 이 제도들이 존재한다. 시·도지사부터 시·군·구의원까지 주민소환이 가능하고, 주민발안도 존재한다. 다만 현행 주민발안은 지방의회의 심사를 거치는 간접 발안이라, 의회에서 부결되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이 제도로 실제 입법을 해낸 사례가 있다. 곽노현이 서울시 교육감 시절 이끌었던 학생인권조례(55개 조문)가 주민발안으로 발의되어, 당시 민주당이 다수였던 서울시의회가 일점일획도 수정하지 않고 통과시킨 사례였다. 그보다 앞서 서울광장 조례 즉 서울시청앞 광장을 시민에게 돌려준 조례도 이 방식으로 제정되었다. 두 사례 모두 약 9만 명의 서명이 동원되었다.<br>"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시민이 하는 겁니다. 시민이 들고 일어날 날이 오면, 이 제도는 반드시 도입됩니다."<br>&nbsp;대리운전 기사의 권력을 함께 행사하기<br>강연이 끝나자 사회자는 자신이 메모한 것을 바탕으로 전체를 한 장의 비유로 압축했다. 대리운전 기사 비유였다. "우리는 국회의원이라는 기사에게 우리의 대리운전을 맡긴 주인이다. 그런데 지금 이 체제의 기괴함은 다음과 같다. 1)기사의 임금을 기사가 스스로 정한다. 2) 주인이 정해야 할 월급을 기사가 마음대로 정하고 있다. 2) 기사의 징계를 기사들끼리 서로 한다.술 마신 기사를 옆자리 기사가 봐준다. 3) 기사가 바른 길로 가지 않고 딴전 피워도 주인이 제재할 방법이 없다.감시와 책임추궁의 수단이 없다. 4)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것, 기사를 뽑는 방식(선거제도)과 면접·채점의 룰을 선임 기사들이 미리 정해 놓고 후임 기사들을 뽑는다.<br>"대리운전 권력은 주인이 되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강연의 핵심입니다."<br>좌장의 비유는 강연의 현학적인 개념들을 일거에 손에 잡히는 것으로 바꿔 놓았다. 그리고 그것은 공교롭게도 전태일기념관이라는 장소와 맞물렸다. 전태일이 1970년에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다면, 2026년의 이 교실에서는 "우리는 대리운전 기사를 부리는 주인이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둘 다 도구가 주인을 지배하는 구조에 대한 거부라는 점에서 같은 계보였다.<br>물론 곽노현의 처방에는 쟁점이 있다. 시민의회가 실제로 얼마나 대표성과 숙의성을 동시에 담보할 수 있을지, 추첨 민주주의가 전문적 판단이 필요한 영역에서 어떻게 작동할지, 국민발안이 포퓰리즘의 도구로 전락할 위험은 없는지, 이런 질문들은 그의 강연 한 번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또한 이재명 대통령에게 개혁의 선창자 역할을 기대하는 대목은, 그 자체로 "권력 정점에 기댄 개혁"이라는 오래된 딜레마를 다시 끌어안는 것이기도 하다. 이재명 대통령이 실제로 이 길을 갈지, 간다면 얼마나 갈지도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br>그러나 이런 의문들에도 불구하고, 2시간의 강연은 한국 정치 담론에 잊혀진 한 조각의 어휘를 되돌려 놓았다. '셀프 입법 특권'이라는 이 다섯 글자는, 왜 한국 유권자가 그토록 열심히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갈아치웠는데도 정치판이 바뀌지 않았는가에 대한 가장 간결한 답이었다. 그리고 그 답은, '답을 찾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답을 찾으려는 이들이 드물었다'는 것을 드러냈다. "학계의 게으름이 결국 시민 상식의 부족과 제도 상상력의 결핍으로 나타난다"는 그의 지적은, 청중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돌려진 것이었다.<br>강연이 글이 되는 동안에도, 서울 어느 국회 회의실에서는 여야 정개특위 위원들이 예비후보 등록 마감이 한참 지난 시점에서야 비로소 광역의회 비례대표 비율을 몇 퍼센트 올릴 것인가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곽노현이 그날 오후 던진 질문은 정확히 그 실랑이의 한복판을 향해 있었다. 게임의 룰은 선수가 정하는가, 주인이 정하는가.<br><br><br><br>]]></description>
			<author>이원영</author>
			<pubDate>Fri, 01 May 2026 12:33:00 +0900</pubDate>
		</item>
		<item>
			<title>성소의 뿌리는 가정과 삶의 태도에 있다</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16</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umVXHt79_2222.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70" style="clear:none;float:none;" /><br><br>부활 제4주일 (2026.04.26) 성소주일&nbsp;: 사도 2,14-41; 1베드 2,20-25; 요한 10,1-10&nbsp;<br><br>1. 전례의 취지<br>부활 제4주일인 오늘은 성소(聖召) 주일입니다. 우리에게 들려오는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성소라고 하는데, 성소 주일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함께 이 부르심에 대해 드려야 할 우리의 응답에 대해 생각해 보는 특별한 날입니다.&nbsp;<br>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되던 1964년에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매년 부활 제4주일을 성소주일로 정했습니다. 사실 성소는 믿음을 받아들인 모든 신자들에게 열려 있는 은총이지만, 특별히 하느님 나라와 교회 그리고 복음화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봉헌할 일꾼들인 사제, 수도자, 선교사의 성소 증진을 위해 기도하고 관심을 일깨우는 날이 오늘, 성소 주일입니다.<br>하느님 나라의 일꾼들, 즉 사제와 수도자와 선교사를 부르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수확할 일꾼’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린이, 청소년, 젊은이들이 장차 사제, 수도자, 선교사로 받을 부르심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자리와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 자리가 혼인 성소를 통해 성화시켜야 할 가정이요,&nbsp; 그 기회가 직업 성소를 통해 세상에 나가서 봉사하는 신자들의 모범입니다.&nbsp;<br>성화된 가정, 적어도 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기도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는 자녀라야 일꾼을 바라는 꿈을 꿀 수 있고 그런 꿈을 지닌 자녀라야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 듣습니다. 기도하는 가정에서 부모와 함께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 어린이들이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선교사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nbsp;<br>또한 세상에 봉사하는 직업을 통해 신앙을 증거하는 부모를 보면서 자란 자녀라야 일꾼이 되기를 바라는 꿈을 꿀 수 있고 그런 꿈을 간직한 자녀라야 장성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죄와 탐욕에 물들지 않고 세상에 대한 봉사의 직무로 직업을 성화시키는 부모의 등을 보며 자란 청소년들이 성소의 싹을 키워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혼인 성소와 직업 성소가 사제 성소는 물론 수도자 성소와 선교사 성소의 못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br>2. 말씀의 흐름<br>전례의 취지를 말씀드린 데 이어 오늘 미사의 복음과 독서에 들려온 하느님의 말씀도 살펴보겠습니다. 복음은 요한 복음 10장에 나오는 착한 목자의 비유 이야기이고, 제1독서는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오순절에 유다인 군중에게 행한 설교이며, 제2독서는 베드로 사도가 교우들에게 써 보낸 편지입니다. 부활 시기에는 요한 복음과 사도행전을 집중적으로 봉독하는데, 그 이유는 특별하고도 중요합니다. 공생활 동안에는 그 신원이 가려져 있었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그분의 참모습이 드러나지 않았었습니다. 이것이 마르코, 마태오, 루카 등 공관복음사가들이 기록한 복음서의 메시지입니다.&nbsp;<br>그런데 요한 복음사가는 달랐습니다. 아예 복음서의 처음부터 예수님의 참모습을 전제하고 공생활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한처음부터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 계시던 존재로 소개한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일곱 가지 표징 사건으로 복음서를 구성했습니다. 요한 복음서에 증언되신 예수님은 십자가로 부활하시는 분이기 이전에 이미 부활한 경지에서 존재하고 활동하시는 분으로서 등장하고 또 활약하셨습니다.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던 순간에 남기신 말씀이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인 것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일곱 가지의 표징으로써 당신의 신성을 다 드러내셨다는 뜻입니다.<br>이렇게 부활 시기에 선포되는 부활의 복음은 독서로 배치된 사도행전에서 빛을 발합니다.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발현하시는 체험을 세 번이나 하게 된 제자들이 사도로 변화되어 교회를 세우는 장엄한 과정을 증언하는 ‘교회의 복음서’입니다. 그들은 믿음이 굼뜨거나 허약한 처지를 벗어나서, 담대한 믿음으로 용감하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목숨을 걸고 증언하고 다녔습니다. 발현하시는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그토록 강렬했던 것입니다.&nbsp;<br>그랬더니 그들과 성령으로 함께 하시던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과 입과 손을 통해서 기적도 일으킬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앉은뱅이 불구자가 일어나 걷고 뛸 수 있었던 기적이나 이미 죽은 사람을 일으킬 수 있었던 기적도 사실은 사도로 변화된 그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설교를 했고 기적을 일으켰습니다.<br>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초대교회 신자들도 변화되었습니다. 함께 모여서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성찬을 나누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었습니다. 신자들의 거룩한 변화를 지켜본 사도들도 이것이 예수님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인 줄을 깨닫고, 용기 백배하여 사방에 나가 ‘예수 부활’을 선포하고 증언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주변의 유다인들이 경탄하며 믿음을 청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신자들의 수효가 날로 늘어날 수 있었습니다. 로마제국과 유다인들의 박해 속에서도 교회는 날로 커 갔습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사도들로 변화되어간 과정만이 아니라 변화된 사도들을 통해서 초대교회의 일반 신자들까지도 변화되어간 과정까지 증언하는 교회의 복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nbsp;<br>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선교사 성소를 위해서도 신자들의 가정이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할 당위성과 필요성이 여기서 비롯합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하고 밝히신 뜻입니다. 제자들도 이 ‘양 들의 문’을 통하여 들어갔기에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고, 변화된 사도들을 통해서 신자들도 이 ‘양 들의 문’을 통해 들어갔기에 공동 생활과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양들의 문’이라고 밝히신 예수님의 계시에 따라서 우리네 가정과 직업이 그분 삶을 통해서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는 일, 이것이 사제 성소, 수도자 성소, 선교사 성소를 계발하고 키우는 일의 시작입니다.<br>3. 성령의 이끄심<br>부활 시기는 성령 강림 대축일로 마칩니다. 부활하신 경지에서 가르치고 증언하시며 일곱 가지 표징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요한 복음서를 통해 들은 교회가, 사도행전을 통해서는 제자들이 사도들로 변화되고 또 변화된 사도들에 의해서 신자들이 공동 생활과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나설 수 있을 만큼 변화될 수 있었던 기운은 성령의 이끄심 덕분이었습니다. 이 기간이 전례상으로 50일 동안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사십 주야 동안 받으신 후,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당신 사명을 선포하실 때에 성령의 이끄심을 받으신 데에서 기원합니다.&nbsp;<br>“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nbsp;<br>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이끄시는 성령에 따라서 부활의 경지에 오르신 것이었으며, 당신의 제자들도 같은 경로를 따라서 사도들이 될 수 있도록 이끄셨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제자의 처지에서 변화된 사도들이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기적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도록 이끄셨고, 또 이를 목격한 초대교회의 신자들 역시 말씀을 듣고 성찬을 나누는 공동 생활과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는 복음 선포의 길로 이끄셨던 것입니다.<br>사제와 수도자, 선교사가 성소를 받고 예수님을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응답을 할 수 있기 위해서도 성령의 이끄심이 필요합니다. 기도로 성화된 가정에서 그리고 사회에 봉사하는 직업을 통해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게 된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성령의 이끄심에 끌리게 됩니다. 기도에 맛들이고 봉사의 보람을 알게 되면, 사제나 수도자 그리고 선교사로서 살아가고 싶은 거룩한 열망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길에 첫 발을 내딛는 이들이나, 일생을 바쳐 성소에 응답한 이들의 한결같은 비결은 오직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이 하느님께서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 성소의 길이 아무리 험난해도 성령의 이끄심과 도우심 덕분에 기도하면서 힘을 받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nbsp;<br>성령께서 이끄시고 도우시는 값진 열매는 가난하고 아픈 이들에 대한 사랑인데, 이것이야말로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보증입니다. 이는 “나는 양들의 문”이라고 계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처럼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라고 당부하시고는, 제자들과 모든 믿는 이들에게 밝히신 최후의 심판의 척도를 밝히신 데에서도 잘 드러납니다.(마태 25,40) 그 척도가 바로,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베푼 자비와 사랑입니다. 그래야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는 예수님 말씀이 실현됩니다.<br>오늘날 성소자가 감소하는 바람에 성소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성 소 감소에 대한 대책을 세우려면 성소 위기에 대한 진단부터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정작 성소의 위기는 사제직과 수도생활 그리고 선교사 지망자가 줄어드는 결과적 현상이 아니라, 기존의 성소자들인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선교사들이 이 열매와 척도를 뚜렷하게 증거하지 못하는 원인적 현상에서부터 옵니다. 성소의 위기를 가정마다 한 자녀만 낳는 풍조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예수님도 나자렛 성가정에서는 하나 뿐인 외아들이셨습니다. 또 자녀들이 많은 신자 가정이라고 해서 성소자가 꼭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nbsp;<br>부모의 혼인 성소와 직업 성소를 통해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이 ‘양들의 문’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하신 예수님의 당부를 구체적으로 느끼게 되는 계기는 바로 이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고 복음을 전하는 복음 선포입니다. 죄악에 물든 세상의 현실에 실망하게 되는 체험도 이 계기와 더불어 일어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에 허무함과 회의감을 느끼게 되는 체험도 마찬가지입니다.&nbsp;<br>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예수님의 매력에 빠지며 교회에 현존하시는 성령의 섭리로 서서히 끌려가는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고요히 마음을 들여다 보며 기도에 맛들여가는 때도 이때요, 경건하게 거행되는 미사에서 성사를 통한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게 되는 때도 이때입니다. 그야말로 오늘 미사의 화답송 후렴에서 기도한 바와 같이,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1) 하는 처지가 되는 것이지요. 오늘 신학교와 수도원, 선교회 등에서 진행되는 성소 주일 행사는 바로 이때를 맞이하고 있는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을 맞이하는 성령의 이끄심이 됩니다.<br>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베드로가 3천 명도 넘는 유다인 군중 앞에서 행한 설교가 성소 주일 행사에 참여하는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에게도 성소 주일 행사의 미사에서 선포될 것입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사도 2,38.40) 성소를 느끼게 된 이들이 하느님께로부터 용서받아야 할 죄란 바로 사랑하지 못한 죄입니다. 사랑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한 죄입니다. 사랑을 받은 만큼 베풀지 못한 죄입니다. 십계명을 어기는 정도를 넘어서 이 근본적인 회개를 해야 할 깨달음을 느끼게 해 주는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이끄심입니다.<br>교우 여러분! 성소의 바탕은 부모의 혼인 성소와 직업 성소에서 마련되고, 그 계기는 기존 성소자들이 증거하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베푸는 사랑에서 마련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br>&nbsp;<br><br>]]></description>
			<author>이기우</author>
			<pubDate>Sun, 26 Apr 2026 06:10:04 +0900</pubDate>
		</item>
		<item>
			<title>[가스펠:툰] &quot;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quot;</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15</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TX8xZB1v_042626_EBB680ED999C_ECA09C4ECA3BCEC9DBC-EB8F85EC849C.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68"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yfEw0sFa_5BEABEB8EBAFB8EAB8B05D042626_EBB680ED999C_ECA09C4ECA3BCEC9DBC-EBB3B5EC9D8C.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69" style="clear:none;float:none;" /><br><br>2026년 4월 26일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br>제1독서 (사도행전 2,14ㄱ.36-41)<br>오순절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br>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br>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br>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고 타일렀다.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br>제2독서 (베드로 1서 2,20ㄴ-25)<br>사랑하는 여러분,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nbsp;<br>“그는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그의 입에는 아무런 거짓도 없었다.”&nbsp;<br>그분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nbsp;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돌아왔습니다.<br>복음 (요한 10,1-10)<br>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nbsp;<br>“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br>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br>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br>“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br><br><br>]]></description>
			<author>김웅배</author>
			<pubDate>Fri, 24 Apr 2026 11:14:19 +0900</pubDate>
		</item>
		<item>
			<title>종교의 위기, 신자 감소가 아니라 ‘의미 없음’이 문제</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14</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lxuyEU8R_ECA285EAB590EC9D98_EC82ACED9A8CECA081_EC9881ED96A5EBA0A5.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65" style="clear:none;float:none;" /><br><br>한국 사회에서 종교를 둘러싼 변화는 이제 단순한 신자 수의 증감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문제의 핵심은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느냐가 아니라, 종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삶 속에서 어떤 위치에 두고 있는가에 있다.<br>이 발표한 ‘한국인의 종교 1983-2025’ 조사에 따르면, 지난 40여 년간 종교의 사회적 위상은 전반적으로 약화되어 왔다. 그러나 이번 조사에서 드러난 변화는 단순한 감소가 아니라, 종교와 사회의 관계 자체가 재편되고 있다는 점이다.<br>확장되지 않는 종교, 멈춰 선 영향력<br>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인식은 뚜렷하게 변했다.<br>1980년대 약 70%가 종교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다”고 보았지만, 2025년에는 이 응답이 24%로 줄었다. 반면 “과거와 비슷하다”는 응답은 53%로 절반을 넘었고, “감소하고 있다”는 응답도 23%에 이르렀다.<br>종교는 더 이상 사회를 이끄는 중심 동력이 아니라, 확장도 축소도 아닌 ‘정체된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에는 종교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으로 이해됐다면, 지금은 그 영향력이 점점 일상과 분리된 채 머무르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br>특히 주목할 점은 종교인(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비종교인의 인식 격차다. <br>종교인은 여전히 종교의 사회적 기여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개신교인 80%, 천주교인 70%, 불교인 61%가 종교가 사회에 도움을 준다고 응답했다. 이들에게 종교는 도덕적 기준을 제공하고, 공동체를 유지하며,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의미 있는 체계로 작동하고 있다.<br>반면, 비종교인의 시선은 전혀 다르다. 비종교인의 68%는 종교가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는 단순한 반감이 아니라, 종교를 사회적 갈등을 낳거나 시대와 어긋난 제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반영된 결과다.<br>믿음은 약해졌지만 ‘초월에 대한 감각’은 남아 있다<br>초자연적 개념에 대한 인식은 또 다른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br>‘기적이 존재한다’는 응답은 57%로 과반을 유지했다. 그러나 천국·극락(44%), 사후 영혼(43%), 절대자·신(41%) 등 전통적인 종교 교리와 연결된 개념들은 절반 이하로 나타났다.<br>이는 사람들이 종교의 교리를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월적 세계나 설명할 수 없는 가능성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 상태임을 보여준다.<br>특히 ‘기적’에 대한 높은 응답은, 그것이 종교적 신념이라기보다 '설명할 수 없지만 일어날 수 있는 특별한 사건'이라는 일상적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가능성도 크다. 결국 이 같은 특징은 교리는 약화되었지만, 초월에 대한 감각은 남아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br><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PxeObL7K_EBAA85ECA088ECB0A8EBA180EBB0A9EC8B9D.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66" style="clear:none;float:none;" /><br>명절 차례 문화의 변화 역시 같은 흐름을 보여준다.<br>유교식 차례를 지낸다는 응답은 53%로 줄었고,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는 응답은 35%까지 증가했다. 특히,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는 응답은 1992~2014년 10% 내외 였다가 팬데믹 시기인 2021년에는 32%로 급증했는데 이후에도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지 않은것이다. <br>차례는 특정 종교라기보다 가족 공동체가 유지해온 생활 속 의례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례가 빠르게 약화되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더 이상 특정 신념을 따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적 실천 자체를 지속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br>종교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br>이번 조사 결과 종교는 급격히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서 조용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멀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에서는 영향력이 정체되고, 개인에게는 중요성이 낮아지며, 비종교인에게는 부정적이거나 무관심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br>특히 중요한 변화는, 사람들이 종교를 비판하거나 거부하기보다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종교가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우선순위에서 제외된 존재가 되어가고 있음을 시사한다.<br>▶ 이전기사 보러가기<br><br><br>]]></description>
			<author>임신비</author>
			<pubDate>Tue, 21 Apr 2026 21:04:43 +0900</pubDate>
		</item>
		<item>
			<title>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닿았다</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12</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3695266591_OyRFsrmZ_2222.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63"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사진제공 = 이기우) </acronym><br><br>부활 제2주간 토요일 (2024.04.13)&nbsp;: 사도 6,1-7; 요한 6,16-21<br>초대교회에서 사도들과 신자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유다 이스카리옷의 자리를 채울 사도를 선출하는 일이었습니다. 마티아가 뽑힌 이 보궐선거 다음에 사도들과 신자들이 두 번째로 한 선거가 부제 직무를 신설하고 스테파노를 비롯한 일곱 명의 부제를 선출하고 그들에게 사도들이 안수한 일이었습니다.&nbsp;<br>오늘날 부제 직무는 과도기 부제직이든 종신 부제직이든 사제직을 준비하거나 돕는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에서는 달랐습니다. 모두 백스무 명이나 되는 사도 및 신자들이 장엄하게 성령을 받고 뜨거운 은총으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켰고, 이는 예수님께서 생전에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신 기적들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nbsp;<br>아파서 고통받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치유의 기적을, 소외되고 차별받아 마귀들린 가난한 이들에게는 구마의 기적을 일으켰던 예수님의 공생활이 사도들에 의해서 고스란히 재현되기에 이르자, 이를 지켜본 신자들은 뜨거운 은총으로 감화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당부하신 대로, 함께 모여 말씀을 듣고 성찬을 나누며 서로 서로 발을 씻겨주는 심정으로 가진 것을 나누고 특히 궁핍한 이들을 돌보았습니다.&nbsp;<br>그랬는데도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내부의 불평등이 생겨났습니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새로 신자 공동체에 합류하면서 주류였던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게 닥친 첫 시련이요 갈등이었습니다.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 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2-4)<br>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사도들은 기도와 전례 거행 그리고 복음 선포 등 순수 종교적인 직무에 전념하겠다는 것이었고, 신설된 부제 직무는 식탁 봉사 즉 공동체 내부의 복지와 경영 등 경제적인 직무를 맡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초대교회 내 약자들에 대한 복지적 배려와 교회 외부의 가난한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공동체 경영의 직무가 생겨난 것입니다.&nbsp;<br>그런데 스테파노가 교회의 첫 순교자로서 치명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부제 스테파노는 단순히 내부 복지와 외부 나눔이라는 경영 직무만 한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순수 종교적인 직무에 전념하겠다던 사도들은 자신들을 극도로 경계하던(사도 5,33) 유다교 지도자들이 보기에 새로운 신흥 유다교 종파로 보일 정도로 신중하고 조신하게 처신했고(사도 3,1) 박해 받을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 갈등을 일으킬 만한 충돌 요인을 죄다 피해갔습니다.&nbsp;<br>그러자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습니다.(사도 6,8) 이에 반대하는 유다인들, 이른바 해방민들과 케레네인들과 알렉산드리아인들과 킬리기아와 아시아 출신들의 회당에 속한 사람들이 나서서 스테파노와 치열한 논쟁을 벌일 지경이 되었습니다.(사도 6,9) 그러나 스테파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고(사도 6,10), 급기야 사람들을 선동하여 최고 의회에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다는 혐의로 고발해 버렸습니다.(사도 6,12-14)&nbsp;<br>사도행전 7장은 이 최고 의회 법정에서 스테파노 부제가 행한 긴 연설을 장중하게 들려줍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즉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설교였습니다. 이러한 태도를 깊이 들여다 보면, 베드로를 비롯한 기성 사도들과는 물론이고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셨던 예수님보다도 훨씬 더 용감한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스테파노의 결기어린 모습은 최고 의회 의원들을 포함한 유다인들의 적대감을 불러 일으켜 재판이나 선고도 없이 돌로 쳐서 죽이는 사태로 번지게 되었습니다.&nbsp;<br>애초에 초대교회 내부의 더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라고 신설된 부제 직무에 선출되었지만, 이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사도단의 소극적인 처신으로 말미암아 기성 유다교단과의 마찰이나 충돌도 마다하지 않았던 스테파노는 교회 역사상 첫 순교자가 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사도 7,60) 부활 시기 동안 요한 복음과 특히 사도행전의 선포를 하는 교회의 전례적 취지를 길잡이로 삼아온 맥락에서 보자면, 스테파노가 맡은 부제 직무는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위한 특별한 책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명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메사아 사명의 최우선적 사명으로 삼으셨던 바였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세족례나 성찬례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한 배려였습니다.&nbsp;<br>오늘 복음의 상황은 빵의 기적으로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께서 억지로라도 당신을 임금으로 모시려고 쫓아오던 군중을 피해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가 겪으신 일입니다. 그 동안 제자들은 따로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 한가운데로 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습니다. 이 바람은 북쪽 헤르몬 산에서 불어 내려오는 바람과 서쪽 지중해에서 불어 올라오는 바람이 마주치는 맞바람이었습니다(마르 6,45-52). 새벽이 되자 더욱 거세어진 바람에 밀려 배가 뒤집어질 지경이 되었고 높은 파도로 인해 넘쳐 들어온 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배는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마태 14,22-33).&nbsp;<br>예수님께서는 며칠째 군중을 가르치시느라고 시달리셨기 때문에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커다란 기적까지 일으키시고 난 후에는 이들로부터 벗어나서 홀로 쉬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군중도 제자들도 다 돌려보내시고 헤르몬 산에 올라 하느님께 기도하시다가 문득 제자들이 처한 위험이 감지되셨나 봅니다. 하느님의 영과 소통하는 기도를 하다 보면 흔히 겪게 될 영적인 감지현상을 보여 주신 셈입니다. 이때 감지된 제자들이 겪고 있던 그 위험은 매우 다급하게 느껴지셨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당신이 타고 가실 배도 없었던 형편이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구하러 서둘러 가느라고 물 위를 걸어가서 구해 주셨습니다.<br>&nbsp;생전 처음 보는 이 광경에 제자들은 놀라서 유령인 줄 착각하기도 했지만(마태14,26), 예수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하고 태연히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분이 배에 오르시자 그렇게 거세게 불던 바람이 갑자기 멈추었습니다(마르 6,51). 기적 같은 일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을 때는 맞바람 때문에 노를 젓기가 그렇게 힘들더니(마르 6,48), 그분이 함께 계시니까 노를 젓지 않았는데도, 배가 어느새 제자들이 가려던 곳에 슬그머니 가 닿았던 것입니다(요한 6,21).&nbsp;<br>거센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지는 기적보다도 더 중요한 이 기적은, 이 자연현상으로 인해 제자들의 마음도 가라앉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려던 곳에 어느새 가 닿을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빵이 늘어난 일이나 물 위를 걸은 기적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가려진 이 기적 현상이 오늘 미사의 복음에서 들려온 하느님의 메시지이고, 이는 독서에서 부제 직무를 신설한 사도들의 행위와 맞물려서 교회 직무에 관한 매우 중요한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그것은 사제든 부제든 교회의 직무는 예수님의 현존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는다는 점이고, 그래서 성령이 충만해야 한다는 점입니다.&nbsp;<br>어제의 독서 말씀에서 들으셨다시피, 성령을 받은 후 사도들은 대외적으로는 박해의 상황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대사제, 수석 사제들과 경비대장 등을 앞세운 유다 최고 의회로부터 툭하면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고, 매질도 당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서는 입도 벙긋 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요구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사도 4,20)고 버티기도 하고, “사람보다 하느님께 순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사도 5,29) 하고 항변하기도 했습니다.&nbsp;<br>그러자 이에 격분한 대사제로부터 공연히 매질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때 사도들은 억울해 하기는커녕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습니다(사도 5,41). 그런 와중에도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군중 앞에서 태생 불구자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행하기도 했고(사도 3,8.12), 이 기적을 목격한 군중과 소문을 들은 이들을 합해 무려 오천 명 이상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또 다른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며(사도 4,4), 몹시 분주하게 복음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nbsp;<br>서두에 언급했다시피,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부제 직무를 신설한&nbsp; 이 조치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면제하게 된 결정과 더불어 사도들이 예수님 없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공동으로 합의한 첫 결정이었습니다. 이것이 훗날 교회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소집했던 역대 공의회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내린 이 결정은 또한,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으로 구분될 수 있는 ‘예수 추종의 직무’에 있어서 사도들이 수행하던 사제직으로부터 예언자직과 왕직을 분리해 내려던 조치였습니다. 이리하여 부제들 중의 한 명으로 선출된 스테파노의 예로 미루어 보면, 당시 부제 직무는 말씀도 선포하고 식량 배급도 담당한 것으로 보아 그렇습니다(사도 6,8-15). 예언자직과 왕직까지도 수행했던 스테파노의 부제 직무를 보면,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위해서라면 기성 유다교단의 종교적 권위와의 긴장이나 충돌도 무서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수행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nbsp;<br>교우 여러분!<br>말씀을 선포하는 직무는 물론 교회 재정을 담당하는 직무에 있어서 간직해야 하는 자세는 예수 추종과 성령 순종입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 역사상 천8백년 만에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 명제를 회복시킨 레오 13세와 비오 11세의 회칙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직무는 주교와 신부 등 온 성직자와 온 신자들이 더불어 힘을 합쳐서 해내야 할 메시아 백성의 사명입니다. 과도기 부제직이나 종신 부제직을 넘어 주교와 사제 등 오늘날 교회의 모든 직무 담당자들도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셨던 이러한 은총을 청해 받는다면 우리가 탄 교회라는 배는 어느새 가려던 목적지에 가 닿을 것입니다. ‘추종’과 ‘순종’으로 예수님의 영에 초점을 맞추는 것, 이야말로 교회와 복음화를 위해 무척 소중하고 바람직한 직무영성입니다.<br>&nbsp;<br><br>]]></description>
			<author>이기우</author>
			<pubDate>Fri, 17 Apr 2026 15:20:03 +0900</pubDate>
		</item>
		<item>
			<title>수사·기소 분리 검찰개혁이 놓친 문제와 해법</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13</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3695266591_EftMUs4q_chhh_20260104_13.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64"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사진 = MBC)</acronym><br><br>검찰개혁의 상징이었던 검찰청법 폐지법안과 함께 공소청 신설법안과 중대범죄수사처 신설법안이 드디어 지난 3월 25일 국회를 통과했다. 대통령에게만 충성하며 국가와 사회에 군림해온 무소불위 검찰청이 공소청과 중수처로 완전히 쪼개져서 곧 박물관으로 사라질 것이 국민의 이름으로 확정된 셈이다. 수사와 기소가 조직적으로 분리된 형사사법의 새 길이 날지는 막판까지도 안개 속이었다. 정부안 성안 과정과 당정청 협의 과정이 모두 순탄치 않고 파열음이 끊이지 않았다.&nbsp;<br>기대를 모았던 두 차례의 정부안은 개탄스럽게도 누가 봐도 검찰기득권 수호법안이었다. 촛불시민들이 경악과 분노로 부글부글 끓었고 그나마 국회법사위 소속 민주당 의원들이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줬다. 드디어 지난 3월 16일 밤 이재명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민심을 수용했다. 대통령의 결단으로 특사경 수사지휘권 박탈을 포함한 ‘검수완박’이 관철되고 검찰개혁이 비로소 모양을 갖췄다. 그러나 검찰개혁은 수사-기소 분리로 끝날 일이 아니다.<br>한국 사회에서 검찰개혁은 지난 수년간 가장 뜨거운 정치적 화두였으나 그 담론과 실천의 폭은 갈수록 왜소해졌다. 본래 검찰개혁의 본령은 견제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을 해체, 재편해서 형사사법 절차에서 국민의 인권을 수호하는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게 만드는 데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검찰 제도의 법적 틀 전반을 손보는 것이 검찰개혁이 해야 할 일이다. 애당초 검찰개혁 논의는 정치검찰의 통제와 해체에 초점을 맞춰 시작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이것이 ‘수사·기소 분리’ 혹은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이라는 프레임으로 옮겨갔다. 정치검찰 해체를 포함한 핵심 개혁 의제들이 슬그머니 시야와 논의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검찰개혁 담론의 빈곤화와 파편화는 정치권의 편의주의와 검찰의 생존전략, 학계의 직무 유기와 언론의 무관심이 맞물린 결과로 개혁의 실천적 한계를 필연적으로 설정하고 말았다.<br>검찰개혁 담론이 놓친 첫 번째 본질적 의제는 대통령의 검사인사권 독점 문제다. 대한민국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이 늘 도마 위에 오르는 근본 원인은 대통령이 2300여 명에 달하는 모든 검사의 임용과 승진, 보직 경로를 100% 장악하고 있는 비정상적 인사구조에 있다. 실은 이것이 제왕적 대통령을 만들어 내는 핵심 권한의 하나다. 민정수석실의 관여를 통해서 대통령 1인의 의중이 검찰 조직 전체의 목줄을 쥐는 결과를 낳으며, 검사들이 정권의 입맛에 맞게 움직이는 ‘해바라기성 줄 세우기’ 문화를 필연적으로 초래한다. 인사권이라는 뿌리가 대통령에게 종속되어 있는 한 수사권을 박탈하고 기소권만 남겨두더라도 기소권의 정치적 오남용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통령의 검사인사권 문제는 야당일 때는 줄기차게 외치다가 여당이 되면 쏙 들어가는 대표적인 내로남불의 하나다.<br>실은 대통령이 검찰총장과 검사장급만 인사권으로 장악해도 나머지 검사들은 ‘검사동일체 원칙’이라는 위계 구조를 통해 일사불란하게 지휘할 수 있다. 검사의 독립관청성과 양립하기 어려운 강한 검사동일체 원칙은 검사에게 양심적, 전문적 판단에 의한 직무면제요구권이나 법정 내 자유 발언권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더 완화하여야 맞다. 그러나 견제받지 않는 대통령 인사권이 존재하는 한 그 실효성은 낮을 것이다. 독일이 연방검찰총장 임명 시 주정부 대표로 구성된 연방참의원의 동의를 구하고, 헝가리가 검찰총장 임명에 의회의 2/3 이상 동의, 즉 야당의 동의를 구하게 한 입법례와,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독립적 헌법기관인 ‘최고사법평의회’에 검사인사권을 맡기고 행정부의 개입을 차단하는 입법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br>두 번째로 외면당한 과제는 ‘법무부의 검찰화’와 그로 인한 문민 통제의 상실이다. 본래 법무부는 검찰을 감독하고 견제하는 문민 통제의 본산이어야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법무부 차관과 검찰국장 등 요직을 현직 검사들이 독점해 왔다. 이는 감독기관을 피감독기관의 구성원이 장악하는 기형적 구조이다. 결과적으로 법무부가 검찰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검찰이 법무부를 통해 조직 이익을 관철하는 ‘역전 현상’이 초래됐다. 법무부의 인적 구성을 변호사나 법학교수 등 검사를 대체할 법전문가들로 탈검찰화해서 법무부를 실질적인 검찰 통제기관으로 세우는 작업 없이는 검찰은 사실상 대통령의 직할 부대로 남을 뿐이다.<br>세 번째는 검찰의 기소 독점권을 견제할 시민적 통제 장치인 ‘기소배심제’의 부재다. 수사권이 분리되어도 검찰이 기소 여부와 기소 혐의, 기소 시점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한, 검찰은 여전히 보완수사요구권을 통해 특정 표적을 향한 ‘먼지털이식’ 압박을 가하거나 정권 실세를 보호하는 권한을 여전히 유지한다. 현재의 수사기소심의위원회처럼 검찰총장이 위촉한 전문가들이 권고 의견만 내는 방식은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무죄 주장 사건, 표현의 자유 침해 사건, 대기업의 ESG(환경, 인권, 지배구조) 책임 위반사건, 정무직과 판검사의 독직비리 사건 등 사회적 파급력이 큰 사안에 대해서는 시민들이 직접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기소배심제를 필수적으로 도입해야 한다.<br>네 번째로, 개혁 담론에서 유독 소외되었던 지점은 행정부 소속 특별사법경찰(특사경)에 대한 수사지휘권 문제다. 특사경은 민생현장과 기업활동에 관한 각종 규제 입법과 기업 형법을 다루는 전문분야 경찰을 의미한다. 전국적으로 2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지난 2021년의 수사권조정 국면에서도, 이번 검찰개혁 국면에서도 검찰의 특사경 수사지휘권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세, 금융, 노동, 환경, 해양, 식품, 약품, 건축 등 전문 분야를 다루는 특사경은 검찰에게 권력과 네트워크, 이권을 보장하는 황금거위였다. 이번에 이재명 대통령의 막판 지시로 검찰의 수사지휘권이 삭제된 것은 전관 비리를 포함한 검찰 비리의 거대한 황금어장을 걷어냈다는 점에서 아주 큰 성과다. 다만 특사경이 실질적 수사 주체가 되고 검찰은 법률검토와 자문에 집중하는 정교한 협력 시스템 설계와 특사경의 전문 수사역량 강화 방안 마련이라는 과업이 남아있다.&nbsp;<br>다섯 번째는 헌법에 박힌 ‘검사의 독점적 영장청구권’ 문제다. 1961년 군사쿠데타 이후에 삽입된 이 규정은 사전 영장실질심사제도가 없던 시절에 피의자의 인권 보호를 위해 검찰의 경찰수사 지휘권을 전제로 만들어진 헌법적 대못이다. 이미 사전 영장실질심사제와 사후 구속적부심제가 확립된 지금의 사법체계에서, 더욱이 검찰이 수사(지휘)권을 내려놓을 것이 확정된 상황에서, 수사기관이 영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사항에 대해 판사가 최종 결정하기 전에 검사의 검토까지 이중 통제를 받게 해야 할 합리적 이유가 있을지 의문이다. 개헌을 통해 영장청구의 주체를 법률로 정하도록 유연화함으로써 검사는 본연의 기소 및 공소 유지 기능에 집중하게 해야 한다.<br>여섯 번째 과제는 검찰 권력의 사유화를 막기 위한 전관 비리의 근절이다. 전관 비리의 몸통은 판사보다 검사다. 지금까지 수사와 기소, 형 집행의 모든 단계에서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특히 퇴직 검사들이 재직 시 쌓은 공적 네트워크를 이용해 수사와 기소 축소 은폐, 형벌 감경과 가석방 편의 등으로 막대한 수임료를 챙기는 행태는 사법 정의를 뿌리째 뒤흔드는 범죄행위다. 전관 비리 근절이라는 공익은 일부 퇴직 검사의 직업의 자유보다 훨씬 중대하다. 누가 보더라도 공직 경험의 사유화와 영리화가 불가능하다고 느낄 만큼, 상당 기간의 변호사 개업 금지나 관련 기업 취업 금지 등 현행보다 훨씬 강력한 수준의 규율이 도입되어야 한다. 잘못된 동료의식의 발로와 퇴직보험 용도로 법과 정의를 비틀고 국민 불신과 조롱을 자초하는 전관 비리라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유산인지 현직 판검사들과 온 국민이 총궐기할 사안이 아닌가 싶다.<br>마지막으로 이러한 본질적 개혁 의제들이 그동안 왜 정치권과 언론, 학계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는지를 짚어봐야 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정치검찰 해체가 검찰개혁의 첫 번째 목표였는데도 정치검찰을 낳는 대통령의 인사 전권 문제는 논의 밖이었다. 검찰총장 추진위 구성의 중립화 방안이나 검사장 주민직선제 등 개혁 입법을 강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당은 대통령 권한이라 입을 다물었고, 야당은 지리멸렬해서 생각 자체가 없었다. 권력에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해야 할 책임을 지닌 언론과 복잡다단한 진실을 해명해야 할 책임을 지닌 관련학계도 제 역할을 방기했다. 반면 ‘수사권 박탈’이라는 선명한 구호는 시민 설득과 지지층 결집에 유리해서 정치 가성비가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은 수사-기소 분리의 문제점을 과장하고 수사-기소 분리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반발하기만 하면 됐다. 외부의 이목을 자연스럽게 그리로 유도하며 인사제도 논의나 시민 통제 논의, 특사경 논의를 성공적으로 차단할 수 있었다.<br>위에서 보았듯이 검찰은 사법부에 맞춰 대검, 고검, 지검으로 나눈 무시무시한 검찰청 조직을 가진 것으로 성에 안 차 3만 5000 수사경찰은 물론이고 2만여 특별사법경찰(특사경)을 종 부리듯 부렸으며 법무부를 장악했다. 특히 특사경 수사지휘권을 통해 특사경을 운용 중인 대부분 행정조직(국세청, 노동청, 환경청, 식약청, 산림청, 해양청 등 외청, 시청, 도청 등 각 지자체)에 막강한 직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어떤 집단도 갖지 못한 탄탄한 인적 네트워크를 온갖 규제당국 및 피규제 기업들과 구축했다. 이것이 검찰의 권한 남용 공간이자 뇌물과 향응 등 독직비리 창구로 작동했다.&nbsp;<br>검찰은 검사동일체의 강고한 위계질서 아래 무제한적 수사(지휘)권과 헌법상의 영장청구권, 독점적이고 편의적인 기소권한을 행사하며 국가 내부의 국가로서 거대한 특권 조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검찰은 법무부의 외청을 훌쩍 뛰어넘어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3부에 비견할 만한 ‘검찰부’의 위상과 권력을 향유했다. 오직 인사권자인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척하며, 국가권력의 꼭대기에서 정치권, 관계, 재계, 언론계 등 국가와 사회의 중요부문 위에 군림해 온 것이다.<br>이렇게 볼 때 지금의 수사-기소 분리로 검찰개혁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몽과 환상에 가깝다. 간신히 가장 중요한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검찰개혁의 목표는 검찰의 견제 없는 집중 권력을 해체하여 민주적 통제시스템 속으로 되돌려놓는 것이어야 한다. 법무부, 의회, 법원, 시민, 언론이 각기 다른 층위에서 검찰권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촘촘한 그물망을 완성할 때, 비로소 검찰개혁은 마무리된다. 이제는 검찰 수사권 논란에서 벗어나 우리가 놓쳤던 좀 더 본질적인 개혁 과제들을 공론화의 장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래야만 수사-기소 분리 개혁이 뿌리내리고 기대효과를 낼 수 있다. 그래야 세계에 유례없이 견제 없는 집중 권력을 누렸던 한국의 정치검찰을 민주사회의 인권검찰로 정상화하고, 진정한 법치주의의 기틀을 세울 수 있다.<br>윤석열의 망나니 검찰정권을 3년이나 경험하고 나서도 검찰 권력이 정권의 주구로 전락하거나 마구 날뛰는 꼴을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br><br>]]></description>
			<author>곽노현</author>
			<pubDate>Thu, 16 Apr 2026 23:28:14 +0900</pubDate>
		</item>
		<item>
			<title>[가스펠:툰] &quot;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quot;</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11</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3695266591_gZmkEatA_041926_EBB680ED999C_ECA09C3ECA3BCEC9DBC-EB8F85EC849C.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60"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3695266591_QqpWvJ2i_041926_EBB680ED999C_ECA09C3ECA3BCEC9DBC-EBB3B5EC9D8C.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61"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3695266591_wd1JcO52_5BEABEB8EBAFB8EAB8B05D041926_EBB680ED999C_ECA09C3ECA3BCEC9DBC-EBB3B5EC9D8C-1.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62" style="clear:none;float:none;" /><br><br>2026년 4월 19일 주일 (부활 제3주일)<br>제1독서 (사도행전 2,14.22ㄴ-33)<br>오순절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br>“유다인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것들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br>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분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br>형제 여러분,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예언자였고, 또 자기 몸의 소생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자기 왕좌에 앉혀 주시겠다고 하느님께서 맹세하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며 ‘그분은 저승에 버려지지 않으시고 그분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br>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br>제2독서 (베드로 1서 1,17-21)<br>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각자의 행실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으니, 나그네살이를 하는 동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br>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br>복음 (루카 24,13-35)<br>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br>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br>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br>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br>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br>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br><br><br><br>]]></description>
			<author>김웅배</author>
			<pubDate>Thu, 16 Apr 2026 22:43:54 +0900</pubDate>
		</item>
		<item>
			<title>“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08</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8pjHRqvw_Gemini_Generated_Image_hsgvrbhsgvrbhsgv.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55" style="clear:none;float:none;" /><br><br>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2026.4.11): 사도 4,13-21; 마르 16,9-15<br>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기쁨을 노래하고 축하하는 팔일 축제 기간 동안 네 복음서의 복음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시는 장면이 주로 소개되었고, 사도행전의 독서에서는 발현 체험을 한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 복음을 선포하는 장면이 주로 소개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발현하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이미 가르치셨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확신시켜 주셨고, 이 확신을 얻어 사도가 된 제자들은 예수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nbsp; 하느님 나라와 예수 부활에 관한 이 복음은 네 복음서 전체에서 소개된 발현 기사와 사도행전에서 집중적으로 보도된 사도들의 행적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br>오늘 복음에서도 마르코 복음사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그리고 열한 제자에게 차례로 나타나신 일들을 간추려 보도합니다. 발현을 목격한 이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처음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알아보고 나서는 죽으셨던 분이 부활하셨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놀라고 나서야 비로소 기뻐하며 그분의 부활을 믿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그런 후에 비로소 자신들도 부활하신 예수님 덕분으로 기운을 얻게 되고, 그 기운으로 자신들도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거룩하고도 놀라운 변화를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nbsp;<br>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스승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삼 년 동안 배웠던 바를 상기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이 진리라는 확신을 들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었고, 이것이 참된 진리임을 확신하게 된 계기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이었기에 사도가 된 제자들은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nbsp;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가르침이었고, 부활의 복음은 이 새 세상을 열어젖힐 수 있는 새로운 인간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nbsp;<br>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인간에 관한 이 복음은 겁이 많고 믿음이 약했던 어부 출신 제자들을 담대한 용기와 믿음을 지닌 사도들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불구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할 수 있을 정도로 기적 능력마저 갖추게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당돌한 저항자들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기적의 증거가 살아 있는 데다가 이를 찬탄해 마지않는 군중 앞에서 감히 어쩌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사도들은 당당하게 이렇게 반박하고 나왔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19).<br>이렇게 해서 예수 부활을 믿게 된 제자들이 사도들로 놀랍게도 변화되었고,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도들이 보고 들은 바 즉 발현체험에 입각한 신앙 증거의 행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nbsp; 이런 놀라운 과정과 기적적인 시작이 사도들과 교회가 체험할 수 있었던 부활의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확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부활의 은총, 바로 그것이었습니다.<br>오묘한 섭리로 이 땅에 들어온 한국 천주교회 역시 새 세상과 새 인간에 대한 강력한 희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우선 지배층이 주자학을 국교처럼 신봉하던 탓에 참으로 부당하게도 오랫동안 억압받았던 민족의 종교심성을 각성 시켰습니다. 박해 속에서도 은밀하게 그러나 억누를 수 없이, 이제야 우리 겨레가 민족사의 초창기처럼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드디어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오래된 종교적 희망을 다시 불러 일으켰습니다.&nbsp;<br>또한 유학 고전에 대해 주자가 달아 놓은 해석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는 바람에 사상적 계엄령과도 같았던 사문난적(斯文亂賊)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까닭도 중국 명왕조에서 서양 선비로 대우받았던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가 저술해 놓은 천주실의 덕분이었습니다. 숱한 당쟁(黨爭)과 억울한 사화(史禍)의 위협에 숨죽여 살던 양반 선비들도 드디어 조선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돌파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사회적 희망까지도 불러 일으켰습니다.&nbsp;<br>더욱이 양반 선비들에 비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 차별당하던 중인 신분 이하 상민들은 물론이고, 마치 사고 파는 짐승처럼 부림을 당하던 천민 출신들은 천주교 교리에서 하느님 앞에서 만민이 평등하다는 복음을 듣고 감격해 마지 않았습니다. 양반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남존여비의 굴레에 매여 있던 여성들도 그 복음적 감격의 정도는 천민들에 비해 전혀 못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워진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으리라는 사회적 희망이 강력하게 불타올랐습니다. 그리하여 탄압이 더욱 잔학해져 가던 19세기 중반 이후에 천민 출신과 여성들의 입교가 더 늘어났습니다. 박해 속에서 교세가 늘어났던 이 현상은 세계 선교 역사상 한국에서만 일어났던 기현상(奇現象)입니다.&nbsp;<br>이러한 점이 보편 초대교회의 현실과 정확하게 상통하는 한국 초대교회의 현실이었습니다. 이를 아주 대표적으로 증거한 인물이 황일광 시몬(1757~1802)입니다. 그는 천민 출신으로 태어났으나, 타고난 지능과 열렬한 마음과 명랑한 성격을 타고 났습니다. 그는 1792년 무렵 홍산으로 이주하여 살던 중에 권일신의 제자 이존창이 천주교 교리에 해박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배운 후 교우촌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내가 천한 신분임에도 양반 교우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더 있음이 분명하다.”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에게 이 세상의 천당이란 교우촌이었습니다.&nbsp;<br><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rTLcDg9S_e9629798-2c86-4d98-ac27-b7926713c321.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56" style="clear:none;float:none;" /><br><br>1800년에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여러 교우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특히 ‘주교요지’를 짓고 있던 정약종과는 그야말로 믿음의 벗, 즉 교우로서 막역하게 지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황일광은 유학자로서 식자층(識者層)이 쓰던, 유식하되 어려운 언어에만 익숙하던 정약종에게 진솔하면서도 쉬운 민중의 언어와 그 안에 담긴 민족의 종교심성을 그 특유의 뛰어난 지능과 솔직함으로 전해 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주교요지’는 ‘천주실의’보다 더 뛰어난 교리책”(주문모 신부)이 되어 신유박해 이후 지속된 백년 동안 교우촌의 신자들로 하여금 박해에 대항하여 견디어 낼 수 있게 해 준 사상적 방패가 되어 주었습니다.<br>교우 여러분!<br>보편 초대교회에서나 한국 초대교회에서나 기적 같은 선교 활약을 펼친 신앙 선조들은 모두 다 발현 체험을 겪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보고 들은 것을 말할 수 있게 해주는”(사도 4,20) 발현체험은 부활 신앙의 기반입니다. 그리고 말씀과 성찬으로 이루어지는 미사는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교회의 발현 양식입니다. 습관화된 자세로 말씀을 듣거나 성찬에 참여하지 말고, 복음과 독서에 나온 증인들의 눈으로 새롭게 말씀을 듣고 성찬에 참여해 보십시오.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익숙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지만, 새롭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는 발현체험이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nbsp;<br>그리하여 솟아날 믿음은,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새로운 사회는 지금도 가능하다는 믿음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인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믿음입니다.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에 대한 희망으로 미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도들처럼 부활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사도들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계십니까?&nbsp; 우리가 보고 듣는 체험을 증언하는 그 작은 일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끝내는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nbsp;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상은 그렇게 해서 옵니다.&nbsp;<br><br><br><br>]]></description>
			<author>이기우</author>
			<pubDate>Sat, 11 Apr 2026 09:30:03 +0900</pubDate>
		</item>
		<item>
			<title>왕과 사는 사람, 왕을 파는 사람</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09</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qeo5yGWz_common.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57"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사진 =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공식 홈페이지)</acronym><br><br>1,600만 명의 시민이 영화관을 찾았다. 569년 전 죽은 단종(1457)을 2026년의 국민들은 왜 다시 기억의 수면 위로 끌어올렸을까. 프로이트와 융의 통찰을 빌리자면,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 우리 사회의 무의식 속에 억눌려 있던 ‘정의에 대한 갈망’과 ‘지워진 존재에 대한 부채감’이 단종과 엄흥도라는 상징을 통해 터져 나온 것이다.<br>이 숫자는 단순한 흥행 기록이 아니라 민심의 준엄한 선택이었다. 사람들은 수양대군의 화려한 권력 찬탈사에 주목하지 않았다. 대신 영월의 하급 관리였던 엄흥도에 주목했다. 서슬 퍼런 권력 앞에 모두가 눈을 감을 때, 그는 유배된 왕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았고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 엄흥도에게 왕은 이용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왕이 버려진 그 참혹한 순간에도 곁을 지키며 고통을 함께 ‘살아냈다’. 관객들이 공명한 지점은 바로 여기다. 권력의 서사가 아닌, 끝까지 곁에 남은 ‘인간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br>기억의 전례, 2천 년 전 중동의 청년 예수를 부르다<br>이러한 기억의 소환은 인류 역사 속에서 거대한 강물처럼 흘러왔다. 2천 년 전, 중동의 한 청년 예수는 권력에 의해 처참히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인류는 그를 죽음 속에 방치하지 않았다. 매주, 매해 반복되는 전례(Liturgy)를 통해 그를 기억의 광장으로 불러냈다. 예수를 기억하고 소환하는 전례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죽은 자를 오늘 우리 곁으로 살려내어, 그가 추구했던 사랑과 정의를 현재의 삶으로 살아내겠다는 강력한 부활의 선언이다.<br>이 기억의 전례는 오늘날 작가 한강의 문장들과도 맞닿아 있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작가는 묻는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한강이 그려낸 광주와 제주의 영혼들은 산 자의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작별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그들의 고통을 나의 통증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이다. 죽은 자는 산 자의 기억을 통해 비로소 완전해지며, 산 자는 그 기억을 짊어짐으로써 비로소 인간다운 삶의 길을 찾는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그들은 죽은 자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살아있는 오늘’이 된다.<br>정치라는 이름으로 오염된 기억<br>그러나 정치의 장면으로 오면 이 숭고한 기억은 일순간 왜곡되고 오염된다. 선거 국면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소환할 때, 시민들은 그것을 온전한 애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서울시장을 하겠다는 정원오가 박원순 시장을 소환한 것이 그러하다. 그것은 살리기 위한 기억이 아니라, 자신의 입신을 위한 ‘정치적 호출’로 읽히기 때문이다. 애절한 비극이 권력 쟁취의 도구로 사용되는 순간, 민심은 등을 돌린다. 기억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짊어져야 할 십자가이기 때문이다.<br>과거 한 시대의 중심에서 ‘3철’이라 ‘독수리 5형제’라 불리던 인물들의 지금 모습은 어떠한가.지난날의 혼란과 무능에 대한 책임은 증발했고, 정치는 다시 비정한 계산기로 돌아갔다. 누군가는 숨어들고, 누군가는 밀려나며, 누군가는 다시 배지를 향해 달린다. 비루하다. 참으로 비루하다. 그들은 한때 왕과 함께 사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제는 ‘왕을 파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이재명 대통령의 사진보다는 자신의 정책과 성과를 들고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br>아스팔트의 연대, 거래되는 정치를 거부한다<br>우리는 기억한다. 윤석열-김건희 정권의 비정상적인 통치와 계엄의 공포 속에서, 아스팔트 위로 나오라 외치던 그 간절한 소환을. 시민들이 추운 겨울. 거리로 뛰쳐나왔을 때, 민주당은 연대를 말했고 함께 싸우자고 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사람을 나누고 줄을 세운다. 소위 ‘배지’를 달았다는 자들은 회의 석상에서 “거리에서 싸운 이들의 영향력은 무시해도 된다”고 냉소한다. 연합정치의 틀을 부수어버린다. 대통령이 사랑의 교회까지 찾아가 이영훈 목사를 만나며 손을 잡고 평강과 연합을 외치고 있는데, 추운 겨울 아스팔트 거리 위에서 싸워왔던 동료들을 “세력도 없는 시민사회 단체, 대화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연합정치를 걷어차는 발언을 하고 있는 소위 “뺏지”들을 바라보며 다음 선거를 기다린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며 말릴 것이다. <br>이것은 단순한 공천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의 문제다. 단종을 기억하는 사회와 죽음을 소비하는 정치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존재한다. 하나는 과거의 억울함을 통해 현재를 바꾸려 하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비극을 팔아 현재의 권력을 사려 한다. 지금의 정치는 우리가 아스팔트 위에서 지켜내려 했던 그 정치인가.<br>정치가 답할 차례다<br>혹자는 물을 것이다. 왜 지금 ‘왕’이라는 봉건적 언어를 다시 꺼내느냐고. 여기서 말하는 ‘왕’은 권력의 형식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 버려질 수 있고, 언제든 지워질 수 있는 ‘가장 연약한 존재’에 대한 상징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왕의 자리가 아니라 그 곁에 서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br>하느님의 시선은 언제나 지워진 자들의 곁에 머문다. 고통의 곁을 지키지 않고 그 고통을 팔아 연명하는 정치는 영적으로 파산한 것이나 다름없다. 1,600만 시민은 이미 답했다. 우리는 ‘왕을 파는 장사꾼’이 아니라 ‘왕과 함께 살아내는 엄흥도’를 원한다고.<br>이제 비루한 계산기를 두드리는 정치가 답할 차례다. 당신들은 기억을 짊어질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거래할 것인가. 죽은 자들의 소리 없는 외침이 오늘 당신들의 발등을 찍고 있음을 잊지 말라.<br> <br><br>]]></description>
			<author>지성용</author>
			<pubDate>Fri, 10 Apr 2026 16:10:40 +0900</pubDate>
		</item>
		<item>
			<title>[가스펠:툰] &quot;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quot;</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07</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QZkB4Pm1_041226EBB680ED999C_ECA09C2ECA3BCEC9DBC-EB8F85EC849C.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53"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5FHo6gRs_5BEABEB8EBAFB8EAB8B05D041226_EBB680ED999C_ECA09C2ECA3BCEC9DBC-EBB3B5EC9D8C.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54" style="clear:none;float:none;" /><br>2026년 4월 12일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br>제1독서 (사도행전 2,42-47)<br>형제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br>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br>제2독서 (베드로 1서 1,3-9)<br>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br>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br>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br>복음 (요한 20,19-31)<br>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br>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br>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br>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br>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br><br><br>]]></description>
			<author>김웅배</author>
			<pubDate>Fri, 10 Apr 2026 16:09:51 +0900</pubDate>
		</item>
		<item>
			<title>한강하구 북한 땅에 국제기구도시를 세우자</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10</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gKTkaqJt_5BEABEB8EBAFB8EAB8B05DDSC01873.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58" style="clear:none;float:none;" /><br><br>지구촌 평화를 말하는 자리에서 동북아는 늘 문제의 진원지로 거론된다. 북핵 위기, 미중 패권 경쟁, 한반도 분단.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보면 어떨까. 문제의 진원지가 해법의 진원지가 될 수는 없을까.<br>평화는 선언으로 오지 않는다. 이해관계가 얽히고 제도가 뿌리를 내릴 때 비로소 지속된다. 국제기구란 그 제도의 물리적 형태다. 기구가 한 곳에 모이면 분쟁을 조정하는 중립지대가 생기고, 사람이 오가고, 돈이 흐르고,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브뤼셀이 유럽 평화의 상징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br>유엔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br>1945년 만들어진 국제 질서가 수명을 다했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느끼는 사실이다. 유엔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 — 미국·영국·소련·중국·프랑스 — 이 설계했다. 공교롭게도 이 다섯 나라는 이후 모두 핵보유국이 됐다. 안전보장이사회의 거부권은 이 다섯 나라의 동의 없이는 어떤 집단 행동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장치다. 유엔은 핵을 가진 자들이 핵전쟁을 방지하는 클럽으로 설계된 것이다.<br>그 설계의 한계가 21세기 들어 날마다 폭로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채 4년째 전쟁을 이어가고, 이스라엘은 가자에서 학살을 계속하고 있다.<br>트럼프의 미국은 무도한 이란 침공을 강행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는 거부권 앞에 무력하게 침묵한다.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네타냐후와 푸틴에게 체포 영장을 발부해도 집행할 방법이 없다. 법은 칼이 없으면 종잇조각이라는 것이 지금도 유효한 현실이다.<br>더 결정적인 것은 유엔이 구조적으로 다룰 수 없는 문제들이 폭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후 붕괴, 생태 파괴, 빅테크 데이터 독점, 팬데믹 — 이것들은 모두 국경을 넘는 문제다. 그러나 유엔 헌장 제2조 7항의 불간섭 원칙은 강대국이 무슨 짓을 해도 '내정 간섭'이라는 방패 뒤에 숨을 수 있게 해준다. 20세기형 위협에 맞게 설계된 기구가 21세기형 위협 앞에서 무력한 것은 설계 실패가 아니라 설계 의도의 한계다.<br>그 결과 지금 지구촌에서는 새로운 국제 거버넌스에 대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유엔을 대체하자는 것이 아니다. 유엔이 구조적으로 할 수 없는 것 — 공유 자원의 민주적 관리, 강대국 지도자에 대한 실질적 제재, 지구 차원의 공공재 공급 — 을 담당할 새로운 성격의 기구들이 절실해졌다는 것이다.<br>기후, 에너지 전환, 데이터 주권, 해양 자원, 핵 감시, 생물다양성 — 분야마다 새로운 국제 협력의 틀이 요구되고 있다.<br>세계 경제의 중심이 동북아로 왔다<br>국제 거버넌스의 수요가 폭발하는 바로 이 시점에, 세계 경제의 중심이 동북아로 이동했다. 2000년 세계 GDP의 30%이던 아시아의 비중은 2025년 현재 약 50%에 달한다. 중국 18.3조 달러, 일본 4.1조 달러, 한국 1.7조 달러. 동북아 3국만 합쳐도 세계 경제의 22~23%다. 세계 4분의 1의 경제를 움직이는 권역이다.<br>그런데 이 권역에 국제기구 본부는 얼마나 있을까. 국제기구연합(UIA) 2024/2025년 연감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활동 중인 국제기구는 약 4만 5,000개, 등록된 기구는 7만 8,500개를 넘는다. 2008년 대비 두 배 가까이 늘었다. 그런데 그 본부 소재지는 여전히 유럽과 북미에 극단적으로 집중되어 있다. 브뤼셀 1,000개, 파리 288개, 런던 284개, 빈 156개, 제네바 135개. 아시아 최다인 싱가포르가 111개, 도쿄 92개, 서울 76개다. 동북아 3대 도시를 합쳐도 210개 — 브뤼셀 혼자의 5분의 1에 불과하다.<br>세계 경제의 비중과 국제기구의 비중 사이에 이토록 큰 괴리가 있다. 이것은 불균형이다. 그리고 불균형은 언제나 조정을 요구한다.<br>트럼프가 만들어준 역사적 공백<br>2026년 1월, 트럼프 행정부는 행정명령으로 66개 국제기구 및 UN 산하기구에서 탈퇴와 재정 지원 중단을 선언했다. UNFCCC(기후변화협약), IPCC, UNCTAD, UN민주주의기금, UN인구기금 등 제네바와 뉴욕에 집중된 핵심 기구들이 포함됐다. 루비오 국무장관은 "낡은 다자주의 모델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추가 탈퇴 가능성도 열어두었다.<br>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기회다. 미국이 떠난 기구들에 새 거점이 필요해졌다. 제네바의 한 언론은 이 상황을 "국제 제네바를 대변할 지도자가 없다"는 위기로 묘사했다. 동시에 이것은 미국 없이도, 혹은 미국을 대신하는 새로운 협력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자각을 촉진하고 있다.<br>신설, 이전, 확충. 지금이 바로 세 가지를 동시에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br>한강하구, 지구촌에 이런 곳은 없다<br>어디에 새 거점을 마련할 것인가. 필자는 2018년 이 지면에서 한강하구를 제안한 바 있다. 지금 그 제안을 다시, 훨씬 강한 근거를 들어 꺼낸다.<br>한강하구 일대 약 260㎢, 개풍군을 중심으로 개성공단과 강화도 북부를 포함하는 이 땅은 서울 면적의 절반이다. 북한 땅이 대부분이다. 70년간 접경지대로 묶여 손 못 댄 그 땅이, 지금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도시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br>입지 조건을 보라. 인천공항까지 1시간, 베이징·상하이·도쿄까지 2시간 항공권이다. 해양(서해)과 유라시아 대륙철도가 동시에 연결되는 지구상 유일한 지점이다. 2천만 인구 밀집지가 1시간 안에 있고, 세계 경제의 거점인 동북아 3국이 코앞이다. 군사적 긴장만 완화된다면 지구상에 이만한 조건을 갖춘 곳은 없다.<br><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5zUNi7MK_19520_65843_2630.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59"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필자가 제시하는 국제기구도시 후보지. (사진제공 = 이원영)</acronym><br><br>여기에 국제기구들이 들어선다. 기후, 에너지 전환, 데이터 주권, 해양, 보건, 군축 — 국경을 넘는 문제를 다루는 기구들이 국경 그 자체인 이 땅에 자리 잡는다. 기구의 존재 자체가 평화의 물리적 보증이 된다. 한강하구를 침범하는 것은 그 기구들에 입주한 수십 개국을 동시에 건드리는 일이 된다. 브뤼셀이 유럽에서 한 역할을, 한강하구가 동북아에서 할 수 있다.<br>여기에 각국에 50년 장기 임대하는 조차지 기능을 더한다. 상하이가 조계지를 통해 이종 문명의 시너지로 성장했듯, 홍콩 옆 선전이 그랬듯, 이 땅도 그렇게 진화할 수 있다. 토지는 북한이 소유한 채 지대를 받아 주민에게 돌린다. 개성공단이 이미 소규모로 이 모델의 가능성을 증명했다.<br>북한에게도 유력한 출구<br>북한도 지금 절실히 평화를 원하고 있다.<br>한강하구 국제기구도시는 북한이 체제를 바꾸지 않고도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유력하고 현실적인 경로다.<br>국제기구가 들어오면 세계와 소통하는 인프라가 생긴다. 국제 사회는 이 도시의 안전을 보장할 이해관계를 갖게 된다. 북한을 고립시켜 만들어진 위협은, 연결이 만들어낼 안정으로 대체된다.<br>이 구상이 실현되면 한반도 평화는 더 이상 강대국의 선의에 기대는 수동적 평화가 아니다. 지구촌이 함께 이해관계를 가지는 능동적이고 구조적인 평화가 된다.<br>상상이 전략이 되는 순간<br>노예제 폐지도, 여성 참정권도, 유럽연합도 처음에는 공상이었다. 역사는 불가능이 필연이 되는 과정의 기록이다.<br>유엔은 수명을 다해가고 있고, 새로운 지구 거버넌스에 대한 수요는 폭발하고 있다. 트럼프는 기존 국제기구 질서를 흔들어 공백을 만들고 있다. 동북아는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떠올랐지만 국제 거버넌스의 중심에서는 여전히 변방이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지금 동시에 맞물리고 있다.<br>한반도의 지정학적 무게를 짐이 아니라 자산으로 바꾸는 것, 분단의 접경을 인류 협력의 거점으로 바꾸는 것 — 이것이 적극적 평화전략의 의미다. 방어하는 평화가 아니라 만들어가는 평화다.<br>신설하고, 이전하고, 확충하라. 한강하구가 그 답이 될 수 있다.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이다.<br>&nbsp;<br><br>]]></description>
			<author>이원영</author>
			<pubDate>Fri, 10 Apr 2026 16:08:50 +0900</pubDate>
		</item>
		<item>
			<title>새로운 존재방식, 이것이 부활입니다</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05</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8UuQwmeS_9999.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48" style="clear:none;float:none;" /><br><br>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2026.4.5)&nbsp;: 창세 1,1-31; 창세 22,1-18; 탈출 14,15-15,1; 이사 54,5-14; 이사 55,1-11; 바룩 3,9-4,4; 에제 36,16-28; 로마 6,3-11; 마르 16,1-7<br>1. 파스카 성야 전례의 뜻<br>오늘은 파스카 성야(聖夜)입니다. 인류의 파스카를 위해 전례로 미리 성취하는 거룩한 밤입니다. 성목요일의 주님 만찬 미사에서 파스카 전례가 시작될 때 암시되었듯이, 예수님의 제사에는 죽음과 부활이 이미 담겨 있었습니다. 성금요일의 주님 수난 예절에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바쳐야 할 희생으로서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지향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음을 맞이하라는 것이었습니다.&nbsp;<br>성토요일을 지내고 맞이한 이 밤은 파스카의 절정인 부활 성야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그분 덕분에 부활한 우리가 새롭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향을 보여 줍니다. 부활은 새로운 창조이기 때문에, 새로이 태어난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주시는 기운에 힘입어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의 삶을 지금 여기서 그리고 우리 자신부터 주어진 상황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존재방식, 이것이 부활입니다.&nbsp;<br>2. 말씀의 흐름<br>한처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고 말씀하시고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원죄를 범한 아담과 다시 인류의 시조가 된 노아 이래로 사람들은 하느님과 엇박자를 많이 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류를 하느님과 일치시키고자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을 가장 닮은 사람이셨습니다.&nbsp;<br>아담에서 노아, 아브라함을 거쳐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으뜸으로 중시했던 일은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일이었고 그것이 제사였습니다. 제사에서는 하느님께 드리는 지향과 제물이 중요한데, 아담은 원죄를 저지른 데 대한 속죄의 제사를 바쳤을 것이고, 노아는 대홍수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데 대한 감사의 제사를 바쳤을 것입니다만, 짐승을 불살라 바치는 번제가 그 제물이었습니다.&nbsp;<br>아브라함은 늘그막에 얻은 이사악을 바치라고 하시던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했으나 그 믿음을 크게 보신 하느님의 자비로 그 외아들 대신 어린양을 바치는 제사를(창세 22,13) 바쳤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을 바치실 본연의 제사의 예형(豫型)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려는 지향으로 십자가상에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속죄와 감사의 지향을 수렴하되 본연의 지향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또 본연의 제물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br><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JxoSF4fm_1111.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49" style="clear:none;float:none;" /><br><br>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혹독한 강제노역으로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해방됨으로써,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해방되어야 할 인류 전체의 파스카 과업을 미리 보여주는 역사적 예형이 되어 주었습니다.&nbsp;<br>파스카 과업을 향해 나아감에 있어서 이사야는 노아 시대에 있었던 대홍수 심판을 상기시키면서 앞으로는 하느님께서 직접 인류와 평화의 계약을 맺으실 것임을 알려 주었고(이사 54,9-10), 그 평화의 계약은 장차 사람으로 강생하시어 세상에 오실 성자 하느님께서 직접 평화의 계약을 맺으실 것이었습니다.&nbsp;<br>마침내 성령으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성자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마치시고 부활하셨고, 그분의 부활이 새로운 창조임을 알아본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그분과 계약을 새로이 맺고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교회의 사도로 부름 받은 바오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이들에게 이 세례성사에 담긴 창조와 해방의 은총을 상기시켜 주었는데,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부활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야 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로마 6,8).&nbsp;<br>이상 파스카 성야 미사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흐름을 간추려 드렸습니다. 이 말씀들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노는 부활 찬송에서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강생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오, 복된 탓이여!”라고 외치며 감격하였습니다.&nbsp;<br>3. 말씀의 성취인 부활<br>부활은, 자기 자신을 제물로 희생 봉헌한 예수님의 십자가상 제사를 받으신 하느님께서 예수님이야말로&nbsp; 당신을 가장 닮은 인간이심을 증명해주신 가장 큰 복음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고 하시며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사건입니다. 구약성경이 전해준 으뜸 메시지가 창조라면, 이를 완성하는 부활은 신약성경 최대의 메시지입니다.&nbsp;<br>그래서 창조는 우리 믿음의 바탕이 되고, 부활은 그 목표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이고 의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될 뻔 했다고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만큼 그분의 부활이 중요하고, 놀라우며, 감사한 은총입니다. 이제는 우리도 그분 안에서 부활해야 하고, 부활이 그저 육신의 소생 사건이 아니므로 우리의 부활은 역사적인 미래의 현실로 드러날 것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그리고 민족과 함께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nbsp;<br>4. 부활의 지평이 여는 미래<br>오늘 파스카 성야 미사의 말씀에 따르자면, 부활은 하느님을 닮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교회가 민족 안에서 마주치고 있는 최우선적인 과제는 무신론 풍조를 극복하여 겨레로 하여금 창조주 하느님을 알게 하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일입니다. 과거의 역사에서 하느님 신앙에 대한 박해를 이겨낸 우리 교회는 영혼을 잊어버린 채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현세적 삶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신앙을 증거해야 합니다.&nbsp;<br>미사는 믿는 이들이 하느님께 최대의 정성으로 바쳐드려야 하는 흠숭지례(欽崇之禮)로서, 감사와 속죄의 지향에 더하여 우리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입니다. 미사에서 선포되는 말씀에 귀 기울이고, 성찬에서 받은 거룩한 기운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께 흠숭을 드리는 일이 우리 자신을 제물로 바쳐드리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미사에 맛들인 신자들에게서 풍기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쉬는 신자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로 퍼져 나가야 합니다. 그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nbsp;<br>그 옛날 이집트와 가나안은 파스카 과업의 역사적 예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은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부린 파라오 대신 물질 숭배와 특히 자본 숭배로 비인간화를 초래하는 마귀가 지배하고 있고, 여기서 탈출하여 해방되어야 할 목표로서는 가나안 땅 대신에 사랑의 문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사랑의 문명을 위한 평화의 계약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몸소 보여주신 대로 사랑을 자비롭게 실천하는 다짐을 수반합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의 신앙인들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가야 할 새로운 갈릴래아는 바로 아시아 대륙입니다.&nbsp;<br>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로 25년 이상 새로운 갈릴래아로 떠오른 아시아 대륙에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에 대해서 숙고해 온 아시아의 주교들은 대희년을 앞두고 열린 ‘아시아 주교 시노드’에서 요한 바오로2세 교황과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천명한 바 있습니다. 과거에 서구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전해 들었던 아시아인들 가운데에서 믿는 이들이 고작 3%에 머물고 있는 역사를 반성하면서, 이제 복음화의 방향은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전체 아시아인들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nbsp;<br>지난 세기 서구 열강은 그리스도교 문화권의 나라들이면서도 아시아인들에게 착한 이웃이 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식민지로 정복하여 사람들을 노예처럼 억압했으며 자원을 자기 마음대로 수탈해 갔었습니다. 선교 역사가 5백 년이 넘어가는 아시아 대륙에서 복음화가 지지부진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종교간 교세를 경쟁하는 식으로 선교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도 아시아 주교들은 아시아인들 사이에서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본받고 싶은 나라로 삼게 만들고 있는 한류 문화 현상의 주역인 한민족이 이제 아시아 복음화에서도 앞장 서 주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한류의 복음화입니다.&nbsp;<br>이미 한민족의 근현대사에서 입증되었듯이 가장 불행했던 처지에서 가장 부러운 처지로 변화시킨 이 가톨릭 한류가 복음화를 밑거름으로 삼아서 아시아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있어서도 원동력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nbsp;<br>5.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존재방식<br>그래서 아시아 주교들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전체 아시아 그리스도인이 삼중의 대화로 새로운 존재방식을 살아가야 한다고 호소하였습니다. 첫째로는 아시아 복음화 과업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와 아시아의 종교들이 진리를 향한 구도적 대화에 나서기를 권고하였습니다. 진리야말로 종교간 대화에 매우 적절한 화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시아의 오랜 연륜을 지닌 전통 종교들로부터 진리를 깨닫고자 치열하게 정진하는 구도의 정신과 자세에 대하여 풍요로운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 종교가 인격적인 신이신 창조주 하느님과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이신 인류의 구세주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무신론이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전하고 계승해온 거룩한 전통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배워야 합니다.&nbsp;<br>이러한 종교간 대화와 더불어,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이 서구 사회의 논리적이고 분석적 논리로만 그리스도 신앙 진리를 전할 것이 아니라 아시아 문화의 직관적이고 종합적인 사유방식으로 전하고자 노력하는 문화간 대화를 병행해야 한다고 권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사회의 사유방식 차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말씀 이신 분이시며, 엄밀히 말하면 아시아의 서쪽인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자라나시고 활동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니 아시아인들이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아시아적 사유방식을 배워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nbsp;<br>또한, 광범위한 빈곤과 가혹한 독재에 시달리고 있는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의 현실과 처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할 수 있는 한 이들이 이 빈곤과 독재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가난한 이들과 대화하는 방식입니다. 이들은 아시아 대륙에서 아시아 종교의 영성과 문화적 감수성을 가장 진하게 간직하고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hvnqPJ9T_333333.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50" style="clear:none;float:none;" /><br>교우 여러분! 아시아 주교들이 권고하는 이 ‘삼중의 대화’야말로 아시아 복음화 과업을 향한 새로운 존재방식이요,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할 수 있는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아시아 주교들의 성찰을 드러낸 '오늘날 아시아의 복음화'에 관한 성명서 일부를 소개합니다.&nbsp;<br>“(아시아 교회는) 우리 문화들의 양식과 틀에 맞게 그리스도교 생활을 육화하지도 못했으며, 교회를 토착화하지도 못해 그리스도교 생활과 교회를 이 땅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 아시아의 위대한 여러 타 종교 형제들과 더불어 개방적이고 진지하고 꾸준한 대화를 나누기로 약속한다. … 복음의 생활과 메시지가 아시아의 유서 깊은 문화 속에 더욱 융화되도록 최선을 다한다” (FABC 제1차 총회 성명서 「오늘날 아시아의 복음화」, 1974년 타이완 타이페이).<br><br>]]></description>
			<author>이기우</author>
			<pubDate>Sat, 04 Apr 2026 10:30:05 +0900</pubDate>
		</item>
		<item>
			<title>[가스펠:툰] 그제야 보고 믿었다</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04</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K5eyPGwt_040526ECA3BCEB8B98EBB680ED999CEB8C80ECB695EC9DBC-EB8F85EC849C.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46"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t8pS0dCl_5BEABEB8EBAFB8EAB8B05D040526ECA3BCEB8B98EBB680ED999CEB8C80ECB695EC9DBC-EBB3B5EC9D8C.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47" style="clear:none;float:none;" /><br><br>2026년 4월 5일 주님 부활 대축일<br>제1독서 (사도행전 10,34ㄱ.37ㄴ-43)<br>그 무렵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br>“여러분은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br>그러나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br>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3,1-4)<br>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br>복음 (요한 20,1-9)<br>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br>“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br>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br>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br><br><br><br>]]></description>
			<author>김웅배</author>
			<pubDate>Fri, 03 Apr 2026 17:30:03 +0900</pubDate>
		</item>
		<item>
			<title>“예수는 전쟁하는 이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title>
			<link>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06</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Y5GMpTHO_cq5dam.thumbnail.cropped.750.422.jpe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51"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사진 = VATICAN NEWS)</acronym><br><br>레오 14세 교황이 지난 29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 미사에서 예수를 “평화의 왕”으로 강조하며, 전쟁과 폭력에 대한 단호한 메시지를 전했다.<br>교황은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봉헌된 미사 강론에서, 폭력이 그분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평화를 선택하신 예수를 묵상했다.<br>“그분은 다른 이들이 폭력을 부추기는 동안에도 온유함 속에 굳건히 머무르십니다. 다른 이들이 칼과 몽둥이를 들 때에도, 그분은 인류를 품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십니다.”<br>교황은 예수가 어둠과 죽음이 다가오는 상황 속에서도 세상에 생명과 빛을 주기 위해 오셨다고 강조했다. 또한 하느님과 이웃 사이를 가로막는 모든 장벽을 허물고, 인류를 아버지의 품으로 이끌고자 하셨다고 설명했다.<br>교황은 “평화의 왕”이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반복하며, 수난의 순간마다 드러난 예수의 선택이 곧 평화를 향한 길이었다고 밝혔다.<br>제자가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베었을 때, 예수는 칼을 거두라고 명하셨다. 또한 십자가 위에서도 스스로를 방어하지 않으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자신을 내어주셨다.<br>“그분은 언제나 폭력을 거부하시는 하느님의 온유한 얼굴을 드러내셨습니다. 자신을 구하기보다, 인류 역사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짊어지는 모든 십자가를 끌어안으셨습니다.”<br>교황은 이어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며 강조했다.<br>“너희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나는 듣지 않는다. 너희 손에 피가 묻어 있기 때문이다.”<br>그러면서 교황은 “예수는 전쟁을 거부하시는 평화의 왕이시며, 그 누구도 그분을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전쟁을 일으키는 이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그것을 거부하십니다.”라고 분명히 밝혔다. <br>또한, 교황은 세계 곳곳에서 폭력과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언급하며, 인류 공동체가 입은 상처를 깊이 우려했다.<br>“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시 외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자비를 베풀어라! 무기를 내려놓아라! 너희가 형제자매임을 기억하라!”<br>강론을 마치며 교황은 하느님의 종 토니노 벨로 주교의 기도를 인용하며 희망을 전했다.<br>“거룩하신 마리아, 셋째 날의 여인이여,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소서. 전쟁의 번쩍임이 저물어 가고, 고통받는 이들의 눈물이 사라지게 하소서.”<br>이번 강론은 예수의 수난을 단순한 신앙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전쟁과 폭력의 현실과 직접 연결해 해석한 메시지로 읽힌다. 특히 “전쟁하는 이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표현은, 신앙이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선언으로 주목된다.<br>로이터를 비롯한 주요 외신들은 교황의 이번 발언을 두고 ‘현재 진행 중인 전쟁 상황 속에서 나온 가장 직접적인 종교적 경고’로 평가하며, 신앙이 폭력의 명분으로 사용되는 현실을 비판한 발언이라고 해석했다.<br>▶ 원문보기&nbsp;<br><br>]]></description>
			<author>강재선</author>
			<pubDate>Mon, 30 Mar 2026 21:42:14 +0900</pubDate>
		</item>
	</channel>
</r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