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잘못도 범하지 않고 완벽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그렇게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동안 상당한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한 고통 때문에 자신의 생명력도 파괴된다. 그는 자신의 약점뿐만 아니라 강점까지도 파괴하게 된다. 우리는 성공을 통해서 보다 실패를 통해서 더 많이 배운다. 카를 융(Carl Gustav Jung)은 성공이 많은 삶은 변화를 갖기 어렵다고 말한다. 즉, 큰 성공은 변화의 가장 큰 적이란 말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작금의 상황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들의 진정한 실력과 현실적 상황의 결과일 것이다. 우리들의 추락이 우리들의 스승이 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상처받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 그 순간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뜨리고 변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바라보아야 한다. 용기를 내자! 힘을 내자!
민들레는 잡초다. 하지만 꼭 잡초만도 아니다.
룰루 밀러 기자의 논픽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2021, 곰출판)라는 책에서 ‘민들레 원칙’이 언급된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중략) 약초 채집자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하게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민들레는 잡초다. 하지만 꼭 잡초만도 아니다. ‘민들레 원칙(dandelion principal)’이라는 말은 R. D. 오스틴 교수(덴마크 코펜하겐 비즈니스스쿨)에게서 시작되었다. 자폐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대표적 증상은 제한적이고 반복적이며 일정한 방식이 유지되는 행동이나 활동에 집착하기에, 단순 반복하는 노동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집중력을 가진다는 강점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폐성향’도 장애가 아닌 남다른 경쟁력으로 바라본다는 패러다임의 전환, 개개인에게 숨겨진 강점을 파악해서 잡초가 아닌 약재로서의 효능에 집중했다.
오스틴 교수는 사람들 개개인에게 숨겨진 강점을 간파해 내는 것은 마치 민들레의 효능을 파악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 진가를 아는 사람만이 민들레를 잡초가 아닌 약초로 활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자본의 몸부림’으로 폄훼될 수도 있지만, 인간이라는 존재에 있어 ‘민들레 원칙’은 공동선을 이루어 나가려는 선한 의지를 가진 많은 이들에게는, 모든 인간의 존엄과 미소한 생명 하나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영감을 준다.
씨앗을 바람에 날려 보내어 영역을 확장하는 민들레는 매우 모험적인 식물이다. 위험과 성공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산하 어느 곳이나 민들레의 영토가 아닌 땅이 없다. 민들레는 우리 민족과 함께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많은 이름이 있다. 땅에 납작 붙어있어서 ‘안질방이’, 여러 가지 덕이 있다 하여 ‘포공영(蒲公英)’, 문 둘레에 흔히 있어서 ‘문둘레’ 등으로 불리었다. 민들레는 이 중에 ‘문둘레’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반면 서양에서 민들레는 영어로 ‘dandelion’, 중세 라틴어 ‘dens leonis’이 번역 차용되어 고대 프랑스어 ‘dent de lion’이 되고, 14세기 영어에 유입되면서 현재의 표기 ‘dandelion’으로 축약되었다. 뜻은 ‘사자의 이빨’이다. 민들레 잎의 모양이 마치 사자의 이빨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씨앗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영역을 확장하는 민들레처럼
검찰 출신 정순신 변호사가 아들의 학교폭력 문제로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에서 낙마했다. 특히 학교폭력 사실에 대한 최초 보도가 나왔던 2018년 당시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정 변호사와 함께 서울중앙지검에서 근무한 사실이 부각되면서, 인사권자인 대통령과 인사검증 책임자인 한동훈 ‘법무(法無)장관’을 향한 책임론이 거세지고 있다.
정순신의 아들은 상습적 언어폭력을 저질러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정작 가해자 정 씨의 아들은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학교폭력 가해자가 ‘철학’을 하겠다는 그 자체가 너무 아이러니하다. 철학은 세계와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 원리 즉 인간의 본질, 세계관 등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을 혐오하고, 인간을 학대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철학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윤 대통령은 “104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미 이전에도 윤 대통령은 “한반도 유사시 일본이 들어올 수도 있지 않은가!” “한동훈은 (정권에 대한 수사를) 거의 독립운동처럼 해온 사람”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한 게 아니다. 방사능 유출도 안 됐다”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나라가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정치, 외교, 경제, 민생, 안보, 안전 어디에도 평화가 없다. 정적 제거를 위해 압수수색은 일상이 되어버렸고, 이태원 참사에서 보았듯이 행정은 마비수준이다. 천공이라는 자의 행보를 두고 장군들이 불려가 조사를 받고, 주가조작, 학력위조로 공정과 정의를 짓밟은 대통령의 아내는 자기도취에 빠져 온 국민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싸워야 한다. 민들레 꽃처럼 싸워야 한다. 씨앗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영역을 확장하는 민들레처럼 사방으로 꽃씨를 날려 보내야 한다. 땅에 납작 붙어 ‘안질방이’가 되어 겸손하게 전해야 한다. 민들레는 여러해살이 풀로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며 줄기는 없다.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한다. 하방연대를 더욱 탄탄하게 꾸려내야 한다. 문둘레에 자리 잡아야 한다. ‘문(門)’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목이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좋은 길목을 잡고 앉아야 한다. ‘사자의 이빨’처럼 한번 물면 놓지 말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
흔하고 너른 들풀과 어우러져 거침없이 피어나는 민들레처럼
‘영성’이라는 말이 한국 사회에서 상당히 오염되었다. 무지하고 반지성적인 종교 적폐세력이 ‘영성’을 돈벌이와 ‘가스라이팅’의 연장처럼 오용(誤用)했다. 영성은 사람들이 그들의 일상 속에서 신성함(sacrality)을 찾고, 보존하고, 필요하다면 변모(transformation)시키기 위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거나 서로 관계하는 모든 방식과 관련 있는 것이다.
영성은 모든 이들의 생명의 통합과 붕괴를 이끄는 중요한 동력이며, 이러한 영성은 우리 매일의 생각과 느낌, 행동들에 반영되면서 생명을 주거나 혹은 파괴적인 힘을 가하고 있다. 민들레 영성은 민들레처럼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지향’이고, ‘의지’이고 ‘의미’이다.
민들레 꽃처럼 살아야 한다. 특별하지는 않을지라도, 결코 빛나지 않을지라도, 흔하고 너른 들풀과 어우러져 거침없이 피어나는 민들레처럼 살아가야 한다. 비록 지금 우리는 처절하고 쓰라린 상처와 울분으로 무기력해지기도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쓰지만 좋은 약이 되었다. 거짓을 가려내는 기회가 되기도 했고, 우리 안의 참된 실력을 키워나갈 시간이 생겨났다. 조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천천히 즐기면서, 옆에 있는 좋은 친구들과 동료들을 바라보며 여유를 가지고, 가야 할 길, 꿋꿋하게 걸어가자. 민들레의 투혼으로.
이 칼럼은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