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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프레스 인터뷰 1회 청전 스님
  • 가톨릭프레스 편집장
  • 등록 2015-04-16 13:16:20
  • 수정 2015-06-22 11: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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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전 스님은 사제가 되기 위해서 광주 대건신학대학에 다니다 송광사로 출가한 독특한 이력을 지닌 분이다. 10년 간 선방에서 수도하다 인도로 건너가 티벳 망명 정부가 위치한 히말라야 산자락인 다람쌀라에서 달라이 라마의 제자가 되어 현재 29년째 그곳에 머물고 있다. 해마다 히말라야의 라닥 오지 지역에서 봉사 활동을 펼치며 ‘민중이 곧 나의 종교’라고 설파하고 있다.


저서로는 『당신을 만난 건 축복입니다』, 『달라이 라마와 함께 지낸 20년』,『나는 걷는다 붓다와 함께』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샨띠데바의 『입보리행론』, 쫑카빠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람림』 등이 있다. 이 인터뷰는 지난 3월 스님이 잠시 한국을 다녀갔을 때 서울의 한 찻집에서 하였다.



김근수(이하, 김): 지난해 뵙고 다시 뵈어 기쁩니다. 가톨릭 프레스 독자를 위해 오늘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대를 다닐 때와 출가한 지금 스님께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달라진 생각이 있습니까?


청전스님(이하, 청전): 전혀 없습니다. 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제 수행의 큰 스승님들 가운데 한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의 훌륭한 가톨릭 영성가들을 만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이나 수녀원에 가서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으면 저는 항상 마더 테레사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 분이 ‘뭐가 그렇게 훌륭하냐?’고 물으면 참 말씀으로 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제가 일생에서 ‘이 분은 성인이다. 이 분은 성자다.’라고 생각하는 분을 세 번 만나 보았습니다.


첫 번째 분은 달라이 라마 존자님, 두 번째 분은 마더 테레사, 그리고 세 번째 분은 티벳의 한 노스님입니다. 이 세 분의 공통점은 그분들과 접촉하는 순간 제 몸 안에 오는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말로 어떻게 표현을 못하겠지만 그 느낌, 체험만은 생생합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제가 이런 체험을 한 후에야 그 동안 의심을 품고 있던 성경의 한 부분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복음서의 하나인 마르코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예수님께서 군중 속에 걷다가 한번은 뒤돌아보며, ‘누가 내 몸에 손을 대느냐?’고 물어보십니다. 처음에는 군중 속의 어떤 사람도 감히 예수님 앞에 못 나오지요. 그러다가 뒤에 가서 사과하고 나오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직자의 옷을 입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잘 해석한다고 해서 이런 예수님의 참모습이 체험으로까지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신부님, 수녀들과 말씀을 나누다가도 종종 ‘아직 체험을 못 하셨군요.’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말씀드리면 ‘신 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없으면 성직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 자체가 팍팍해집니다. 서양 철학자 가운데 이것을 참으로 무섭게 경험하신 분은 빠스칼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 분이 ‘오도송(悟道頌, 깨달음 노래)’도 썼습니다. 출가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의 ‘불, 불, 불, 아, 하느님. 하느님!’은 수많은 오도송을 썼던 선사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후 빠스칼의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자기 생명까지 내준 보살입니다. 불자들의 예를 들자면 깨닫고 난 후의 붓다만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붓다의 진면목을 모릅니다. ‘무엇을 보아야 하느냐?’ 하면 붓다가 되기 이전의 인간 붓다, 즉 고행하는 붓다를 봐야만 완전한 붓다의 진면목을 보게 됩니다. 영광스러운 붓다만 보려고 하면 붓다처럼 살고자 하는 간절한 서원을 세울 수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삶을 따르겠다고 여기는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크게 다를 것은 없을 것입니다.


(김): 마르코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이 자기 몸에서 뭔가 기운이 빠져나가는 걸 느껴서 돌아섰다고 대목을 언급하셨는데(마르코 5, 24-34), 그 기운이 빠졌다는 뜻에 대해서 좀 더 말씀해 주시지요?


(청전): 저는 예수님이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군중 속의 한 사람이 자신의 간절함으로 인해 그것을 느꼈다고 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기운이 아픈 사람들, 민중들을 치유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 붓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신 큰 스승들, 성현이라고 불리는 분들이 모두 그렇다고 여깁니다.


불교에서는 보통 이런 큰 스승님들은 ‘깨달은 분들’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몇몇 사람들은 ‘그럼 깨닫고 난 후에는 무엇이 달라지느냐?’고 의문을 품습니다. 저는 깨달은 후에도 자신의 목숨을 버릴지언정 끝까지 자비와 사랑의 실천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달라질 게 없다고 봅니다.



(김): ‘깨달은 분들은 오직 자비와 사랑의 실천한다.’고 말씀해주셨는데 그럼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분들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보시는지요?


(청전):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연습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 모두 다만 그 길에, 과정 중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법당에 설 때면 ‘불교를 바로 하십시오!’라고 강조합니다.


평생 절에 가지 않고, 불상에 절 한번 않은 사람들도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면서 깨달음은 얻을 수 있습니다. 제가 마더 테레사를 존경하는 이유도 그 분의 삶에서 보여주신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깨달은 분들은 진리의 성취자들인데 그 분들은 또한 우상 파괴자들이기도 합니다.


(김): 앞에서 스님께서는 영광의 붓다보다 고행, 수행의 붓다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로 말하자면, 부활한 예수보다 십자가의 예수, 역사의 예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되겠습니까?


(청전): 예. 딱 맞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르침을 베푸시기 전에 40일 동안 단식도 하셨지요. 우리는 그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부활한 예수님만 쫒다 보면 예수님의 삶이 없어집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자기마저도 희생한 예수님을 찾아야지 2천년 동안 기다려도 오지 않은 부활한 예수님, 영광스런 예수님만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요즘도 한국에서는 ‘나는 깨달은 사람이다.’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대중에게 큰소리를 칩니다만 자비와 사랑의 행동이 없습니다. 원래 종교의 가르침은 당대 민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소외받고 가난하고 병들고 배고픈 사람을 먼저 보살피라는 것이 모든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성직자는 예수님이나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민중을 위한 봉사자입니다. 이 봉사 활동이 곧 수행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배금주의, 자본주의는 많이 봉사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많이 가져서 행복하다는 착각을 내놓고 심어줍니다.


(김): 많이 가지려고 하는 인간의 욕심 문제를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신약성서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이다.’(1티모테오 6,10)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청전): 맞는 말입니다. 한국에서는 소수의 사람들이 돈을 거의 다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인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이제 종교마저도 물들이고 있습니다. 어떤 스님이 ‘이대로 가다간 5년 안에 모든 종교는 망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맞는 말입니다. 바르게 쓰면 여럿이 행복하지만 자기 혼자 다 가지려고 하면 큰 죄악이고 폭력이 되는 것이 바로 돈입니다.


(김): 돈을 많이 가지는 것, 권력을 많이 가지는 것이 큰 죄악이고 폭력이라는 말씀이신지요?


(청전): 그럼요. 가진 것을 나눌 때 행복해야지 더 많이 가지려고 했다가는 더 큰 욕심만 생길 뿐, 결코 행복할 수 없는 법입니다.




(김): 예수에게 가장 감명 깊게 배우거나 느낀 점이 무엇입니까?


(청전): 저는 성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요한복음 1장 1절이라고 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성경이 동양 언어로 번역될 때 가장 난해한 부분 가운데 하나로 보이는데 태초의 ‘말씀’은 그리스어 ‘logos’, 라틴어 ‘verbum’, 그리고 영어 성경에는 ‘word’로 되어 있습니다.


‘word’라니 얼마나 웃음이 나오는지. 독일어, 불어는 모르겠습니다만 동양에서는 태초에 ‘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동양의 ‘도’가 곧 그 말씀에 해당하는데, 포장지만 다를 뿐 결국은 자기들만의 언어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불교에서는 ‘어떻게 도에 이르느냐?’를 가르치는데, 때 묻지 않은 맑은 영혼을 갖추는 것이 바로 도를 닦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잘 먹고 잘 살지만 맑은 영혼이 없습니다.


그래서 ‘물질문명이 발달한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인간들은 더 불행해졌습니다. 잘 먹고 잘 살아도 거기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다고 성인들은 말씀하셨습니다. 맑고 바른 영혼을 갖춘 분이 유교에서 말하는 선비이고 가톨릭에서 말하는 성자입니다.


(김): 오랫동안 라닥의 오지에서 봉사 활동을 해마다 해온 줄 알고 있습니다.


(청전): 제가 라닥 오지에 관심을 가진 것은 자본주의 영향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 지구촌에서 그나마 그들이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기로 이런 삶을 사는 민족은 아직 지구촌에 둘이 남아 있습니다. 티벳 유목민과 아프리카 사막에 사는 베두인인데 그들에게는 저축이라는 개념도 없습니다. 제가 라닥 오지에서 봉사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순수한 영혼을 보면서 위로를 받았던 셈입니다.


(김): 인도의 다람쌀라라는 곳에서 29년 동안이나 머물러 계시면서 달라이 라마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신 줄로 알고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와의 일화라도 있으면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청전): 중국이 달라이 라마 존자님을 음해하기 위해 악소문을 퍼뜨려도 그분은 그런 중국인을 위해서도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불교만을 고집하지 않는 분입니다. 외국에 가셔도 당신의 가르침의 핵심인 두 가지, 즉 인간성 함양과 종교 화합을 말씀하십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한 종교가 이 세계를 지배하지 못한다. 나는 붓다의 제자지만 불교가 최고다라고 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예를 들자면, 불경에는 수미산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되어 있지만, 당신께서는 ‘나는 그런 거 안 믿는다.’고 공공연하게 말씀하시고 과학적인 세계관을 강조하십니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내 종교가 최고이다.’고 주장하며 이웃 종교를 비방합니다. 그러나 종교가 있기 전에도 사람은 있었습니다.


지구상의 세계 종교라는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등, 이런 것이 생기기 전에도 인간은 있었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라고 해봐야 겨우 2천5백년 역사입니다. 어쩌면 종교가 생기기 전에 소박하게 살던 사람들이 더 행복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양심에 따라 좋고 나쁜 것을 알았을 뿐, ‘내 종교 네 종교’로 사람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종교는 인간입니다.


(김): ‘예수는 좋은데 교회가 마음에 안 든다.’든가 ‘예수는 좋은데 성직자가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좋은데 종단이 싫다거나 부처님은 좋은데 스님들이 싫다.’는 말이 불교에도 있습니까?


(청전): 있습니다. ‘절에 왜 안 가십니까?’하고 물으면 ‘중 보기 싫어서 안 갑니다.’라고 그럽니다. 지금 스님들은 거의 모두 우량아들입니다. 잘 먹고 게으른 탓입니다.


가톨릭의 독신 수행자와 불교의 수행자에게 예수님과 붓다는 삶의 모델입니다. 제가 달라이 라마 존자님의 침실까지 들어가는데 그분 침실에는 불상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삐쩍 마른 고행상입니다.


불교의 수행자들은 붓다가 된 후의 붓다만 봐서는 안 됩니다. 진짜 불공은 불상 앞에서 예불을 올려서 되는 것이 아니고 이름 없고 힘들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참 예배, 참 불공은 항상 민중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민중이 예수님이고 민중이 붓다입니다.


(김): 민중에게 가난한 사람에게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참 예배이고 불공이라는 말씀 깊이 새기게 됩니다.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한 말씀만 해주시지요.


(청전): 인도에서 그 사건을 볼 때 제 속이 다 타들어가더군요. 전 세계적으로 부끄러운 사건입니다. 다람쌀라의 티벳 사람들도 압니다. 세월호 사건을 교통사고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교통사고가 나도 차를 길옆으로 치우거나 견인해 가지 그대로 두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세월호 인양에 돈이 천문학적으로 드니 세월호를 인양하지 말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제가 막 나무랍니다. 천문학적인 돈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빚을 내서라도 세월호를 인양해야 합니다.


자기 친자식이 그 안에 들어 있으면 그런 말이 나오겠습니까? 자식을 잃은 부모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그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빨리 찾아야 합니다. 이 사건은 한국의 부정부패, 정치와 경제의 결탁, 관료주의 문제 등 모든 잘못된 것들이 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입니다.


한국을 정말 제대로 된 나라라고 생각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세월호를 건져야 합니다. 직접 피해자가 아니더라도 유가족과 같은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침몰한 것이라고, 또 빠지면 이제 못 일어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김): 어디에선가 김희중 대주교와 강우일 주교에게 좋은 인상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청전): 그분들이 바른 말씀을 하시니까요. 민중을 위한 말이 곧 진리의 말입니다. 주교님이 이웃 종교에 가서 절하고 모습은 그만큼 그분의 인격이 고매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살아온 모습 그대로 행동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종교인들이 비만, 우량아입니다. 의식 있고 깨어있는 사람은 배불리 안 먹습니다. 진짜 수도자, 진짜 영성가는 덜 먹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은 생각하며 늘 깨어 있는 의식으로 살고자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김): 새로 생긴 가톨릭 프레스 독자들과 한국 천주교 신자들을 위해 스님의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청전): 생명을 가진 존재 그 어떤 것도 불행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겠습니까? 자기가 가진 것이 제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어도 그것을 나누려고 하는 마음, 행동 바로 그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곧 그것이 자신의 행복입니다.


이웃의 배고픔과 추위와 가난을 함께 한다면 그 사람은 영혼의 행복을 알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님과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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