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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으로 읽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2부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11-26 10:17:54
  • 수정 2015-11-26 16: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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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1월 13일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린 기후변화 세미나에서 가톨릭프레스 김근수 편집장이 강연한 내용을 1부와 2부로 나누어 싣는다. <편집자주>


▲ 13일 ‘작은형제회 정의평화창조질서보전 특별위원회’는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로서’를 주제로 ‘기후변화 세미나’를 개최했다. ⓒ 최진 기자


‘찬미받으소서'를 보는 여러 의견들


회칙을 불편하게 여기는 세력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강대국과 정치경제 지배층은 회칙을 당연히 싫어한다. 그들의 이익과 계획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가톨릭 보수파도 회칙을 언짢게 여기고 있다. 개신교 일부는 ‘찬미받으소서'를 행업으로 구원을 쟁취하려는 시도의 하나로 보고 있다.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보고 하느님께 받은 권리로 여기는 그들은 회칙의 일부 내용이 하느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는 온난화가 인간이 초래한 재앙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과학계는 회칙을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과학계와 오랫동안 긴장관계에 있던 가톨릭에는 반가운 일이다. 갈릴레이를 파문한지 359년이 지난 1992년에야 복권시킨 가톨릭 아닌가. 과학잡지 네이처는 6월 25일자에 회칙을 지지하는 사설을 싣기도 했다. “해결책이 하나일 수는 없다...다양한 관점을 존중하면서 전문가들 사이에서 정직한 논쟁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라고 회칙에서 밝힌 교황의 말은 과학자들에게 큰 호감을 준 것 같다. 


가톨릭 사회교리와 해방신학의 관계


쿠바에서 미국으로 오는 기내회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의 사회교리 이상으로 말한 적 없다”라고 말했다. 로메로 대주교는 일부 해방신학자들이 사회교리를 왜 비판하는지 의아해했다. 사회교리와 해방신학의 관계를 올바로 보기란 상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교회 내 일부 흐름은 사회교리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해방신학을 폄하하고 있다”(Ricardo Antoncich) 사회교리와 해방신학이 같은 영토를 놓고 서로 다투는 경쟁 관계인 것처럼 설정하는 것이다. 해방신학보다 훨씬 일찍 등장한 사회교리가 왜 해방신학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느냐는 것이다. 사회교리를 제대로 가르치고 홍보했더라면 해방신학은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며, 이제라도 사회교리를 잘 가르친다면 해방신학은 금방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가톨릭 보수파들이 그렇게 생각하며 즐거워하고 있다. 


일부 해방신학자들은 사회교리가 남미 상황이나 가난한 사람들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거나 반영하고 있지 않다고 불평한다. 사회교리가 노동자, 농민, 가난한 사람들의 세계와 거리가 먼 학술적 교의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교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주체성을 아직 충분히 존중하고 있지 않다고 아쉬워하고 있다. 


그런 의견들이 솔깃하긴 해도, 사회교리와 해방신학을 같은 차원에 놓을 수는 없겠다. 사회교리를 해방신학으로 대체할 수 없고, 해방신학을 사회교리로 대체할 수 없다. 사회교리와 해방신학은 그 역할과 방법론이 같지 않다. 사회교리를 위로부터의 해방신학 또는 교회의 해방신학이라고 보면 지나칠까. 사회교리와 해방신학에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하느님나라의 관점에서, 하느님나라를 향한 길에서 서로 만난다. 


사회교리가 축구나 야구 같은 경기 종목이라면, 해방신학은 모든 경기에 공통인 준비운동이라고 할까. 사회교리가 신학의 한 분야라면, 해방신학은 모든 신학의 기초 방법론이다. 사회교리에서 가르침의 주체 또는 중개자는 교황 문헌, 주교회의 문헌 등 교회의 교도권이다. 해방신학에서 주체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사회교리와 해방신학의 차이를 강조하는 그룹에서 묘하게도 해방신학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교리와 해방신학의 역할과 방법론이 다름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경향은 해방신학에 우호적인 입장이다. 해방신학에 대한 숨은 의견과 속셈이 사회교리와 해방신학의 관계를 논하기 전에 이미 있는 것이다. 신학이 문제라기보다 신학자들이 문제다.  


보수파로 분류되는 독일의 칼 레만 추기경조차 이런 말을 하였다. “해방신학을 이론적으로 비판하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반성해야 한다” 자유의 일부도 채 누리지 않는 사람에게 방종의 위험을 미리 훈육하는 사람도 있다. 아직 제대로 참여하지도 못한 사람에게 균형 감각을 들먹이며 견제하는 사람도 있다. 


해방신학에서 이론적 주체는 하느님 백성의 고통과 실천을 이론적으로 엮어내는 신학자다. 해방신학의 실천적 제일 주체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해방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는 가난한 사람들이지 해방신학자가 아니다. 해방신학에서 1차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요 신학은 2차적 활동이다. 


해방신학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있지 해방신학의 운명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해방신학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세상을 해방신학자들은 바라고 있다. 해방신학은 사회교리를 무시하지 않는다. 해방신학을 아래로부터 해방신학 또는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신학이라고 표현할까. 


전망과 과제


프란치스코 교황은 ‘찬미받으소서’에서 스승이나 학자의 입장이 아니라 사목자의 시선으로 지구와 인간을 보고 있다. 교황은 종교인, 신학자, 가톨릭 신자보다 우선 가난한 사람들의 운명을 의식하고 있다. 예수, 로메로 대주교도 그렇지 않았을까. 가난한 사람들의 눈을 지니고, 가난한 사람들의 신발을 신는 것은 해방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출발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눈을 가지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신발을 신지는 않으려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적지 않다. 


‘찬미받으소서’의 핵심 메시지를 통합생태라고 한다면, 예수의 핵심 메시지는 하느님나라다. 예수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했지만 교회는 주로 예수만 보았다. 예수를 보면 하느님나라를 떠올리고, 하느님나라에서 예수를 의식해야 하는데 말이다. 예수와 하느님나라의 관계에서 교회사에 지속된 그 잘못이 ‘찬미받으소서’ 경우에도 반복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교회가 하느님나라를 망각해온 잘못 말고도 걱정은 또 있다. ‘찬미받으소서’의 메시지만 보고 그 메시지의 찬성자와 반대자를 현실에서 분석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 실수 말이다. 하느님나라에 집중한다 해도 하느님나라 메시지의 청취자와 반대자를 반드시 분석해야 한다. 하느님나라 메시지는 강조하지만 하느님나라의 반대자를 분석하지 않으면, 한편으로 하느님나라를 강조하면서 다른 편으로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을 눈감아주는 셈이 된다.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부자와 권력자들이다. ‘찬미받으소서’의 메시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과 흉계를 꿰뚫고 있어야 한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잘못하는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기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주어 없는 문장을 잘 쓰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에는 목적어 없는 문장이 참 많은 것 같다. 교황 말씀이나 문헌이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지 알아듣지 못하거나 못들은 척 하는 사람이 있다. “교황이 설마 내게 하는 말은 아니겠지?”하며 딴청 피우는 사람이 특히 성직자중에 의외로 많다. 


가톨릭교회에 이상한 관행이 또 있다. 교회에 큰 문제가 생기면 그 원인과 책임을 조직보다 개인에게, 성직자보다 평신도에게 돌리는 버릇 말이다. 교회쇄신 문제에서 주교나 성직자는 아예 면제되는 줄 안다. 자신이 개혁 대상인데도 마치 개혁 주체인 양 행세하는 사람도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라는 인물이나 교회 문헌이 알리바이로 잘못 쓰여서는 안 되겠다. 교회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즐겨 등장하는 방어 논리가 있다. 뛰어난 개인과 훌륭한 문헌을 인용하여 문제의 핵심을 흐리고 무마하는 버릇이다. 가톨릭에 뛰어난 인물이나 훌륭한 문헌이 없어서 그동안 걱정이었나. 그런 정직하지 못한 버릇은 안 된다. ‘문헌 따로, 삶 따로’라는 우리 버릇은 언제 사라지려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 ‘복음의 기쁨’에 대한 강좌에서 특이한 모습 하나를 언급하고 싶다. 해방신학을 잘 모르고 ‘복음의 기쁨’을 능숙하게 해설하는 사례를 나는 드물지 않게 보았다. 평소 자신의 삶과 행태가 해방신학과 거리가 아주 먼 일부 강사들이 ‘복음의 기쁨’을 뻔뻔하게 강의하는 모습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나 언급 없이 신학을 도대체 할 수는 있단 말인가.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한가하게 커피를 마시며 신학토론을 할 수는 없지 않는가. (프란치스코 교황)


“신학교와 수도회의 교육기관에서 가난한 이들의 어려움과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 교육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214) 라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부탁하고 있다. 그러나 골프에 빠진 사제들이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얼마 전 어느 신문이 ‘기사 따로, 광고 따로’라는 변명을 했다. ‘교황 따로, 사제 따로’라는 말이 생각난다.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교회 밖 사람들에게 가톨릭의 이미지를 우호적으로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가톨릭에는 ‘괜찮은 문헌 하나 나왔네, 알리바이로 쓰기 좋겠네, 두어 번 세미나 열면 되겠지 뭐...’ 정도 외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교회 재산을 늘릴까’ 신경 쓰는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생태 문제에 대한 교황의 말씀이 얼마나 진지하게 들리겠는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생애 최초의 미국방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교회가 가르침을 끊임없이 설명하려 애쓰면서 실천에 주저하는 것은 균형 잡히지 않은 것이며, 위험하고,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만들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게 교회 재산 늘리기에 바쁜 한국천주교회에 주는 말씀 같다.  


핵폭탄(104), 군비 축소(175) 문제를 ‘찬미받으소서’ 간단히 언급하고 자세히 분석하지 않은 점이 아쉽다. 그러나 ‘가톨릭이 진보적’이라는 찬사를 듣는 시대가 내 생애에 올 줄은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다. 내 생각이 멋지게 틀렸다. 이 얼마나 놀랍고 황홀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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