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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불 신학자 김경곤 인터뷰 : 종교의 미래는 그 구성원들에게 달려 있다
  • 김경곤
  • 등록 2015-09-05 09:51:16
  • 수정 2015-11-05 17: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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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인터뷰에서 마지막은 ‘프랑스 천주교회의 현재 처지와 동향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과 대답이었다. 이번 시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질문으로 인터뷰 2회를 이어간다.




- (김근수 편집장)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평은 어떠합니까?


▶ (신학자 김경곤) 현 교황은 선례가 없을 정도로 유럽인들의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비종교적인 일반 대중매체, 신문, 잡지들 역시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타종교인들도 현 교황을 배출한 가톨릭교회에 선망의 눈길을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현 교황이 지닌 인간미와 청렴성뿐만 아니라 그의 개혁정신과 경제적·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때문입니다. 즉 복음의 정신을 실천·구현하려는 그의 의지 때문입니다. 반면, 교회 내 여성의 위상, 사제 독신제, 동성애자에 대한 입장, 피임 문제 등에 대해서는 현 교황 역시 선임자들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비판 역시 제기되고 있습니다.



- 어려운 질문이 될 수도 있겠으나, 한국 천주교회의 현재 모습에 대해 어떻게 평가 하시겠습니까?


외국에서 오랫동안 살아 온 제게 이 질문은 사실 답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한국 천주교회의 몇몇 국면에 대해 추론하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발전을 기대하는 마음에서 그동안 발전된, 긍정적인 국면보다는 부족하고 미진한 면을 몇 가지 체계 없이 언급해 보겠습니다.


먼저 한국 천주교회의 신학적 현주소를 알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가톨릭계 출판사에서 발행된 신학 서적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제가 받은 첫인상은 영성관계 서적과 신앙 단상 위주의 출판물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역사비평적 입장에서 기술한) 성서 신학과 교의 신학 관련 서적은 상대적으로 열세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교의사 관련 서적이 극소수라는 점이었습니다. 교리서가 교의신학서 보다 많은 것도 특이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신앙하는가’ (신앙 내용)라는 근본적인 질문보다는 ‘신앙 행위’로 중심이 이동되어 있는 것 같고, 신앙 내용이나 의식, 교회법 등이 어떤 역사적·사회적 배경에서 시작되어 어떤 변화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것인지 설명하고 그래서 미래의 변화가능성을 열어 놓는 입장을 견지하는 서적은 얼마나 되는지 자문해 봅니다. 더욱이 신앙 내용에 있어서도 ‘진리의 위계’ (hierarchia veritatum,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의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11항 참조)가 있다는 점, 즉 가톨릭교회가 전하는 신앙 내용들 중에는 중요성의 정도에 따라 서열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교리·교의를 설명하는 서적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신학 비전문가들과 평신도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에 근거하여 출판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아니면 ‘이해타산’에 의해 출판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외국어로 쓰여진 신학 전공 필독서들의 번역서가 많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학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는 대학생들과 미래의 사제직을 준비하는 신학생들이 외국어로 쓰여진 전공 서적들을 무난하게 소화하고 있기에 굳이 번역서를 출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까요?


어찌되었든 국내 가톨릭계 출판사와 외국 신학 전공 서적의 번역 출간을 협의하는 일은 쉽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 가지 달갑지 않은 일화를 말씀드리자면, 세계적으로 알려진 신학자이자 제 박사 논문을 지도해 주셨던 한스 발덴펠스 Hans Wandenfels 교수 (예수회원)의 역작이며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 소개된 『Kontextuelle Fundamentaltheologie콘텍스트를 고려하는 기초신학』을 한국어로 번역 출간하고자 했던 저의 노력은, 1차 번역을 모두 마쳐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국내 가톨릭계 출판사들이 모두 호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다른 서적들의 출간 일정이 모두 잡혀있기 때문이라는 답신을 받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국내 신학생들과 신학자들이 독일어 원서 정도는 쉽게 읽고 있기 때문이거나, 가톨릭계 출판사들 역시 ‘경제적 이윤’이 없는 서적의 출간을 원하지 않거나, 그것도 아니면 번역 출간을 제안하는 역자가 성직자도 아니고 외국에 살고 있는 무명의 평신도에 지나지 않기에 그런 것은 아닌지 자문하고서 펜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본당 사목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목자들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긍정적인 것만 같지는 않습니다. 25년 전에 한국에 있으면서 자주 들었던 비판 사항들을 아직도 듣게 되는 것은 서글픈 일입니다. 예를 들어, 적지 않은 사제들이 성당 건물 짓기에 정열을 쏟아 붓고 그래서 신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헌금을 요구하고, 평신도들보다도 (신학적 전문지식을 제외하고는) 지식수준이 낮으면서 평신도들을 ‘병신도’ 취급하거나 권위적인 태도를 보이며, 시대를 앞서가기 보다는 ‘시대의 징표’ 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며, 지속적인 자기 발전에 주력하기 보다는 일상에 안주하고, 복음 정신에 맞게 봉사와 사랑의 삶을 살기보다는 구시대의 유물과도 같은 가부장적 가치관에 기대어 대접받는 사람으로 군림하고, 신자들에게 주체적인 신앙의 길을 제시하기 보다는 순응적·무비판적 신앙, 우민화 형 신앙을 주입시키고 있다는 등.


금년 7월 19일 절두산 성당 주일 미사에서 있었던 일화를 들어보겠습니다. 가톨릭프레스 모임에 참여했다가 미사 참례를 하게 되었는데, 메르스 사태 관련 내용으로 강론을 시작한 주례사제가 신자들이 ‘웃어서는 안 될 부분에 웃었다’고 강론대에서 야단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몇 십 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21세기에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 있는 성당에서 가톨릭 사제는 신자들을 그런 식으로 대해도 된단 말인가? 아! 이것이 한국 천주교회의 현실이란 말인가? 독일이나 프랑스 성당에서 만일 그런 태도를 취하는 사제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신자들의 항의로 인해 발언 의도를 해명하느라 정신을 못 차리거나, 신자들의 따돌림을 받거나, 신자들을 잃게 되거나, 사제 본인이 본당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강론 중에 그런 식의 발언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현상은 해당 사제 개인의 인품이 부족한 탓이며 보편적 현상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대답을 할 필요조차 없는 질문이겠지요.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인내심과 넓은 아량에 경의를 표할 뿐입니다. 물론 사제가 마치 인간 구원의 열쇠를 쥐고 있는 양 잘못된 신앙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감히 사제를 비판할 생각조차 못하는 신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근간을 이루는 신앙 형태는 한편으론 ‘번영의 논리’에 근거한 현세적 기복신앙이며, 다른 한편으론 죄의식을 매개로 한 사후 보상에 대한 희망이 아닌가 자문해 봅니다. 즉 교회나 성직자들에게 물심양면으로 잘 하면 그에 상응하는, 아니 그보다 몇 배나 되는 복을 현세에게 받게 될 것이라는 식의 ‘논리’를 교회가 앞장서서 전파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인간을 해방하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을 죄의식에 짓눌리게 하는 슬픈 소식을 전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에 얽매이게 하고 ‘정신적 노예’가 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 봅니다. 프랑스 종교사회학자들 중에는 종교를 ‘시장’이나 ‘기업’에 견주어서 종교 역시 각자 자기 ‘상품’을 제시하면서 ‘판매 실적’을 올리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의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어쩌면 ‘자본 투자’가 전혀 필요 없는 ‘천연상품’일 것입니다. 이런 ‘상품들’을 ‘강요’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이중 삼중으로 고역을 치르게 하는 것은 복음 정신과는 너무나 먼 일일 것입니다. 또 사회적 불의도 그저 ‘내 탓이오’라고 한탄하며 개혁하지 않고, 가치 있는 다양한 목소리를 내지도 못하게 하고 인정하지도 않으며 오직 제도 교회의 ‘한 가지 목소리’ 아래 ‘일치 아닌 일치’를 이루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일반적 현실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부터 마음대로 뛰어놀지도 못하고 학원수업, 과외공부에 억눌린 아이들의 실상과 자녀들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모든 열정과 자본을 투여하는 부모들의 고통을 모두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도태되기가 두려워 울면서 ‘겨자’를 먹으며 ‘겨자’를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고사리 손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겨자’를 먹이고 있는 것이, ‘겨자’를 먹는 것 외에는 다른 ‘살 길’이 없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이, ‘겨자’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전반적 현실이라고 볼 수 있는데, 가톨릭교회는 이런 ‘겨자 바람’을 거부하고 새로운 삶을 제시하기 보다는, 아이들이 ‘겨자’를 잘 집어 삼킬 수 있도록 미사를 드려주고 기도를 대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신자유주의가 표방하는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전 세계가 무한대 경쟁의 도가니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그래서 대다수의 (피지배 계층) 사람들은 그 안에서 꼭두각시 마냥 인생을 살다가 세상을 떠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 가톨릭교회는 ‘발전 경쟁’의 허구성을 지적하기 보다는 경쟁에서 살아남게 해달라는 ‘기도 전담 기구’, 결국 살아남지 못하고 죽어간 자들을 위한 ‘장례식 전담 기구’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과거 유럽사회가 식민지 개척에 혈안이 되었을 때, 가톨릭교회는 그 정책의 비인간성을 지적하기 보다는 반대로 식민지 확장을 묵인하거나 심지어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며 신대륙에서 ‘복음 선포’와 교세 확장을 꾀했습니다. 그런데 몇 세기가 지난 지금 과거 식민주의 정책이 소수 국가의 특정인들에게는 경제적 이익을 도모했지만 피식민지 국가의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았던 인류의 대죄 중의 하나라고 역사적 비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겠습니다.


- 현재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종교간 대화는 어떻게 보십니까?


얼마나 많은 종교인들이 다른 종교인과 무신론자 또 불가지론자의 입장과 사상을 알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종교인들이 자기 종교의 원천과 역사성, 즉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천하며 때로는 타종교의 영향을 받아온 역사를 알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종교인들이, 종교현상들 중에는 명칭이 다르지만 유사하거나 동일한 현상들을 여러 종교에서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알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종교인들이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상대주의’ 내지 ‘우유부단함’과 동의어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한국에서 종교간 대화는 거의 몇몇 종교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종교인들은 자기 신앙집단의 우월성 내지 유일성에 젖어있고 배타적이거나 포용주의적 입장에서 타종교를 바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양대 종교인 불교와 그리스도교 (개신교와 천주교)간의 대화는 몇몇 사상가들이 각 종교의 내용을 소개·비교 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두 종교를 함께 공부한 학자는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특이한 현상은 그리스도교 신학자로서 불교를 연구하는 자들은 적은 수일지라도 존재하는데 비해, 불교학자로서 그리스도교를 연구하는 자는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연구한다는 말은 상대방을 비판하기 위한 편협한 접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역사적 경전 연구 및 교의 연구를 뜻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역시 마찬가지로, 저명한 불교학자들 중에는 그리스도교인들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리스도교 신학자들 중에서 불자를 찾아보기란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두 종교 비교 서적 출간에 있어서는 상황이 오히려 반대가 됩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계 출판사 보다 불교계 출판사에서 그런 종류의 서적을 더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두 종교 간의 학술적 비교에 있어서도 교리적·철학적 대비가 주류를 이루며, 이에 선행되어야 하는 문헌사적 연구 및 역사 비평적 상호접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유교와 그리스도교간의 대화, 무속신앙과 그리스도교간의 대화에 있어서 주의하지 않는 두 가지 사항을 간략하게 언급하겠습니다. 먼저 유교와의 대화에 있어서는 대화의 주체가 선명하지 않다는 점과 또 유교 사상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포함한 한국민 전체의 사회·윤리관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는데도 너무 일상화 되었기에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외부인의 눈으로 볼 때야 비로소 이런 점들은 확연해 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객관적 시각이 없이는 사실 대화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유교 못지않게 한국 민의 정서와 종교성에 영향을 미친 무속 신앙과의 대화에 있어서 주의하지 않는 점은 모든 무속인들이 공인하는 경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공통된 무속 신앙’의 내용이 확연하지 않을 수 있고 그래서 대화는 극히 한정된 범위 내에서 아니면 몇몇 무속인의 관점에 한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 그렇다면 가톨릭의 미래는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저는 예언자도 아니고 점술가도 아니기에 가톨릭교회의 미래를 알 수는 없지만, 다양한 종교들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한 가지 점은 알 수 있습니다. 그 점은 바로 한 종교의 미래는 그 구성원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건물을 수도 없이 많이 짓고, 수많은 자산을 보유하고, 또 신자수를 한없이 늘리고 권력자와 재력가들의 후원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종교가 인간에게 해방과 구원의 길을 제시할 수 없다면 지배이념이나 지배도구가 되어 버리고 결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는 점입니다.



- 끝으로, 가톨릭프레스에 바라는 게 있다면 한 말씀 해 주세요.


그동안 들을 수 없었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리가 되고 그렇게 남아주길 바랍니다. 모든 종교와 마찬가지로 가톨릭교회 안에도 인간을 해방·구원으로 이끄는 길과 인간을 억압·구속하는 면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어, 가톨릭교회 구성원들이 후자를 지양하고 전자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관련기사보기를 통해 김경곤 신학자와의 인터뷰 1회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



[필진정보]
김경곤은 종교사학자. 독일 마인츠 대학교에서 문학사와 가톨릭신학 석사학위를, 독일 본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사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고등학교에서 15년 동안 종교문화를 가르쳐오고 있으며,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불교사, 동양종교사, 종교사학 기초개념 등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선불교와 그리스도교에서 본 인간과 구원. 보조 지눌과 카를 라너 비교 연구』가 있고, 「법화경언해 연구」, 「한국 여성·남성상 형성에 있어서 유교가 미친 영향. 조선시대 여성교육서를 중심으로」, 「나사렛 예수와 보살. 종교사학자가 본 길희성의 보살예수론」 등의 논문을 저술했다. 옮긴 책으로는 『왕비와 수도사와 탐식가』, 『세계 종교 올림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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