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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하는 일도 달인의 경지에 이르면...
  • 전순란
  • 등록 2015-09-17 15:5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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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16일 수요일, 맑음


우리가 오면 늘 묵은 쌀을 서울집 테라스에 뿌려주곤 한다. 그런데 요 며칠 참새는 물론 뻔뻔한 비둘기까지 가까이 오질 않고 단풍나무에서 서성인다. 웬 일인가 싶어 지켜보니까 우리 침실 앞에 고양이가 납작이 엎드려 날짐승을 기다리고 있다. 몇 달 전 마당 한 구석에 꿩의 깃털이 수북하게 쌓이고 몸체는 흔적도 없었던 일이 생각났다. 아마도 마당의 돌절구에 채워둔 물을 먹으러 내려왔다가 고양이에게 잡아먹혔으리라.


그때부터는 우리 마당에 어정거리는 노란 털 고양이가 날강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에 밥숫갈이나 구걸하러 오는 참새들을 노리다니 용서할 수가 없어 “요, 나비새끼야 당장 꺼지지 못해?”라고 욕을 하고 신발짝을 휘두르면서 쫓아보냈더니만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도망가주는 동작을 하다 어느 새 도로 그 자리에 와 엎드려 있다.




그런데 해거름에 테라스에 널어뒀던 대추를 보스코가 챙겨다 방안에 다시 널었고 그 새에 뭔가 이상한 게 섞여 있어 자세히 보니 고양이 똥이다. 고양이는 누가 해코지를 하면 반드시 보복을 한다더니 우리 소중한 대추널판에다 똥을 싸놓고 가다니....


정확하게 아침 8시 30분에 지호가 도배하는 일군을 데리고 왔다. 작은아버지라고 소개하여 얼굴을 보니 정말 지호아빠 차사장을 닮았다. 작은아버지이면서도 ‘작은사장’인 조카의 말을 잘 듣는다. 초딩 3학년 때부터 보아온 지호가 40에 들어서서 당당하고 든든하게 자기 몫을 하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엊그제 강연을 간 수녀원에서도 같은 식탁에 앉은 수녀님이, “장상연합회 행사로 미사를 갔었는데 젊은 살레시오 신부님이 미사를 드리더라구요. 근데 강론 말씀이 또박또박하고 저희 수도자들이 깊이 생각하게 해 주셔서 누군가 했는데 뒤에 알고 보니 바로 교수님네 아들 신부님이시더라구요. 그래서 모두 ‘역시나...’ 했다구요.”라는 칭찬을 듣고서 흐뭇했었다는 보스코.





지호 작은아버지는 40년간 도배를 했다는 베테랑답게 혼자서 우리 작은방 전부와 이층 마루 둘레천정을 거뜬히 도배했다. 기계에다 종이를 걸고 길이와 크기를 입력시키니까 종이를 잘라가면서 풀칠을 해내고, 그것을 차곡차곡 접어서 들고는 사다리에 올라가 두 손으로는 도배지를 붙여가고, 발로 걷어차서 풀종이를 풀어가는 품이 가히 경지였다!


보스코는 “아내를 돕는 틈틈이 공부를 하고 틈틈이 대성(大聖) 아우구스티누스를 번역하는” 남자답게, 내가 빨래하게 작은방과 침실의 커튼을 뜯어서 일일이 핀을 빼고, 빨래한 망사커튼과 겉커튼에 다시 일일이 핀을 꼽아서 사다리에 올라가 걸어 준다. 저 나이 때에 저만큼 아내를 돕는 고마운 남편은 드물리라. (“탐나는 사람, 가져가. 공짜로 줄 게...”라던 티찌아나의 농담이 하마트면 입밖으로 나올 뻔했다.)




페친 한 사람이 코엘료 책을 거의 다 사서  읽었다면서, 혹시 책 읽을 사람을 찾는 듯한 글이 떠서 얼른 댓글로 응모했더니만, 오늘 그 책들이 택배로 내게 도착했다! 과자 두 봉지까지도! 폐친 잘 두면 이렇게 반갑고 오진 일에도 당첨된다! 어느 전직대통령이 퇴임 후 하고 싶은 일이 뭐냐는 질문에 “코엘료 책을 잔뜩 쌓아놓고서 실컷 읽고 싶다.”고 답변했다는데 그 대통령 안 부럽다.


오밤중에 초인종이 울린다. 11시 30분! 누군가 싶어 치토폰을 들여다보니 (한진)택배아저씨다! 내가 수리를 부탁한 큰 가방 두 개를 가져다 놓고 간다. 내일 오후에 배달된다는 전화가 와서 내일은 지리산에 내려가야 하니 오늘 중으로 가져다줄 수 없느냐고 부탁한 일이 그제사 생각났다.


정말 저렇게 밤낮없이 수고하는 분들을 보면 절대로 택배비는 깎지 말고, 휴천재에서든 서울집에서든 시원한 오미자차라도 한 잔 드려야겠다. 우리 큰아들 말마따나, 우리의 편리한 일상생활 이면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밤낮 없이 뛰면서 고생하고 심지어 수탈까지 당하는지 안다면....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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