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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차는 자기 발로 걷는 마지막 걸음인데...
  • 전순란
  • 등록 2015-09-19 09:4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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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18일 금요일, 맑음


아침 전화를 받는 엄마의 목소리는 한결같다. 다른 시각에 전화를 하고서 “엄마, 내가 누구게?”라면 으레 “순행이지.”라면서 동생 이름을 대시곤 하는데 아침 7시에 전화를 드리고 물으면 “아침에 하는 건 큰딸 순란이지.”라고 하신다. 습관적으로 내 전화를 기다리고 계시므로 그 전화 없이는 엄마에게 하루의 아귀가 안 맞는 걸까? 올여름엔 그러기를 석 달이었으니...


엄마는 꼭 “너 지금 어디냐?”고 물으신다. 서울이라면 “내려갈 때 들르겠구나.” 하시는 바램이 묻어난다. 양로원의 노인들이야 자식들이 찾아오는 것이 제일 큰 낙이지 무슨 다른 낙이 있겠는가? 보스코가 엄마와 팔짱을 끼고 걸으면 흐뭇한 미소를 띄시며 “우리 큰딸, 우리 사우”라며 만나는 사람마다 소개하신다. 보스코를 다들 아는 분들인데도 말이다(이번 11월에도 “죽은 이들을 사랑하는 계절”이라는 제목으로 그곳 어르신들에게 강연을 하기로 정해져 있다). 우리 다섯 형제는 한 달에 한 번씩 엄마를 찾아뵙기로 의논하였는데 잘 지켜지는 듯하다.



호천이가 전화를 했다. “누나, 기뻐해 주세요. 경사났어요. ‘유무상통’ 기관지에 톱기사로 대서특필됐는데...” 무슨 일이 내 동생을 이렇게 흥분시켰을까? “우리 엄마가, 지팡이도 안 짚어 맨날 얼굴을 깨고 다니시던 자해공갈단 엄마가 드디어 밀차를 밀고 다니셔요.” 그리고 다른 할메들이 “드뎌 밀차를 미시는구먼?”이라면 “우리 아들이 사다줬다우. 힘들면 앉을 수도 있다우.”라고 자랑하시면서 앉아보이기도 하시더란다. 양로원에서 밀차를 밀면서 걷는 일은 자기 발로 걷는 마지막 단계를 의미하는데 엄마가 넘어지실까 염려하는  자식들로서는 그 일만으로도 반가운 소식을 삼아야 하다니... 


보스코는 휴천재 이층 청소를 하고 나는 아래층을 하였다. 구석구석 걸레가 달린 진공소제기를 돌리는 품이 젊었을 적에 기숙사 사감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청소를 시키며 갈고 닦은 솜씨다. 진이엄마도 ‘꿀방’과 ‘진이방’에 십년 넘게 묵힌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마대 푸대로 열 푸대는 넘게 담아 내놓고 있다. 나도 내놓아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지금 내놓으면 ‘아름다운 가게’에라도 가서 새 주인을 기다리겠지만 나중에는 의류쓰레기에 버려질 것들이다. 여자들에게는 옷마다 나름의 추억이 있고, “이담에 더 날씬해지면..” “담엔 언젠가...”하면서 걸어두고 넣어두게 마련이어서 옷가지를 버리기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보스코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86년. 엄마 집에서 짐을 풀었는데 내 옷가지를 지켜보던 엄마가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셨단다. 69학번의 내가 대학시절에 입던 옷들을 결혼 13년후에도 못 버리고 입는다 생각하시니까 당신의 가난을 딸에게 대물림하셨다는 가책이 드시더란다.


작년 가을에 거제 율리아노씨가 자기 집에서 손수 캐다가, 실어다, 심어주고 간 금목서가 꽃을 피웠다. 부엌까지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가 풍겨와 냄새를 따라가 보니 옆마당, 앞마당이 금목서 두 그루에서 뿜는 향기로 가득하다. 님은 가도 향기를 남기고 율리아노씨를 여읜 파올리나의 고독하고 곤고한 삶이 그 향기 끝에 와 닿는다.


명절마다 유리씨가 보내오는 한우가 택배로 도착하고, 아들이 먼데 가고 없다고 관구관에서 보내온 곶감 상자가 (곶감집에) 도착하고, 옥련씨의 한과며 안차장의 모시떡이 풍성한 한가위를 맞이하게 해 주어 고맙고도 고맙다.


20년 족히 된, 감동의 냉장고 냉동실 문이 자꾸 열려서 A/S를 부탁했는데  바로 오늘 오후에 찾아왔다. 이탈리아의 느려터진 서비스에 속상하던 기억 때문에도 ‘감사합니다’를 거듭했더니만 되레 그 총각이 당황하는 표정이다. 아무렴 우리네 귀한 총각들이 밤낮으로 달려 다니는 서비스인 만큼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특히나 한가위라고 평소보다 더 뼛골 빠지게 뛰어야 하는 택배 기사님들도 참 고맙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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