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족 친일 정권이 역사교과서를 국정화 시키려는 작태에 대하여 역사학계를 비롯한 시민사회세력들의 반발이 거세어지고 있다. 그러나 종교계를 비롯한 한국 천주교회는 침묵하고 있다. 역사 정의를 무너뜨리고 반민족 범죄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는 불의한 정권의 악행에 대하여 교회는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지 자못 궁금하다.
일각에서는 천주교회는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의사 표명을 자제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한국교회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정치권력과 야합 또는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일이 얼마나 많은가? 먼저 한 가지 사례만 보자.
천주교회는 2004년부터 참여정부가 추진했던 <사립학교법 개정안>에 대하여 한나라당과 보수 개신교단과 연합하여 ‘사학법 개정안 처리의 철회’ 또는 ‘반대운동’에 적극적이었다. 2004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사회주교위원회(당시 위원장 정명조 주교)는 사립학교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2005년 10월 18일에는 한국주교회의 의장 최창무 주교가 국회를 방문하여 김원기 의장에게 ‘법 개정을 연기해 달라는 청원서’를 국회에 전달한 바 있다.
당시 사립학교법 개정안은 사립학교 재정의 불투명성과 재단의 비민주적 횡포를 바로 잡고자 만든 좋은 법안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민족공동체와 교육의 공동선 보다는 교파 및 종교 재단의 이익에 우선하여 사학법 개정안을 반대하는 과오를 범하였다. 이런 행위들은 일제 강점기부터 변함없이 진행되고 있다. 왜 민족의 고난과 신음소리보다 교파 이익이 우선이어야 하는가? 그것이 과연 복음인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지난 200여 년간 과오를 반성하는 문건 '쇄신과 화해'를 2000년 12월 3일 발표하였다.
[ 한국 천주교 반성문 요지 ]
교회는 그리스도가 완수한 구원의 은혜를 나눠 주도록 부름 받았으나 우리는 그 사명을 다하지 못했음을 고백하며 이런 참회를 바탕으로 자신을 쇄신하면서 민족과 화해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대열에 함께하려 한다.
2. 교회는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분리를 이유로 민족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3. 광복이후 전개된 세계질서의 재편과정에서 빚어진 분단 상황의 극복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에 적극적이지 못한 점을 반성하고 이 과정에서 생겨난 사람들의 희생을 마음 아파한다.
6. 때때로 성직자들도 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귀감이 되지 못하고 권위주의에 빠지거나 외적성장에 지나친 관심을 주는 중 세상풍조를 따르는 때가 많았음을 고백한다.
2000년 12월 3일 대림 첫 주일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민족의 수난과 고통에 수수방관했던 과오를 반성하고, 민족과 함께 하는 교회로 거듭나겠다고 하느님과 민족 앞에서 고해성사를 보았건만, 현재 친일정권이 추진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에 대해서는 왜 그토록 침묵과 방관으로 일관하는지 납득할 수가 없다. 과거사 반성문은 보여주기 위한 쇼였는가?
솔직해지자, 교회는 올바른 과거사 청산을 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민족과 화해하지 못했다. 과거 친일주교들의 행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만일 친일정권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앞장서서 반대한다면 과거사 반성문의 진정성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이토오 히로부미의 노선에 충성했던 주교들의 행적을 살펴보자. 「일제는 그들의 조선 침략 목적을 달성하는 보조적인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하였다. 한일 병합(1910년) 전에 이토오 히로부미는 종교계 지도자들에게 연회를 자주 베풀며, 정치적인 일체의 사건은 일본이, 정신적인 방면에는 종교가 담당할 것을 주장하였다」(최석우 신부,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 한국교회사 연구소, p.359)
천주교회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 권력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였으며, 그러한 합법적인 권력의 테두리 안에서 종교의 자유를 확보하고 포교 활동을 활성화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뮈텔 주교는 “한국천주교회는 정부(일본 정부)와 군인, 경찰 등 행정 당국의 편에 서 있다”(『뮈텔주교 일기』 1910년 4월 25일자.) 라며 일제의 통감정치를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일제의 통감 정치가 조선의 발전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서울교구연보Ⅱ,1908년도 보고서,58면) 천주교회의 민족 현실 인식은 한국인들과 천주교 평신도들의 독립운동 및 민족 운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통감통치가 끝난 후 1910년 8월 29일, 일본의 조선 강제병탄에 대한 서울대교구장 뮈텔주교와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의 입장은 어떠했는가? 주교들의 일기와 서울교구연보의 보고서를 요약하면, “일본은 조선의 합법적인 정부가 되었다. 일본과의 합병에 의해서 조선은 물질적인 이득을 얻을 수가 있어 좋은 일이다. 일본인 관리들과 천주교 선교사 그리고 조선인 신부들과의 사이는 어디에서나 좋다. 일본 정부의 헌법이 인정하는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되어 교회의 안정이 보장되었다”
천주교회와 일제의 우호적인 관계는 일제 강점기 내내 유지되었다. 일제 총독들은 주교들의 성성식에 참석하여 만찬회 연설을 통해 교회 성직자들이 조선통치를 위해 협조해준 일에 감사를 표시하였다. 총독부 설립 25주년 기념식에서는 3명의 주교들과 성직자들을 초청하여 일본 천황의 문장이 새겨진 은잔과 총독부 공로 표창을 선사하기도 하였다.
대구교구장 드망주 주교가 총독부 25주년 기념식에 참가한 후에 기록한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선교 생활 첫 사반세기는 새로운 총독부 활동의 첫 사반세기와 일치하였습니다. 천주교회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천주교회는 합법적인 정부에 대하여 주님의 네 번째 계율의 의무를 알려주었을 뿐입니다.(4번째 계명은 ‘부모에게 효도 하여라’, 일본 정부는 부모라는 뜻, 일본에 충성과 공경을 해야 한다) 일본 정부는 합법적인 정부입니다. 합병 첫날부터 우리의 가르침은 전혀 주저함이 없었습니다.”(『부산교구연보』 1936년도 보고서, 249∼25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