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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 가톨릭프레스 편집국
  • 등록 2015-04-18 09:11:31
  • 수정 2015-04-18 09: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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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그 본질이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과거의 예수, 이스라엘의 예수, 이 천년 전 갈릴래아 호숫가를 걸어 다니며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마르코 1,15)’말했던 예수를 지금 여기로 소환하는 것이다(anamnesis).


그 슬프고 가슴 아픈 예수를 제대 상 위에서 기억하는 것이다. 그의 억울한 죽음과 쓸쓸한 뒷모습을 기억하는 것이다. 미사 때 마다 우리는 과거를 말한다. 그것도 이 천년 전에 쓰여진 복음들과 편지들, 아니 그 보다 먼저 쓰여진 모세오경과 예언서, 시서와 역사서를 읽어 나간다.


왜 그 먼 나라의 과거를 이 천 년이 지난 지금 2015년 그것도 극동 아시아의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읽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과거를 기억하는데 동참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인은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예수가 했던 말과 생각과 행동을 증언하는 사람이다. 그가 어떻게 이 땅의 소외된 사람들과 살아갔는지,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과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어떻게 기쁜 소식을 전했는지를 증언하는 것이다.


그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권력자들에게 말했다.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곳이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구나” (마태 21,13) 예수는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셨다. 성전에서 사고 팔고 하는 자들을 모두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우리는 지금 그 모든 것을 증언하고 있는가? 증언(μάρτυς)이라는 말은 ‘순교’라는 말과 그 어원이 같다.


일정한 시기가 되면 열리는 ‘순교자 현양대회’도 중요하지만 현양만 하고 순교(증언)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어불성설(語不成說)인가! 예수의 말씀을 증언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 아니겠는가 말이다.


이렇듯 그리스도인은 기억하고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이 땅의 억울하고 한 맺힌 사람들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피맺힌 죽음, 갑오년 우금치 전투에서 스러져간 우리 선조들도 모두 예수의 편린이다.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싸우다 죽어간 모든 이들이 예수였다. 한국전쟁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양민들과 군인들이 모두 예수다. 미완의 혁명으로 죽어간 이들, 광주에서, 서울에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이 땅의 민주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운 모든 이들이 예수다.


지난 4월 진도 앞바다 에서 말없이 억울하게 가라앉은 모든 이들이 예수다. 그들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본질이다. 그것은 예수의 길 이전에 인간의 길이다.


시대를 역행하는 대한민국 사회는 이제 기억과 증언을 가로막는다. 기억을 왜곡 조작하고, 증언에는 여러 가지 법의 재갈을 물리려고 시도한다.


기억이 왜곡되면 똑같은 잘못을 반복한다. 증언을 가로막으면 인간은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진다. 삶의 활력을 잃어버린다.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고 본질에서 비켜나가는 삶을 살게 된다.


현대 그리스도 종교에서는 ‘무신론’이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건강한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복음의 기억을 ‘왜곡’하는 자들이 문제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예수를 팔아 장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수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예수의 이름으로 병원과 학교를 사업체로 생각하며 운영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주식회사에서 이윤을 쫓아 지옥까지 따라가며, 예수의 이름으로 타인을 조종, 통제하며 인권과 시민권, 인간의 존엄을 유린하는 범죄들이 얼마나 많이 발생하고 있는가?


그들은 예수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왜곡하고, 앞 뒤 맥락을 끊어 놓고, 구절과 말마디를 잡고 대중을 현혹시킨다. 그들은 복음을 두려워한다. 예수의 다시 오심을 두려워한다. 이 가운데 예수는 사라진 것이다. 교회에서 예수가 사라진 것은 이미 오래 전이었다.


사회의 구조적 개혁은 종교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종교는 거룩함(sacro)으로 자신의 속물스러움(profano)을 교묘하게 위장하기 때문이다. 종교권력을 가진 소수는 끊임없이 공동체의 ‘투명’을 말하지만 정작 그들은 투명하지 않다.


오히려 베일과 신비주의로 꽁꽁 싸고 있다. 권력은 중심에서 멀리 있는 모든 이들을 투명하게 바라보며 그들을 도전적으로 윤리적으로 통제하고 조종하고자 한다.


예전에는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며 세상을 위해 기도했지만 이제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세상의 변화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지만 우리들 삶의 영역은 왜 민주적이지 않고, 투명하지도 않으며 세속만도 못한 불합리와 부조리가 판을 치는가?


왜 교회의 사제들도 쌍용자동차, 콜트악기사의 노동문제, 강정의 평화와 환경문제, 밀양과 세월호의 진실규명을 위해서는 투쟁하지만 교회의 적폐와 모순을 말하지는 못하는가?


왜 세상의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내부의 독선과 아집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하지 못하는가?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가?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1-42) 우리는 먼저 우리의 들보를 거두어 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부족하고 죄스러운 존재들이지만 그렇다고 기억과 증언을 두려워하거나 왜곡하거나 회피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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