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9월 미 의회에서 연설 중에 링컨 대통령, 마틴 루터 킹 목사, 토머스 머튼과 도로시 데이 등 네 인물을 언급하였다.(관련기사: 교황, 링컨 대통령 등 4명 위대한 미국인으로 거론) 교황의 숨은 의도는 1930년대 가톨릭 노동운동을 이끈 여성 활동가 도로시 데이를 미국사회에 다시 소개하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미국인에게 비교적 낯설고 특히 미국 가톨릭에 파문을 던진 인물이었다.
1897년 뉴욕에서 태어난 도로시 데이는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던 1917년 11월 백악관 앞에서 여성참정권을 주장하는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고 구금되었다. 당시 20살이던 그녀는 감옥에서 15일 단식투쟁을 하였다. 그 후 그녀는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조합주의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헬렌 켈러가 참여하던 세계산업노동자(IWW)라는 전투적 조합주의 단체에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가톨릭에 귀의하여 사회 활동가로 일하게 된다.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 노동자’라는 신문을 내고 노동 착취와 차별을 고발했다. 가난은 피할 수 없는 사회질서의 일부라는 편견을 그녀는 비판하고, 가톨릭 내에 퍼진 근본주의와 대결하였다. 그녀는 2차 세계대전과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를 비난하였다. 그녀는 미국에 퍼진 당대의 지배적 사상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도로시 데이는 베트남전쟁을 평화와 가톨릭의 이름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미국 가톨릭계의 정서는 이와 달랐다. 스펠만 주교는 베트남을 방문해 미국 장병들을 위로하면서 “베트남전쟁은 문명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했다.
1940년대 말 뉴욕의 가톨릭 묘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했다. 당시 뉴욕 교구장 스펠만 주교는 파업 노동자들을 공산주의 음모에 빠진 자로 몰았고 모든 협상을 거부했다. 도로시 데이는 노동자들을 옹호하며 스펠만 주교를 비판하였다. “주교는 우리의 영적인 지도자일지 모르나, 우리의 통치자는 아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곧 그녀는 미국 가톨릭교회에서 비난받고 고립되었다.
스펠만 주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악명을 떨치던 인물이었다. 65년 10월 공의회 마지막 회기에서 사목헌장 ‘Gaudium et spes’ 채택을 놓고 주교들 사이에 의견이 대립되었다. 가장 뜨거운 논란은 문헌 79, 80항을 두고 벌어졌다. 국가의 정당방위를 옹호하는 주교들과 방어용 목적이라도 전면적 섬멸 전쟁을 반대하는 주교들이 대립하였다. 전임 교황 비오12세가 섬멸전쟁은 어떤 경우에도 거부되어야 한다고 밝혔지만, 교황의 의견에 반대하는 주교들도 많았다.
섬멸전쟁을 찬성하는 주교들 선두에 뉴욕 교구장 스펠만 주교가 있었다. 그는 핵무기 존재를 옹호하면서 핵무기를 통한 위협이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자유를 지켜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79, 80항뿐 아니라 사목헌장 자체에 반대표를 던지자고 선동했다. 65년 12월 4일 투표에서 사목헌장에 반대하는 표가 전체 투표의 20%에 달하는 483표에 달했다. 스펠만 주교는 후에 추기경이 되었다.
스펠만은 한국과 인연이 있다. 1945년 9월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자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는 9월 26일 명동성당에서 감사 미사를 드렸다. 군정장관이던 가톨릭 신자 아놀드, 미국 군종교구장 스펠만 주교 등이 참석하였다. 미군은 노기남 대주교를 비롯한 친일 부역자를 처벌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아놀드 군정장관이 가톨릭 신자임을 착안하여 노기남 대주교는 군정 당국에 여러 가톨릭신자를 추천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이 장면이다.
교황은 미국 가톨릭교회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추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교황은 도로시 데이를 미국 가톨릭에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복권시켰다. 교황의 뜻은 분명하다. 도로시 데이의 삶이 옳았고 도로시 데이를 힘들게 했던 미국 가톨릭교회는 잘못했다는 것이다.
스펠만 추기경과 최기산 주교는 노동자들의 애원을 외면하고 대화를 거부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스펠만 추기경에게 미움 받던 도로시 데이를 복권하였다. 스펠만 추기경처럼 처신하는 최기산 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어떻게 생각할까.
교황과 도로시 데이가 믿는 하느님과 스펠만 추기경, 노기남 대주교, 최기산 주교가 믿는 하느님은 같은 분이실까. “가난한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느님의 도구인 우리가 그러한 부르짖음에 귀를 막는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뜻과 그분의 계획을 거스르는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