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잡고 웃은 일처럼 신명나는 일이 있을까. 신명나게 웃을 수 있는 일도 신명나게 함께 웃을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세상이 돈에 미친 것처럼 돌아가는 요즘, 신명나게 웃을 일은 더더욱 많지 않다.
웃으려면 먼저 서로가 공감해야 한다. 서로 같은 경험이 있을 때 공감은 두 배가 되고 백배가 되기도 한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도 공감이 없으면 오래 할 수 없다. 몇 번은 의무나 사명감으로 할 수 있지만 공감이 없으면 오래 가지 못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교로 증거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스승의 유언을 목숨을 바쳐서 살아낸 것이다. 그런 순교의 힘이 어디에서 나올 수 있을까. 그건 아마도 예수님께 받은 수많은 사랑 때문일 것이다. 즉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공생활의 경험에서 그 누구에게서도 받을 수 없었던 사랑을 경험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공감이 뼛속까지 스며들었기에 그 사랑의 공감이 몸 밖으로, 마음과 영혼 밖으로 표출된 것이 아닐까.
예수님의 사랑의 길,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공감의 길을 가는 사제들. 그 공감의 길은 못자리 신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 제자들이 공생활 동안 예수님께 특수훈련을 받았다. 신학교 생활은 이러한 공생활의 교육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다.
광주신학교에서 6년 동안 함께 한 동기신부들이 20년 만에 처음으로 모이는 날이다. 부산‧광주‧전주‧제주교구 동기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그 설렘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인생의 반 이상을 스승 예수 제자의 길, 사랑과 정의와 평화로 이루어진 공감의 길을 걸어온 벗들이다. 그저 함께 있는 시간만으로도 우린 서로에게 공감이 되는 벗들이다.
신앙의 순교자들이 신앙의 터전을 이룬 울산 언양성당에서 모였다. 군산에서 형신부가 진안에 들려 함께 동행했다. 형과 단 둘이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처럼 행복했다.
“오늘 누가 누가 올까. 몇 명이나 모일까”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며 설레는 마음을 달랬다. 신학교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들을 하나씩 꺼내서 해바라기꽃을 피우며 달려갔다. 언양성당 사제관에 들어서자 “아 형. 진짜 오래만이네요. 20년 만에 처음이네요. 우리 아우들도 그대로네”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을 서로 손 잡으며, 포옹하며 나누었다.
저녁 7시, 식사장소로 이동했다. 언양 불고기 대신 한우를 구워 소주와 막걸리 잔을 주고 받았다. 큰형님의 건배로 시작된 자리, 우정만 그득한 자리, 술맛도 고기맛도 꿀맛이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아우는 숯불에 연신 고기를 구워냈다. 산골짜기에서 고생하는 형을 챙겨주는 아우의 사랑에 가슴이 숯불처럼 달아올랐다.
오래 두어도 변치 않는, 6년 동안 한 솥밥과 한 성당, 한 침실과 강의실,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아파했던 5월 광주, 망월동의 역사적 기억까지… 우리의 우정은 변할 수 없는 사랑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나는, 6년 동안 동고동락한 벗들이 함께 나누어준 아픔과 고통, 고뇌와 좌절에서 오뚝이처럼 일어나 어깨동무한 결과였다. 그 연대에서 피어난 사랑과 정의, 기쁨과 평화, 이 모든 것들이 뿌리가 되고 줄기가 되어 자라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시대의 아픔, 가난한 이들을 향한 연민, 정의와 평화에 대한 열망, 이 땅의 하늘나라를 향한 열정과 사랑이 나를 지탱해줬고 지금의 나로 서있게 해 준 것이다. 스승 예수를 향한 열망과 사랑, 그 한 분 하느님의 무한한 지지와 사랑 덕분이었다.
우리의 공감은 2차까지 이어졌다. 맥주를 마시며 그 시절 신학교와 이 땅의 하늘나라 구현의 현장에서 있었던 일화들로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감사와 기쁨의 잔치였다. 똘래(퇴학)를 당할 수 있었던 일화의 긴장감도 웃음폭탄이 되었다.
잠이 많은 형이 아침미사 가기 전에 샴푸로 양치질을 하다가 “이 맛이 아닌데” 수도꼭지에 입을 대는 수간 입안에서 솟아난 거품 이야기, 미국에서 포 스프라이트 주문을 했는데 포 프라이 치킨과 포 감자튀김이 나온 이야기, 태국교포 사목하는 형에게 휴가를 갔다 바나나보트를 탔는데 보트가 깊은 바다로 나가더니 구명조끼 단추가 풀어질 정도로 급커브를 도는 바람에 형 혼자 바나나보트에 남고 아우 둘이 바다 속으로 빠졌다. 아우 둘이 물 밖으로 나오자, “머시기야 니 어딘노 머시기야” 고함을 지른 이야기 등등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이제 그만해라 배 아파 죽겠다” 해도 이야기가 그치지 않았다.
가능한 퇴학을 시키지 않으려고 애간장 타셨던 학장 신부님, 가방 속에서 소주병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데도 가방을 열어보라 하지 않은 교수 신부님, 대침묵 시간에 월담해서 술을 마시고 온 사실을 알고 반성문 한 장으로 넘어가신 학생처장 신부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눈감아 주신 그 사랑 이야기에도 웃음꽃이 피어났다. 사제관으로 돌아와서도 계속된 우리의 추억담은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를 폭죽처럼 쏘아 올렸다. 새벽 두 시,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거실에서 아우들과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뜬 아침, 기쁨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진안고원 골짜기에서 공소할머니들과 산지 8년, 사목권이 없어 그동안 한 번도 할 수 없었던 가정방문을 본당 신부님의 배려로 처음 가는 날이다.
동기들과 목욕탕에 갔다. 2층 온탕에서 단풍이 곱게 물든 산들을 보았다. 우리들의 우정만큼이나 고운 단풍, 그 고운 단풍 숲에 오늘 방문할 할머니 할아버지 고운 얼굴들이 떠올랐다.
황태 해장국을 먹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을 뜨거운 악수로 달래고 차에 올랐다. 형과 둘이서 진안으로 돌아가는 자동차 안, 도란도란 어제 밤 “아이고 배야” 일화들을 되새기면서 한바탕 웃었다.
수많은 웃음들 속에 새겨진 아우의 아픔 하나가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은 은총이었다. 세상과 시대의 아픔에 함께 하며 농민과 가난한 이웃을 구체적으로 챙기고 그 누구보다도 소명과 열정을 다 바친 아우신부였다. 그런 아우에게 교회와 세상에서 희망을 보지 못하는 사제직의 권태기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그것은 유혹이었다. 사제직의 소명과 열정이 강한 만큼 권태기도 강하게 휘몰아 닥쳤던 것이다.
그 어떤 시련과 고통도 바람처럼 지나간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가슴과 마음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사제직을 떠났다. 그 후 핸드폰에 저장된 신부들의 이름을 하나씩 지우게 되었다. 신부들 이름을 지우고 나니 전화 걸 수 있는 전화번호가 몇 개 남지 않았다. 충격이었다. 30년 가까이 걸어온 길을 다시 뒤돌아보게 되었다. 은총의 시간이었다. 다시 사제의 길, 공감의 길, 초심의 길로 돌아와 발령을 기다리고 있다는 아우 신부의 가슴 떨리는 소식이다.
하느님의 자비로 다시 사제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사제의 길 20년 중에 가장 많이 웃었던 선물보다 귀한 은총의 선물은 아우 신부가 첫 마음으로 돌아와 다시 사제의 길, 공감의 길을 가겠다는 선물이다. 아우 신부의 그 결단에 눈물이 핑- 도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내년 동기신부 모임 때 아우신부를 기쁜 얼굴로 만날 수 있기를 첫 마음으로 기도하련다.
두 손 모아 간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