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에 나오는 ‘모든 성인의 통공’이란 단어는 남을 위한 기도, 즉 전구를 가리킨다. 서로 남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은 참으로 더 아름답다. 남을 위한 기도가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여러분은 여기 남아서 깨어 있으시오.”(마르코 14,34)하고 예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예수는 제자들의 전구를 기대하시지 않았을까. 프란치스코 교황이 당신을 위한 기도를 사람들에게 부탁할 때, 교황은 신자들의 전구를 의식하는 것 같다.
로메로 대주교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렇게 착한 양떼와 함께라면, 착한 목자 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자 가난한 신자들은 “이렇게 착한 목자와 함께라면, 착한 양떼 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라고 화답하였다. 로메로 대주교와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 안에서 일치하였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 존경하는 성철 스님이 남긴 말씀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 성당에 다니기보다 남을 위해 기도하러 성당에 다닌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고 아름답다. 진정한 기도는 개인주의의 기초가 아니라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한 아름다운 기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기도하지만, 남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런 기도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욱 황폐하게 만들 뿐이다. 그런 기도를 하느님께서 어여삐 여기실 리 없다. 남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자기 모습에 다가서게 된다. 남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할 수 없다.
칼 라너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아마 90%는 가짜 기도일 것이다.” 엉터리 기도, 가짜 기도가 교회 안에 흔하다는 말이다. 기도를 개인주의로 연결하는 갖가지 요설은 악마의 속임수에 불과하다. 기도는 개인주의와 아무 관계없다.
나 지신의 고뇌를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보여드리고 의탁하는 일도 훌륭한 기도다. 그러나 남의 고통을 마치 내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며 하느님께 전구할 때 기도는 진짜 기도가 된다. 그런 기도는 하느님을 기쁘게 한다.
진짜 기도가 드물고 기도를 업신여기는 세상에서 우리는 진짜 기도를 선포하고 증거해야 한다. 기도는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행동으로 하는 것이다. 입만 천국에 도착하고 나머지 몸은 지옥에 도착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세계 평화를 위해, 이웃 종교를 위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자. 나와 이해관계가 가장 먼 사람을 위해 먼저 기도하는 것이 좋다. 가난한 사람들, 역사의 희생자를 위해 먼저 기도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기도하다 보면 자신이 서서히 좋게 바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기도가 세상을 즉시 바꾸진 못하지만, 기도하는 우리 자신이 어느새 회개에 가까워진다. 기도 없이 회개 없다. 기도하지 않으면, 불의한 세력에 끈질기게 저항할 힘을 잃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