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22일 일요일, 흐림
“여보, 7시 15분이야. 공소예절 가야지.” 갑자기 머리에 쥐가 난다. “아니, 7시 30분에 예절이 시작하는데 이제사 깨우면 어떡해요? 머리를 산발하고 갈 수 없으니 머리만 빗고 갈게요.” 그새 벌써 보스코는 사라지고 없다. 혼자서 투덜거리며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는데 돌아오는 발걸음소리가 들린다. “서두르지 말아요. 공소에 아무도 없어. 오늘이 넷째 주잖아? 가밀라 아줌마도 오시다가 아무도 없다니까 그냥 돌아가셨어.”
전에는 본당신부가 네 번째 주일에 와서 저녁미사를 드렸는데, 지금 신부는 무슨 심통인지 주일미사도 안 오고 문정공소를 아예 폐쇄상태로 만들어버렸다. 사제 하나의 미숙한 갑질로 본당이나 공소공동체가 산산조각 나도 한 마디 없이 참아 견디는 것을 보면 천주교 신자들은 참 대단하다. 내가 몸담았던 개신교라면 목사가 열 번은 쫓겨났을 게다. 아무튼 넷째 주일에는 각자가 알아서 성당미사를 가기로 해서 우리 부부는 운봉이나 성심원 미사를 다니고 있다.
오늘이 체칠리아 성녀의 축일이어서 내 주변의 체칠리아들에게 축하전화를 했다. 체칠리아 장장장장 수녀님, 양체칠리아, 모자 체칠리아, 도정 체칠리아 등등등. 9시 30분 성심원 미사에 맞추느라 전속력으로 차를 몰았다. “여보, 나는 왜 매일 이렇게 미친 듯이 달려다녀야 할까? 뭔 팔자가 이리도 고달플까?” “아마도 당신이 살레시안의 엄마라서 그럴지 모르지.”
로마 중앙역 바로 곁에 돈보스코 성인이 직접 지은 사크로 쿠오레(예수성심) 성당이 있다. 그 역에서 40년간 역원과 역장을 한 사람이 어느 살레시오 신부님에게 털어놓더란다. “제가 40년간 이 역에 근무했는데 기차가 기적을 울리고 차바퀴를 돌리는 순간 검은 수단자락을 날리며 달려오는 사람은 영락없이 살레시안들이었답니다.” 역이 지척에 있으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볼일을 보다가 수단을 펄럭이며 달려오는 신부님들! 그만큼 일이 많고 그만큼 바삐 사는 분들이다. “살레시안들의 사인(死因)은 오직 하나! 과로사(過勞死)!” 라는 농담도 있다.
성심원 준본당의 주임이신 유신부님이 미사를 드리는 열심에는 누구나 고개를 숙인다. 특히 신앙고백을 하는 순간 “믿나이다, 믿나이다!”를 노래로 하는데 그 노인 사제의 우렁찬 소리는 웬지 꼭 믿어야 할 것 같은 간절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평소에 ‘살아있는 예수님’처럼 나환우들과 동고동락해오신 삶에서 우러난 소리여서 저런 분이 믿는 하느님이라면 우리도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리라.
미사가 끝나고 성심원에서 일하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님댁에서 차 대접을 받았다. 스스럼없이 손님을 대하고 누구에게나 따뜻한 친절은 사부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 그대로다. 서울 가리봉동에 있는 모원에는 보스코가 가서 강연을 한 적 있고 살레시안들과 인연이 깊다.
수녀원에서 나오다 실비아 수녀님의 초대로 그분의 숙소에 들러 우리 부부가 떡국대접을 받았다. 사랑의 시튼회 수녀님으로 성심원에서 정양을 하고 계시는데 오래오래 계룡산에서 피정의 집을 관장해 온 분이다. 소박한 삶이 배어 있는 단간 방에서 우리 셋은 맛있게 떡국을 먹으면서 듣는, 영성피정으로 내공을 쌓아오신 수녀님의 경험담이 그 떡보다 더 맛있었다. 맘과 영혼을 앓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걸으며 하느님의 치유의 손길을 많이도 목도하신 얘기들이었다.
성심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미루네 매장에 들러 차 한 잔을 대접받고 한바탕 웃음을 웃고 글피를 약속하고 헤어졌다.
산청에서 조그마한 케이크를 하나 사들고 도정 체칠리아 영명축일을 축하하러 올라갔다. 문정에 들어와 살면서 우리가 각별히 친하게 지내는 부부일뿐더러, 오늘은 늙으신 친정어머니(외동딸 체칠리아를 홀몸으로 키우셨다)도 와 계시고, 작은딸과 사위와 손주 손녀도 놀러와 있는 자리여서 그 댁의 행복을 함께 나누면서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스.선생 내냉고에 일년간 맡겨놓은 식재료들을 한차 가득히 싣고 내려와서 저녁 내내 부엌에 정리해 넣고 나니 또 자정! 전순란은 차운전만 아니라 살림살이도 방방 뛰는 하루여얀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