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희년을 맞아 자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칙서 ‘자비의 얼굴’에서 현대는 자비를 잃어버린 시대라고 말한다. 남한 사회에서도 요즘 자비를 잊은 지 오래된 것 같다.
‘자비’를 신앙의 방향으로 삼는다는 종교마저 최근 들어 자비롭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가폭력과 자본폭력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내쫓는 것을 보면 종교의 존재 이유가 의문스러울 때가 많다.
천주교 명동성당은 이미 자비를 잊은 지 오래다. 최근 인천성모병원 노조에 대한 인천 주교들과 교황대사의 태도를 보면 한국 가톨릭에는 자비가 없었다.
남한사회는 자비를 잃은 지 오래다. 남한에서의 자비는 그저 자선행위나 좋은 일을 한다는 사회복지의 이름을 달고 하는 사회사업일 뿐이다.
교회에서는 이와 같은 원인으로 개인주의를 꼽는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혼동한 데 따른 오해다. 개인주의는 쉽게 말하면 남과 남이 서로 피해가 없는 걸 바라는 것이다. 개인주의에서 원인을 찾는 것은 공동체가 당연히 가져야 할 복지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위험한 태도이다. 이 태도는 자비를 왜곡할 수도 있다.
남한에서 아무런 검토 없이 성급하게 들여온 신자유주의 경쟁과 성과급 경쟁 체제가 자비를 자선으로 떨어뜨렸다. 자비의 정의를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자비라고 할 때 떠오르는 것은 남을 돕는 일, 용서, 관용, 그리고 동정심이다. 그 가운데 용서와 동정심이 자비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들이다. 그러나 이런 정의와 개념이 오히려 자비를 왜곡하고 약화시킬 수 있다.
남을 함부로 용서하라고 강요함으로써 정의가 은폐된다.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는 사회 프로그램에 돈을 내면 그들에게 보태주겠지 하는 생각을 갖게되고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인권현실에 눈을 감게 한다.
자비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동정과 무책임한 용서, 관용으로만 자비를 생각한다면 잔인한 경쟁체제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고 가난한 이웃들을 소외시키는 것이다.
자비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정의’이다! 이는 용서의 진정한 의미가 정의라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독재자를 함부로 풀어주고 피해자들을 무시한 용서는 자비가 아니다. 잘못된 용서 때문에 독재에 대한 판타지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것은 김대중 국민의 정부와 한국 가톨릭교회의 매우 큰 과오 가운데 하나이다.
동정심이 앞선 나머지 사회적 희생자들의 인권상황은 무시된다. 거대 사회사업시설에서 좋은 일을 한다고 언론과 방송에 소개되는 일이 자주 있다. 그리고 몇 년 뒤, 그 사회사업시설에서 인권침해가 발생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지난 8일 자비의 희년이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미사 후 자비의 문을 여는 예식이 있었다. 바로 몇 시간 뒤 성 베드로 대성전 건물에서는 회칙 ‘찬미받으소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이미지를 선정하여 건물전체에 비추는 행사가 있었다. 이는 자비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도 함께 한다는 의미이다.
무엇이 자비일까? 간단하다. 거대사회사업시설과 일부 사회사업시설에 있는 장애인들과 수용인들이 스스로 지역사회 안에서 독립하여 일원이 될 수 있도록 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사업이 사회복지의 탈을 쓰고 있는 지금, 인권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
'피해자들을 배려하지 않는 용서'에 대해 반성하고 '가해자들이 죄를 인정'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두환과 노태우 두 독재자들을 다시 감옥으로 보내고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4대강 파괴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에게 “지겹다”, “그만 하라”고 하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고 응원하고 도와주는 것이 자비다. 이는 성폭력과 살인 등 범죄 피해자들과도 함께 응원하고 도와주는 것이된다.
4대강을 다시 돌려놓고, 설악산 케이블카와 제주 미해군기지 등 무분별한 토건 사업을 중단하는 것이 자비다. 무분별한 송전탑건설을 중단하는 것이 자비다. 핵발전소를 폐쇄하고 건설을 중단하는 것이 자비다. 성소수자, 에이즈감염인, 성매매 피해 여성들이 사회에서 차별 없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 자비다. 동물원과 일부동물보호 시설에서 동물들이 건강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자비다. 야생동물들과 공존하도록 하는 것이 자비다.
여기서 다루지 못한 피조물과 사람들도 많다. 이들에 대해서도 자비가 함께하길 바란다. 자비의 진정한 의미는 정의와 공존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생각하는 자비도 바로 정의와 공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