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 상황은 예수가 살던 시대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당시 유다 사회는 로마군대의 지배하에 살던 식민지 상태였다. 오늘 한국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다. 절망이 모범 정답처럼 권장되는 나라다. 백성의 삶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하였다.
절망이 가득한 오늘, 예수 오심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가. 예수는 이미 오셨고 매일 우리 곁에 계시지만 우리는 왜 예수를 계속 기다리는가.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이 먼저 인간 안으로 들어오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인간이 하느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성 이레네우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으니, 이제 인간을 보면 된다. 사람을 보는 것은 이제 하느님을 보는 것과 같다.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이 되셨으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중하면 된다.
“인간이 됨은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인간은 초월과의 접촉에서만 비로소 참 인간이 된다. 역사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일은 역사 안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초월자를 만나는 일이다.
하느님이 역사 안으로 오셨으니 역사는 단순한 인간만의 무대가 아니다. 하느님이 예수의 모습으로 역사 안에 오셨으니 역사는 초월자를 만나는 자리가 되었다. 하느님을 더 이상 구름 위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하느님은 역사 안에 가난한 사람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역사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면 된다. 이것이 하느님이 인류에게 제시한 희망이다. 이러한 희망을 성탄절에 우리는 깨닫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이제 우리에게 없다. 성탄절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요 희망이다. 그러나 성탄절은 돈과 권력 위에 교회를 세우려는 사람들에게 경고요 심판이다.
예수 탄생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 가난한 교회는 비롯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 가난한 교회는 우리 시대의 유행이 아니라 예수의 요청이다.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는 가난한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일이다.
한국천주교회는 교회 제도 이전에 먼저 성서를 알았다. 평신도가 교회를 이끌었고 박해받는 순교교회였고 가난한 교회였다. 성서, 평신도, 순교, 가난이라는 아름다운 전통이 한국천주교에서 지금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천주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도 아니고 가난한 교회도 아니다. 한국천주교회는 갈수록 부유해지고 있다. 성직자 중심주의는 날로 강화되고 있다. 이 길은 교회의 길이 아니다.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한다. 특히, 주교들과 사제들은 깊이 회개해야 한다.
돈과 권력에 의지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교회가 걸어야 할 길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걷는 교회가 진짜 교회다. 가난한 사람들이 곧 교회다.
로메로 대주교는 성탄 미사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예쁘게 장식된 성탄절 구유에서 아기 예수님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 밤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영양실조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들 가운데에서 아기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대문 앞에서 신문을 덮고 잠을 청하는 가난한 신문배달 소년들 사이에서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는 화려한 성당에는 오시지 않는다. 예수는 세월호 희생자, 백남기 선생, 한상균 위원장과 함께 계신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오신다. 세월호와 노동자를 언급하지 않는 성탄절 설교는 의미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