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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페스 포럼 : "폭력을 넘어서기 위하여" -1부
  • 이찬수
  • 등록 2015-12-31 10:46:31
  • 수정 2015-12-31 11:5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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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 현실 속에 있는 종교가 평화에 공헌할 수 있을까. 평화를 내세우는 종교인이 도리어 폭력에 공헌하는 것이 아닐까. 종교 및 평화 연구자들이 구조화된 폭력적 현실을 진단하고, 종교의 초라한 실상을 폭로하면서, 평화를 상상하는 토론을 벌였다. 대화의 초점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본의 젊은 철학자 카야노 도시히토의 책 『국가란 무엇인가』의 시각을 공유하면서 구조적 폭력의 현실을 종교와 연결 지으며 다음과 같이 첫 번째 집담회를 가졌다. 모임 이름은 “레페스 포럼”. 레페스(REPES)는 REligion and PEace Studies의 약어이다.


토론자(가나다순): 

김근수(가톨릭프레스 발행인, 해방신학)

김대식(대구가톨릭대 대학원 강사, 종교학)

류제동(성공회대 연구교수, 종교학)

원영상(원광대 정역원 연구교수, 일본불교학)

윤인중(에큐메니안 운영위원장, 인천평화교회 목사)

이관표(연세대 겸임교수, 철학/신학)

이병두(종교칼럼니스트/북칼럼니스트, 전 문화체육관광부 종무관)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 사회)

전철후(원불교 강남교당 교무, 원불교학, 기록)

정주진(평화갈등연구소, 평화학박사)

홍정호(연세대 강사, 선교학)





국가와 종교의 폭력들


- 이찬수: 평화를 이야기하고자 할 때 먼저 맞닥뜨리는 현실은 폭력입니다. 특히 오늘날의 구조적 폭력은 국가의 형성 과정과 긴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사실 국가라는 것 이전에 폭력이 있었습니다. 폭력이 사나운[暴] 힘[力]이라면, 압도적 폭력이 다른 폭력을 제압하거나 포섭하고, 그 폭력의 영향력 안에 있는 이들이 자의든 타의든 동의하면서, 폭력이 권력이 됩니다. 이 권력을 기반으로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되었지요. 국가의 형성과 작동 원리를 보면 구조화된 폭력의 모습이 보입니다. 가령 세금을 내기 싫어도 내야 합니다. 안내면 더 큰 힘에 의해 제재가 가해지지요. 


종교가 본래는 이러한 국가라는 경계를 넘어서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국경의 틀 안에 갇혀있을 때가 많습니다. 종교인이 다른 나라에 선교를 하려 해도 여권 혹은 비자를 발급받아야만 가능하지 않습니까? 종교가 국가라는 체제를 정당화해줄 때도 많습니다. 가령 중국에서 국가라는 폭력과 종교의 한계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에는 정부의 힘이 강력해서 종교는 공산당의 통치 범위 안에서만 인정이 됩니다. 


종교는 본래 보편성을 띄지만, 세속적 정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종교가 권력을 넘어서, 그리고 권력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인 국경을 넘어서 존재할 수 있을까, 권력을 넘어선 종교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국가라고 하는 구조적 폭력의 틀을 넘어설 수 있을까, 종교도 실제로는 폭력의 구조 속에서 타협을 하고 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 정주진: 국가 폭력이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선은 사람들이 때로 국가폭력을 알면서도 왜 받아들이고 일정부분 인정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국가폭력에 대해 종교가 비판을 하는데, 과연 종교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종교가 국가폭력을 비판할 때에도 정작 종교는 그 구성원들에게 절대적 복종을 강요하면서 폭력의 구조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종교가 국가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종교 내부의 폭력적 구조에 대한 비판을 병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 폭력과 세금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람들이 세금을 내는 것은 국가의 순기능에 대한 기대 때문입니다. 국가가 어떤 면에서는 폭력을 독점적으로 사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런 힘을 가지고 자신을 보호해 주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세금을 내는 국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국가폭력에 저항한다는 명분으로 세금납부를 거부하고 탈세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지금의 사회에서는 국가의 폭력 독점과 동시에 사람들이 알면서도 왜 그것을 인정하고 필요로 하는지도 성찰해봐야 합니다.  


- 이찬수: 물론 사람들이 국가의 폭력을 인정하는 것은 국가가 안전을 제공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안보라는 말을 내세웁니다. 안전은 스스로 확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실제로는 누군가에 의해, 그러니까 국가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라는 인식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폭력을 받아들이는 건 국가가 안전을 제공할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폭력을 기반으로 성립된 국가가 제공하는 그런 안전을 바라는 상황에서 신의 도움을 바라고 우주적 보편성을 지향하는 종교적 주체성이란 가능한 것일까요? 중국의 예에서처럼, 국가폭력의 구조 속에서 종교는 폭력을 승인하거나 재생산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 원영상: 이찬수 교수님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탐색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종교와 국가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불교에서는 그것은 결국 인간의 생각이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봅니다. 근원적인 내적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종교가 만들어졌고, 외적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인간이 부처이고, 부처님의 화현이라고 보기 때문에 근원으로 내려가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폭력의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 그러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러한 관념은 늘 한계에 부딪힙니다. 현실에서는 폭력이 생산되고 지속되는 구조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시간을 두고 철학적으로 좀 더 깊이 논의를 해 보아야 합니다. 


- 김근수: 폭력을 주제로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논의하는 데 있어 가톨릭교회의 입장이 하나의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교회와 국가의 폭력을 여러 가지로 나눠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가톨릭교회가 구원과 처벌이라는 장치를 통해 신도들을 장악하는 면에서 영적 폭력을 행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갈등과 저항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견제와 타협을 통해서 현재까지 그 틀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남미, 아프리카로 확장되면서 교회와 국가의 또 다른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20세기 중반부터 교황이 지역교회를 지도방문하고 관찰하면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 있습니다. 폭력을 주제로 한 가톨릭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앞으로 더 많은 토론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들의 배제와 포섭 장치


- 김근수: 그런데 카야노 도시히토의 글을 요약하신 이찬수 교수님의 글 가운데 문제제기를 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인간이 신의 은총으로 창조된 그 자체로 귀한 피조물이기에 인간은 천부적으로 존엄하고 자율성도 부여 받았다고 선포한다. 그러면서도 그 존엄성과 자율성도 결국 교회에 의해 승인될 때에만 진정성이 인정된다고 보는 자세도 견지한다”고 하셨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 이찬수: 가톨릭은 특히 제도적 차원에서 이원론적입니다. 여러 해 전에 다양한 종교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열린 미사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미사를 집전하면서 진심어린 표정으로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만 떡을 나누어 주더군요. 그러한 가톨릭의 태도나 입장이야 저도 진작부터 알고 경험하던 사실이지만, 열린 미사에서의 시연조차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배제와 포섭이 동시에 작동하는 체계를 보여주더군요. 가톨릭교회에서 안과 밖을 나누는 이원적 태도는 가톨릭의 특징이자 한계라고도 생각됩니다. 


- 김근수: 그것은 사제 개인의 도덕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성체’를 바라보는 신학적 입장에 따라 신자와 비신자를 나누는 가톨릭교회의 교리 체계에 따른 것입니다. 가톨릭에서 세례 받은 사람에게만 성체를 주는 것을 배제와 포섭의 시각에서 보는 것에 찬성하기 어렵습니다. 가톨릭의 내부 지침 정도로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개신교와 신학적 논의가 좀 더 진전된다면, 성체 배분 문제는 미래에 달라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올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지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인간 평등을 거부한 가톨릭의 방침은 달라졌습니다. 중세 가톨릭교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현대 가톨릭교회가 인간을 평등하게 대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것은 이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 홍정호: 제가 보기에 이찬수 교수님께서 제기하신 문제는 가톨릭교회에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배제와 포섭을 통해 내부와 외부를 경계 짓는 방식은 주체의 자기중심성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적 종교들의 공통점입니다. 억압만으로는 안 되니까 관용을 통치의 방식으로 적극 활용하는 것이죠. 설정된 경계 안에서 상대의 자율성을 적당히 인정해 주면서 통치의 외연을 확장하는 방식입니다. 가톨릭교회의 배제와 포섭의 방식은 오히려 순진한 면이 있습니다. 의례를 통해 통치가 작동하는 방식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떡을 못 먹게 하니까 금방 들통 납니다. 


그런데 개신교의 통치는 눈에 보이는 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말(설교)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더욱 미시적인 차원에서 심화된 방식으로 수행됩니다. 설교자의 말이 자유와 해방, 심지어 해체를 지향하는 경우에도 통치의 기계는 멈추지 않습니다. 발화자가 자기 말에 의해 수행되는 통치를 스스로 인지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사제가 제대에 오르는 순간, 목사가 강단에 오르는 순간에 그리스도교의 통치기계는 작동합니다. 차라리 의례를 통해 배제와 포섭의 경계를 가시적으로 구획 짓는 가톨릭의 체계가 솔직한 것일지 모릅니다. 개신교의 배제와 포섭장치는 눈에 보이지 않아 포착이 더 어렵습니다. 개신교뿐만이 아닙니다. 교리와 제도를 갖춘 종교라 이름 붙이는 것들은 대체로 그러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종교’는 있는가


- 김근수: 우리가 언어로는 ‘종교’라는 단어를 쓰지만 실제는 서로 다른 개별 종교들이 있을 뿐입니다. 종교를 운동 경기에 비유한다면, 야구도 있고 축구도 있고 배구도 있는 것처럼, 개별 종교가 이미 서로 다른데, 뭉뚱그려 ‘종교’라는 이름을 사용하면 논의가 다소 복잡해지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개별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먼저 논의하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 류제동: 개별종교라고 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불교라고 말하지만, 사람마다 인식하는 불교의 내용이 다 다릅니다. 서로 다른 이해를 갖고 있는데, 어떻게 불교라는 보편언어의 사용이 가능하겠습니까? 이 점에서 ‘종교’라는 낱말도 우리 스스로 한계를 인식하면서 사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 이찬수: 개신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신교의 스펙트럼은 비교적 넓습니다.  개신교를 하나의 종교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주류가 보수적이기는 하지만, 전체를 다 보면 말이 개신교인이지 실상은 서로 다른 종교인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급진적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종교라는 말 혹은 종교 담론이 사회적인 영향력을 갖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종교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종교라는 말의 범주가 넓은 것 같아도 이 범주 안에서 논의할 내용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 정주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종교의 개념이 다소 모호하긴 해도, ‘종교’라는 말은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인들은 국가와 타협을 할 때 개별종교의 이름을 앞세우지 않고 ‘종교’의 이름 아래 모입니다. 개별종교는 세력이 약하기 때문에 국가의 협상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모여야 단체행동도 가능하고 협상도 벌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종교라는 낱말은 추상적인 게 아니라, 국가와의 관계에서 권력을 분배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구체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병두: 그렇습니다. 한국처럼 종교가 서로 갈등하면서도, ‘종교지도자협의회(종지협)’나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등을 통해 ‘종교’라는 이름 아래 결집하여 정치권을 상대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나라가 또 있을지 궁금합니다. 한국에서는 종교 집단이 국가를 상대로 일종의 협박을 하기도 합니다. 세력화 된 집단으로서의 종교 권력은 분명 힘을 갖고 있지만 이것은 결코 옳다고 할 수 없지요. 그런데 ‘종교’라는 이름으로 힘을 행사하는 한국의 특수 상황에 힘입어 ‘신도가 별로 없는 교단’도 이른바 ‘7대 종단’이라는 틀 안에 들어가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합세하면 똑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그 범주 안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정권이 바뀌면 새로 들어선 정부에서 “정교분리 원칙을 지키기 위해 문화부 종무실을 없애겠다”고 말을 꺼냈다가 흐지부지되고 마는데, 이런 일은 조직 축소를 원하지 않는 관료들이 ‘종지협’ 등을 통해 정치권에 압력을 행사하는 측면도 있지만 종교계에서도 ‘청와대 등 정치권과 종교계 사이의 소통 창구’인 ‘종무실’이라는 ‘비정상적인 조직’의 존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죠. ‘종무실’ 업무를 담당하는 고위 관료들도 여러 종교계 지도자들과 정치인‧청와대(BH) 사이의 소통 창구를 맡으면서, 자기 존재감을 높이고 그 덕분에 더 고위직으로 올라가는 경우가 있고, 그러다보니 새로 소임을 맡는 사람도 종교계 업무를 소신껏 하지 못하고 그 눈치를 보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헌법으로 ‘정교분리’를 규정해 놓았지만, 정치권과 관료들 그리고 종교계가 그 ‘분리’를 서로 다르게 ‘자기들 입맛에 맞추어’ 해석하면서 실제로는 ‘정교분리’가 아니라 ‘정교유착’ 내지 ‘상호 활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정치권은 종교계에 대한 막대한 예산을 무기로, 그리고 종교계는 ‘표’를 무기로 서로 협박하고 활용하고 지원하지만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흐름의 최종 피해자는 정치권이 아니라 해당 종교계가 될 것입니다.


- 원영상: 자멘호프라는 사람이 에스페란토를 만들 때 국제 언어를 만들자고 하는 흐름이 있었습니다. 자국에서는 자국어를 사용하되, 다른 나라에서는 에스페란토를 사용하자는 이중 언어 전략입니다. 언어의 지배에 저항하는 평화를 바탕으로 하는 운동입니다. 에스페란토의 이중 언어 전략이 종교에도 적용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불교를 공부해 보니까 종교라고 하는 것은 문화적인 현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문화를 만나 ‘불교’로 꽃을 피운 것일 뿐 다른 문화에서는 다른 종교, 이를테면 기독교로 꽃을 피울 수도 있습니다. 국가라는 주제를 놓고 이야기할 때 경험의 다양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지역과 문화와 언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을 인정할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문화적 평등성을 주장할 수 있다고 봅니다. 종교가 문화적 현상인 것처럼 국가 역시 그 깊이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은 현상에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김근수: 국가와 종교의 대립 구조를 포기하자는 뜻은 아니고 개별종교와 국가의 관계부터 논의를 진행해 나가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내부적으로 서로 성향이 다른 두 세력이 강하게 부딪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에서 가톨릭교회를 일치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집단으로 보고 논의를 시작하면 당황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 내부에서조차 서로 부딪히는 의견들이 있는데, 종교를 하나의 실체로 보고 대화를 진행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교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내부의 다양성에 관한 이해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가톨릭프레스와 에큐메니안에 동시 게재하며, 레페스 포럼 : "폭력을 넘어서기 위하여" 2부에서 계속됩니다. 



[필진정보]
이찬수 : 서강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신학으로 각각 석사학위를,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강남대 교수, 대화문화아카데미 연구위원 등을 지냈고,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인간은 신의 암호』,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종교로 세계 읽기』,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유일신론의 종말, 이제는 범재신론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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