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략)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포박하여 자발적인 물신의 노예로 만드는 악령을 주목하자. 하느님의 법에서 이탈된 삶으로 생긴 병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에 치유가 있다. 환락의 도시, 광기의 경쟁, 과학 기술의 우상, 금융 산업화 시대에 얻어맞고 부서진 상처를 무엇으로 치유하는가? 무소유, 섬김, 노동과 기도가 있는 공동체의 삶에 진정한 치유가 있다. 상처도 좋은 삶을 살면 흉터가 사라지면서 창조성이 솟게 된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의식이 분명하다면 소비문화와 이기와 탐욕의 악령을 추방하는 능력을 이미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의무가 있다. 오늘도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능력을 영접하라!
-1월 26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오늘의 묵상 중
인류는 공동체의 삶을 버린 이후부터 사랑하는 방법을 잃었습니다. ‘사랑은 기술’이라고 말한 어느 유명한 심리학자의 말처럼, 사랑은 그저 갈망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능력과 열정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신앙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사랑이신 하느님’을 외면한 순간, 무엇이 사랑인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신부님의 마지막 묵상 글을 소개 합니다.
◈ 2월 28일 사순 제 1주간 토요일
- 제1독서: 너희는 너희 주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라. (신명 26,16-19)
- 복음: <하늘의 너희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43-48)
- 오늘의 묵상: …(선략) 그런데 사람들은 왜 사랑하는 법을 잃어버렸을까? ‘자연, 나, 너, 그리고 하느님’으로 엮어진 큰 세계가 하나의 존재임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유전자를 가진 존재는 모두 하나의 몸이고 ‘공동체’(한가지 共, 한가지 同, 몸 體)이다. 사람은 공동체의 틈새에서 생겨났고 살아간다….(중략)
‘주님, 저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 것처럼 저희에게도 사랑하는 기술을 가르쳐 주소서. 아멘.’
저는 개인적으로 박기호 신부님을 뵌 적도 없고, 그분의 묵상 글들에 대한 특정한 글들을 묶어서 신부님 글의 성향을 연구하려는 목적 또한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신부님의 사회교리적 성격의 글들을 매일미사 책에서 읽을 수 있었다는 경험에 매우 놀랍고 기뻤으며, 혹시나 허락 없이 여기에 신부님 성함과 글들을 올린 것에 대하여 신부님께서 당혹스러우시다면 너그러운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바랍니다.
유명한 소설 「장미의 이름」의 저자 움베르토 에코는 ‘악마’의 정의(定義)를 ‘살면서 지금껏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은 절대적 진리’라고 하였습니다. 받아들이기만 하고 의심하지 않는 진리란 우리에게 또 다른 복종의 삶만을 추동 하게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즘 온 사회가 국정화 교과서 때문에 시끌벅적 합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복음서조차도 여러 다른 복음서들 있습니다. 우리가 성모 마리아를 공경할 수 있게 된 것도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서 덕분이라고 합니다. 만일 루카와 요한 복음서만이 후대에 남게 되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국정화로 인한 일방적인 교육은 마땅히 철회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매일미사 책의 ‘오늘의 묵상’ 글들을 읽으면서 깊은 묵상에 도움이 되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전혀 의심 없이 편협한 논리에 적응해서 나의 묵상으로 소화 시키지 못한 채 그저 타인의 생각에 묻어가는 형식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묵상이라 할 수 없습니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의 묵상, 성경의 말씀을 근본주의적 태도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묵상… 이러한 것들이 바로 우리 자신을 좀먹는 내사(자기 세뇌)의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주로 교의신학과 영성, 철학적 미사 강론과 글에만 익숙한 신자들에게 성경 말씀에 대한 ‘사회교리적 접근 방식’은 앞으로 적극적으로 찾아야 할 주요한 과제이자 절실한 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