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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에서 천주교도만 처형된 것 아니야"
  • 최진 기자
  • 등록 2016-01-15 17:02:44
  • 수정 2016-01-15 17: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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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일,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조선 시대 서소문 지역 역사 바로 보기’학술회의를 개최됐다. (김인환 천도교중앙총부 종무원장) ⓒ최진 기자


‘서소문역사공원 바로 세우기 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범대위)와 천도교 중앙본부는 14일 오후 1시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조선 시대 서소문 지역 역사 바로 보기’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학술회의는 조선 시대 서소문 지역과 관련된 사료 발굴을 통해 ‘서소문 밖 역사유적지 관광 자원화 사업’(이하 서소문 역사공원 사업)의 재검토를 위한 학술적 토대를 마련하는 자리였다. 


범대위가 역사적 사료에 집중하는 이유는 서소문 역사공원 사업과 관계된 정부 기관들이 천주교 성역화 사업에만 집중하며, 서소문과 관련한 총체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허구적인 소설’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범대위는 서소문 지역이 조선왕조 500년 동안 천주교 신자뿐 아니라 근대화와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수많은 이들이 국사범으로 몰려 처형당한 장소라고 주장했지만, 관련 기관들은 ‘역사적 고증이 없다’라며 외면해왔다. 


이날 학술회의는 채길순 명지전문대 교수와 윤석산 한양대 명예교수, 성주현 청암대 교수, 임형진 경희대 교수, 성강현 동의대 교수, 정의연 동천문화유산연구원장이 발표자로 참여했고 범대위 관계자와 역사학자, 천도교 신자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범대위는 정부예산으로 추진되는 사업이 특정 종교의 선교 사업지로 선정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역사 왜곡을 막고 역사의 진실과 사적을 바르게 아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며 이 땅에 살아갈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진실이다”라며 “애국애민의 마음으로 활동하다가 순국하신 선열들의 삶과 진실을 밝히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 채길순 명지전문대 교수 ⓒ최진 기자


채길순 교수는 서소문 지역과 관계된 역사적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나열하며 조선 시대 서소문 지역의 민중사 전개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중구청에서는 ‘왜 서소문의 역사를 서소문 밖의 역사로 말하느냐’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서소문 5개 옥에서 취조를 당하고 판결을 받아 서소문 밖 처형지에서 처형이 일어났고 머리를 잘라 효시했기 때문에 서소문과 서소문 밖의 역사는 깊이 연관된다”며 이는 “천주교 박해에 중심을 맞추고 그 목적에 맞게 처형지만의 역사를 해석하려고 하는 것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채 교수는 조선 신분제를 개혁하려던 허균과 세도정치에 저항했던 홍경래와 민란 지도자들, 위정척사를 상소한 홍재학, 도성 최초의 반봉건·반외세 투쟁이었던 임오군란 주동자들,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추구한 갑신정변 책임자들이 서소문에서 처형됐다고 밝혔다. 또한, 민주주의와 근대화운동을 추진했던 독립협회, 일본 제국주의의 국권침탈에 저항해 무장봉기했던 대한제국군의 남대문 전투가 서소문 지역과 관계가 깊다며 조선왕조실록과 구한국관보, 황성신문 등의 기록을 들어 설명했다. 


성주현 교수는 수원지역 동학농민혁명과 지도자들의 처형을 설명하며 “성리학 이데올로기의 조선 정부는 이곳에서 서학(천주교)을 신봉했던 자들과 동학 농민군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처형하고 목을 매달아 효시했다”며 “서소문과 그 일대는 성리학 통치이념에 저항한 민중들의 숨결이 그대로 담겨 있는 역사의 현장”이라고 평가했다. 


임형진 교수는 “서소문은 그동안 조선의 변혁운동 주역들이 처형당한 현장이다. 물론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기해박해, 병인박해 등 천주교도들이 처형을 당했지만, 조선의 개항 이후에는 천주교도들에 대한 처형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후의 처형은 천주교도가 아닌 오히려 구국과 우국의 충신들이었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서소문 밖의 처형지는 잠깐 천주교도들을 탄압하는 장소였다가 조선의 근본적인 변화를 외친 애국애족의 인사들의 처형지로 변화된 것”이라며 “서소문 밖 처형지는 그런 의미에서 소수만을 위한 역사적 교훈의 장이 되기보다는 더 큰 차원의 국민적 도량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성강현 교수는 “서소문 시위대의 서소문전투는 한 말 항일구국운동인 의병전쟁의 도화선으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서소문전투는 지방 진위대의 전투로 이어졌고 이는 정미의병의 도화선이 되었다. 또한, 정미의병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전쟁의 서막을 열기 때문에 서소문은 국민적 항일의식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며 “서소문은 많은 역사적 의의가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다양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포괄적인 역사유적의 복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소문을 왜 천주교에만 위탁하는가?”


서소문 역사공원 사업은 기존의 서소문 근린공원 일대를 활용해 역사공원으로 재조성하는 사업이다. 전체 사업 부지면적은 21.363㎡에 달하며, 약 460억 원(국비 230억, 시비 137억, 구비 93억)의 예산이 들어간다. 현재 서소문 역사공원 사업은 타당성 조사와 투자심리를 마치고 설계심의를 진행 중이다. 지난해부터 기존 근린공원 해체·정리 작업에 들어갔으며 올해 안으로 가설공사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 사업을 위해 문화체육관광부와 서울시, 서울 중구 시의원 등으로 구성된 ‘서소문 밖 역사유적지 관광 자원화 사업지원 특별위원회’(이하 서소문 특위)가 구성됐다. 서소문 특위 김동승 위원장은 지난해 12월 22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서소문 지역이) 천주교 역사유적인 만큼 천주교 색채가 짙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서소문은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큰 의미를 가진 곳이며, 목숨을 바친 선조들의 순교 정신이 후손들에게 전해져야 한다”며 “이 사업에 총 460억이라는 큰 예산이 투입되는 만큼, 역사성과 관광자원의 특징을 부각하여 방문객들에게 매력이 있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소문 특위는 지난해 9월 1일 문화체육관광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회의에서도 천주교 중심의 역사공원 사업 진행을 논의했다. 서울시의회 김영한 의원은 “목적에 충실해서 사업을 진행했으면 좋겠다”라며 “이탈리아에 가서 큰 성당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문화적인 교양이 올라가는 것 아니냐. 이중적 메시지를 주면 헷갈린다”고 말했다. 


이혜경 서소문 특위 부위원장은 “설계 공모가 나왔을 때 모습은 굉장히 감동적이었고 염수정 추기경님도 그것을 보시면서 굉장히 만족해하셨다”며 “뜻하지 않은 범대위가 생기면서 저항에 부딪히고 변경되는 모습을 보면서 참 가슴 아팠다”고 밝혔다. 


최영수 중구청 과장은 “특정 종교 사업으로 보이게 되면 정부나 시에서 그렇게 많은 예산을 내려줄 수 없으므로 천주교 종교 사업이라고 하는 부분을 뒤로 두게끔 됐다”며 “다음에 MOU를 체결하든가 해서 정식으로 천주교가 운영하는 형태로 바뀌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 정갑선 서소문역사공원 바로 세우기 범국민대책위원회 실행위원 ⓒ최진 기자


이에 범대위 정갑선 실행위원은 “중구청은 우리와 만났을 때 천주교 중심의 역사문화공원이 절대 아니라고 말했지만, 특별위원회에 가서는 운영 자체를 천주교에서 위탁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소문에 있었던 천주교 측의 일부 자료를 가지고 서소문 역사공원 사업을 진행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역사책에서도 중요하게 다루고 배우는 사건들이 있는 곳인데 그 현장을 한 종교에만 치중해 관광 상품을 만들려는 정부의 의도가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보면 서소문에서 처형당한 사람들의 이유가 나온다. 그 이유를 보면 국가가 문란한 상황에서 사람답게 살자고 외쳤던 분들이 국사범으로 처형된 것이다”라며 “국가가 예산을 들여 역사공원을 조성한다면 이런 분들의 죽음을 밝혀 역사적인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정 종교만의 성역화, 그리고 역사적 의미


서소문 처형장의 역사는 조선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이 1293년 도성을 옮기면서 한양에 도성 건설공사를 벌였다. 도성 공사의 사상을 뒷받침했던 오행설 이론에 따라 사형장은 도성 서쪽에 위치하게 되었고 조선 초기부터 서대문 일대는 사형장으로 사용됐다. 특히 모반대역죄 등의 국사범이 처형되는 장소였다. 


서소문 형장에서 처형된 역사 인물은 성삼문, 허균, 홍경래, 이필제, 안교선 등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정약종, 황사영 등 천주교 순교자들도 전통적으로 국사범을 처형하는 방식에 의해 순교했다. 1895년 사형제도가 교수형으로 바뀌자 서소문 처형장은 사라졌지만, 서소문 거리는 효수형을 받은 인물의 머리를 조리돌리는 효시의 장소로 이용됐다. 


전국을 휩쓸었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조선 후기는 개혁과 변혁의 기운이 많았다. 국가적인 재난으로 농촌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지만, 지배계층은 이를 해결하지 못했고 민중들은 분노했다. 특히 조선 후기 민란시대로 접어들면서 조정에서는 국사범을 서울로 불러들여 목을 자르고 ‘서소문 밖 네거리’에 효시했다. 당시 외국인들에 의해 관찰된 서소문 밖 만초천변 일대는 ‘반란자들의 머리’가 빈번히 효시 되는 곳이었다. 


천주교는 서소문 형장에서 많은 천주교 순교자들이 처형된 순교역사의 의미를 담아 2011년 서울시와 서대문구청과 문화관광부 등의 정부 기관과 상의해 국가 예산으로 성역화 작업을 추진했다. 서소문공원에는 천주교 순교자들을 위한 현양탑이 세워져 있으며 지난해 8월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곳을 방문했다. 교황의 방한 이후 서소문공원 성역화 사업은 속도가 붙었다.


하지만 역사학계와 천도교 등은 이에 대한 부당성을 제기했다. 특정 종교만의 성역화는 그 역사적 의미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학계와 천도교는 범대위를 구성해 서소문공원 사업의 재검토를 요구했다. 이들은 서소문에 관련되는 역사인물과 역사유적을 살리는 기념조성물을 건설하고 유적의 의미를 바르게 알려주는 역사공원으로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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