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먼지 재를 쓰고, 머리 풀고 땅을 치며
최근 <경향신문> 오피니언 면 ‘사유와 성찰’ 코너에서 천주교 청주교구 김인국 신부의 글 <임을 빼앗기고 머리에 재를 얹다>를 읽으면서 특이한 경험을 했다. 글을 읽는데, 옛날 청년 시절에 수없이 불렀던(그러나 언젠가부터 까맣게 잊고 있었던) 노래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의 음결이 돌연 내 뇌리에서 아련히 피어나는 것이었다.
노랫말 2절의 한 구절인 “흙먼지 재를 쓰고, 머리 풀고 땅을 치며”의 음결이 또렷이 내 뇌리에서 피어나는 현상에 한동안 숨을 고르다가, 청년 시절로 되돌아간 듯 열렬하면서도 처연한 소리로 노래를 웅얼거렸다.
노랫말이 온전히 재생되지 않아 인터넷 검색으로 ‘노찾사’의 노래를 찾아 함께 부르며 급기야는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 바람에 아내가 잠을 깨어 불평을 하려는 듯했으나 무슨 노래인지를 알아차리고는 잠잠히 침묵으로 동참해줬다.
그날 오전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매일 오전은 수많은 낱말들을 주워 모아 조립을 하는 시간인데, 모든 언어들이 재를 뒤집어쓰고 있는 현상을 체감했고, 줄곧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노찾사의 노래들을 들으며 추억의 바다를 유영했다.
더불어 내가 다시금 사순절을 살고 있음을 실감했다. 사순절을 살고 있기에 또다시 내 모든 언어들에 재를 얹고, 청년 시절의 민중노래들에 심취하며 한량없는 그리움에 눈물짓기도 할 터였다. 임을 빼앗기고 머리에 재를 얹는 오늘의 현상을 절절히 체감하는 탓이기도 할 터였다.
청년 시절 해마다 사순절이면 민중가요들을 부르곤 했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임을 위한 행진곡> <기러기> <타는 목마름으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을 부르며 혼자 눈물짓기도 했다. 집에서도 부르고, 산이나 바닷가에서도 부르고, 술집에서도 부르고, 성당의 행사나 모임 자리에서도 불렀다.
한번은 성당의 무슨 회식 모임 때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을 2절까지 불렀다. 어른 한 분이 무슨 노래냐고 물어 민중가요, 운동권 노래라고 알려드렸더니, 그런 노래를 왜 부르느냐고 핀잔을 했다. 나는 한마디만 했다. “지금이 사순절이니까요.” 그 노래가 사순절과 무슨 상관이냐는 말이 왔지만, 나는 거듭 말했다. “지금은 사순절이에요.”
그 어른뿐만 아니라, 다수의 신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지만, 나는 그 상황 속에서도 사순절을 체감하고 있었다. 사순절을 제대로 살기 위해 민중가요들을 부르는 자신을 스스로 격려했다. 천주교의 사순시기 성가들은 대체로 구슬프고 애절한데, 그 성가들과 민중가요들은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하곤 했다.
나는 사순절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 2천 년 전 그 상황 속으로 상상의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아도 됐다. 머나먼 이스라엘 땅으로 날아갈 필요도 없었다. 오늘의 내 나라 내 땅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는 땅이며 시대였다. 오늘의 현실이 바로 예수께서 국사범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고문을 당하고 십자가를 메고 언덕길을 오르며 쓰러지고 또 쓰러지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하는 현장이었다.
복음서들 안에 자세히 기술돼 있는 그 긴박하고 처절한 상황과 오늘 이 땅의 갖가지 참상들을 등치시킬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음으로써, 나는 사순절을 제대로 살며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절절히 아파할 수 있었다.
기도하는 마음과 현실을 보는 눈의 불일치
사순은 40일을 뜻한다. 머리에 재를 얹는 예절이 거행되는 ‘재의 수요일(올해는 지난 10일)’부터 예수부활대축일 전날까지 46일 동안인데, 여섯 번의 주일을 빼면 40일이 된다. 사순시기의 주일들은 사순시기 안에 있으면서도 날수로는 포함되지 않는다. 주일은 우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천주교 신자들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부터 예수부활대축일 전 날까지 장장 46일 동안 기도와 희생 등에 정성을 기울인다. 재의 수요일에 사제의 손으로 머리에 재를 얹는 것은 일차적으로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는 것이지만, 속죄와 회개를 다짐하는 것을기도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길에 동행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자들은 재의 수요일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주님수난 성금요일’에는 금식과 금육을 한다. 또 사순절 동안 ‘십자가의 길’이라는 기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십자가의 길’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 처형 후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과정 안에 있는 열네 가지 사건을 기리며 바치는 기도여서 옛날에는 ‘14처기도’라고도 불렀다.
매주 금요일 저녁에만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본당도 있지만, 필자가 적을 두고 있는 대전교구 태안성당은 매일 평일미사 전에 이 기도를 바친다. 이 기도에 많은 신자들이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사순절에는 ‘판공성사’도 있고, 평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이 다른 때보다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사순절에는 ‘십자가의 길’ 기도와 미사 참례에 더욱 열심인 신자들을 보면서 가끔은 색다른 의문에 젖어들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며 기도로 그 길에 동참하고 있는 신자들이 왜 오늘의 사회 현실에는 대체로 무관심한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반추하며 슬퍼할 줄은 알면서, 왜 오늘의 갖가지 참상들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일까? 사회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이런저런 형태로 무수히 재연되고 있건만, 왜 그런 일에는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을까? 왜 연대와 공유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기피하는 걸까?
저렇게 열심인 저 형제님과 자매님이 왜 지난해 세월호 참사 진실규명을 촉구하기 위한 서명운동에는 차갑게 외면을 했을까? 저 형제님은 곱지 않은 얼굴로 눈을 부라리기도 했지! 왜 저토록 기도하는 마음과 사회 현실을 보는 마음이 일치하지 못할까? 그 간극을 어떻게 메워야 하나. 그 간극을 사제들이 메워줘야 하는데, 사제들부터 사회 현실에 눈을 감고 있다면…?
사제들이여, 신자들에게 광화문광장 미사참례를 명하시라
천주교의 사순 시기는 판공시기이기도 하다. 교회법으로 일 년에 두 번(부활대축일 전 사순시기와 성탄대축일 전 대림시기) 고해성사를 보게 돼 있는데, 사순시기와 대림시기에 보는 고해성사를 구분해 판공성사라고 부른다.
고해소에서 죄의 고백을 들은 사제는 훈계와 함께 죄를 기워 갚는 보속(補贖, 기도와 행위)을 명하는데, 대개는 간단한 기도를 지시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한 가지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먼 지방에서 사는 신자들에게는 어렵겠지만, 전철도 다니고 시내버스도 연결되는 수도권 성당일 경우 판공성사를 집행하는 사제가 보속으로 ‘광화문광장 미사참례’를 명한다면 어떻게 될까?
광화문광장에서는 매주 월요일 저녁 시국미사가 봉헌된다. ‘신종 쿠데타, 신유신독재 타파를 위한 천주교 시국기도회’다. 세월호 유족들과 해고노동자들이 함께 한다. 세월호 인양과 진실 규명을 애원하는 기도, 국정교과서와 노동개악을 반대하는 기도, 요즘에는 개성공단 폐쇄를 뼈아파하는 기도들도 바쳐진다. 엄동설한 차가운 바람 속에서 지내는 미사인데도 절절한 기운이 온 마음을 뜨겁게 한다.
사제가 성당 미사 중에 광화문미사 참례를 권유하는 발언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요즘에는 강론 중인 사제에게 벌떡 일어나 항의를 하는 신자도 있다고 하니 조심스러운 부분일 터이다. 만일 사제가 고해소에서 보속으로 광화문미사 참례를 명한다면, 그 보속에 대해서도 항의하는 신자가 있을까? 사제는 한 번 참례를 명했는데,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매주 월요일 저녁 광화문광장을 찾는 신자들도 생겨나지 않을까?
평신도 주제에 뒤넘스러운 일이지만 수도권 성당의 사제들께 감히 내 소망을 말해본다. 신자들에게 판공성사 보속으로 광화문광장 시국미사 참례를 명하시기를! 그러기 전에 우선 수도권 교구 사제들부터 광화문광장 미사에 참례하시기를! 사순시기 예수 그리스도님의 수난과 죽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시기를!
사순절은 이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사악한 반대자들, 수구기득권자들에게 빼앗긴 사건을 기념하며 애통해하는 시기다. 지금은 부정선거로 집권한데다가 무지와 무식, 무능과 무치無(恥)의 극치를 보여주는 독재자들에게 민주주의와 헌법 가치와 정의를 무참히 빼앗기고 있는 시대다.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민주주의도 죽음의 강을 건너 기필코 부활하겠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철칙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자들부터 곱씹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