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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페스 포럼 : 종교는 평화공동체인가
  • 이찬수
  • 등록 2016-04-27 10:34:49
  • 수정 2016-04-27 15:3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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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이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지만 사회가 평화롭기는커녕 폭력이 더욱 교묘하게 구조화되고 내면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3차 “레페스포럼”에서는 ‘종교’·‘평화’·‘공동체’를 열쇠말로 원영상(익선) 교수가 “종교연합은 가능한가 - 원불교의 종교공동체론”을, 정주진 박사가 “평화의 공동체성과 세계와 시대 평화적 종교공동체”를, 이찬수 교수가 “세계와 시대 종교공동체의 경계에 대하여”를 발제하고(신현승 교수는 “동아시아 유불문화 전통과 다문화 공동체”라는 제목의 글만 제출) 참석자들이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의 협조를 얻어 천도교 수운회관에 모여 토론하였다. 모임명은 레페스 포럼. 레페스는 REligion and PEace Studies의 약어이다. 


다음은 토론 내용 전문이다. 


토론자(가나다순): 

김근수(가톨릭프레스 발행인, 해방신학), 

류제동(성공회대 연구교수, 종교학)

원영상(원광대 정역원 연구교수, 일본불교학), 

이병두(종교칼럼니스트, 전 문화체육관광부 불교담당 종무관),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진행),

전병술(건국대 연구교수, 동양철학)

전철후(원불교 강남교당 교무, 원불교학/기록), 

정주진(평화갈등연구소장, 평화학),

홍정호(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전문연구원, 신학/정리)




종교연합, 의미 있는 토론을 위하여 


- 이찬수: 원익선(영상) 교무님께서 원불교에서 제안한 종교연합(United Religions) 운동에 대해 이해하기 좋게 소개해주셨다. 종교에서 공동체라는 말, 세계 평화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는 경향이 있는데, 말하는 대로 실천한다면 세계가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잘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간 대화나 종교들의 공동체 혹은 종교 연합 등의 언어를 말하기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개별종교의 경계를 어디까지로 설정할 수 있을까’의 문제이다. 


종교와 종교가 아닌 것의 경계, 특히 종교와 문화의 관계를 명확히 설정할 수 있을까? 이들 경계가 모호하다면, 종교 대화는 물론 종교 연합을 시도하는 주체도 범주도 애매해지기 때문이다. 종교연합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가능하다면 어떤 방법으로 가능할지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대화를 시작해 보자. 


- 전병술: 소크라테스의 변론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라는 죄목으로 고발당한 소크라테스는 “나는 살찐 말을 깨우는 등에”라고 말했다. 민주주의와 세계시민정신을 지닌 ‘아테네’라는 훌륭한 ‘말’이 잠들지 못하도록 자꾸만 찔러대는 ‘등에’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건 아테네의 민주주의 정신이 위기에 빠졌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종교연합의 가능성을 말씀하셨는데, 종교 평화를 말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종교들의 연합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등에와 같은 비판자가 되는 데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각자가 속한 ‘종교’라는 훌륭한 말이 잠들지 못하도록 따끔하게 일침을 놓는 등에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종교연합에 앞서 필요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누구를 찌르는 등에가 되어야 할 것인가?”로 질문이 바뀌어야 한다. 학교를 예로 들자면, 학교장의 가치관이 바뀌면 학교도 바뀐다. 학교의 폭력적인 구조를 깊이 경험할 기회가 적은 학생들에 비해 학교장이 구조적인 폭력의 문제를 인지하고 변화를 결단하면, 문제의 상당부분이 해결된다. 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종교의 최고 지도자들의 인식에 변화를 미치는 등에가 되어야 한다. 작은 단위에서든 큰 단위에서든 종교의 최고 지도자들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평화에 관한 논의는 무익하다. 종교 내부의 폭력의 문제에 대한 비판 없이 종교 연합의 문제를 논의하는 건 오히려 문제를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유교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을 텐데, 종교연합은 유교로 말하면 대동사회를 건설하자는 주장과 같다. 그런데 대동사회에로 나가는 과정에  반드시 폭력성이 드러나기 마련이고 대동사회에도 계급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하나로 연합하려는 생각은 이 점에서 비판과 숙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 전철후: 전병술 교수께서는 대동사회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대동사회에 대한 원불교의 이해는 다른 면이 있다. 대동(大同)은 인간과 인간끼리의 관계 속에서 서로 화합하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회이다. 특정한 조직을 형성하여 한 가지의 가치관과 목적을 지향해 가는 사회가 아니다. 종교 간 대화나 종교연합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찬수 교수님이 쓴 「대동에서 만나는 종교와 평화」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진정한 의미에서 대동은 남과 나를 같이 보는 인(仁)의 이념을 실현하고 세상이 공적인 것이 되는 공공성을 지향하는 사회를 이루는 것이다. 종교연합은 개별종교의 특이성을 무시하는 통일(統一)이 아니다. 종교연합은 각 종교의 교리적·제도적 특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연합이다. 


- 원익선: ‘종교연합이 어떤 형태로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WCRP든 URI든 세계적인 종교모임들의 논의도 비슷할 것이다. 종교의 평화로운 공존에 관한 문제의식은 있지만, 세계적인 차원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구체화시킬 정치적인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연합에 관한 논의는 현재까지는 제도적 차원의 연합에 관한 논의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종교연합은 종교들이 현실문제에 대응해 나가는 방식에 있어서의 종교적인 역할의 연합이라는 면이 강조되어야 한다. 종교연합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 세상의 문제들에 대해 다양한 종교들이 협력하여 대응해 나가는 방식으로의 유동적인 연합이 되어야 한다. 형식적으로는 유동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문제해결의 일치점을 모색해 나가려는 시도가 종교연합 운동의 목적이다.  


지도자 중심의 대화를 넘어서야


- 이찬수: 논의를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 논제를 좁힐 필요가 있다. 가령 UN은 근대 국민국가 체제를 전제로 해서만 운용이 가능한 조직이다. 여기에서는 법적으로 국민의 신분이 분명하다. 그런데 종교인은 국민과 달리 신분이 분명치 않다. 근대 국민국가 체계에서 한국인으로 사는 것과 미국인으로 사는 것은 다르지만,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과 불교인으로 사는 것은 같음과 다름의 경계가 모호하다. 한국의 기독교인은 기독교적이면서 유교적이고, 때로는 무속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미 한 종교인의 정체성 안에서 ‘종교연합’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물론 원교무님이 이야기한 종교연합은 그런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종교적 정체성의 경계가 모호한 상황에서 추진되는 ‘종교연합’은 뚜렷한 종교적 정체성이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를 대표하는 이들의 연합, 다시 말해 교단의 지도자나 종교 엘리트를 중심으로 한 회합이 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런데 이런 엘리트 중심의 종교연합 운동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나 풀뿌리 운동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다. KCRP나 WCRP와 같은 조직이 의미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모임 자체가 종교라는 이름의 차별적 경계를 전제하고 있다 보니, 자칫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자를 배제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들 종교연합 조직이 운영되는 모습을 살펴보면 무엇을 위한 종교연합 운동인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다. 


종교연합운동은 권력욕에서 나온다?


- 정주진: 종교가 종교연합을 지향하는 것은 권력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종교가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기반으로 정치적 힘을 키우려는 욕망에서 종교연합 운동이 추진되는 것 같다. 때문에 종교연합 운동은 권력지향적인 엘리트가 중심이 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종교연합 운동이 성직자가 중심이 되는 운동이라는 점이다. 종교를 대표하는 것이 그 종교에 속한 소수의 엘리트, 그 가운데에서도 성직자들이라는 점은 종교연합 운동의 권력지향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연합운동이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없도록 만드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세계 종교들이 연합해야 한다는 주장은 종교가 연합해서 더 큰 권력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 


- 원익선: 그 의견에는 일정 부분 동감한다. 조직이 생기면 반드시 권력의 문제가 생기고, 중심과 주변이 나뉜다. 정주진 박사님의 지적은 종교연합의 외적 차원이 지닌 한계를 잘 지적해 주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종교연합에 있어서는 종교의 외적인 차원과 더불어 내적인 차원의 문제도 함께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한신대 강인철 교수님의 연구에 의하면, 세계분쟁의 대략 60% 가량 종교가 관여하고 있다고 한다. 현실이 이런데 종교가 분쟁에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실제적인 분쟁 해결을 위해 종교간 연합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고, 평화를 실현해야 할 책임이 종교인에게 있다. 그리고 이것은 개별종교가 지닌 외적 차원의 문제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종교의 근원적인 종교성의 문제로까지 깊이 있게 파고들어가야 해결이 가능한 문제이다. 이 점에서 종교연합은 먼저 종교가 관여하는 분쟁을 내면화하는 작업으로써 제도적 연합과 기구 구성의 권력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가는 한편, 개별종교가 추구하는 근원적인 종교성의 문제에 있어서의 공통점을 모색하려는 시도라는 데 초점이 있다. 


종교연합운동은 포교의 방편?


- 이병두: 종교연합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의 문제제기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종교연합 담론을 주도하고 있는 원불교가 지금 ‘국내 제4종교’라고 하고 ‘4대 종단’ 모임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지만 아직은 교세가 취약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연합 담론을 원불교가 주도하고자 한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것은 원불교가 주류 종교에 편입함으로써, 거대종교로 발돋움하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시도로 읽힐 수도 있다. 


- 원익선: 솔직히 그렇다. 교단 내에서 원불교의 교세가 예전 같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원불교라는 종교는 근대성을 기반으로 탄생한 종교이기 때문에 근대문명의 한계에 대한 성찰을 그 밑바탕에 깔고 있다. 개별적 주체성을 토대로 형성되는 근대문명이 일으킨 폭력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이 원불교의 종교적 특이성을 구성했다. 종교연합 운동은 원불교만이 아니라 근대 종교의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많은 종교들이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권만 보더라도, 아시아의 신종교들은 종교연합을 주장하고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입정교성회(立正佼成会) 역시 원불교 못지않게 종교의 여러 연대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종교연합 운동은 동양종교만의 특징이 아니다. 서구에서는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종교회의(Parliament of the World's Religions)가 대표적이고, 일본에서도 이미 1800년대 후반에 대두된 현상이다.


- 전철후: 첨언하자면, 원불교는 공동체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엘리트 중심의 종교연합운동과는 거리가 있다. 궁핍한 생활환경이었던 영광에서 저축조합으로 조합원을 결성하고 숯 장사를 하면서 자금을 마련했다. 이 자금으로 바다를 막는 간석지 사업을 통해서 생활을 개선하고 정신계몽 운동을 실시하였다. 종교와 공동체가 분리되지 않고 명운을 같이 한 것이 원불교의 정신이다. 입정교성회가 종교연합 활동을 벌이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개별종교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이념과 지역 공동체의 필요가 만날 때 건강한 종교적 실천이 가능하다고 본다. 


- 이병두: 일본의 입정교성회 등도 신종교가 지닌 한계에서 벗어나 ‘큰 마당’에 참여하고 싶기 때문에 종교연합 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펼치는 것 아닌가?


- 원익선: 그런 면이 있다. 군소종단들이 지닌 지리적·역사적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의적인 체계를 보편적인 담론의 토대 위에 올려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 큰 종단들은 군소종단의 목소리에 관심이 없고 대화의 상대로 인식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군소종단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보편적 입장을 주장하고 매진할 필요가 있다. 원불교가 KCRP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도 그러한 교의가 깔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종교연합이라는 테제는 군소종단에 있어서는 ‘블루오션’일 수 있다. 굳어진 체제에 안주하는 거대종단의 종교들이 놓치고 있는 한계를 비판하면서 군소종단이 자기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 이병두: 그런 점에서 원불교는 성공했다. UN의 비정부기구 등에서 원불교 교무님이 활동 하고 있고, 이제 막 원교무님이 말씀하신 대로 원불교가 국내에서 KCRP 사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여성 교무님들이 삼소회(三笑會) 활동에 적극 동참하며, 그 밖의 여러 종교연합 단체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데서도 나름 큰 효과를 거두었다고 본다.


▲ 왼쪽부터 정주진 박사와 원영상 교수


종교연합 운동이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여 


- 정주진: 여러 종교단체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다양한 풀뿌리 활동을 해왔다. 그 결과 지금은 종교에만 국한되지 않는 광범위한 민간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국가 사이, 또는 국가 내 분쟁(무장 갈등)과 관련해 정부나 국제기구 차원의 외교적 활동을 ‘트랙1(track1)’이라고 하고, 민간단체들의 활동을 ‘트랙2(track2)’라고 하는데, ‘트랙2’ 활동에 있어서 종교에 기반 한 단체들의 네트워크 활동은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종교적 배경을 가진 개인들이 다양한 비종교 기구들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굳이 개별 종교의 엘리트들이 세계적인 종교연합을 구성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다. 앞에서 지적된 여러 한계점들을 지니고 있는 종교연합 운동 없이도 종교는 이미 많은 연구자들과 현장 활동가들을 통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자원으로 충분히 연구 및 활용되고 있으며, 연합활동을 벌이고 있다.   


- 이찬수: 신자유주의적 거대권력이 지배하는 상황을 타개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협동조합과 같은 풀뿌리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정주진 박사님 지적처럼 이미 많은 단체와 개인들이 이런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개별종교의 지도자들이 종교간 대화의 주체로 새삼스레 나서기보다는 풀뿌리 운동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자극하고 돕는 역할에 힘을 쏟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라고 본다. 그래야 종교를 통한 평화 정착의 지속성이 담보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KCRP 같은 조직은 정부에서 자금을 받아 운영이 되고 있는데, 세속 권력으로부터 오는 자금이 끊어지면 흩어지고 말 가능성이 높은 조직이다. 위로부터의 대화운동이 아니라, 소규모라도 아래로부터 움직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게 중요한 이유다. 일본의 경우 한국의 KCRP에 해당하는 WCRP일본위원회가 있다. 일본에서는 정교분리가 확실하다보니, 국가가 종교단체에 지원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일본에서의 WCRP 활동은 자발성과 지속성이라는 측면이 한국에 비해 나은 면이 있다. 한국의 종교연합 운동의 실정은 정부에서 돈이 나와서 돌아가는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KCRP는 종교운동의 존립목적과 가치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 오래 걸리더라도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활성화시켜 나가는 것이 그나마 승산 있는 활동이 될 것이다. 


- 이병두: 종교연합 운동의 당위성은 인정하나 현 상황에서 그것의 성공 가능성은 ‘제로(0)’라고 생각한다. 이찬수 교수님 말씀처럼 종교연합은 풀뿌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성취될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 홍정호: 이병두 선생님 의견에 동의한다. 첨언하면, 저는 가능성뿐만 아니라 당위성도 없다고 생각한다. 원불교, 불교, 기독교 등 생활에서 이미 ‘명사’로 고착되어 나름의 교리적 제도적 경계를 설정하고 있는 종교들이 왜 종교적 신념의 차원에서 연합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만약 종교연합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사회적 고통의 해소를 위한 실천적 협력 이상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종교 평화 문제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종교연합이 아니라, 개별종교의 특이성을 더 잘 살리는 ‘통합되지 않은 실천들’이 되어야 한다.


나아가 종교적으로 통합되지 않은 실천들이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건 철학자 김영민 선생님에게서 배운 말인데, 종교는 평화에 있어서 ‘부사(副詞)’의 역할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본다. 즉, ‘종교적으로’(religiously) 평화에 참여하는 것이면 족하다. 어떤 분들은 명사로서의 ‘종교’(religion)가 자꾸 문제가 되니까,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로서의 ‘종교적’(religious) 실천을 강조하시는데, 저는 별 차이 없는 주장이라고 본다. 형용사의 역할이란 고작 명사를 수식하거나 보충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닌가? 형용사는 명사가 없으면 쓸 수 없다. ‘종교’라는 명사를 전제하지 않으면 ‘종교적’ 실천 다 무슨 소용이겠나? 그렇다보니 앞서 평화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도 종교권력의 문제, 평화를 교세확장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시도들이 끊임없이 출현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부사는 다르다. 부사는 명사랑 상관이 없다. 멀찍이 떨어져서 직접 동사(평화)를 수식하거나, 다른 부사나 형용사를 돕는 역할을 하면서 동사적 실천을 돋보이게 한다. 그도 아니면 아예 떼어버리면 된다. 부사가 없어도 동사는 제 역할을 다한다. 


종교가 부사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는 평화가 동사이기 때문이다. 명사로서의 ‘종교’ 없이도, 혹은 형용사로서의 ‘종교적’ 실천이 아니라도, 평화는 지속되어야 한다. 종교연합에 관한 논의는 이 점에서 논의의 초점이 여전히 ‘평화’라는 동사가 아니라, ‘종교’라는 명사 혹은 ‘종교적’이라는 형용사 그 자체에 있거나 둘의 공모/협력가능성에 놓여있는 것 같다. 종교들이 연합해서 뭘 하자는 것인지가 좀 더 분명해진다면, 종교들의 이념적·실천적 연합가능성에 관한 논의보다는 평화적 실천이 요청되는 구체적 사례에 주목하여, ‘종교적으로’ 할 수 있는 논의와 실천을 모색하는 게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

 

종교 간 경계는 모호한 게 아니라 도리어 강고해


- 류제동 : 이찬수 교수님은 종교 간의 경계가 모호하다고 하시지만 제가 살면서 느끼기에 종교간 경계는 매우 뚜렷하다. 기득권층은 이미 그런 경계를 확고하게 갖고 있다. 경계는 그것에 의해 피해를 당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연평도 문제나 독도 문제나 이어도 문제에 있어서 공동으로 협력하자는 제안이 얼마나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까? 공동의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 공허해지지 않으려면 남북문제, 소외문제, 노동자문제 등의 구체적인 문제들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얼마나 놓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앞서 전병술 교수님이 학교장이 중요하다고 하셨지만, 이사장이 더 중요하다(웃음). 학교장도 이사장 눈치를 본다. 교회도 목사가 권력이 있다고 하지만 교회 내 권력자가 기득권을 쥐고 있다면 그들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권력의 층위는 다양하고 서로 얽혀있다. 누가 하나가 없어진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왜 종교연합운동인가


- 김근수: 왜 종교연합에 대한 주장이 제기되었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크게 세 가지 이유에서 종교연합이 문제로 등장하지 않았을까. 첫째, 인류가 닥친 문제가 너무 커졌다. 환경위기나 경제문제처럼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문제의 크기가 과거에 비교할 수 없이 커졌다는 위기의식이 각 종교에게 자리 잡았다. 둘째, 종교 간 충돌이 세계적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종교간 갈등이 지역에 한정된 갈등의 수준을 넘어 전 세계적 범위에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개별종교의 힘만으로 이 문제들을 해결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류에게 닥친 문제, 종교간 충돌의 전 세계적 확산을 해결하기 위해서 종교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여기에서 출현한 것으로 본다. 


개별 종교의 학자들을 모아 놓고 토론을 벌이면 ‘답’은 벌써 나왔을지 모른다. 하지만 개별 종교의 지도자들은 아마 그 ‘답’을 깰 것이다. 거대 종교는 종교연합에 나서기를 꺼려하기 때문이다. 군소종단은 발언권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연합을 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말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종교연합은 이론적 논의 이상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개별종교의 지도자들이 자기 종교 내에서 쥔 권력을 배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톨릭 같은 경우에는 프란치스코 교황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나와도 개혁의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권력배분 문제를 해결 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해결은 어렵다. 종교연합이 가능하려면 논의가 여러 층위에서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예컨대 학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은 그들끼리  따로 논의를 하고, 신도들은 종교 내부에서 교육이나 권력배분의 문제를 놓고 따로 토론해야 할 것이다. 


- 원익선: 김근수 선생님의 지적에 동의한다. 개별종교의 힘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주로 기성종교에 해당되는 말씀일 텐데, 신흥교단의 공적 역할이 있다면, 아마도 기성종교가 해결하려고 한 문제들에 대한 더 나은 답을 제공하는 데 있을 것이라고 본다. 


퀘이커가 모델일 수 있지 않을까


- 정주진: 옳은 지적이다. 기성종교나 신종교나 더 나은 해답을 제공하기 위한 노력에 있어서 협력해야 한다. 그런데 종교가 세계 분쟁을 해결한 좋은 사례들이 이미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퀘이커 공동체를 예로 들 수 있다. 퀘이커 교도들은 자기 이익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평화를 추구하는 진정성으로 현장에 가고 현장으로부터 환영을 받아 분쟁 해결에 기여하곤 했다. 평화를 추구하는 거대종교들은 자기 종교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만, 퀘이커의 방식은 다르다. 그들은 은밀하게, 드러내지 않고, 그러나 끝까지 인내하면서 평화를 추구하고 평화 성취를 위해 일한다. 그리고 평화협정 논의와 체결 등은 당사자들이 스스로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아 하도록 하고 자신들은 뒤에서 보이지 않게 지원을 할뿐 앞에 나서지 않는다. 종교가 해야 하는 역할이 이런 게 아닌가 싶다.  


- 이찬수: 그렇다. 평화와 관련해서 느슨한 종교조직을 바탕으로 평화를 실현하는 대표적인 모임이 퀘이커인 것 같다. 그들은 조직보다는 내면의 영성과 평화적 실천을 중시한다. 국경이나 조직이나 제도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소수인 퀘이커교도가 세계 평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종교간 대화나 연합에 있어 퀘이커처럼 최소한의 조직으로, 차별을 넘어서는 평화적 실천에 나설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원익선: 서구종교의 입장에서는 퀘이커와도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겠지만, 하워드 제어(Howard Zehr)가 쓴 「회복적 정의란 무엇인가 (Restorative Justice)」라는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책의 문제의식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이렇다. 즉, 자연인으로서의 개인과 개인이 싸웠는데, 거기에 국가가 개입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것에 의문을 던진 것이다. 국가는 이러한 개인을 분리시켜놓고, 예를 들어, 벌금을 물리거나 감옥에 보내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원천적으로 회복시킬 수 없다. 왜 국가가 개입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관계의 복원을 국가는 어디까지 가능하게 하고 있는가. 법이라는 틀로써 국가가 개인의 문제에 개입해서 모든 것을 해결했다고 믿는 건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람 사이의 관계는 진정으로 회복 될 수 없는 것인가? 개신교의 일파인 메노나이트(Mennonites)적 교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데, 이러한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 대한 질문들에 대해 하워드 제어는 참회 혹은 회개, 그리고 용서와 사랑 등 종교적 가치에 입각, 치유 프로그램을 만들어 인간관계의 근원적 회복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하워드 제어는 이를 실천하여 성공했으며, 이제는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것을 확대하여 종교도 세계적인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해결의 열쇠를 쥐고 앞으로 나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종교가 인류의 문제에 대해 종교적인 방식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면, 종교 자신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 이찬수: 좋은 토론 감사드린다. 다음 포럼에서는 종교와 평화의 관계를 권력의 문제와 연결 지어 심도 있게 토론해보면 좋겠다.



** 이 글은 가톨릭프레스와 에큐메니안에 동시 게재하며, 레페스 포럼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필진정보]
이찬수 : 서강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신학으로 각각 석사학위를,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강남대 교수, 대화문화아카데미 연구위원 등을 지냈고,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인간은 신의 암호』,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종교로 세계 읽기』,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유일신론의 종말, 이제는 범재신론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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