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참으로 공교롭게도 사흘 전 부활 제 5주일 복음과 똑 같은 내용이다. 오늘 강론을 준비하면서, 머리를 좀 쥐어 뜯긴 했지만, «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는 이 구절에 필이 꽂히는 덕분에 무사히 강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포도 산지는 아니지만, 내 고향 밀양에는 포도농장이 꽤 많이 있다. 중학교 시절, 친구들 중에 몇 집이 포도 농사를 지은 덕분에, 방학 때나, 주말에는 친구들 집에 놀러 가서, 포도 농사를 여러 번 도와 준 적이 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유학할 때, 방학 동안 사목실습을 다녔던 성당들이 대부분 시골에 있었고, 포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참 많았던 곳들이어서 자연스레 포도 농사 짓는 모습을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나무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포도 나무에 대해서만큼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을 정도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안다고 할 수 있는 정도다.
포도 나무는 너무 춥거나 너무 덥거나 강우량이 적당하지 않으면, 제대로 잘 자라지 않는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나무는 토질이 좋고, 영양분이 제대로 공급되어야 잘 자라지만, 포도나무는 특이하게도 척박한 땅에서 재배된 것이 오히려 더 맛있다. 토질이 척박해야 뿌리를 더욱 깊고 넓게 뻗어갈 수 있고, 다양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양분이 많은 부식토는 포도 경작에 오히려 부적합하다. 포도 농사를 지으려면, 석회석, 자갈, 모래, 암반 등이 섞인 땅이 좋은 땅이다. 자갈이 섞인 토양은 낮 동안에 태양의 열을 보존했다가 밤에 다시 발산한다. 이런 식으로 지열 조정 역할을 해준다.
과실수는 그 종류에 따라서 가지치기하는 시기도 다르고, 가지치기하는 방법도 다르다. 포도 나무 한 그루에서 많은 포도송이가 열린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많이 열릴수록, 그만큼 포도 맛이 떨어진다. 그래서 포도 농사를 지을 때에는 반드시 가지치기를 한다.
포도나무 가지치기는 보통 1-2월 겨울에 한다. 포도나무는 가지치기를 잘못하면 열매를 하나도 볼 수 없다. 가지치기할 때에, 지난해 자란 1년생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1년생 가지의 눈 두 개만 남기고 나머지 뻗어나간 줄기는 다 잘라줘야 한다. 각 눈에서 2개의 포도송이가 열리고, 두 개의 눈만 있어도 4개의 포도가 열리기 때문이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를 쳐내고, 열매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년을 기다려야만 가능하다. 세상사를 지켜 보시며, 늘 세상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기다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 이 말씀은 « 있는 사람에게는 더 많이 주어질 것이고, 없는 사람에게는 있는 것마저도 빼앗아갈 것 »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오늘 복음을 다시 한번 읽어 보면, 잘 가꾸어진 가지들은 보다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포도나무의 원줄기에 잘 붙어 있는 일이 과제가 될 것이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깨끗하게 손질되기 위해서는 하느님 아버지가 기뻐하는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고 정리해 볼 수 있다.
포도나무의 원줄기에 잘 붙어 있는 일, 그리고, 보다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하느님 아버지에게 잘 보이는 일, 도대체 무엇일까 ? 포도 나무의 원줄기에 잘 붙어 있는 일은 개인의 완성이고, 하느님 아버지에게 잘 보이는 일은 이웃사랑 실천이다.
개인의 완성과 이웃 사랑 실천은 둘 다 모두 중요하지만, 인간의 사회성과 연대성이라는 인간조건을 고려한다면,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인간 행동이 더 중요하다. 이웃 사랑에는 도무지 생각도 없는 개인의 완성, 그것은 철저한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신앙인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성이 없는 신앙인의 행동은 철저한 이기주의 외에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내 주위의 이웃의 사정에 대해서,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이 땅의 현실에 대해서 무심해하고, 무관심하고, 오로지 개인의 안일이나, 마음의 평안만을 바라며, 기도서의 기도문들을 아무런 생각 없이 읊어대고, 묵주알만 굴려대면서, « 주님, 주님, 성모님, 성모님 » 하는 것은 개인의 완성을 꾀하는 일이 결코 아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으로 오늘 강론을 마치고자 한다. 이웃 사랑에 관해서, 특히 2015년 이 나라 이 땅에서 가장 복장 터지고, 가장 소외되어 있는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에 관해서 참으로 할 말이 많지만, 굳이 말씀 드리지 않더라도 내가 무슨 말을 꺼내고자 하는지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계실 것이다.
«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 (2, 14-17).
이균태(안드레아) : 부산교구 울산대리구 복산성당 주임 신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