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7일 목요일, 맑음
“여보, 여기 와서 이거 읽어 봐.” 보스코의 모니터에는 이메일로 받은 '새벽편지'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집과 잘 정리된 가구와 예쁜 접시들과 행복한 가족의 얼굴들이 사진으로 떠 있다. 큰 연구소 연구원인 남편과 카피라이터 여주인공이 두 아이와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다.
그러나 너무 행복하면 뭔지 모르는 불안이 늘 깔리는 게 우리 삶이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거야? 이게 한순간에 사라지면 어떡하지?” 우리는 영원을 향하여 만들어졌고 길어야 80년 살고 가면서도 모두가 끝없는 삶을 꿈꾸기에, 전혀 다른 곳에 대한 그리움과 의식이 늘 뒤통수를 따라다니기에, 문득 고개를 들면 지평선에 신기루처럼 문득문득 얼비치기에 그러하리라.
저 파일의 여주인공 손지윤씨의 독백이 담담하게 올라 있다.
“심혈을 기울여 아름답게 꾸민 우리 집, 잡지에도 여러 번 나온 아름다운 이 집이 한때는 가장 큰 자랑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아프고 보니 내가 있을 곳은 궁궐 같던 집이 아니라 몇 평 안 되는 비좁은 병실, 피곤한 내 한 몸 누일 곳은 푹신하고 안락한 침대가 아니라 딱딱하고 좁은 보조 침상이었다.
나의 관심을 받았던 수많은 그릇들도 남편과 함께 하는 병실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황량한 이 병실에서 쓸 수 있는 건 보잘 것 없는 플라스틱 접시와 종이컵뿐이었다. 붙박이장에 가득 담겨있던 수많은 옷들과 명품 백들.. 이 또한 내 것이 아니었다. 남편과 함께 하는 병실에선 그저 편한 옷이면 좋았고 귀히 여기던 명품 백도 아무 필요가 없었다.
어디 그뿐이었을까. 20년 넘게 내 자랑이었던 남편도 내 것이 아니었다. 의사들은 말한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이 또한 내 것이 아니라고....”
오늘 공안과에서 내 눈 검진을 하는 날이다. 진단결과는 지난번과 비슷한데 수술한 눈이 시력이 일정치 않다고 여쭈었더니 공영태 원장님의 친절한 설명이 나온다. “내 눈은 내 의지에 따라 멀리 가까이 알맞게 조절을 하는 생명체이지만 백내장 수술을 하고 집어넣은 렌즈는 플라스틱 조각이어서 조절을 못하고 잘 보이다 안 보이다 를 반복합니다.” 60년 넘게 사용하면서 보는 일에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아오다 그 건강을 잃었을 때에야 고마움을 느끼다니....
손지윤씨의 글도 이렇게 이어진다.
“이젠 알고 있다. 내 분신, 내 생명, 내가 사랑하는 이들조차 전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들 또한 그분이 내게 잠시 맡겼던 선물임을 나는 잊고 있었다. 같은 이유로 남편의 건강에 대한 근심, 염려 또한 이제 내 것이 아니다. 의사가 아무리 무서운 말을 해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모든 근심거리 다 주께 맡기고 내 남편 또한 주께 맡기고 나는 이 밤을 또 기다린다....”
고통 중에는 신앙 역시 크나큰 선물이다. 백혈병으로 투병하던 임송균 수사님의 부고를 받아서 신앙의 선물을 더 생생하게 느낀다.
공안과 병실에 있는데 호천이가 전화를 했고 내가 공안과에 와 있다니까 사무실에서 자기도 백내장 끼가 있어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란다. 회사가 삼각지에 있어 금방 종로까지 달려왔다. 초진에는 원장님이 안 봐 주신다는데 특별히 검진을 해 주셨고 내 동생이라고 진찰비도 무료로 해 주셨다.
동생마저 내 ‘공짜클럽’에 가입한 셈이다. 오빠는 백내장이 더 심각한데 동생 얘기로는 “형은 정 필요하면 면도칼 들고 자기가 자기 눈 째서 렌즈 끼워넣을 사람이야.”라며 웃는다. 워낙 병원을 안 가고 의사를 불신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오후에는 빵기랑 ‘영원무역’ 장상무를 만나러 갔다. 90년대 초부터 ‘우리밀살리기운동’을 함께 하던 동지로 25년간을 한결같이 내가 의지하는 친구다. 빵기가 근무하는 ‘굿네이버스’에도 제일 큰 기부를 한 적 있다.
대표회장님(그분도 창녕 성씨)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받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물건을 꼭 필요하게 준비하되 받는 사람의 자존심을 존중하라.”는 지침을 내렸단다. 훌륭한 기업인이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구호사업을 하는 큰아들(네팔 지진참사 땜에 일시 귀국한 길이다)과 함께, 좋은 친구 만나서 저녁을 먹고 재미있는 얘기를 하다 보니 밤 10시가 넘었다.
성남에서 우이동까지 가는 길에 오전 오후 내내 혼자 있었을 보스코를 생각한다. 상실에 즈음해서야 사람의 소중함을 절감하는 것이 인생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면 소중했던 모든 사물들이 회색으로 빛을 잃는다는 사실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