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이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지만 사회가 평화롭기는커녕 폭력이 교묘하게 구조화되고 도리어 내면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4차 “레페스포럼”(REPES Forum)에서는 원불교 강남교당에서 정주진 박사(평화학)가 자신의 책 「평화를 보는 눈」(개마고원, 2015)의 요지를 소개하고 이를 중심으로 평화적 관계와 공동체, 용서와 화해, 비폭력의 문제를 종교와 연결시켜 집중 토론했다. 이하는 발제의 요지다.
참석자: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진행)
전병술(건국대 연구교수, 동양철학)
전철후(원불교 강남교당 교무, 원불교학/기록)
정주진(평화갈등연구소장, 평화학)
허석(원불교 종로교당 교무, 원불교학)
- 정주진: 평화라는 말이 대중화되면서 도리어 오염된 측면이 있다. ‘아침이슬’이라는 노래를 소수가 부르던 때는 남다르게 다가왔는데 일종의 대중가요가 되면서 그 의미를 곱씹는 사람들이 많지 않게 된 것과 비슷하다. 1980년대까지 한국사회에서 평화라는 말은 극소수가 쓰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언어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 기독교계에서 남북교회의 만남을 계기로 평화통일을 언급하게 되고 1988년 “한반도평화통일선언문”이 만들어지면서 평화라는 말이 공개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는 세계적 흐름을 타면서 한국에서도 평화운동이 확산됐고 평화라는 말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일반 대중은 물론 대다수의 정치인들도 평화를 언급하고, 심지어 군인들까지 무력에 기반해 평화를 주장하고 있다. 개인적인 성찰이나 수련을 하는 사람들도 낭만주의적으로 평화라는 단어를 쓰기도 한다. 이렇게 평화라는 말이 대중화되다 보니 본래의 치열하고 역동적인 의미가 퇴색되고 추상적이고 때로는 낭만적으로 쓰이는 언어가 되어버렸다. 평화학 전공자이자 평화연구자로서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차에 출판사의 요청을 받아 「평화를 보는 눈」(개마고원, 2015)을 쓰게 됐다.
이 책은 ‘평화와 폭력의 문제’, ‘관계와 공동체의 문제’ ‘국가폭력’, ‘전쟁’, ‘빈곤’, ‘기후변화’, ‘비폭력’, ‘용서와 화해’, ‘평화교육’ 등 평화를 탐구할 때 기본적으로 다뤄야 할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평화학을 하는 사람들의 궁극적 목적은 연구를 통해 사회변화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평화학에서는 연구와 실천 두 가지가 똑 같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이것은 평화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세계가 가장 고민한 것은 어떻게 전쟁을 막을 것이냐, 그리고 국가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이냐였다. 이런 고민 속에서 그동안 개인적으로, 산발적으로 이뤄지던 평화에 대한 탐구가 1950년대부터 체계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전쟁은 물론 사회의 구조적 문제도 평화를 위한 중요한 탐색 주제가 됐다.
평화학은 국제 문제와 관련해서는 주로 무장갈등과 평화구축(피스빌딩, peacebuilding)의 문제를 다룬다. 무장갈등의 평화적 해결, 평화조약 이후 사회와 국가의 재건, 평화적 과정을 위한 사회 구성원들의 참여, 개인과 집단 사이 갈등해결과 관계의 회복 등이 주요 주제가 된다. 국내 문제와 관련해서는 구조적 폭력에서 비롯된 갈등의 해결, 희생자들의 문제, 폭력 없는 사회 형성 등의 주제를 다룬다. 특별히 약자의 역량을 향상시키고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동력을 만드는 것에 집중한다.
평화학이 가진 목적과 문제의식에 기반해 이 책은 단순히 특정 주제에 대한 논의나 정보 제공에 머물지 않고 독자들이 실천 가능성을 탐색하도록 독려하는 것에도 초점을 두었다. 사실 이 책이 다루는 여러 가지 주제는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다루는 것들이다. 평화학이 왜 빈곤이나 기후변화의 문제까지 다루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평화학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현안 그 자체가 아니라 그와 관련한 폭력의 문제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희생자다. 사실 희생자가 생기지 않으면 폭력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다. 때문에 평화학은 빈곤 자체 보다는 빈곤으로 인해 일상의 삶이 고통스러운 사람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게 하면 사회의 폭력적인 구조가 보이고, 자연스럽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리고 피해자의 고통을 어떻게 경감시킬 것이냐에 관심을 갖게 된다.
또 다른 예로,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문제는 비교적 최근에 생긴 평화학의 관심사다. 기후변화도 폭력적 구조의 문제다.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를 야기하고 악화시키는 것은 선진국과 선진 개발도상국이지만 국제사회의 폭력적 구조 때문에 피해를 입는 것은 주로 가난한 나라들이다. 세계는 기후변화 문제에 기후적응과 기후대응의 두 가지 차원으로 접근하고 있다. 기후대응은 온실가스 감축의 문제를 다루니 가난한 나라들과는 별 상관이 없다. 기후적응의 문제는 불공정과 부정의의 문제를 그대로 보여준다. 부자나라는 넉넉한 재원으로 기후변화에 적응한다. 예를 들어 호주나 방글라데시는 똑같이 침수의 우려가 있지만 호주는 대응책이 있고 피해를 받아도 훨씬 적게 받는다. 그러나 재원도 대응책도 없는 방글라데시는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이지만 기후변화를 야기한 선진국들의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이렇게 기후변화는 국제사회의 폭력적인 구조의 문제와 관련돼 있다.
이 책의 내용에서 화두를 가져와 종교 평화와 관련해 세 가지를 논의해볼 수 있겠다. 첫째는 ‘관계와 공동체의 문제’, 둘째는 ‘용서와 화해의 문제’, 셋째는 ‘비폭력 저항의 문제’다.
첫째, ‘관계와 공동체’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종교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구조가 과연 평화에 기여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볼 수 있다. 종교인에게 평화를 지향하느냐 물으면 거의 모두가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종교공동체가 평화를 가르치는지, 종교인은 평화를 가르치고 만들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 또는 종교공동체나 종교인이 종교 밖과 평화로운 관계를 만들 의지가 있는지 등을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 부분이 많다. 종교가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하지만 종교인들 스스로가 다양한 사람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 그리고 관계를 토대로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정말 관심을 가지는지 등을 성찰해봐야 하고 이것들은 평화를 선언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책에서 사례로 언급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쟁(1992~1995) 후 공동체 회복 노력을 주목할 수 있다. 종교(가톨릭, 이슬람, 세르비아 정교회)와 민족의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공존하다가 전쟁을 겪으면서 관계가 완전히 깨진 경우다. 그들은 전쟁 중에 누가 누구를 죽였고, 누가 나쁜 짓을 했는지를 다 알면서도 전쟁 후 한 마을에서 계속 같이 살아야 했다. 그들이 함께 마을을 재건하고 회복시킬 수 있느냐는 생존을 위한 중요한 문제였다. 공동체 회복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미국의 퀘이커 단체는 마을 텃밭가꾸기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생계에 도움을 얻기 위해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얘기를 하게 됐고 서로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삶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관계가 조금씩 회복됐고 삶의 질이 달라졌고 상호 폭력은 사라졌다. 종교가 안으로 평화 역량을 키우고 밖으로는 그 역량을 공유할 수 있어야 공동체를 재건하고 평화를 만드는 이와 비슷한 일에 기여할 수 있다. 우리사회의 종교공동체가 과연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볼 일이다.
둘째, 정의와 함께 하는 ‘용서와 화해’의 문제다. 정의 없는 평화, 평화 없는 정의는 무의미하다. 종교공동체에서는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면서 희생자의 재희생을 부추기는 경우가 많다. 용서와 화해를 종교인의 태도라고 강요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것은 희생자에게 또 다른 폭력이 되곤 한다. 용서와 화해는 정의가 이뤄지고 용서와 참회가 있은 후 기대할 수 있는 관계 회복의 최종 단계다. 그렇지만 종교는 용서와 화해를 너무 쉽게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용서와 화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진지하고 사려 깊은 논의, 특별히 희생자에 초점을 맞춘 논의가 있어야 하는데 용서도 화해도 한 사람의 결심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희생자를 억압하고 재희생을 낳는다는 것에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용서와 화해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책에서도 언급한 영화 ‘밀양’을 참조해볼 만하다. 용서의 권한은 전적으로 피해자에게 있다. 그리고 참회는 가해자의 영역이다. 참회를 누가 대신 해줄 수 없고, 용서를 누군가 대신 해 줄 수 없다. 종교공동체는 이런 문제들을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셋째는, ‘비폭력’의 문제다. 비폭력은 ‘저항’을 담보로 한 것이고 그래서 ‘비폭력 저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비폭력을 무조건 저항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비폭력은 비겁한 사람은 절대 선택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고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경찰이 순할 때는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다가 경찰이 폭력을 사용하면 폭력적 방식으로 대응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런 선택적인 방법은 비폭력 저항으로 볼 수 없다. 비폭적 저항은 폭력을 멈추게 할 때까지 비폭력적이어야 한다. 비폭력은 어떤 인간도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근거하지만 폭력 가해자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까지를 목표로 삼는다. 비폭력을 원칙으로 선택하지 않는 한 힘든 일이다. 그래서 비폭력 저항을 하는 사람들은 최후에는 자기의 희생까지 염두에 둔다. 우리 사회에서는 비폭력을 너무 쉽게 생각하거나 저항의 방법으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때로 비폭력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비겁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비폭력은 사실 종교의 정신과 가장 가까운데 종교에서도 그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가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 이 글은 가톨릭프레스와 에큐메니안에 동시 게재하며, 레페스 포럼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